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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고의 작품에 나타난 영지주의 연구
위고의 작품에 나타난 영지주의 연구
서정기
1. 머리말
낭만주의의 특징은 상상력의 찬양과 심정의 토로만은 아니다. 영국이나 독일, 프랑스 어디에서나 형이상학적-종교적 갈망, 신비 주의적 충동, 비교주의 원리에 대한 열정적인 심취 등을 쉽게 우 리는 목격할 수 있다. 이러한 특징의 근거가 되는 것은 무엇보다도 운명의 한계에 대한 아픈 인식이다. 낭만주의자들은 이 한계를 뛰어넘어 인간조건을 타파하고 모든 것으로부터 벗어나거나 도피하려는 욕망에 시달린다.
시인이라기보다는 환상가라고 할 수 있는 영국의 윌리엄 블레이크, 마술적 이상주의에 빠진 독일의 노발리스 등이 바로 그들이며, 프랑스에서는 다음과 같은 시구를 남긴 라마르틴이 그 대표적 인 작가라고 할 수 있다.
본성은 갇혀 있으나 희망은 무한한,
인간은 추락한 신, 하늘을 추억한다.
여기에서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비기독교적적 신화이다. 정통적인 기독교에 의하면 이것은 교조적인 기독교 개념이 아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추락한 신이 아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다음의 시구를 보자.
오로라의 수레를 타고 나는
내 소망의 막연한 대상인 너에게로 왜 날아갈 수 없는 것일까?
유형의 땅에 나는 아직도 왜 머물고 있는 것일까?
지상과 나 사이에는 공통적인 것이 아무 것도 없다.
이 땅이 유형지여서 원래의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 등, 이렇게 주어진 조건 이외의 ‘또 다른 것 autrechose를 원하는 것은 종교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영지주의자들의 근본 원칙이다.’
19세기 중반의 위고의 상황은 낙담 그 자체였다. 1841년 그는 사랑하던 딸 레오폴딘을 잃었고 1851년에는 조국을 잃었기 때문이다. 그는 벨기에로, 영국으로 망명했고 그가 옳다고 믿었던 그의 조국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즉 프랑스 대혁명의 이념과 위대한 제정은 루이 나폴레옹이라는 찬탈자에 의해 사라져버린 것이다. 정체성을 잃은, 파멸한 한 나라의 망명자의 상황을 이 해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것은 기원 후 몇 세기 동안의 수많은 유대인들과의 상황과도 다르지 않다. 그리스 로마 세계로 흩어져 버린 유대인들 가운데는 메시아와 그 왕국을 기다리던 종교사상가들이 있었다. 그들의 상황은 앵글로 노르망디의 섬에서, 많은 사람들에게서 예언자로 환호받으며 폭정의 몰락과 대혁명의 귀환을 기다리던 위고의 상황과 꼭 같다.
망명한 예언자, 빅토르 위고의 절망적인 상황은 계시적인 많은 작품들을 낳게 한다. 즉 징벌시집 lesChâtiments , 정관시집 Les Contemplations , 세기의 전설들 LaLégendedessiècles , 사탄의 종말 LaFindeSatan , 신 Dieu 등이 그것이다. 이 작품들에는 폭정의 몰락, 시인-예언에 대한 갈채와 감사, 최후의 심판의 도래에 관한 비전들이 나타나 있다.
그런데 그보다 1700여 년 전 유사한 상황에서 다른 계시적인 작품과 체계가 탄생한다. 기원 후 2세기 동안 강력한 유대인의 왕국에 대한 예언에 따라서 유태인들은 종종 로마인들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켰었다. 그러나 이러한 봉기는 한 번도 성공을 거둔 적이 없다.
그러면 어떻게 할 것인가? 그들은 신에 관한 예언을 믿었지만 그 예언들이 실제로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따라서 그들은 예언을 잘못 이해했으리라 우리는 짐작할 수 있다.결국 예언을 재해석해 야만 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우리가 영지주의라고 부르는 신화적, 철학적 체계가 탄생하게 된다. 그 체계는 성경, 특히 구약과 창세기의 새로운 해석에서 유래하며 그 새로운 해석을 우리는 그노시스 gnose라고 한다.
