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슨 일 있어요..?

Realize 2023. 12. 9. 23:06

요시노... 무슨 일 있어요..?

 

뭐가? 아무 일 없는데?

 

왜 자꾸 나오군에게 차갑게 대하지~~~?

.........읏

나오군에게 이런 기분을 가져 버리다니..

 

다녀왔습니다.

 

...어서와...

우아아 또...!

 

 

- 메리지 그레이 17화 -

 

 

사람 맘은 요로꼬롬 겉과 속이 많이 다르게 표현하기도 해용ㅎㅎ

근데~

괴팍 괴랄 괴별 괴이 괴착 괴패 괴학 괴배 괴란 괴격 괴각

한 달지의 기본 포지션ㅋ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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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스티아 여사제 베스탈은 누구이며, 그들의 직업은 무엇인가? by 테드

Realize 2023. 12. 9. 13:06

테드가 요로꼬롬 멋져요~ㅎㅎㅎ

한글자막 있으니 콕 눌러 보세용☆

https://www.youtube.com/watch?v=ER0Cu0KQFqM

요기서 2:58에 나오는

손으로 가루 같은거 떨구는거 뭔지 알아요???

 

몰라 살사ㅋ

https://cafe.naver.com/purifymoon/5891

 

헤스티아 여신에게 바치는 공양물 몰라 살사

대한민국 모임의 시작, 네이버 카페

cafe.naver.com

근데 베스탈 여사제의 죽음은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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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군과 마녀사냥 by 조금은 삐딱한 세계사 유럽편

카테고리 없음 2023. 12. 8. 23:06

조금은 삐딱한 세계사 유럽편 p120

 

많은 부분을 생각해보게 하는 내용~

https://cafe.naver.com/purifymoon/3549

 

십자군 원전. 성지탈환의 이름 아래 행해진 '성전' 그 뒤에 숨겨진 로마교황의 속셈은?

대한민국 모임의 시작, 네이버 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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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르만인 >

 

교황 레오 3세는 게르만인 샤를마뉴 대제에게 서로마제국 황제의 관을 씌어주었다. 그리하여 이제 중세 유럽의 질서는 로마의 유산을 토대로 기독교와 게르만족에 의해 확립되어 갔다.

 

게르만족의 전반적인 특성은 로마인과 사뭇 달랐다. 지중해의 온화한 기후와 발달된 해양무역, 풍족한 식량 등 전반적으로 편앙한 생활을 구가하던 로마인들은 개방적이면서도 관대한 성품이었던 것에 반해, 혹독한 겨울의 추위와 척박한 땅, 로마나 갈리아, 게르만족 내의 크고 작은 세력과 끝없는 사투를 벌여야 했던 게르만인들은 용맹하고 잔인한 성격과 함께 그리스의 스파르타에 비견할 만큼 엄격하고 맹목적인 전사의 성향으로 발전했다. 서양 전설이나 영화속의 바바리안 이미지는 대부분 이런 고대 게르만의 기억에서 비롯된 것이다.

 

게르만인들이 기독교화된 로마를 접수햇다는 것은 많은 점을 시사한다. 로마에 비해 덜 문명화된 민족이었던 그들은 로마를 통해 전파된 기독교를 세련되게 승화시킬 능력이 부족했다. 거기에 지금도 남아잇는 특유의 완고한 성향이 가뜩이나 융통성 없는 일신교 기독교의 절대주의 도그마를 더 강화해버리고 말았다. 기독교와 예수의 가르침과는 사뭇 반대되는 모습으로 1000년이 넘게 이어진 중새의 배경에는 문명화되지 못한, 개성과 자존심이 강했던 게르만족과 일신교 전통의 결합이라는 특수성이 작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중세가 로마시대에 비해 근대적인 관점에서 오히려 퇴보한 면이 많았다는 점, 공식적으로는 철저한 일신교 체제하에 있었음에도 게르만 특유위 미신과 주술, 마법이 횡행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십자군과 마녀사냥으로 이어지는 종교적 집착, 이에 더해 신을 대리해야 할 교황청의 병적인 부패와 일탈, 사회 전체에 걸쳐 반복된 살육과 가난 및 질병 등은 이런 점을 여실히 말해주고 있다.

