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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토르 위고의 작품에 나타난 변신론 - 자아 무한 개념을 중심으로
빅토르 위고의 작품에 나타난 변신론
-자아 무한 개념을 중심으로
서정기
1 서 론
위고의 형이상학적 세계를 하나의 문맥으로 논리적으로 설명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 세계는 너무도 복잡하고 때로는 모순으로 가득 차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종교적인 측면에서 카톨릭의 모습을 보여주는가 하면 유태교의 카발라 원칙들을 보여주기도 한다. 신학적인 측면에서 혹자는 그를 이신론자로 분류하기도 하고 혹자는 범신론자로 평가하기도 하는데 이 논쟁은 오늘날도 여전히 반복되고 있다. 그의 세계가 모순으로 가득 차 있다면, 어떤 면에서는 그만큼 그의 세 계가 광대하다는 의미도 될 수 있을 것이다. 본고는 위고가 타 학자들이나 타종교와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변신론을 살펴보고 그만의 고유한 변신론은 어떤 것인지를 밝히고자 한다.
2 본 론
2-1. 위고의 통합적 변신론
위고가 자기 고유의 변신론을 확립하기 전에 그가 표명했던, 타 신학 자들이나 타종교와의 공통적인 요소들을 살펴보기로 하자. 조제프 비아네 Joseph Vianey는 「동방박사들 Mages」의 시구 두 행,
신은 삼중의 불, 삼중의 하모니, 사랑, 권능, 의지
Dieu, triple feu, triple harmonie, Amour, puissance, volont
에 주석을 달면서2) 이 세 가지 요소들을 라므네 Lamennais가 [철학 소묘 l’Esquisse d’une philosophie]에서 거론했던 삼위일체 이론과 연결시킨다. 라므네 Lamennais는 이 책에서 쥐이에서의 강연에서처럼 삼위(三位)는 권능과 지성 intelligence, 사랑이며, 그것들이 협력하여 우주를 창조했다고 설명한다. 즉 권능의 발현인 움직임, 지성의 발현 인 빛, 사랑의 발현인 열기의 현상들이 서로 협력했다는 것이다. 그러 나 우리가 보는 바와 같이 엄격히 말하면 [정관시집 Les Contemplations]에서 나타나는 공식은 이 설명과 일치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위고는 망명하기 전에 발표했던 [돌더미 Tas de pierre]에 다음과 같이 주석을 붙이고 있다
사상이 하나의 눈이라는 것을 가정해보자. 그리고 이 눈의 태양이 무엇일 수 있는지 알아보자. 그것은 신일 것이다. 생명인 신, 빛인 신, 열기인 신. 그것은 다시 말하면 권능인 신, 지성인 신, 사 랑인 신이다.
Supposons que la pensée soit un oeil, et cherchons quel pourra être le soleil de cet oeil, ce sera Dieu Dieu vie, Dieu lumière, Dieu chaleur, C'est-à-dire Dieu puissance, Dieu intelligence, Dieu Amour.
이로 보아 위고는 아래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라므네의 주장을 베낀 것처럼 보인다. 또한 우리는 [철학 소묘 l’Esquisse d’une philosophie]의 내용과 유사한 몇 가지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 서 위고 종교의 근원이 라므네의 신학에 있는 것이라고 말 할 수는 없으며 그 차용이 일차적으로 중요한 것도 아니다. 그러나 위고가 쥐이 에서의 강연 중 몇 가지 요소를 차용했을 가능성은 농후하다. 왜냐하면 그는 라므네가 쥐이에서 가르치던 1830~1831년에 그 강연에 몇 차례 참석했기 때문이다. 그가 받은 영향은 가끔 뒤얽혀있는 것처럼 보인다. 예를 들어 ‘모세의 율법의 독수리 l'Aigle du Mosaïsme’의 몇 구절을 살펴보자.
세상을 창조한 후에 신은 잠이 들고 그 피조물들이 떠돌아다니도록 내버려 둔다. 그리고 나서 그는 잠에서 깨어나 새로운 세상을 창 조한다.
그는 다시 잠이 들고 이 세상은 사라져버린다.
... il se rendort, et ce monde s'en va
성서나 유태교의 전통에서도 이와 비슷한 사실을 찾아볼 수는 없다.
