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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주의적 자아형성과 근대적 대학의 이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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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주의적 자아형성과 근대적 대학의 이념(이화여대 인문대 교수학술제 발표, 2014년 5월 23일)
교수학술제 발표
낭만주의적 자아형성과 근대적 대학의 이념
박찬길(영어영문학과)
그곳에서 영원 위에 서있는 정신의 상징을 보았다.
그는 어두운 심연 위에 웅크리고 앉아
하나의 연속적인 흐름을 이루며
소리 없는 빛을 향해 발산되는
자신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윌리엄 워즈워스, 1850년판 『서곡』 14권 70-74행)
학문은 곧바로 직접 마음을 하나의 직관으로 향하게 한다. 이 직관은 하나의 지속적인 자기 형성이고 직접적으로 자기와의 동일성으로 인도하며, 그리고 이것을 통해서 정말로 지극히 복된 생활로 인도한다.
(F.W.J. 셸링, 『학문론』 제2강, “대학의 학문적 사명과 도덕적 사명에 관하여” 50면)
낭만주의 문학의 핵심은 개성적인 자아의 형성이다.거칠게 말하여 낭만주의 이전에는 따로 “형성”해야 하는 독특한 자아의 개념이 존재하지 않았다. 인간은 누구나 하느님의 피조물로서 아담과 이브의 후손일 뿐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장 자끄 루쏘(Jean-Jacques Rousseau)는 “고백록”(The Confessions)을 쓰면서 “내 목적은 모든 면에서 본 모습 그대로 그려진 초상화를 나와 같은 사람들에게 제시하는 것이다. 그 초상화의 주인공은 바로 나 자신이다. 단순히 나 자신. 나는 내 마음을 알고, 내 동료인간이 어떤지 안다. 하지만 나는 내가 만나본 어떤 사람과도 다르게 만들어졌다. 나는 온 세상에 나 같은 사람은 없다고 감히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남보다 낫지 못할지 모르지만, 적어도 다르다”고 선언했다(Rousseau 17).
낭만주의시대의 예술가들은 루쏘처럼 자신들의 자아가 남다르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으로부터 자기들의 예술적 역정을 시작했다. 영국의 워즈워스(William Wordsworth) 역시 개성있는 자아의 “형성”을 평생의 작업으로 삼았다. 그는 프랑스혁명이 발발한 직후 평생의 동료 코울리지(Samuel Taylor Coleridge)를 만나 함께 혁명을 꿈꾸며 영국을 포함한 온 세상에서 지복천년이 현실화되기를 설렘으로 기다렸지만, 그들에게 다가온 건 정치적 탄압과 혁명의 좌절이었다. 그들은 섬머셋(Somerset)에 같이 은거하며 『서정담시집』(Lyrical Ballads)(1798)이라는 기념비적 저작을 공저한 것으로 유명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의미있는 사건은 그 직후에 있었던 그들의 독일체류였다. 코울리지는 괴팅겐(Gottingen)으로 가서 관념철학을 공부했고, 워즈워스는 누이동생 도로시와 함께 고슬러(Goslar)에서 머물며 그의 자서전 『서곡』을 쓰기 시작했다. 그것은 물론 실패한 공화주의자로서 막막한 앞날에 대한 실존적 고민으로부터 비롯된 작품이었다. 나는 누구이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워즈워스는 이러한 고민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자신의 과거를 되돌아보고, 루쏘처럼 “남보다 낫지 못할지 모르지만 적어도 다른” 자신만의 개성적인 자아를 그려보고자 했던 것이다. 하지만 워즈워스의 이러한 자서전 프로젝트에 코울리지가 끼어들면서 중대한 변화가 생겼다. 코울리지는 워즈워스에게 단순하게 개인사를 다룰 것이 아니라 위대한 철학시의 저자가 되기를 요구했다. 코울리지가 생각했던 것은 워즈워스 같은 시적 천재가 코울리지 자신이 제공하는 철학적 프로그램에 의거하여 인류가 물려받은 문명의 모든 요소들을 하나의 시로 집대성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이 작품이 워즈워스의 일생일대의 업적(Magnum Opus)이 될 것으로 확신했고, 나아가 이것이 실패한 혁명을 대신하여 인류를 구원할 수 있다고 믿었다.