 

 

< 십자군과 마녀사냥 두 광신적 이벤트의 공통점 >

 

1. 종교의 이름으로 행한 증오의 표출

 

절대억 개념에 힘입어 중세 유럽은 이웃에 대한 사랑을 설파하는 기독교의 가르침에도 불구하고 특정 성향의 사람을 악의 상징으로 규정, 증오하고 공격했다. 관용이나 사랑은 이교도나 이단에게는 용인되지 않았고 오직 기독교도 내에서만 의미가 있을 뿐이었다.

 

2. 수백 년 동안 유럽 전역에 걸쳐 일상화

 

십자군 원정은 11세기 말부터 13세기 말에 이르는 200년간 여러 차례에 걸쳐 벌어졌고, 마녀사냘은 15세기 초부터 17세기 초까지 유럽 전역에서 자행되었다. 이는 이 상황들이 결코 짧은 순간에 광풍처럼 지나간 일시적인 이벤트가 아니라 중세 유럽의 정신 기저를 대변하는 장기적인 현상이었다는 점을 보여준다.

 

3. 약자를 탄압하는 도구로 악용

 

십자군 원정과 마녀사냥의 가장 악질적인 측면른 그 대상이었던 무슬림과 마녀 혐의자뿐 아니라 힘과 명분을 빌미로 일반 사람들까지 괴롭히고 학살하는 도구로 오용되었다는 점이다.

 

4. 절대성의 획득

 

신의 이름으로 행한 일들인 만큼 그 권위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고, 그 과정이서 벌어지는 부작용들은 묵인되었다. 그러나 실은 그 부작용들이야말로 십자군과 마녀사냥의 본질을 드러내고 있다.

 

 

< 십자군 >

 

이슬람의 객관적인 진실은 백인 기독교들에 의해 재정립된 사실과는 사뭇 다르다. 중세 전반에 걸쳐 이슬람 세계는 유럽보다 훨씬 개방적이고 자유로우며 문명화되어 있었다. 수학 기하학 물리학 등 자연과학에서 이슬람의 뛰어난 업적은 르네상스 이전의 유럽을 압도했다. 종교적인 측면에서도 "한 손엔 코란을 한 손엔 칼을"이라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유명한 인용구와 달리, 정복지의 주민을 강제적으로 개종시키지 않았다. 원칙적으로 이슬람 율법에 위배되기 때문이었다. 이슬람 제국들은 개종하지 않은 주민들에게 조금 더 무거운 세금을 물리는 정도의 제재를 가했고, 그 세금조차 비잔티움 제국의 일상 세금보다 가벼웠기 때문에 민중에게 오히려 환영받기도 했다는 점은 앞서 언급한 바와 같다.

 

이러한 공통 배경으로 일견 가까워야 할 듯한 세 종교의 관계는 실제로는 좋지 않은데 그 이유는 서로를 '이단'으로 여기고 경원하기 때문이다. 중국이나 인도처럼 유럽과 세계관이 완전히 다른 경우에는 아예 논외로 치부될 수도 있지만, 종교적 뿌리가 같으면서 미묘하게 다른 교리를 주장하는 사람들끼리는 도리어 예민해지고 불신과 증오도 첨예해진다.

 

주목해야 할 사실은 이때 명분으로 내세운 예루살렘 탈환의 성스러운 임무는 알고 보면 실질적인 의미가 없었다는 점이다. 예루살렘은 이미 400여 년 전인 서기 638년에 시리아, 팔레스타인과 함께 비잔티움 제국에서 이탈해 있었다. 게다가 이슬람 특유의 관용적인 종교정책으로 예루살렘 안의 기독교 성지들은 존중 관리되고 있었고, 덕택에 수많은 순례자가 유럽 각지에서 이곳을 방문하는 것에도 큰 문제가 없었다.

 

그럼에도 이슬람의 서진을 두려워한 교황은 알렉시루스 1세의 요청이 있자 성지 탈환의 명분을 부추기고 성전으 주창함으로써 십자군을 조직하게 되었다. 그 실질적인 목적은 신성로마지국 황제인 하인리히 4세와의 권력 경쟁을 유리하게 이끌려는 정치적 계산과 함께, 교황의 권위가 별로 미치지 않는 비잔티움 제국의 동방정교 세력을 흡수 병합하기 위한 것이었다.