오히려 쟈크 외젤 Jacques Heugel의 주장을 빌면 이것은 브라마의 밤 과 낮에 관한 힌두교의 교리를 생각하게 한다. 위고도 읽었다고 알려진 뽀티에 Pauthier 번역의 마누 법전에 의하면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이 신이 잠에서 깨어나자마자 이 우주는 그 일을 다 이룬다. 그가 잠이 들 때..., 그 때 세계는 해체된다... 깨어남과 휴식이 교대로 일어남에 따라서 불 변의 존재는 움직이고 움직이지 않는 피조물 모든 무리를 소생시키거나 죽게 한다.
Lorsque ce Dieu s'éveille, aussitôt cet univers accomplit ses actes; lorsqu'il s'endort..., alors le monde se dissout... C'est ainsi que, par un réveil et par un repos alternatifs, l'Etre immuable fait revivre ou mourir éternellement tout cet assemblage de créatures mobiles et immobiles.
위고의 생각과 마누법전이 유사하다는 것은 매우 놀랍다. 그러나 마누법전에 어울리는 사실을 왜 위고가 모세와 연결시켰는지는 의문이다. 그런데 1846년 위고는 성서를 다시 읽고 나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신은 목적 없는 복수자가 아니며 지고의 숙면자도 아니다.
Dieu n’est ni le vengeur sans but, ni le dormeur suprême
그리푸스가 독수리의 뒤를 이을 때도 그는 그를 다음과 같이 반박한다.
... 아니, 신은 복수자가 아니다! 신은 질투하지 않는다. 아니, 신은 궁륭을 인 채로 잠들지 않는다.
... Non, Dieu n’est pas vengeur! non, Dieu n’est pas jaloux Non, Dieu ne s’endort pas. portant toute la voûte
이와 같이 신의 잠이라는 개념은 질투하는 신이라는 개념과 대조를 이룬다. 후자는 완전히 성서적이다. 그러나 신이 가끔 잠든다는 개념은 구약성서의 「애가 Psaumes」에서 보인다. 즉 예를 들면 신이 자신의 종 족을 잊고 포기하고 있다고 다윗이 불평할 때가 바로 그 경우이다. 그는 이렇게 소리친다.
주여, 일어나시오, 왜 잠자고 있나요?
Exsurge, quare obdormis, Domine?
악한 자가 의로운 자를 핍박 가능케 하는, 신의 잠이라는 테마는 고전적, 성서적 시에서 자주 볼 수 있다.
위고는 루이 17세에 대한 첫 번째 오드에서 징벌의 시기를 다음과 같은 시행으로 예고한다.
그래서 세상의 군주가 잠에서 깨어났다.
Alors se réveilla le monarque des mondes
라마르틴도 역시 [명상시집 Méditations poétiques]의 「XXII Méditation : Le Génie」 끝 부분에서 불신자들을 침묵시키기 위해 신에게 나타날 것을 간청할 때 「애가 Psaumes」의 그 구절을 다시 인용한다.
때가 되었습니다! 일어나시오! 이 긴 휴식에서 나오시오.
Il est le temps! Lève-toi! sors de ce long repos...
그러나 위고는 신의 부단한 창조행위를 확인하기 위해 신의 잠을 부인한다. 주석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는 결코 잠들지 않는다. 생명이기 때문에.
il ne s’endort jamais, étant toute la vie
마찬가지로 신이 끊임없이 창조한다는 이 개념은 위고와 동시대에 살았던 학자인 장 레이노 Jean Reynaud의 신학에서도 필요불가결한 원칙이다. 그에 의하면 세계는, 공간 속에서 무한한 것처럼, 시간 속에서 영원하며 우주는 전 시간에 걸쳐 창조되었다는 것이다. 만일 창조가 한 시기의 ‘역사적 사건’이라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신이 창조하기 이전에 무엇을 했는지에 대해 말하기 난처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레이노는 신이 무한히 능동적이라는 원칙을 표명한다.