메시아를 기다리던 유태인들의 상황과 유사한 위고의 상황을 고려하고, 앞에서 본 낭만주의의 특징을 고려해 볼 때 우리는 위고의 작품에서 영지주의적인 관점을 확인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본 논문에서는 영지주의 이론을 간략히 살펴보고 위고의 작품에 직접적으로 나타나는 영지주의적 세계관을 밝히고자 한다.
2. 본론
2-1. 고대 영지주의 이론
위고의 작품에 나타나는 영지주의적 세계관을 확인하기 위해 우리에게는 우선 참조관점, 즉 고대의 영지주의 체계를 확인해 볼 필요가 있다.
어떤 영지주의 ungnosticisme에 대해 간략하게 정의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영지주의란 하나의 교리 또는 일관성 있는 종교가 아니기 때문이다.그것은 강력한 교조적 교회가 확립 되기 전에 그리스 로마 사회에서 많은 학파와 사상가들에 의해 가르쳐진 다양한 체계의 공통적인 명칭이다.이 다양한 체계는 성서의 재해석에 근거하고 있으며 소수의 선민들 즉 예언자나 학파의 문하생들에게 밝혀진 지식으로써 작동된다.
그리스어에서 그노시스 gnosis란 단지 ‘앎 connaissance’을 의미 한다. 그러나 영지주의적 문학에서 그것은 ‘어떤 지식 unsavoir’과는 전혀 관련이 없다. 그노시스란 경이로운 효력을 가진 앎을 의 미한다. 다시 말해 자신의 내면 속으로 침잠해 들어가 자신의 본질로서 존재하는 하느님을 체험으로 아는 것이다. 따라서 수 천 수 만의 사람 중 극소수만이 그 앎을 깨닫고 누릴 수 있다. 또한 입문자의 전유물로서의 앎은 단순한 신자들의 세속적인 믿음과는 대립된다. 따라서 그노시스란 단지 앎이라기보다는 비밀스럽고 신비로운 ‘계시’라고 하는 것이 더 옳다.
영지주의자들에게 있어서의 앎이란 무엇보다도 어떻게 세상이 그렇게 악할 수 있는지, 어떻게 그것이 악의 대리인들 손에 맡겨 져 있는지를 알아내는 일로부터 시작된다.
지고의 신이 존재하며 이 신은 선하다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어떻게 선하고 전능한 신이 이 악한 세상에 대해 책임을 질 것인가?
영지주의자들이 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유태인들의 신, 구약의 여호와를 포기하는 것이었다. 그들에 의하면 창세기의 모든 것은 정확하다. 그러나 그들이 해석을 제대로 하지 못한 것이다. 여호와는 땅과 하늘을 창조했으나 이 창조는 악한 행위였다. 왜냐하면 바로 인류의 현 상태, 특히 유태인들의 현 상태는 악에 의해 지배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호와는 따라서 악한 신이다. 그러나 전능한 신은 선하다. 따라서 여호와와는 다른 또 하나의 신, 여호와 보다 더 강력한 신이 존재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영지주의자들에게 있어 여호와는 아이온 Eon, 아르콘 Archonte, 데미우르고스 Démiurge또는 단순한 천사의 위치로 축소될 수밖에 없다. 그 수나 기능들은 영지주의자들에 따라 달라지기는 하지만 분명한 것은 여호와와는 다른 지고의 신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지고의 신이 설계자라면 악한 신은 작업자에 불과한 것이며 구약의 여호와는 작업자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영지주의자들에게 계시된 비밀은 다양한 우주적 체계의 비밀, 신들과 천사들의 계급, 창세기의 진정한 역사 등이었다. 이러한 앎은 구원으로 통하는 직접적인 길이다. 정통파 기독교에서는 인간은 믿음을 통해 구원이 가능하지만 영지주의자들에게 있어서는 구원은 앎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다.영지주의자들에게 있어 인간은 셋으로, 즉 영 l’esprit과 육체, 영혼 등으로 이루어지는데 구원은 오직 영과 관련된다. 태초에 인간은 순수한 영으로 창조되었다. 그러나 타락 laChute이후 그는 육체와 영혼도 갖게 되었다. 영지주의적 구원은 인간을 순수한 영의 상태로 되돌리는 것이다.