워즈워스도 역시 이에 동조했다. 그는 앞으로 쓸 그 시를 『은둔자』(The Recluse)라고 명명했고, 그동안 쓴 자신에 관한 시는 『은둔자』의 도입부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워즈워스의 시쓰기는 그들의 바람처럼 그렇게 순탄하게 진행되지 않았다. 무엇보다 견고했던 그들의 동지적 관계 역시 코울리지의 마약중독으로 금이 갔다. 그러나 워즈워스는 코울리지와의 관계를 절연한 다음에도 『은둔자』 프로젝트를 멈추지 않았다. 멈추기는커녕 오히려 다른 모든 시 쓰기보다 더 중요한 일생의 숙제로 간주했지만, 워즈워스가 죽을 때가지 『은둔자』는 완성되지 않았다. 결국 워즈워스가 “도입부”로 써놓고 평생 동안 고쳐왔던 그 부분만이 사후에 『서곡』이라는 이름을 출판되었다. 그러나 그 시대의 문학운동을 전체적으로 조망할 수 있는 지금의 시점에서 판단해본다면, 『은둔자』는 이미 『서곡』이라는 형태로 완성되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워즈워스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본론”을 써야한다고 생각했지만, 그는 자기도 모르게 자기 나름의 본론을 완성했던 것이다.
이러한 『서곡』의 집필과정은 워즈워스가 자신의 시적상상력을 묘사하는 『서곡』의 한에피소드와 묘한 유비관계를 보여준다. 『서곡』은 여행을 통하여 자아를 탐구하는 전형적인 낭만주의적 원정(Romantic Quest)의 형식으로 되어있는데, 알프스 도보횡단의 에피소드는 『서곡』이 왜 서론이 아니라 본론인지, 워즈워스가 이 시를 통해 확립한 자아가 왜 세계를 포괄하는 것인지를 잘 보여준다. 워즈워스는 『서곡』의 6권에서 씸플론고개(Simplon Pass)를 통해 알프스를 넘었던 경험을 서술하고 있다. 가이드를 따라서 가파른 언덕을 오르던 중 워즈워스 일행은 앞서가던 가이드를 놓친다. 그들은 초조한 마음으로 헤메다가 우연히 한 농부를 만나서 길을 묻는다. “알프스를 넘어가려고 하는데, 아직 멀었나요?” 그런데 그 농부가 알려준 것은 놀랍게도 그들이 이미 오래전에 알프스를 넘었다는 사실이었다. 워즈워스가 자신의 내면에 이미 들어있었던 엄청난 정신적 에너지, 우리에게 익숙한 비평용어로 말하면 “낭만주의적 상상력”이라고 불리는 것을 마주 대하는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상상력, 그 힘은 인간 언어의 딱한 무능력 때문에
여기에서 그렇게 부를 수밖에 없다.
그 엄청난 힘은 정신의 심연으로부터 솟아났다.
한때 어떤 외로운 여행자를 감싸고 있다가
아비없이 생겨난 안개처럼.
나는 길을 잃었다.
그리고 뚫고나갈 생각도 못하고 멈춰섰다.
하지만 이제 나는 깨어있는 내 영혼에게 말할 수 있다.
“그대의 영광을 알았노라!”
감각의 빛이 꺼져버리고, 번쩍하는 광채가 보이지 않는 세계를 드러낼 때,
위대함은 어떤 찬탈의 위력으로 자리를 잡고, 그곳에 거한다.
우리가 젊은이건 늙은이건 상관없이
우리의 운명, 우리 존재의 심장과 그 거처는
영원성과 함께 있고, 오로지 거기에만 있다.
그것은 희망과 함께 있다. 절대 죽을 수 없는 희망과.
분투, 그리고 기대, 그리고 욕망,
그리고 언제까지나 계속해서 생겨날 어떤 것과 함께.
(1850년판 『서곡』 6권 592-608행)
이것은 물론 코울리지가 바라던 바처럼 이성(Reason)의 위력이 무제한적으로 발휘되는 가운데 철학적인 사유를 통하여 비로소 인식되는 그런 종류의 상상력, 즉 “무한한 ‘나의 실존’ 속에서 일어나는 영원한 창조행위가 유한한 정신 안에서 재현된 것”과는 다른 것이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워즈워스는 그의 의도와 상관없이 어떤 알 수 없는 힘에 의해 어느덧 완성되어있는 자신의 자아를 조우했고, 예술적 자아를 찾아 떠났던 그의 여정은 실질적으로 여기에서 이미 끝났다. 결국 『서곡』의 형태로 완성된 워즈워스의 시적 자서전은 그의 시적 감수성을 형성한 매우 사적인 체험의 기록이지만, 거기에서 형성된 그의 시적 자아는 그 자체로 보편적인 인간에 대한 제유(synecdoche)이기도 하다. 다시 말하면, 워즈워스가 기록한 낭만주의적 자아의 확립과정은 한 개인의 독특한 성장기이기도 하지만 그 자체가 보편적인 인류의 역사이며, 그가 섬세하게 기록한 그의 정신의 성장은 그가 살았던 시대의 이른바 세계정신(Weltgeist)의 완성이기도 했던 것이다. 워즈워스가 보여준 낭만주의적 자아는 그 자체가 이미 세계였다.