지금까지 확인한 것을 비추어볼 때 위고는 인도의 교리나, 중세신학 아니면 적어도, 성서에서 그가 찾아냈다고 믿는 어떤 개념을 함께 녹여 신에 관한 통합적 변신론을 만들어 냈으리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변신론은 다양한 접근을 허용함으로써 누구도, 또는 어느 것도 자신만을 인정하도록 요구할 수 없으며, 동시에 그것은 고대의 전통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에 어떤 한 세대에만 속할 수도 없다.
예를 들면, 신의 개념들 중의 하나, 즉 드니 소라 Denis Saurat가 말하는 것처럼 ‘접근불가능하고 이해 불가능한 본체 noumène inaccessible, incompréhensible’인 신의 개념이 암시하는 논거들을 찾아보자. 1853 년에 쓰였지만 1877년부터 [여러 세기의 전설 La Légende des Siècles]의 결정적인 결론을 이루는 시 「심연 Abîme」에서, 신은 무한의 저 너머에 자리하고 있다. 1870년 위고는 같은 생각을 표명하기 위해 「최고위 Suprématie」라는 시를 쓴다. 서사시 [신 Dieu]의 결론도 여전히 이 방향으로 전개된다. 즉 이 시들에서 신을 의미하는 빛 la Lumière은 인간이 부정적으로밖에는 정의할 수 없는 모든 규정들과 명칭들을 무화시켜버린다.
소라는 이 교리를 카발라와 연관지으며 위고를, 밀턴에게 영향을 주었다는 카발주의자 플러드 Fludd에 비교한다. 한편 쟈크 외젤은 ‘인도의 현자들’과 ‘진정한 영지주의자들’과 연관 짓는다. 빛에 의해 상기되는 신은 사실상 영지주의자들의 ‘심연l'abîme’을 생각하게 하며, 위고도 그 생각을 모르지는 않았으리라고 그는 주장한다. 또한 주르네 Journet와 로베르 Robert는 이 교리를 신플라톤학파, 특히 플로티누스의 ‘저 세상 l'au-del’이라는 개념과 비교한다. 이런 점에서 위고의 이론 은 신학 보다는 신비신학 속에서 분명해진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유사점들이 있다고 하더라도 위고가 그것들의 영향을 깊이 받았을 것이라 성급히 결론지어서도 아니 될 것이다. 왜냐하면 영지주의와 플라톤주의, 신비신학과의 관계에서 포착되는 유사성은 위고의 종교적 사상 중 부분적인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위고의 변신론을 역사적으로 더 가능성이 있는 계통 속에서 규명해볼 수도 있다. 지고의 존재 l'Etre Suprême의 절대적 초월성이라는 개념은 철학적 이신론의 주요 부분이다. 18세기 볼테르의 이신론 le déisme은 어떤 면에서 보면 ‘불가지不可知한 것의 신비에 기댄’ 이신론이다. 이 이신론은 기존 종교들의 神人同形論을 근본적인 초월성이라는 이름으로 비판한다. 이 이신론은 지고의 존재를 기존의 모든 정의와 신학, 교리 밖에 위치시킨다.
위고는 신을 형언할 수 없는 심연이라 정의하는데, 이러한 신의 개념 은 어떤 의미에서는 위고에 있어서 신을 향한 피조물들의 무한한, 그러 나 이루어지지 않는 영적 진보라는 원칙과 통합된다. 「하늘의 고독 Solitudines Coeli」의 끝부분에서 그는 신에게로 올라가는 ‘존재들의 사슬’을 보여준다.
올라가고 또 올라가고 끊임없이 올라가며 그를 찾고, 그리고 언제나 그에게 다가간다. 그러나 결코 그에게 도달하지는 못한 채. 우리가 만질 수 없고, 더럽힐 수도 없고, 절멸시킬 수도 없는 그 존재.
Montant, montant, montant sans cesse, et le cherchant,
Et l'approchant toujours, mais sans jamais l'atteindre,
Lui, l'être qu'on ne peut toucher, ternir, éteindre,
영적 진보는 불멸성을 요구하지만 죽음 후에도 영혼은 신에 도달하 지 못한다. 1844~1848에 쓰인 [추신 Post-Scriptum]의 텍스트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언제나 다가가기, 결코 도달하지 못하고. 그것이 점근선의 법칙이며, 천사의 법칙, 영혼의 법칙이다.