영지주의자들의 우주적, 형이상학적 앎 laconnaissance은 결국 자신에 대한 앎이다. 누가 우주를 창조했으며 누가 주재하는지를 앎으로써 우리는 자신의 위치와 운명, 그리고 모든 인간 안에 존재 하는 신적인 요소를 인식하는 것이다. 구원의 즉각적인 결과는 독립이다, 즉 여호와에 의해 부과된 도덕적 규칙으로부터, 또는 그에 의해 창조된 물질세계로부터의 독립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자신의 구원을 확신하는 영지주의자들은 고행자 또는 방탕자 ledébauché가 될 수 있다. 이러한 자신의 앎은 크나큰 확신을 부여한다. 중요한 것은 절대적인 지식, 때문이다. 새로운 신화, 사물을 보는 새로운 방법을 영지주의자들이 창안해내기 위해 필요한 놀라운 능력은 바로 거기에서 나오게 된다. 진리에 대한 앎은 창조적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영적인 것을 창조해내며 인간 내부의 영의 부분을 증가시키기 때문이다. 반대로 무지는 악을 창조해낸다. 그러므로 선과 악에 대해 말 하는 것은 동시에 우리는 앎과 무지에 대해서 말하는 것과 같다.
무지는 악과 밀접히 관련이 있고 여호와는 이 악에 대해 책임이 있는 창조주이기 때문에 여호와를 무지와 연결 짓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의 큰 과오, 즉 자신의 창조 안에 존재하는 이 악의 원인은 그의 무지이다. 즉 그는 자신보다 더 높은 곳에 또 다른 신이 있었다는 것을 알지 못했으며 자신이 지고의 원칙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이 영지주의적 데미우르고스는 조로아스터교의 특성을 물려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즉 무지와 밤은 영지주의적 여호와와 페르시아의 신 아리만 Ahriman에 공통되는 특성이다. 아리만은 유태교와 기독교의 사탄에 대한 영감의 원천임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영지주의적 여호와는 기독교적 여호와의 대적자인 기독교의 사탄과 멀리 떨어져 있지는 않다. 그러나 사탄은 악의로 행동하지만 데미우르고스의 과오는 무지라는 것을 유념해야 할 것이다.
영지주의자들이 생각하는 지고의 신에 대한 개념은 시간을 따라 추상적인 방향으로 전개되어간다.서기 1세기에 신은 유태교의 신처럼 인격적인 personnel 신이었다. 그 후 신은 미지의, 무한히 멀리 있는 위대함이라는 추상적 개념으로 변한다. 이 미지의 신이 직접 물질세계를 창조한 것은 아니다. 그는 자신 보다 덜 완벽한 존재들을, 우리가 알고 있는 그대로의 세상에 책임을 져야하는 존재들을 창조했다. 이 열등한 존재들 중의 하나가 유태인들의 신이다. 신의 최초 창조로부터 남아있는 것, 신의 불티를 제외하고는 시간 속에서 모든 창조된 것은 사라진다. 이 불티는 앎을 가진 특혜 받은 자들에게 존재한다.
묵시록적인 apocalyptique 원리들은 다양하다. 케린투수 Cerinthe 에 의하면 그리스도는 예루살렘에서 천년 동안 지배하기 위해 마지막 날 다시 나타난다. 케린투스는 그리스도를 구약의 여호와에 해당하는 신약의 신으로 간주한다. 2세기 초 중요한 영지주의 이론가 중의 하나인 안티오크의 사투르니우스 Saturnin d’Antioche 에 의하면 구약의 창세기 역사는 정확하며 글자 그대로 이해해도 좋다. 죽음 후에 피조물로부터 자신의 한 부분, 즉 신적인 불티를 거두는 것은 바로 이 신이다.육체는 따라서 죽는 것이다. 이러한 불티를 갖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하늘에서건 지옥에서건 영원한 삶도 없다.