워즈워스가 반복하여 말하지만, 이러한 자아의 형성, 그의 용어를 빌면 시적 자아의 성장(the growth of poetic self)을 증언하는 것은 프랑스혁명의 실패에서 오는 환멸과 절망감을 극복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렇게 역사의 실패를 개인의 내면적 성장으로 보상하려는 시도는 물론 워즈워스에게만 고유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워즈워스의 경우에는 절망감을 극복하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는데 문제가 있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혁명을 꿈꾸던 개혁가 워즈워스는 혁명의 대의를 저버리고 변절한다. 그가 43세 되던 1813년에는 일종의 세금징수관이었던 정부의 한직을 받아들일 뿐 아니라, 1818년에는 자기 고향지역의 귀족의 부패한 선거를 돕는 찬조연설을 해서 그를 영웅으로 여기던 셸리와 바이런 같은 젊은 시인들의 공분을 사게 된다. 그러나 그러한 개인적인 정치적 행보보다 더 문제가 되는 것은 완성된 그의 시적 자아가 영국의 현실 속에서 구현되는 방식이었다. 잘 알려져 있는 것처럼 그러한 자아를 키운 것은 그가 다녔던 케임브릿지 대학이 아니라 영국의 자연이었다. 잘 알려져있는 것처럼 영국의 자연과 거기에 뿌리박은 영국 민중에 대한 그의 애정은 남다른 것이었고, 그래서 우리가 그를 “자연시인”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그에 자연사랑, 자연 그리고 자연에 가까운 사람들에 대한 사랑은 그가 공화주의자일 때는 건강한 민중성의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지만, 그가 보수화하여 세금징수원 혹은 보수적 선동가가 되고, 또 영국 자체가 유럽의 패권을 차지하여 제국주의국가로 탈바꿈하게 되면서부터는 전혀 다른 정치적 의미를 갖는다. 빅토리아시대 영국에서 워즈워스는 뛰어난 시인이 아니라 토리적(Tory) 감수성의 원조가 되어 계관시인(Poet Laureate)으로 취임하며, 전국적인 명사이자 국민적인 시인으로 떠받들어진다. 그러한 맥락에서 워즈워스가 여전히 피력하는 영국의 자연과 땅에 대한 사랑은 건강한 민중성이 아니라 국수주의의 잠재력을 다분히 가진 영국적 지방성(parochialism)으로 퇴화한다. 계관시인 워즈워스의 시와 이념은 결국 19세기 후반에 이르러 영국의 제국주의를 뒷받침하는 “영국성”(Britishness)의 형성에 중요한 이념적 토대를 제공한다.
낭만주의시대의 영국에서 낭만적 자아의 형성과정을 담은 문학적 기획은 워즈워스의 영향을 받은 다른 낭만주의 시인들에게도 매우 핵심적인 작업이었다. 워즈워스를 가장 좋아했던 셸리(Percy Bysshe Shelley)는 “얼레스터”(Alastor) 같은 시에서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한 젊은 시인의 여정을 진지하게 묘사한다. 시적 자아의 완성을 위한 이 시인의 투쟁은 진지하며, 눈물겹도록 결사적이다. 그리고 끝내 완성되긴 하지만 그 완성의 순간이 현실에서는 곧 죽음의 순간이기도 하다.
세상에는 여전히 몰인정한 일들이 행해지고, 말해지며,
많은 벌레들과, 짐승들과, 사람들이 계속 살아간다.
강력한 대지는 바다와 산, 도시와 황야로부터
그 장엄한 목소리를 조용히 끌어올린다.
나지막한 저녁기도 혹은 가벼운 밤기도를 행하며.
...하지만 그대는 떠났다.
그동안 그대를 위한 가장 순결한 성직자들이었던
이 허깨비같은 장면 속의 형태들을
그대는 더 이상 알아보지도, 사랑할 수도 없다.
아, 이제 그대는 더 이상 그대가 아니다.
(「얼레스터」 690-698)
셸리가 키이츠(John Keats)의 죽음을 애도하면서 썼던 엘레지 「에도네이즈」에서는 아예 셸리 자신이 죽은 키이츠에게 합류하면서 그와 함께 죽음 속에서 시인의 영원한 정체성을 구축하는 것으로 묘사된다.
내가 시를 지으며 불러냈던 바람이 이제
내게 내려와, 내 정신의 쪽배를 밀고 간다.
해안에서 멀리, 태풍에 돛을 맡겨 본 적이라곤 없는
저 떨고 있는 군중들로부터 멀리,
육중한 대지와 둥근 하늘이 갈라진다!