끝없는 상승, 영원히 신을 추구함, 그것이 그의 불멸성이다.
Se rapprocher toujours, n’atteindre jamais, c’est la loi de l’asymptote, c’est la loi de l’ange, c’est la loi de l’âme.
c’est cette ascension sans fin, c’est cette perpétuelle poursuite de Dieu, qui est son immortalité.
신의 탐색 서사시 마지막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이 결론의 초안을 대강 그리고 있다. 즉 탐구자는 신을 보기 위해 죽는다. 그는 다시 깨어나 이렇게 말한다
유령이여, 너는 나를 속였구나, 나는 아직도 모르겠다.
(신, 그것은 무한이다. 그는 언제나 뒷걸음친다. 삶을 어떻게 바꾸어도 그에게 도달하지는 못한다. 단지 우리는 빛 속으로 나아갈 뿐)
Spectre tu m’as trompé, je ne sais rien encore.
(Dieu, c’est l’infini. il recule toujours-aucune transformation de la vie ne l’atteint-Seulement on avance dans la lumière)
후에 [여러 세기의 전설 La légende des siècles]에 실렸던, 1875년의 작품 「인간에게 A l’homme」라는 시도 신에게로 향한 ‘걸음’을 주장하고 있다. 그 걸음은 ‘무덤 저 너머로 계속되며’, ‘이것이 진보다’라고 위고는 주석을 단다.
라므네도 역시 “우주는 탄생하는 신과 같다. 그것은 영원히 어떤 경 계에 의해 아버지로부터 분리되지 않는다. 그 경계는 끊임없이 뒷걸음 치며, 그러나 늘 잔존한다. 왜냐하면 그 경계는 거대함과 영원 속으로 달아나기 때문이다”. 그는 ‘진보주의적’ 신학이 창조된 이 세기에 속 한다. 1852년 으젠 펠르탕 Eugène Pelletan의 [19세기의 신앙고백 Profession de foi du dix-neuvième siècle]도 이 이론에 근거를 두고 쓰인 것이다. 위고가 그렇게 하듯 그는 진보를 ‘결코 신에 도달하지는 못 하지만 끊임없이 신에게로 되올라가는 존재들의 보편적 움직임’으로 정의한다. 위고에 있어서처럼 그에게 있어서도 죽음 후에도 신에게 결코 도달할 수는 없다. 그리고 영혼의 상승은 그 끝을 모른다
이상 살펴본 바와 같이 위고의 종교적 사상은 신비주의적이거나 고대의 보편적인 전통과 합류한다. 그것은 그러나 동시에 이신론적인 18세기와 볼테르에게서 나온 것처럼 보인다. 결국 위고의 종교적 사상은 현대적 사조에 합류하면서 거기에 고유한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게 된다.
2-2. 위고 고유의 변신론
이신론과 ‘진보주의적’ 신학은 신을 인간의 범주 밖으로 한없이 밀어내버린다. 이제는 어쩌면 가장 중요한, 그리고 최소한도 이론의 여지없는 영향, 즉 유대-기독교의 영향에 대해서 검토해보기로 한다.
위고가 세례를 받았는지 받지 않았는지 확인되지 않지만 프랑스인인 그가 기독교의 영향을 받았으리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없다. 그가 어느 정도의 성서 독자라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 영향은 우리가 알고 있다고 믿는 그런 영향의 반대쪽으로 작용하는 것처럼 보인다. 즉 그 영향은 역사에 개입하는 어떤 신에 대한 믿음을 의미한다. 그 신은 각 인간과 개인적인 관계를 유지하며 사랑으로 정의된다. 위고의 신은 영지주의자들의 심연이며, 신비주의자들의 ‘형언할 수 없는 것’이며 볼테르의 이해불가능한 존재이며 천문학적, 거대한 신학의 무한 속으로 달아나는 신이다. 위고의 신은 선지자들의 신이며 심판하는 여호와이며 예수가 선언한 자비로운 아버지이다.