2세기에 나타난 세 명의 위대한 영지주의자들, 즉 마르키온 Marcion, 발렌티누스 Valentin, 바실리데 Vasilide 등은 신화적인 방향을 벗어나 영지주의를 보다 더 추상적이고 철학적인 방향으로 이끌어간다. 시리아 사람 케르도 Cerdo의 제자인 마르키온은 교조적 기독교 교리와 시리아의 영지주의를 결합하려 했다. 그는 구약을 거부한다. 왜냐하면 구약의 신은 창조주이며 입법자일 뿐이기 때문이다. 진정한 지고의 신은 거기에서 모습을 보이지 않는 다. 물질은 나쁜 것이며 육체는 부활할 수 없다.
발렌티누스의 이론은 유태교에 더 가깝다. 그에 의하면 신의 불씨를 가진 인간의 주요 적은 오류 Erreur라고 불리는 半神的인 원칙이다. 無 안에 물질을 창조해 넣은 것이 바로 이 오류라는 것이 다. 창조하기 위해 오류는 진실을 복제한다. 이 오류는 결국 예수를 죽이게 되는 것이다.
바실리데스는 극단적인 추상화의 대표자이다. 그에 의하면 태초 에는 아무 것도, 절대적으로 아무 것도 없었다. 현존하지 않는 inexistant이 신은 현존하지 않는 물질로 현존하지 않는 우주를 창조한다. 이것은 이미 신화적이라기보다는 철학적인 용어에 가깝다. 현존하지 않는 이 우주는 세 부분으로 이루어진 신의 아들 하나를 품고 있는 하나의 씨다. 첫 번째 부분은 곧 신에게로 되돌아 갔다. 두 번째 부분도 마찬가지로 되돌아갔다. 그러나 그의 날개, 즉 성령을 초우주적인 세계와 우주 사이의 창공으로서 남겨놓은 채로. 세 번째 부분은 우주에 씨로서 남겨져 있었다. 이 씨로부터 우주cosmos를 창조한 위대한 아르콘이 나왔다. 또 다른 아르콘은 땅을 창조하기 위해 나타났고 그도 또한 아들 하나가 있었다. 이 아르콘이 바로 아브라함과 이삭, 야곱의 하나님이다. 그리고 나서 우주에 남겨져 있던, 원초적 아들의 세 번째 부분이 빛을 발했는데, 이 빛은 아르콘들을 관통하면서 그들이 신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준다. 이 빛은 마리아의 아들 예수에게까지 이른다. 이 신적인 아들의 세 번째 부분은 변모하여 예수를 좇아 현존하지 않는 신에게까지 다다른다. 영적인 인간들, 순수한 정신들은 후에 아들을 좇게 된다. 그들 모두가 올라갔을 때 현존하지 않는 신은 완전 한 무지로 전 우주를 뒤덮게 된다.
결국 이러한 이론을 간략히 정리해보면 영지주의자들에게 있어서 개인의 구원이란 개인에 내재하는 신성의 복원이며, 영지주의 운동의 가장 중요한 혁신은 개인의 구원을 우주적 중대한 사건으 로 끌어올린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2-2. 빅토르 위고의 작품에 나타난 영지주의 특징
‘영지주의적’이라고 부를 수 있는 신화와 태도들은 위대한 낭만주의자들에게서 분명히 나타난다.신에 대한 반항은 이미 본 바와 같이 알프레드 드 비니와 바이런 같은 작가들에게 존재한다. 이 시인들은 데미우르고스나 아르콘같은 영지주의적 용어를 사용하지 않지만 영지주의자라 불릴 만하다. 왜냐하면 그들의 작품에서 악한 신에 대한 반항을 우리는 쉽게 목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신 은 지고의 신이지만 악하다. 따라서 희망이 없더라도 그에게 반항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선과 악의 대조는 낭만주의 작가들 사이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태도가 아니라 형이상학적인 문제를 다루는 모든 문학에서도 발견된다.