나는 어둡게, 두렵게, 멀리 실려 간다.
천국의 가장 안쪽 베일 속에서
에도네이즈의 영혼이 마치 별처럼 반짝이며
영원이 거하는 처소로부터 손짓하며 부른다.(「에도네이즈」 487-495)
영국으로부터 쫓겨나 이태리에서 망명생활 중이던 셸리는 실제로 이 시를 지은 지 일 년 남짓 되었을 때 배를 타고 나갔다 익사체로 발견된다. 워즈워스가 『서곡』을 통해 구축한 이상적인 인간형이 훗날 매우 보수적인 국가적 이데올로기의 재료로 현실화되었다면, 셸리가 도달한 완전한 인간에 대한 꿈은 셸리 자신 만큼이나 영국의 현실에 발을 붙일 여지가 없었다. 셸리에게는 완성의 순간이 죽음이었고, 영원성을 획득한 시적 자아는 본질적으로 관념에 머물 수밖에 없었다.
셸리와는 또 다른 방식으로 낭만적 자아를 형상화했던 바이런(George Gordon Byron)도 마찬가지였다. 바이런을 영국 문단의 깜짝 스타로 만들었던 『해롤드 도령의 순례기』(Childe Harold’s Pilgrimage)도 『서곡』처럼 유럽을 배경으로 하는 전형적인 낭만주의적 원정의 형식을 가지고 있다. 훗날 “바이런적 주인공”(Byronic Hero)의 원형이 되는 해롤드는 허구적인 주인공으로 제시되었으나 바이런은 곧 자기의 분신임을 인정한다. 이것 역시 바이런이 유럽을 순례하며 자신의 낭만적 자아를 구축하는 것을 내용으로 하는 작품이다. 그러나 약 5000행에 달하는 이 방대한 분량의 시를 통해 바이런이 시적 자아를 형성해내는 방식은 워즈워스와는 정반대의 방향성을 가진다. 워즈워스가 알프스에서 그리고 스노우돈(Snowdon) 산에서 맞닥뜨린 것은 결국 자기 자신 안에 있던 창조적 에너지, 상상력이었고, 그는 그것을 세계를 포섭하는 거대한 관념으로 만들었다. 바이런도 유럽을 순례하지만 그가 만난 것은 알프스의 장엄한 자연과 같은 것이 아니라 포르투갈과 스페인, 이태리와 그리스, 그리고 알바니아까지 광대하게 펼쳐져 있는 거대한 과거의 제국들의 흔적들이었다. 바이런은 그 흔적들에서 유럽의 찬란한 역사와 그 역사를 만들어 낸 위대한 인물들을 만난다. 바이런은 워즈워스처럼 “자연”을 접하면서 자기 내부의 관념을 거대하게 키워나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유럽 문명의 물질적 증거들을 향해 자신의 자아를 투사하고 확산한다. 바이런이 발견하려는 이상적인 인간형은 자신의 좁은 내면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보다 넓은 문명세계로 자아를 확산하여 공적인 역사의 공간과 결합시킨다. 나폴레옹이 몰락하고, 그리하여 더욱 더 희망이 없어진 유럽의 당대 현실에 자신의 자아를 재료로 삼아 유럽문명의 정수를 집결한 진정한 유럽적 정신(The European Mind)을 구축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목적을 가진 바이런의 낭만주의적 원정도 영국의 현실은 물론 유럽의 현실 역사에서도 발 디딜 틈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바이런은 로마의 콜로세움을 둘러보며 자신의 낭만주의적 원정을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하지만 난 살아왔다. 그리고 헛되게 살아오진 않았다.
내 정신은 그 힘을, 내 피는 그 불꽃을 잃을지 모른다.
그리고 나의 육신은 고통을 이겨내면서도 썩어가겠지.
하지만 내 안에 있는 어떤 것은 여전히 살아남아 고통과 시간을
지치게 하고, 내가 죽는 그 순간에도 계속 숨을 쉴 것이다.
천상의 어떤 것, 그들은 물론 대단하게 여기지 않겠지만,
그것은 소리 잃은 현금의 기억된 음조처럼
그들의 연약해진 정신에 내려앉아 바위처럼 단단해진 그 심장 안에서
이젠 늦어버린 사랑의 회한을 뒤흔들어 일깨울 것이다.
봉인이 찍혔다. 그러니 이제 어서 오라, 그대 두려운 힘이여.
이름 없는, 그러나 그 때문에 전능한 힘이여, 그대는 여기
한밤중의 그늘 속을 걷고 있다.
깊은 경외감, 그러나 두려움과는 완연히 다른 그런 기분으로.