우리가 지금 살펴보려는 [철학서문 Préface philosophique]의 제 1부에 모아진 신의 존재에 대한 증거들은 전통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위고는 자신 고유의 깊은 성향, 또는 기호를 드러내는 식으로 신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1817년 위고는 신의 실재함을 증명하는 철학경시대회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만일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아무 것도 존재하지 못한다. 아니면 무엇인가 존재한다면 신도 존재한다는 것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 라므네도 후에 쥐이에서 비슷하게 가르친다. 그에 의하면 실재함은 존재의 ‘원초적 개념’에 근거한다. 즉 무한하고 필연적인 존재는 자신에만 의거한다는 것이다. 무엇인가 실재한다는 것을 인정하는 순간 우리는 신의 실재함을 상정한다. 그래서 라므네는 다음과 같이 단언한다. 즉 “엄밀히 말해 따라서 진정한 무신론자는 있을 수가 없다. 진정한 무신론자는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말하는 사람이다. 또한 이러한 명제를 주장하기 위해서는 실재함이라는 개념, 존재라는 개념이 있어야만 한다... 또한 그가 존재하며 동시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믿어야만 한다”
이와 유사하게 1845년 경 위고는 다음과 같은 초안을 작성한다.
제1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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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실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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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인가가 있다. 따라서 누군가가 있다.
Chapitre Premi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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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xistence de Die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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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l y a quelque chose, donc il y a quelqu'un
1860년 그는 이전과 마찬가지로 똑같이 추론하며 1817년의 공식을 다시 인용한다: “‘아무 것도 없다.’ 이 말은 무신론에 있어서 난공불락의 요새와 같다... 무엇인가 존재한다고 믿는 순간부터 그는 저항하지 못하고 신에게로 이끌려간다. 자신을 제대로 방어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이 분명하게 말해야 할 것이다: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말과 동시에 ‘나는 존재하지 아니한다’ 라는 말도 함께 해야 한다”.
따라서 위고에게 있어서 ‘무신론’은 ‘니힐리즘’과 동의어가 된다.
라므네에게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위고에 있어서도 진정한 무신론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위고의 말을 빌면 “결국 부정한다는 것은 긍정의 분노한 형태이기” 때문이다.
위고는 [철학서문 Préface philosophique]에서, 학생 시절의 분석에서처럼, 외부세계로부터 출발한다. 그는 18세기 이신론자의 전통적인 입장을 견지하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하나의 기계는 하나의 기술자를 전제한다. 천상의 기계장치에는 기술자가 필요하다.” 그러나 그가 집요하게, 강력히 주장하는 것은 우주의 조화가 아니라 우주의 거대함 énormité이다. 그는 우리에게 현동적인 무한을 확인시켜주고 그 풍경을 보여주기를 원한다. 그는 무한이라는 개념을 추상적으로 부르는 것이 아니다. 그는 구체적인 무한으로부터 출발하여 그것을 우리 눈앞에 펼쳐 보이며, 아니면 오히려 우리를 그 속에 빠뜨려 버린다. 또한 그는 현상들과 세계들, 공간들을 한데 모으면서 양적인 측면에서 접근한다.
위고의 논증은 존재의 충만함이라는 저항불가능한 감정 속으로 흡수된다. 무신론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무신론에게는 실제로 설 자리가 없다. 왜냐하면 ‘무신론이 무한에 대해 가하는 상처는 폭탄 하나가 바다에 가하는 상처와도 같은 것이며 모든 것은 다시 닫히고 계속되기’28)때문이다. 모든 것이 신으로 가득 차 있다면 정말로 그것은 어디에 자리 잡을 것인가? 그래서 조르주 상드에게 위고가 다음과 같이 쓴 것을 우리는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나는 내 자신의 실재보다도 신의 실재를 더 확신합니다. 신은 우리를 잡고 우리를 감싸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안에 있습니다.”
그런데 자명한 이치인 신은 이해할 수 없는 존재다. 신은 인간을 파악하지만 인간은 신을 파악하지 못한다. 우리는 신을 따르지만 그에게 도달하지는 못한다. 그는 우리를 둘러싸지만 우리는 그를 보지 못한다.
그는 접근불가능하다. 그는 피할 수 없다.
Il est l’inaccessible, il est l’inévitable.