그러나 위고의 특징은 그 선과 악의 대조를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그는 그것을 물질적인 층위로 가져온다. 그렇게 하면 거기에서는 모든 것이 쉽게 이해된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는 갈 채 받는 네로로부터 멀지 않은 곳에서 숨을 거둔다 Christexpire nonloindeNéronapplaudi”라는 단 하나의 구절이 선과 악의 대조, 악의 지상에서의 성격(그리스도는 신의 왕국의 왕자이고 네로는 지상의 황제이다), 그것의 지상에서의 성공(악인 네로는 갈채 받으며, 선인 그리스도는 살해당한다.)을 동시에 보여준다. 악과 지상적인 이것 간의 밀접한 관계는 숙고해 보아야 할 많은 것을 보여준다. 이 관계는 세기의 전설에서 빈번하게 보인다. 선은 천국적인 것이다. 이것은 교조적인 기독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증명된 사실이다. 그러나 악이 지상적인 것이며 특히 물리적, 역사적 세계가 악한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또 다른 이야기다. 왜냐하면 이 세상은 신의 작품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위고에 있어서 악과 물리적 물질 간의 밀접한 결합이 유래한다. 우리는 정관시집의 「어둠의 입이 말하는 것 Cequeditlabouched’ombre」의 초고에서 그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이제 무엇이 피조물과 창조주를 구별하게 하는가?
창조주는 절대적인 것으로서 영, 순수한 영이다...
피조물과 창조주를 구별 짓게 하는 것은 그것이 물질과 혼합되어 있다는 것이다.
일정량의 물질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은 피조물의 속성이며, 그것이 그 징조이다.
그런데 피조물이란 불완전함이다.
따라서 물질이란 불완전함의 징조이다.
그리고 후에는 같은 논리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악은 피조물의 물질량을 증가시킴으로써 피조물을 신에게서 떼어놓으려는 경향이 있다. 증가하는 물질의 무게는 피조물을 점점 더 어둠 속으로, 오류 속으로, 악 속으로 떨어지게 한다.
이러한 논리는 따라서 영지주의자들의 논리와 다르지 않다. 세계는 악하다. 따라서 그것은 선한 신에 의해 창조된 게 아니다. 신은 그러므로 지상의 밖에 있는 것 밖에는 창조하지 않은 것이다. 지상에 속하는 모든 것은, 신에 의해 창조되지 않은 것은 따라서 악한 것이다. 따라서 물질은 악하다.
악의 기원에 대해 위고가 주장하는 바를 그의 시, 정관시집의 시편 「어둠의 입이 말하는 것」을 통해 살펴보자.
신은 무게없는 존재만을 만들었을 뿐이다.
그를 빛나고 아름다운, 천진하고 숭배받도록,
그러나 불완전하게 만들었다. 그렇지 않다면 같은 높이에서 피조물은 창조주와 동등하게 되고,
이 완전한 존재는 무한함 속으로 들어가 신과 뒤섞여 분간할 수 없게 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피조물은 빛 때문에 그에게로 다시 들어가 존재하지 않게 되었으리라.
예언자가 꿈꾸는 피조물은
오, 깊이여, 존재하기 위해 불완전해야만 했다.
그러니 신은 우주를 만들고 우주는 악을 만든 것이다.
(...)
그런데 최초의 잘못은 최초의 무게다.
신은 고통을 느꼈다. 무게는 형태를 띠게 되었다.
(...)
악, 그것은 물질이다. 검은 나무의 치명적인 열매.
위고에게 있어서 창조주가 완벽함이라면 피조물은 필연적으로 불완전하다. 그렇지 않다면 피조물은 창조주와 구별되지 않을 것이다. 그에게 있어서 창조주의 완벽함은 그것이 순수한 영이기 때 문이며, 피조물은 물질과 뒤섞여 있기 때문에 불완전하다. 태초에 신은 자신과 피조물과의 거리를 없게 만들었다. 모든 존재들은 천사였다. 다시 말하면 ‘무게를 잴 수 없는 물질’로 만들어졌다. 그 러나 여전히 창조주는 피조물과 자신을 구별하기 위해 피조물이 불완전하도록 만든다. 완전함이 불완전함을 만들어낸 것이다. 이와 같이 창조된 불완전함은 ‘불완전 행위’, 즉 ‘잘못’이며 우리는 이것을 악이라고 부른다. 악은 물질로 만들어진다. 그것은 무게를 달 수 있는 물질이다.