그대가 가는 곳은 언제나 죽은 벽들이 담쟁이 외투를 덮여있고,
장엄한 광경은 너무도 깊고 분명한 감각을 불러내어
그리하여 우리는 여기 있던 것의 일부가 되고
우리가 바로 이 장소가 된다. 보이지는 않지만, 모든 것을 보면서.
(『해롤드 도령의 순례기』 4권, 1234-1215)
셸리가 「애도네이즈」의 결말에서 예언한 것과 비슷한 방식으로 죽음을 택한 것처럼 바이런 역시 그리스의 독립전쟁에 참여하다 죽는다. 셸리가 시인들의 영원한 공화국에 스스로 제물이 되어 자신의 낭만적 자아를 완성시켰다면, 바이런은 자신의 문학적 순교로 거대한 유럽의 정신을 되살린다.
셸리와 바이런이 시인의 삶을 재료로 하여 낭만주의적 자아를 완성해가는 과정은 자신들의 생명을 담보로 할 만큼 용감하고, 필사적이며, 영웅적이고, 그만큼 진정성 있는 비극적 감동을 주는 것이지만, 현실의 역사에 반영될 수 있는 가능성은 애당초 배제된 채, 값지지만 공허한 관념에 머물 수밖에 없었다. 워즈워스는 보수적 이데올로그로 변한 이후에도 북쪽의 호수지방에 머물렀고, 바이런과 셸리는 영국에서 쫓겨난 채 외국에서 생을 마감했다. 그러나 같은 시대에 이들과 비슷한 낭만적 자아를 꿈꿨던 독일의 시인과 철학자들은 놀랍게도 이러한 그들의 꿈을 문학적인 기획에서 끝내지 않고 현실로 구현했다. 낭만적 자아의 형성이란 결국 당대에 그들이 가장 이상적인 인간성으로 간주했던 인성을 양성하는 교육프로그램이었다. 그런데 바로 이것이 바로 그들이 창시한 근대적 독일대학의 기본 정신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독일 낭만주의의 문학과 철학은 발표자의 전문영역이 아니기 때문에 발표자는 이차적인 자료를 통해 얻은 지극히 초보적인 지식밖에 가지고 있지 못하다. 그러나 영국의 낭만주의의 내용이 잠재적으로 가지고 있는 현실성과 역사성을 다른 토양에서나마 간접적으로 가늠해보고 싶었다. 따라서 여러 전문가 동료들의 너그러운 이해와 적극적인 도움을 기대하면서, 독일의 낭만주의자들이 낭만주의 이념을 재료로 삼아 베를린 대학을 설립한 사연을 간단히 전하면서 발표의 나머지 부분을 채울까 한다.
워즈워스를 비롯한 영국낭만주의 시인들이 꿨던 꿈, 개별적이면서도 보편적인 낭만적 자아의 형성이라는 꿈은 당연히 독일 낭만주의 시인, 철학자들에게도 공유되는 것이었다. 슐레이어마허(Schleiermacher)나 쉴러(Schiller), 피히테(Fichte)와 훔볼트(Humboldt)가 그 대표적인 인물들이었다. 이들은 그들의 시와 철학을 통해 영국의 동료들보다 훨씬 더 다양하고 정교한 낭만주의를 만들었다. 하지만 여기서는 그들의 면면을 자세히 살필 형편이 못되며, 본 발표와 관련하여 그들이 대체로 공유했던 이념, 즉 “빌둥”(Bildung)의 개념을 간단히 살펴보겠다. “빌둥”은 우리말로 그냥 “교육” 혹은 “인문교육”(liberal education) 혹은 “도야”(陶冶)라는 말로 번역되기도 한다. 그 개념을 검토하는 것도 그 자체로 만만치 않은 작업이기 때문에 여기서는 한 개인의 내면적 성장을 도모하는 교육이라는 뜻으로 이해하면서 “빌둥”이라는 말을 번역하지 않고 쓰겠다. 그중에서도 베를린대학을 설립하는데 직접 간여한 훔볼트의 정의가 좋은 출발점이다. 그는 “빌둥”과 관련하여 두 가지 중요한 문건을 남겼는데, 첫번째 것은 “국가영향력의 한계를 규정하려는 시도를 위한 생각”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내용인데, 이는 존 스튜어트 밀(John Stuart Mill)이 『자유론』에서 인용하여 유명해진 구절이다.
인간의 진정한 목적, 모호하고 일시적인 욕망이 바라는 것이 아니라 이성의 확고한 명령이 규정하는 바는 인간의 능력을 최고로 가장 조화롭게 교육(Bildung)시켜서 완전하고 일관된 전체가 되도록 하는 것이다. 자유는 그러한 발전의 가능성이 꼭 필요로 하는 중대하고도 불가피한 조건이다...여기에 인류의 전체적인 위대성이 궁극적으로 근거하고 있으며...모든 인간은 그러한 방향으로 끊임없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즉 에너지의 개별성과 자기발전로 귀결해야 한다.