“우주는 나타내는 것 이상을 한다. 그것은 보여 준다 L’univers fait plus que démontre; il montre”라고 위고는 말한다. 그것은 무엇을 보여줄까? ‘그것은 우선 만질 수 있는 것을 보여주고, 다음에는 보이는 것, 그 후에는 접근 불가능한 것을, 그리고 나서는 이해 불가능한 것을 보여 준다. 결국 위고는 우주의 거대함과 동시에 그 신비를 고집스럽게 강조한다. 그에게 세계는 하나의 수수께끼인 것이다. 그는 우리가 따지거나 질문을 던지기 보다는, 이해불가능란 것을 받아들이도록 강요한다. 역설적으로 위고의 신은 아무 것도 설명하지 않고 단지 인정된다. 그는 ‘신비의 창조자이다’.
이러한 위고의 추론은 학자들에게 위고가 맹신자라는 공격의 빌미를 제공하기도 한다. 위고는 종교들의 ‘공통적인 신비로운 토대 fond’를 내세우면서, 거기에 비이성적이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지만 사리에 어긋나는 ‘맹신’을 개입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반대로 신비에 대한 공감과 신비에 대한 존중심 때문에 위고는 신학자들에게 호의를 품지 않는다. 왜냐하면 신학자들은 신을 ‘설명하기’ 원하기 때문이다. 그는 믿기 전에 이해하기를 요구하는 무신론적 합리주의자들에게도 호의를 보이지 않는다. 반대로 볼테르식의 풍자적인 어조로 교리를 비판하는 위고는 ‘고행수도자, 고행자, 카르멜회의 수녀 등의 ‘성스러운 공포’, ‘명상과 불안’을 인정하고 존중한다. 신성의 신인동형론적 표상들을 냉정하게 거부하는 그는 명상적 태도나 신비주의의 성격을 견지하고 있으며, 이성에 의해 정당화되는 것이 아니라 전율로 실증되는 종교적 태도에 대해 편을 든다.
그는 무신론을 반박하기 위해 또한 도덕적인 이유에 의지한다. [철학서문 Préface philosophique]의 제 2부에서 그는 무신론자인 아나톨 르레 Anatole Leray와 나눈 대화를 이야기하고 있다. 르레는 후에 한 여인을 구하다가 익사했다. 위고는 결국 그는 따라서 진정한 무신론자가 아니었다고 말한다. 그에 의하면 신에 대한 믿음이 없으면 도덕성이란 없다는 것이다. 만일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모든 것은 허용될 뿐만 아니라, 삶을 기쁨으로 만드는 어느 것도 가능하지 않다. 더 이상 미덕도 없고 사랑도 없다. 모든 것이 무덤에서 끝나버린다면 어떻게 살 것인가? ‘신비로운 노래를 부르며 아이를 재우는’ 한 여인은 스피노자를 반박하기에 충분한 것이다.
만일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깔리귤라는 ‘현인’이 될 것이며 아리스티드 Aristide는 ‘미치광이’가 될 것이며 트리말키오니스 Trimalcion는 욥 Job만큼의 가치가 있을 것이다. 무신론은 전능한 시저의 조롱, 티베리우스의 형벌면제, 보르지아의 무책임, 착한 이들의 절망, 의로운 자들의 공포‘가 될 것이다.
무신론은,
바르베스를 잘못했다하고 바젠을 옳다고 한다.
Donne tort à Barbes et raison à Bazaine!
따라서 지고의 존재는 루이 나폴레옹을 징벌할 책임이 있다. 그런데 이 엄격한 심판자는 절대자 l'Absolu이며 그는 심판의 저 너머에 자리하고 있다고 그는 말한다.
그리고 복수, 용서, 심판은 인간의 언어이다.
Et vengeance, pardon, justice, mots humains.
일견 이 두 태도는 충돌을 일으키는 듯하다. 그런데 [레미제라블 Les Misérables]의 초고의 한 텍스트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도덕법’ 은 광대한 것에 적용되기에는 너무도 작다. 무한의 선과 악을 알 수 있게 하는 무게나, 자, 기준표도 우리는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러나 이것은 ‘미지자가 도덕법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니라고 위고는 분명히 말한다. 절대에 어울리는 도덕법은 그 완전무결함 때문에 우리를 벗어난다는 것이다. 두 개의 태도가 화해할 수 없는 것이라고 하더라도, 여기에서 여전히 두 움직임, 즉 신을 아주 가까이, 현재, 역사적, 일상적으로 만들려는 움직임과, 동시에 신을 절대적인 것, 포착 불가능한 것, 상상 불가능한 것으로 만들려는 움직임이 합류한다.