 

고위층의 정치적 의도와는 무관하게, 이렇게 만들어진 십자군이 조직되는 과정과 유럽인 사이에는 다음과 같은 정서가 자리하게 되었다.

 

1. 비잔티움 제국을 패퇴시키며 다가오는 이슬람에 대한 두려움

2. 이슬람과 이교도에 대한 증오

3. 바티칸과 사제들이 선동한 예루살렘 성지 탈환에 대한 때 아닌 열정

4. 기왕에 형성되어 있던 게르만적 비정미와 기독교적 광신

 

 

< 책에 언급된 십자군 종류 정리 >

 

농민 십자군 : 셀주크 투르크 제국과 싸우러 가던 여로에 성전 수행이라는 명분하에 약탈, 제국과 맞붙었을 때 대패하여 괴멸

 

다른 자생적인 십자군 : 여로중 헝가리에서 유대인 학살을 하여, 성난 헝가리인들에게 전멸

 

정규 십자군 : 1099년 이슬람에 입성하자 이슬람 지배자들이 보여줬던 관용정책과 반대로 여자와 어린이를 포한한 수십만명의 유대교와 이슬람교도들을 학살하여 이슬람 문명국을 경악시키고 유럽 기독교도의 인간성에 대한 회의와 의심을 촉발.

 

알비 십자군 : 1209년 이단 협의를 받고 있는 프랑스의 베지에 시를 공격, 2만여 명의 시민 전체를 학살. 이때 시토회 수도원정 아르날두스 아말리키 왈 "죽여라. 하느님은 당신의 백성을 알아보신다."(안죽으면 하느님의 백성ㅠ)

 

소년 십자군 : 1212년, 종교적 신념과 낭만주의에 가득 찬 프랑스와 독일의 10대 소년이 자발적으로 결성, 총 5만에나 되는 대규모 인원을 끌어들이는 데에 성공하지만 원정 과정에서 노예 상인에 속아 대부분이 북아프리카에 노예로 팔려가고, 속지 않은 소년들 역시 배가 침몰하여 익사.

 

양치기와 농민으로 구성된 자생한 십자군 : 1251 이집트의 회교도로부터 프랑스 루이 9세를 해방시킨다는 명목으로 창설. 프랑스 전역을 돌며 유대인과 양만을 대상으로 살육과 약탈을 일삼다가 프랑스 왕의 군대에 의해 격퇴.

 

 

십자군이 이교도만을 목표로 삼았던 것도 아니다. 일단칼을 가지면 휘둘러보고 싶은 마성은 십자군 원정 내내 유감없이 발휘되었는데, 그 칼끝은 유대인은 물론 원정의 길목에 놓여 있던 다양한 사람에게까지 향하기 일쑤였다.

 

십자군에 참여한 사람 모두가 광기에 휩싸여 살육을 일삼고 다녔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전반적으로 그들이 유럽과 이슬람 세계에 끼친 폐해는 아주 컸고, 특히 성스러운 군대, 신의 영광 등의 거창하고 숭고한 명분을 생각한다면 그 윤리적 타락의 정도는 실로 비참한 것이었다. 해방 전쟁, 성전 등 그럴듯한 명분으로 포장된 모든 다른 전쟁처럼 십자군 원정도 힘에 중독되어 피를 탐닉하는 인간의 잔인성의 어두운 면을 보여준 비극이었을 뿐이다.

 

앞서 말했듯 십자군 원정 이전의 이슬람은 학문과 동교적 관용의 측면에서 중세 유럽과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그런 이슬람을 자극해 배타적인 태도로 바꾸어간 것은 타협과 관용을 모르던 중세 유럽의 잔인함과 무지였다.

 

 

< 마녀사냥 >

 

마녀사냥이 시작되기 이전의 중세에는 마녀 마법사 요정 등 비기독교적이고 신비로운 존재들에 대해 그다지 엄격한 기독교적 잣대를 적용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흘러 다니던 게르만 전설을 집대성한 니벨룽겐의 노래는 13세기 초에 완성되었는데 이때는 유럽 기독교국들의 맹신적 열정이 강해지고 있던 시기이고 십자군 원정이 이어지던 때다. 이교도를 죽이자는 함성이 드높고 이단 심판이 득세함에도 한편에서는 마법사와 요정, 용과 여신, 소인족이 등장하는 이교도적 신화가 정립되고 있었으니 참으로 아이로니컬한 상황이다.