이 구절은 단골로 인용되어 분석되는데 베이서(Beiser)의 설명에 따르자면, 이러한 원문에 의거한 “빌둥”의 낭만적 이상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육체와 정신을 아우르는 통합적(holistic) 성격이고, 다른 하나는 개인주의적(individualistic) 성격이다. “통합적” 성격은 인간의 능력이 한쪽에 치우치지 말고 균형있게 발전되어야 한다는 것이며, 그 결과 그렇게 발전한 인간은 통합되고, 조화로우며, 균형 잡힌 전체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뜻에서는 낭만주의가 좁은 의미의 계몽주의에 반대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즉 계몽주의가 지성과 이성의 전면적 지배를 주장하는 것에 반대하며 그에 맞서 감정의 중요성을 옹호하는 것과 통한다는 것이다. 개인주의적 성격에 관한 강조는 낭만주의적 입장에서는 당연한 것이다. “빌둥”은 인간의 보편적인 능력을 개발하기도 하지만 개인에게 각각 특유한 능력들을 각각에 고유한 방식으로 발전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개별성의 윤리는 슐라이어마허에 의해 “신성한 에고이즘”(divine egoism)이라는 표현을 얻기도 하는데, 이것은 개인이 가지는 고유한 개인적 특성의 절대적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이러한 입장은 피히테와 칸트가 보편법과 의무의 윤리를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과 대조된다고 할 수 있다. 낭만주의자들의 이러한 개인성에 대한 강조와 계몽주의자들의 보편법과 의무의 윤리에 대한 강조 사이에는 쉽게 넘기 어려운 장벽이 존재하는데, 이들 사이의 대립을 해소하기 위하여 어떤 낭만주의자들은 루쏘에게 발견하는 것 같은 “사랑”의 중요성을 내세우기도 한다. 사랑을 통해 이성과 감수성 사이의 갈등을 조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교육에 있어서 “빌둥”에 대한 낭만주의적 강조는 사실상 독일 계몽주의(Aufklarung)의 교육개혁에 대한 반발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러한 계몽주의적 개혁은 대략 18세기 중반부터 시작되었는데, 그 핵심은 종교적 색채를 강하게 가지고 있었던 당시의 독일대학의 교육프로그램을 탈피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핵심은 유용성(Nutzen)을 강조하는 것이었다. 그 유용성은 학생 개인에 대한 유용성을 증진하는 것이기도 하고, 동시에 이러한 계몽주의적 교육개혁을 주도하고 있었던 절대주의 왕정이 느끼는 유용성을 강조했다는 것이다. 즉 계몽주의적 교육의 유용성은 군주와 국가에 대한 충성을 전제로 한 것이었다. 이러한 개혁은 할레(Halle)로부터 시작되어 라이프찌히(Leipzig)와 괴팅겐(Gottingen) 대학으로 확산되었고, 슐레겔, 노발리스(Novalis), 티익(Tieck), 슐라이어마허 등도 그러한 교육개혁의 희생자였으며, 그러한 배경이 이들로 하여금 새로운 대학의 이념에 낭만주의적 개념을 더욱 더 적극적으로 반영하도록 만들었다. 이들은 이러한 맥락에서 “빌둥”의 개념을 통해 학생 개인의 차원에서는 지나친 직업주의(vocationalism)를 지양하고, 국가와의 관계에 있어서는 대학의 정치권력으로부터의 자율성과 교육과 연구에 있어서의 무제한적인 자유를 주장하게 되었던 것이다. 또 쉴러 같은 경우는 예술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교육을 통해 이룩해야 할 가장 높은 수준의 인간적 삶은 아름다운 삶이며, 오로지 그러한 삶을 통해서만 개인이 그의 모든 경험을 유기적인 전체로 조직해낼 수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는 개인의 삶을 바람직한 방향으로 조직하는 것을 마치 성장소설(Bildungsroman)을 구성하는 것처럼 간주했다. 바로 이러한 지점에서 독일 낭만주의자들의 “빌둥”에 대한 강조가 영국낭만주의자들의 문학적 기획에 접근한다고도 볼 수 있다.