그렇다면 위고에 있어서의 신은 지고의 신이 아니라 영지주의 자들의 신, 데미우르고스와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악과 물질의 관계는 신비주의적 종교 체계에서는 흔히 보이지만 교조적 기독교에서는 거의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그 기원이 영지주의이기 때문에 위고에 있어서 영지주의적인 특성에 대해 잘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영지주의적 특성을 위고 스스로 인정했는지, 원했는지 우리가 확인할 수 없다. 다만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낭만주의 시대의 전형적인 사고 중 하나였다는 사실이다.
물질과 악의 관계, 비물질적인 것과 선의 관계는 세기의 전설 의 서두에 있는 시 「이 책의 근원이 되는 비전 Lavisiond’ouest sorticelivre」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모든 것이 거기에 있다. 즉 물질과 영, 진흙과 빛
육체는 고모라이며 영혼은 시온이다.
이 관계는 이 서시에서 자주 확실히 나타난다.
그러나 위고가 일관되게 물질과 악, 비물질적인 것과 선의 관계를 대립적으로 보여주는 것만은 아니다. 종종 위고는 영혼과 물질 간의 결합, 동등화의 가능성을 말하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이와 같이 시 「지구 LaTerre」의 한 연을 볼 수 있다.
지구는 구덩이 안에서 모든 것을 동등화한다.
그리고 시저와 알렉산더 같은 이들이 만든 유골들을 죽어버린 목동과 뒤섞는다.
그것은 영혼을 하늘로 보내며 짐승을 남겨둔다.
그것은 악의 거대한 소멸 속에서 두 가지 재의 차이를 알지 못한다.
또한 우리는 「여인의 축성식 LeSacredelafemme」에서도 위고의 동일한 태도를 볼 수 있다. 이 시는 원초적 타락 이전의 세계의 상태에 대해 묘사하고 있는데 이때는 목가적인 시대이다. 이 때 모든 것은 -영혼과 물질 -은 선했었다.
어둠에서 빛에 이르기까지, 바닥에서 꼭대기까지,
존경할 만한 우애가 싹트고 있었다.
별은 오만하지 않았으며, 벌레도 새암하지 않았다.
삶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서로 존중하였다.
그러나 이 목가의 세계에서조차 악은 잠재태로서, 씨로서 존재하는 것이다. 비록 그것이 아직 힘은 지니고 있지 못한다 하더라도 더듬거리며 말하는 것이다.
지옥이 희미하게 더듬거리며 야유한다.
물과 산, 나무들, 땅과 하늘의
커다란 기쁜 외침 속에서 그 야유는 자취를 감춘다.
타락 이전의 세계에서 물질의 존재는 조금 의심스럽다. 그러나
모든 것은 불꽃, 찬가, 행복, 다정함, 관용이었다.
이 수많은 날들은 거대한 여명을 가지고 있었다.
이처럼 타락 이전의 세계, 행복한 상태에서 물질은 추상적인 용어로 축소되어 있다. 악의 도입과 함께 물질의 현존이 나타나며 세계는 불투명해지고 무거워지는 것이다. 위고의 이러한 표현은 영지주의자들의 개념과 일치한다. 왜냐하면 예를 들면 바실리데스에 의하면 비천한 성질을 가진 모든 것은 불투명하기 때문이다. 불투명성은 서열의 사다리를 올라가면서 감소한다. 이렇게 해서 신에게 다다르면 그것은 아주 아름답고 물질을 거의 갖지 않아서 그것이 비현존한다 inexistant라고 할 수 있다. 반대로 교조적인 교리에서는 물질은 영만큼 좋은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것은 선을 위해 신에 의해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영지주의자들의 개념은 위고의 시 「어둠의 입이 말하는 것」에서도 다시 한 번 확인 된다.
네가 보는 사다리가 끊어진다고 믿느냐?
높은 곳의 의미를 아는 너는 믿느냐?
피조물들이 천천히 단계적으로 빛을 향하여 올라가며
그 전체 행로 중에 더 많은 빛을 비추어 물질을 더 적게 만들고 있음을
(...)
너는 믿느냐? 나뭇잎을 숨으로 채우고 머리를 빛으로 채우면서,
돌로부터 나무로, 나무로부터 짐승으로,
돌로부터 너에게로 알아차릴 수 없이 천천히 올라가는
이 거대한 삶이, 심연이며 급경사인 인간에게서 멈추리라고.