 

마녀사냥이 벌어지던 당시 교회나 위정자들이 두려워했던 것은 마녀가 함의하는 악마성 자체보다는 마녀나 마법사 이야기의 이면에 존재하던 다신교적인 쾌활함과 자유의 흔적이었다.

 

마녀사냥은 이어한 다양한 이미지 가운데 사악한 면이 집중적으로 부각되면서 나타나게 되는데 그 배경에는 당시 유럽의 정치 문화 종교 등 각종 사회상이 깔려 있었다. 13세기 이전부터 시작된 바티칸과 신성로마제국, 비잔티움 제국 간의 대립은 유럽 내의 다양한 갈등을 낳았다. 이런 교권과 속권의 갈등 양상은 상대 진영에 대한 공격의 핑곗거리를 다양하게 만들었는데, 여기에 한몫한 것이 교리의 해석과 적용의 적법성 문제, 즉 이단 논쟁이었다.

 

기본적으로 유럽 가톨릭 교회의 정통성은 바티칸에 있지만, 유럽 역사를 통틀어 이단 시비는 지역과 교파 간에 끊이지 않았다. 평소에는 그리스도 안의 형제로 존중하던 성직자 사이에서도 갈등의 골이 깊어지거나 힘의 균형이 깨지면 순식간에 화형대가 언급되는 이단 협박으로 바뀌곤 하던 시대였다. 나와 다른 의견이라면 무엇이든 악마의 배후 조종으로 의심하는 사고방식의 위험성과 해악은 형언할 수 없이 컸다.

 

원래는 교리 해석을 둘러싼 교파나 사제, 정부, 수도사 등 지식인층이나 세력 간의 다툼이었던 것이 힘없는 민간인과 여성을 겨냥하게 된 것은 1517년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을 통한 개신교의 출현 등 교회의 분열상 및 르네상스와 합리주의, 과학 등 근대성의 발흥과 관련되어 있다. 이 모든 사건은 전통 가치를 상징하는 바티칸과 교회의 세력을 항구적으로 약화시키는 일들이었기 때문이다.

 

과거와는 달리 새로운 개신교 세력은 더 이상 이단이라는 명목하에 제거해버릴 수 있는 규모가 아니었다. 여기에 더해 계속된 전쟁과 기아, 전염병 등 각종 사회적 어려움에서 오는 초조함은 자연스레 약자를 향한 탄압으로 연결되었다. 약자 중에서도 가장 약한 자들이 바로 마녀사냥의 주 대상이 되었다.

 

주로 생식력, 젊음, 아름다움을 잃은 40대 중후반 이후의 여성이 많았는데 특히 장애가 있거나 병 때문에 외모가 흉측한 경우는 더 그럴듯한 마녀 후보로 꼽혔다. 이들 가운데에는 가족이 없고 마을에서 무당이나 산파일로 생활하는 과부가 많았으며 사회적으로 존경받지 못하면서도 두랴움과 거리감을 주는 이들은 약간의 조작만으로 쉽사리 증오의 대상으로 변질될 수 있었다.

 

남성 위주의 사회에서 전통적으로 여성의 지위는 아주 모순적인 상태에 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사회적으로 천대받거나 남성과 동등한 권리를 인정받지 못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숭배와 찬양의 대상이 되어왔다. 유혹과 사악함의 원천이면서 동시에 순결과 아름다움의 상징이고, 육욕의 결정체이면서도 정숙함의 화신이며, 창부이자 현모양처일 뿐 아니라 경계의 대상이자 흠모의 이상향이기도 하다.

 

남성이 자신의 성적 동기와 종교적 환상을 통해 자의적으로 부여한 여성의 이중적인 이미지는 전체적으로 비현실적인 몽상의 세계였던 중세 말에 극에 달하게 되는데, 마냐사냥은 여성에 대한 두려움과 흠모, 경멸과 숭배의 내적 혼란과 갈등이 증오로 표출된 것이다.