이 이중의 전제는 신인격 神人格 la personne divine에 대한 위고의 생각에서도 다시 나타난다. 그가 찾으려는 것은 신의 인격 personne이기 때문이다. [신 Dieu]에서 박쥐는 무신론을 상징하는데 그는 다음과 같이 애석해하고 있다.
이 어둠 속에서 아무도 나라고 말하지 아니한다.
Dans cette obscurité, personne ne dit: Moi
그래서 ‘모든 것’은 ‘아무 것도’와 동의어가 된다. ‘지고의 증인’이 없을 때
우리는 거대함 때문에 무 자체로 되돌아간다.
On revient au néant par l'énormité même.
그러므로 결국 존재의 근거가 되는 것은 자아 Moi이다.
위고는 [철학서문 Préface philosophique]에서 이렇게 말한다. “세계는 결론을 내린다: 그 결론은 누군가 Quelqu'un 있다는 것이다.” 소설에서도 그는 다음과 같이 추론한다: “무한이 거기에 있다... 만일 무한이 자아를 가지고 있지 않다면 그 자아는 그의 한계이다. 그는 무한하지 않게 될 것이다. 따라서 그는 달리 말하면 존재하지 않게 될 것이다. 그런데 그는 존재한다. 무한의 자아, 그것이 신이다”
[돌더미 Tas de pierre]에서도 그는 비슷한 논증을 보여주고 있다.
나라고 말하는 것은 통치권의 속성이다... 원칙과 맹목적인 힘으로서의 어떤 신을 꿈꾸었던 철학자들은 신을 인간 아래에 위치시켰다. 신은 말한다 : 나. 범신론을 완전히 타파하는 거대한 점.
Dire moi est un attribut de souveraineté... Les philosophes qui ont rêvé un Dieu, principe et force aveugle, ont placé Dieu beaucoup au-dessous de l'homme.. Dieu dit je. Point immense qui détruit tout le panthéisme.
무한이라는 개념과 인격 personnalité이라는 개념은 위고의 생각 속에서 불가분인 것처럼 보인다. [레미제라블 Les misérables]에서 그는 두 개의 무한을 구별하는데 즉 ‘우리 밖의, 또는 절대적인 무한’과 ‘우리 안의 무한’ 이다, 후자는 영혼을 가리킨다. 영혼은 우리 밖에 있는 무한의 거울이나 반영, 메아리이다. 그리고 ‘낮은 곳의 무한 속에 자아가 있는 것처럼 위쪽의 무한도 자아를 지니고 있다. 낮은 곳의 자아는 영혼이며 높은 곳의 자아는 신이다.’ 이 자아에 의해서 인간은 무한의 성격을 띠게 되며, 이 자아에 의해서 신은 인간을 닮게 된다.
범신론 문제가 나타나는 것은 바로 지금이다. 같은 장에서 위고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즉 만일 우리 밖의 무한이, 무한하기 때문에 반드시 지성적이라면, 마찬가지로 그것은 무한하기 때문에 본질적 substantiel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물질이 그에게 없다면 그의 한계는 거기라는 것이다. 위고는 인격으로서의 신과 인간의 유사성을 밀어붙여 신에게 육체를 부여하기까지 한다. 그 육체는 무한한 우주이다. 신을 존재로 정의하는 다음 시행들을 보자.
그것에 의해서 우주는 법칙의 단일성을 나타내면서 인간처럼 말할 수 있다: 나야.
Par qui, manifestant l’unité de la loi, L’univers peut, ainsi que l’homme, dire: Moi
각 피조물에서 반복되어 나타나는, 특히 인간에게서 반복되어 나타나는 유일한 법칙에 의해 우주는 하나의 인격으로 변하는 것을 우리는 확인할 수 있다. [지고의 정관 Contemplation Suprêm]에서 위고는 결국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자연이라는 개념은 모든 것을 설명해준다... 자연을 구성하는 모든 것을 그것 안에 간직하면서 그것을 가능한 가장 작은 크기로 축소시켜 보시오... 당신은 인간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을 팽창시켜 보시오. 당신은 신을 느낄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윌리엄 셰익스피어 William Shakespeare]의 공식과 만나게 된다. 여기에 위고의 변신론이 요약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신에 의해..., 우리는 살아있는 무한의 소리를 듣는다.