아니다. 이 거대한 삶은 무적으로, 경탄할 만하게 계속 진행되어
보이지 않는 것 속으로, 무게가 없는 것 속으로 들어가서
천한 육체인 너를 위해 그곳에서 사라져버린다.
(...)
그것은(거대한 삶)결코 도달할 수 없는 하늘을 지나 사라져버린다.
별 총총 박힌 사다리의 고귀한 상승이여,
그것은 사슬에 묶인 악마로부터 날개달린 영혼에게로 올라가며
검은 이마를 빛나는 발가락에 닿게 하고,
별-영을 천사-태양에게 다시 붙이며
머나먼 거리를 지나
별로 장식된 무리와 푸른 무리를 다시 이으며
높은 것과 낮은 것, 가장자리와 가운데를 모아 신 안에서 깊이 사라져버린다.
영지주의자들처럼 위고도 연속적인 창조에 대해 여러 번 설명하고 주장한다. 영지주의자들에게 있어서 설계자로서의 신은 세계를 창조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우선 하급의 힘, 작업자를 창조해야만 한다. 그 힘이 이제 물질세계를 창조한다. 위고에게 있어서 신은 완벽한 어떤 것을 창조할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 만이 오직 완벽한 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불완전한 어떤 것을 창조해야만 했다. 그리고 나서 이제 피조물들은 생명을 얻고 홀로 창조를 해나간다. 동시에 불완전함은 증가해간다. 그래서 시인은 「어둠의 입이 말하는 것」의 초안에서 그렇게 적는 것이다.
「여인의 축성식」에서 우리는 신이 어떻게 창조하며 피조물이 어떻게 창조적 힘을 얻어 계속 작업을 하는지를 본다.
성스러운 피조물은 이제 창조적으로
막연히 놀라운 모습들의 형상을 빚어내고
엄청난 무리의 존재들을 만들어내고,
곧 나무들, 그리고 바다, 그리고 구름들을 만들어 냈다.
그리고 나서 신에게 미지의 형태들을 제안했다.
사려깊은 수확자인 시간이 나중에는 바꾸어버린.
「의식 LaConscience」에서 위고는 어떻게 악덕이 깊이와 가장 불투명한 물질을 찾고 있는지 분명히 보여준다. 악덕-카인은 불투명성 뒤에 숨기를 원하며 또한 보호를 위해 불투명성을 취한다. 따라서 위고는 가장 무거운 물질 -철, 구리, 돌 -과 악간에 관계를 설정한다. 반대로 선은 빛으로 나타나다. 별빛으로. 카인은 그것을 꺼뜨리려 한다.
그리고 저녁에 그는 별들에게로 활을 쏘아댔다.
그러나 가장 위대한 빛은 신에게서 오는 빛이다. 신의 눈으로 표상되는 이 빛은 모든 것을 관통한다. 악의 어둠과 불투명성은 신의 빛에 대적하기에는 무기력하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악과 물 질 간의 관계이다.
위고는 교리에 반하는 이 관계를 부각시키기 위해 오히려 교조적인 기독교적 신화를 이용한다. [세기의 전설]의 제 4장에서 위고는 영지주의자들처럼 ‘가짜 신들’에 대한 질문을 제기한다. 가짜 신들은 올림푸스의 신들, 그리스-라틴의 신들이다. 그런데, 그러나 그들은 모두 영지주의적 데미우르고스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여기에서 이 신들은 모두 악하다. 그들은 이 세상에 있을 수 있는 악한 모든 것들을 표상한다. 그리고 악의 이러한 화신은 물질이라 불린다.
신들은 자기들 끼리 말을 했다:- 우리는 물질이다,
신들은. 우리는 헤아릴 수 없는 경계이다.
그 너머에는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의 이름으로 군림하는 악으로써 우주를 붙들고 있다.
이것이 악 즉 데미우르고스와 물질 간의 영지주의적 관계이다.