그렇다면 훔볼트는 이러한 이념적 배경을 가지고 창설한 베를린대학은 실제로 어떤 원칙을 가지고 있었는가? 첫째, 교수와 학생은 동일체이다. 독일대학은 교수와 학생을 지식탐구라는 활동에 있어 동등한 존재로 간주한다. 지식은 단순히 나눠주거나 전달할 수 있는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하나의 과정, 하나의 탐구, 혹은 사유의 한 형식이다. 이러한 지식을 탐구하는 자들은 배움 자체에 대한 사랑으로 한 데 뭉친 유기적 동일체이다. 이 공동체는 진정한 의미에서 민주적이다. 왜냐하면 교수나 학생 누구도 지식을 독점하고 있다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Humboldt, 1809/1956, pp.377-378). 둘째, 연구와 교육은 동일체이다. 연구와 교육은 긴밀한 연관 속에서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 최고의 교육은 교수의 연구와 이와 연관된 학생의 연구의 결과로서 이루어진다(Schleiermacher, 1808/1956, p. 253). 셋째, 모든 지식은 동일체이다. 지식의 모든 분야들은 이성에 의해 결합되는 오직 하나의 통일된 정신으로 수렴된다. 전체는 부분에서 발견되고, 또 부분은 전체 속에 존재한다(Fichte, 1807/1956, p.141). 이러한 개념은 자연과 역사, 경험과 사유를 하나로 포괄하는 최고의 통합적 철학이며, 유기적 전체를 이루는 하나의 거대한 지식체계를 전제로 하는 것이다(Schleiermacher, 1808/1956, p. 260)(Pritchard 510).
훔볼트적 대학이 상정하는 교육은 문화적이고 교육적인 환경 속에서 한 개인의 내적 자아를 성장시키는 것과 관련되며 그것은 매우 다채롭고 다양한 상황 속에서 이루어진다. 이러한 정신은 “모든 사람은 다른 사람들의 권리를 침해하거나 헌법적 질서 혹은 도덕법에 위배되지 않는 한 자신의 인격을 자유롭게 표현할 권리를 갖는다”는 현재의 독일 기본법 제 2항에도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대학에 관한 훔볼트의 가치의 핵심은 두 가지의 자유이다. 하나는 교육의 자유(Lehrfreiheit)이고 다른 하나는 배움, 즉 연구의 자유(Lernfreiheit)이다. 교수들은 자신이 알고 있는 그대로 진리와 지식을 가르칠 수 있는 자유를 가져야 하고, 또 학생들은 이것을 독립적으로 배우고, 또 간섭받거나 시험받지 않으면서 스스로 성장할 수 있는 자유를 보장받아야 한다. 베를린대학에서는 대학이 일정하게 정한 때가 아니라 언제라도 학생들이 원할 때 시험을 볼 수 있게 하고, 일정한 길이와 순서, 미리 정해진 내용을 학생들에게 제시하지 않는 관행이 있었는데 이것은 모두 훔볼트적 자유의 개념에 충실했기 때문에 생겨난 것이었다.
훔볼트의 대학에서 보내는 학문적 생활에는 “고독과 자유”(Einsamkeit und Freiheit)가 필수였다. 그래야만 젊은 학생들이 부모나 고용인에게 의존하지 않고 자유롭게 독립적인 존재로서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학자들의 공동체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했는데, 학자는 누구나 하나의 자유인으로서 자신의 독특한 생각을 표현할 수 있는 자유를 가지고 다양한 배경을 가진 다른 자유인들과 자유로운 공동체를 형성할 수 있어야 했다. 이러한 공동체에서는 사회적 관계가 물론 중요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한 개인의 내면적 삶의 가치를 침해하지 않는 범위에서 작용하는 것이어야 했다. 훔볼트는 관료주의와 이데올로기적 간섭의 위험 때문에 국가권력이 대학에 관여하는 것에 근본적인 반대의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훔볼트는 국가가 선의를 가지고 대학을 돕는 것조차 반대했는데, 이는 그가 정부 관리의 신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대학정책에 있어서는 자유주의자로서의 면모를 명확하게 드러냈다는 것을 뜻한다.
사실상 인문교육의 전통은 플라톤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로마시대에 이르면 인문학의 일곱 개 과목 즉 문법, 수사학, 논리학으로 이루어진 3과목(Trivium), 산술, 음악, 기하학, 천문학으로 이루어진 4과목(Quadrivium)의 개념이 확립되며 인문학을 중심으로 한 이 일곱 개의 과목이 중세의 대학의 주된 커리큘럼이 된다. 이러한 기본과목을 다 이수한 연후에 신학, 법, 의학 등 보다 전문적 과목을 공부할 수 있는 자격을 얻게 되었는데, 바로 이 때문에 기본학문인 인문학의 연구와 교육이 보다 전문적이고 등급이 높은 전문적 과목의 연구와 교육에 비해 수준이 낮은 것으로 치부되는 경향이 있었다. 훔볼트는 인문학과 보다 실용적이고 직업지향적인 타학문들과의 위계질서를 인정하지 않았고, 오히려 이것을 거꾸로 뒤집었다는 데 큰 공로가 있다. 뤼베(Lubbe)는 “19세기 초반에 일어난 대학개혁의 가장 중요한 측면은 기초학문인 문리학부(Arts and Sciences)를 더 높은 학부 특히 신학부와 법학부의 제도적 지배로부터 완전히 해방시킨 것”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Pritchard 509-528).