 

마녀사냥이 일반화된 후에 남녀노소와 귀천을 막론하고 서로 의심하고 밀고하는 풍조가 만연하게 되었다. 연적, 정적, 채무자는 물론 불화가 있는 가족 내에서조차 꼬투리를 잡아 마녀로 밀고하는 일이 이어졌다. 지역에 따라 이런 밀고는 법적인 의무이기도 했다. 일단 마녀로 고발되면 무죄 방면은 거의 상상할 수 없었다. 사안이 사안인 만큼 변호도 기대하기 힘들었고 자백할 때까지 무자비한 고문이 이어졌다. 마녀로 인정되고 나면 재산이 모두 국가에 압수되었으니 정부로서는 꽤 괜찮은 돈벌이 수단이기도 했다.

 

 

< 마녀로 고발되는 사유 >

 

1. 큰소리로 웃는다.

2. 전혀 웃지 않는다.

3. 혼자 중얼거린다.

4. 간질병이 있거나 사시다.

5. 외모가 흉하다.

6. 고양이를 키운다.

7. 피부병이 있다.

8. 몽유병이 있다.

9. 교회를 잘다니지 않거나 고해를 하지 않는다.

10. 낮에 잠을 잔다.

 

(달지는 마녀였군요?)

 

 

200~300년간 계속된 마녀사냥은 17세기에 정점이 오른 후 점차 사그러들고 세상은 민주주의와 무신론, 기계와 진화론, 막시즘의 시대인 근대로 접어든다. 그러나 이미 수십만 명에 달하는 죄 없는 어머니, 딸, 아내가 의심과 증오 속에서 화형대로 보내진 후였다. 마녀사냥은 열정을 가장한 종교적인 광신과, 종교를 통해 사회를 통제하려는 성적자와 위정자의 계산, 그리고 불만과 증오를 발산할 길이 없었던 대중의 히스테리가 섞여 만들어낸 비극이었다. 인간이 이질적인 타인에게 얼마나 잔인해질 수 있는지 증명하는 본보기이자, 군중의 심리에 쉽게 동화되고 이를 폭력의 명분으로 이용하는 인간의 현실을 폭로한 극단적인 예였다.

 

반드시 지적되어야 하는 부분은 가톨릭뿐 아니라 그 불합리성을 비판했던 프로테스탄트(개신교)에서도 마녀사냥이 성행했다는 사실이다. "오직 성서"를 외치며 성서에 근거한 신앙과 교리를 주장한 마르틴 루터조차도 "마녀에게 어떤 동정도 갖지 않으며 모두 죽이고 싶다"고 말할 정도였다. 마녀사냥이 마지막까지 성행한 곳은 가톨릭 유럽이 아니라 개신교 미국이었다.

 

이런 점들은 한 가지 면에서 합리적이고 개혁적인 사람이라도 다른 면에서는 여전히 광신적인 열정과 잔인한 광기에 휩싸일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하나의 도그마에서 빠져나오면서 실은 다른 도그마로 이행하는 상태는 역사의 여러 지점에서 확인할 수 있는 현상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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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운을 상쇄시키는 방법중 하나~

Realize 2023. 12. 8. 13:05

 

황금을 만들 수 있는 엄청난 재능.

 

하지만 그에 대한 반작용으로 엄청난 불운도 함께 따라온다.

 

그래서 유렌은 보통 자신의 주변에 강한 운을 지닌 존재들을 둬 자신의 불운을 상쇄시키고 있었다.

 

 

- 나 혼자 탑에서 농사 249화 -

 

 

다안~

24시간 항시 옆에 끼고 있어야 한다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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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세가 의도적으로 만든 고행의 길 by 조금은 삐딱한 세계사 유럽편

Realize 2023. 12. 7. 23:05

조금은 삐딱한 세계사 유럽편 p40

 

흐응~

유대인의 일신교 & 선민 사상은

모세 주도하에 '이집트계 유대인 스카우트 잼버리'한거라고........

말되네!?

 

울 찻집에 있는 여러 모세 글들과 함께 읽어보세용~

 

 

모세가 의도적으로 만든 고행의 길

 

 

유대교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은 모세다. 구약성서의 처음 다섯 장, 즉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는 모세가 직접 썼다고 하고, 이를 모세5경 혹은 토라라고 부른다. 우주의 창조와 에덴동산, 노아의 방주, 아브라함과 이삭, 십계명 등 성서의 고전적인 이야기가 모두 들어 있는 유대교의 가장 중요한 경전이다.