또 다른 중요한 점은 신들의 무지이다. 올림피아의 가짜 신들은 자신들이 진짜 신이라고 믿는다.그들은 자신들의 신적인 능력이 절대적이고 지고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타이탄인 프토스 Phtos를 감금하지만 그는 달아난다. 그들은 그 덕분에 그때까지 알지 못했던 어떤 신을 발견하게 된다.
오 놀랍구나! 그가 마침내 알아차리게 되었구나,
낮이 밤과 뒤섞이는 이 심연 밑바닥에서,
영원한, 두터운 안개를 지나,
우리가 알 수 없는 거대한 어떤 어둠 속에서, 눈동자 하나를!
그 때 근엄하고 오만한 타이탄은
수없이 그를 치려했던 천둥 흔적을 지니고
번개 맞은 꼭대기들의 모습과
잔해들의 고상한 기형을 띠고
푸른 에테르 깊숙이 그 꼭대기에서 망연자실한
어두운 올림푸스 산의 신들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그들에게 소리친다. 끔찍하게도, :
오, 신들이여! 그는 하나의 신이다.
이것은 영지주의의 여러 체계들과 비교될 만하다. 서기 2세기의 좀 더 발전한 영지주의에서 악과 무지의 관계가 완전히 확립된다. 선민들에게 밝혀진 구원적 앎은 당연히 미지의 신에 대한 인식이다. 안티오크의 사투르니우스는 악한 천사들이 창조주들이며 사탄은 모세와 선지자들을 헤매게 만들었으며, 인류를 무지로 타격했다고 주장한다. 배사교는 뱀을 숭배한다. 인간에게 지식을 주었기 때문이다. 발렌티누스 전통에서는 창조주가 출현하는 것은 무지와 고통, 마지막 천사인 소피아의 절망으로부터이다.
그러나 그 중에서 위고의 무지한 신들에 가장 가까운 영지주의적 신은 바실리데스의 신이다. 그에 있어서는 하급의 아르콘이 세계를 창조했다. 후에 지고의, 현존하지 않는 신의 아들로부터 오 는 복음의 빛이 모든 아르콘들을 비추고 그들에게 그들은 지고의 신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하기 때문이다.
3. 결론
위고가 작품을 쓸 때 영지주의에 대해서 알았는지는 확인할 수 도 없지만 이상 살펴본 바와 같이 그의 작품에 영지주의의 특성이 잘 나타나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긴 세월에 걸쳐 쓰여진 그의 방대한 작품 속에는 영지주의적인 특성 뿐만 아니라 교조적인 특성도 뒤섞여 있다. 예를 들면 그는 인식도 지식도 없었던, 원초적 상태를 찬양하기도 한다. 그에게 있어서 타락을 이끌어온 것은 계시이며 지식이기도 하다.
최초의 황금빛의, 형언할 수 없는 비침이여!
아직 아무 것도 알지 못하고 모든 것을 비추던 햇살의!
이런 점에서 위고는 영지주의 이론가들은 반대편에 서 있는 것이다. 拜蛇敎교도는 뱀을 숭배하기 까지 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인간에게 지식을 주었고 악한 신의 작업을 망쳤기 때문이다. 이러한 태도는 위고에게 불가능한 것처럼 보인다. 그에게 있어서 신은 완전히 선하다.
위고는 이처럼 신에 대해서도 때로는 모순적인 관점을 드러내고 있다. 한편으로는 선한 신이며 한편으로는 악한 신이기도 하다. 때로는 범신론적 관점에서 세계를 바라보기도 하지만 어느 때는 이신론적인 관점에서 바라보기도 한다.
인간의 진보를 믿고 세상을 그 방향으로 이끌고자 노력하다가 망명까지 해야 했던 위고에게 어느 하나의 얼굴을 가진 신으로는 세계의 문제를 풀어낼 수가 없었을 것이다. 위고의 연구자인 알부 이 Albouy의 말대로 ‘이러한 신이 없었다면 위고의 신화는 미완성으로 남아있을 것이다. 그의 상상력은 지고의 이 배우를 요구한다. 그 덕분에 우주는 완전히 생기를 얻고 의인화되며 인간화한 다. 미지의, 동시에 현존하는, 어디에나 존재하지만 숨어있는 이 신은 상상력을 영원히 멈추지 않게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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