훔볼트의 독일대학에서는 인문학이 차지하는 위상이 처음부터 막중했다. 인문학은 어떤 의미에서는 새로운 대학에서 이루어지는 연구와 교육의 핵심적 내용이었고, 근대적 대학의 커리큘럼 그 자체였다. 훔볼트적 이상의 가장 중추적 내용인 연구와 교육의 자유, 그것에 입각한 내적 자아의 확립이라는 교육의 목표는 앞에서 “살펴본 독일 낭만주의자들의 교육철학을 현실화한 것이기도 하지만, 영국의 현실에서는 도저히 그 구현의 가능성을 발견할 수 없었던 영국낭만주의 시인들의 낭만적 자아형성의 이상과도 깊은 연관이 있다. 워즈워스와 코울리지, 셸리와 바이런은 영국의 옥스퍼드 혹은 캠브릿지를 다녔지만, 그들의 대학에서는 베를린 대학에서와 같이 스스로의 내면을 자기 마음대로 완성시킬 자유를 누릴 수 없었다. 그리하여 그대신 그들은 호수지방의 자연을 탐구하거나 당시의 귀족 자제들처럼 유럽 여러 나라를 도는 순례여행을 떠났던 것이다.
독일 낭만주의자들이 꿈꿨던 이상적인 대학은 영국 낭만주의자들이 단지 문학적 기획으로 시도했던 바를 새로운 교육기관을 통해 현실 속에 실현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들의 꿈은 베를린 대학의 창설로 현실화되고 이들이 확립한 인문교육의 원칙들은 나날이 기업적 관료체제로 변해가는 망칙한 대학의 현실을 경험하는 21세기의 우리에게도 여전히 버릴 수 없는 꿈으로 자리잡고 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이러한 꿈은 늘 공리주의자(Utilitarian)들의 공격을 받아왔다. 지금 우리가 그러하고, 18세기 중반 독일대학에서 그러했으며, 또 1820년대부터는 영국대학도 예외가 아니었다.
사실 여러 경로를 통해 이미 잘 알고 있는 이러한 근대적 대학의 이념을 다소 장황하게 인용한 이유는 간단하다. 그 당연한 원칙들을 공개적으로 집단적으로 같이 크게 읽어보는 것만도 발표자로서는 가슴 뛰는 일이기 때문이다. 또 수세기 전보다 더 전면적이고, 더 몰상식한 공리주의자들의 공격이 우리를 더 숨막히게 하지만, 오늘날 우리가 경험하는 “기가 막히는” 현실이 사실상 수백 년의 역사를 가진 스토리의 끝자락이라는 것을 상기하기 위해서이기도 하다. 우리는 우리 학문의 존엄성을 모욕하고, 우리의 학문적 영역을 위협하는 공리주의자들의 공격에 대해 때로는 분개하고, 때로는 좌절하며, 또 때로는 애써 외면하지만, 사실상 우리가 원하는 것처럼 인문교육을 위한 이상적인 상태에 있어본 적은 별로 없었으며, 우리가 의식하든 의식하지 않든 우리는 한편으로는 공리주의와 또 다른 한편으로는 과학주의와 끊임없이 싸움을 벌여온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또 부인할 수 없는 것은 단기적인 맥락에서는 대체로 “지는” 싸움을 해왔다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문교육이 여전히 대학 커리큘럼의 중요한 일부로 살아남아왔다는 것은 그 자체가 우리의 연구와 교육이 사회를 유지하고 발전시키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하고 있다는 살아있는 증거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공리주의적 집단이 어떤 논리를 가지고 공격한다고 해도, 인문학자의 자부심과 긍지를 잃지 말고 대동단결하여 의연하게 대처해 나가는 것이 필요하다고 본다.
영국과 독일의 낭만주의자들이 각각 “낭만적 자아의 형성”을 위한 낭만주의적 원정을 통해, 또 “빌둥”의 개념을 통한 근대적 대학의 설립을 통해 일깨워준 인문교육의 이상을 우리의 입장에서 되새기고자 하는 것이 오늘 발표의 취지였음을 다시 한번 말씀드리며 아무쪼록 후속 토론을 통해 나날이 거세지는 그들의 도전을 견뎌내기 위한 전략의 실마리가 지혜롭게 모색되었으면 한다.
주요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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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5월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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