드러난 무한의 숨어있는 자아, 그것이 신이다...
압축된 세계, 그것이 신이다. 팽창된 신, 그것이 세계이다.
Par Dieu..., nous entendons l’infini vivant.
Le moi latent de l’infini patent, voilà Dieu...
Le monde dense, c’est Dieu. Dieu dilaté, c‘est le monde.
그로부터 신에게 주어진 명칭들, ‘모든 자아들이 떨어져 들어가는 나-심연 moi -gouffre’, ‘영혼-세계’가 유래하며, 가장 충격적인 명칭이 나온다. “여기에 존재 l’Etre의 진정한 이름이 있다. 그것은 전체-하나 Tout Un이다”.
그렇다면 이 주장을 범신론적이라고 규정지을 것인가? 그렇다. 동시에 아니다. 이러한 용어 시비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가 위고를 르누비에 Renouvier처럼 모순적이라고 평가할 수 있는지 아니면 소라처럼 종합적이라고 평가할 수 있는지를 선택하는 문제다.
우리는 소라의 입장을 지지한다. 왜냐하면 다음의 텍스트가 신 안에서 자연의 속성들과 인격의 속성들의 통합을 강력히 이루어내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철학서문 Préface philosophique]에서 ‘기하학적 점 point géométrique’에 대해 생각하면서 위고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물질은 분자에 이른다. 생각이 한 점에 이르는 것처럼. 추상적인 점과 물질적 분자는 서로에게 보이지 않지만 무한 속에서는 필연적으로 동일하다. 다시 말하면 둘 모두 추상적이며 동시에 둘 모두 실제적이다. 물질적 심연은 정신적 심연과 뒤섞이기에 이른다... 현실 réalité의 극단에서의 관념과 물질의 이러한 만남은 정신 esprit이 정관할 수 있는 가장 큰 깊이일 수 있다. 이러한 창 l’ouverture을 통해 우리는 분명히 신을 볼 수 있다.” 신은 결국 자연의 존재의 성격을 띠며 동시에 하나의 인격처럼 행동한다. “그는 필연성과 의지의 동일성이 절대 속에서 실현되는, 경이로운 존재이다.”
3 결 론
위고에게 있어 신은 다음과 같은 존재이다.
모든 것이 그 안에서 녹아버리는 존재, 그러나 모든 것이 그와는 다른 존재.
L’Etre en qui tout se fond, mais de qui tout diffère
그는 인격적으로는 무한이지만 무한의 너머에 위치한다. 인간의 영혼이 육체 보다 우위에 있는 것처럼. 아마도 그러나, 위고의 교리를 너무 상세히 규정하는 것은 잘못된 일인 듯하다. 드니 소라가 시인의 감정으로부터 이러한 종합을 이끌어내는 것은 옳다. 시인은 자연 어디에서나 신을 느낀다. 그는 너무도 발전된 직관을 가지고 있어서 신의 이미지로부터 신을 느낀다. 동시에 위고는 그 고유의 자아는 하나의 심연이라고 의식하며 개인적인 만큼이나 보편적이라고 느낀다.
신은 인격으로서 인간에게 다가간다. 신을 전체 Tout라고 말할 수 있다면, 그 신은 범자아 Pan Ego로서 인간의 사고를 뛰어넘는다. 신인동형론의 냉혹한 비판은 분명히 위고의 종교적 작품에서 가장 큰 자리를 차지한다. 그는 ‘신은 형체도 없고 한계도, 목소리도 없는 현존’이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끊임없이 설득시킨다.
이 신인격은 어떤 피조물보다도 더 우리 가슴에 가깝다. 그것은 상상할 수 없고 깊이도 잴 수 없는 심연이다. 그러한 것이 위고의 신이다, 내밀하고 동시에 도달할 수도 없는. 위고의 종교는 이중의 전제를 지니고 있다. 그는 새로운 종교를 꿈꾸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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