 

이집트 왕가에서 자란 사람으로서 혈통이 모호한 인물인 모세는 기원전 1300년경 노예로 살고 있던 동족을 모아 이집트를 탈출, 젖과 꿀이 흐른다는 가나안을 찾아 떠나는데 이때가 일신교로서의 유대교가 성립되는 시점이다. 유대교 신앙은 그 오래전부터 이미 존재했지만 이를 구체적이고도 강력한 형태로 정리하고 고착시킨 것이 모세이기 때문이다.

 

성서에 등장하는 모세의 일화 가운데 인상 깊은 장면은 시나이 산에서 그가 십계명판을 받아 내려왔을 때의 일이다. 연락이 두절된 채 산 아래에서 40일간 기다리다 지친 동족이 금송아지(풍요와 다산의 신 바알을 상징)를 맨들어 섬기는 것을 본 그는 분노한 나머지 십계명판을 땅바닥이 던져 깨버리고 말았다. 그래서 모세는 새 십계명판을 받기 위해 다시 산으로 올라가야 했다.

 

이 일화는 당시 일반인에게 일신교사상이 정착하지 못했다는 점을 말해준다. 모세와 연락이 끊어진 지 얼마 되지 않나 지역신의 우상을 만들어 절을 하고 있던 모습은 이후 수천 년에 걸쳐 나타난 유대인의 강철 같은 종교적 신념과는 상반되기 때문이다. 다양한 역할의 신과 그 상징으로 우상을 섬기는 것은 모세의 시대에 당연한 일이었고 그때까지는 유대인도 그 전통과 관습에 젖어 있었다. 허나 약속의 땅을 찾아 시나이 반도의 광야를 헤매던 40년 동안 모세는 강력한 권위와 함께 홍해를 가르고 신과 대화하여 십계명을 받아오는 기적을 통해 유일신 하느님의 전능함과 강력한을 유대인들의 뼛속 깊이 심게 되었다.

 

모세는 금송아지를 섬긴 죄로 동족 3000명을 처형했는데, 이 시절 동족의 죄를 잔혹하게 다스리던 그의 독재 행각에는 오랜 방랑 기간 동안 겪은 온갖 현실적인 어려움에도 흔들리지 않는 신앙심을 유대인의 심중에 심으려는 의도가 숨어 있었다. 사실 가나안은 이집트에서 천천히 걸어도 불과 몇 달이면 도착할 수 있는 가까운 지역이다. 그런데도 여기에 도달하기까지 40년이나 걸렸다는 것은 모세에 의해 기획된 의도적인 고행의 맥락으로 해석이 가능할 것이다. 이런 고행은 위험하기도 하지만 구설원을 배타적으로 방어적인 분위기 속에서 서로 뭉치게 하는 효과가 있고 결국 일신교로서의 유대교 신념을 더욱 강하데 담근질하는 결과를 낳았다.

 

이렇게 특수한 여건에 더해 모세가 신에게서 직접 받았다는 십계명과 그것을 안치한 성궤 등 스스로가 신에게 선택된 민족이라는 증거물이 마련되고, 그 결과 모세가 도입한 야훼 신앙은 공허한 금송아지 숭배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권위를 갖게 되었다. 이것은 성궤가 신의 증표를 넘어 신 그 자체와 동일시되고, 이후 예루살렘의 솔로몬 성전에 안치됨으로써 신이 직접 거하는 장소로의 의미를 갖게 된다는 사실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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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른다면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많습니다.

Realize 2023. 12. 7. 13:05

...알겠습니다.

 

이 애들은 판단하기 위한 정보조차 주어지지 않았던 건가

 

모른다면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많습니다.

그러니 로데리히.

당신은 문관 견습으로서 많은 곳에서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게 자신을 닦으시면 됩니다.

다양한 영지에서의 정보를 모은 후에 더 이점이 있는 영지가 있는가

아렌스바흐와 잘 지는 것으로 얼마나 이점이 있는가

잘 맛봐주세요.

 

해보겠습니다.

 

......

 

 

- 책벌레의 하극상 4부 20화 -

 

 

수년 전부터 울나라의 마법생태에 대해 많은 생각을 했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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