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를 오해하는 현대인에게

Realize 2023. 12. 10. 23:07

중세를 오해하는 현대인에게

책에서 달지 기준 중요하다고 보는 부분만 뽑았어용~

중세에 대한 다양한 견해가 쌓여가는 소리 들리지 않나요ㅎ

 

 

 

아리스토텔레스를 금하라

 

한때 세계사 교과서에 토마스 아퀴나스가 신앙과 이성을 조화시켰다는, 관행적으로 사용한 표현이 있었다. 여기서 신앙은 기독교를, 이성은 아리스토텔레스로 다변되는 고대 그리스철학과 학문을 상징한다. 조금 단순하게 이야기하면 중세 기독교는 고대 그리스의 철학과 학문을 신앙에 해가 된다는 이유로 1000년 넘게 배제했다. 그러다가 12~13세기 유럽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학문을 배우자는 욕구가 다시 일어났다. 13세기 후반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으로도 신의 오묘한 진리를 이해할 수 있다면서 기독교 신앙과 고대 그리스철학의 이성을 조화시키려고 노력했다.

 

1270년 파리 주교 에티엔 탕피에는 급진주의적 아리스토텔레스 추종자들의 13가지 명제를 가르치지 못하도록 금지했고, 1277년에는 이 금지 목록을 219개로 확대했다. 1277년 금지령은 약 50년간 지속되다가, 1325년 파리 주교가 아퀴나스의 가르침을 언급했다고 내린 파문을 무효화하고, "이후로 유리는 이 항목들에 대해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고 대신 그것들을 자유로운 학문적 논의에 맡긴다."라고 선언함으로써 폐지되었다.

 

12~13세기 유럽에서 배우고자 했던 아리스토텔레스 학문은 이슬람 세계로부터 수입된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고대 그리스철학을 배재했던 중세 유럽 기독교 세계와는 달리 이슬람 세계는 고대 그리스의 지적 유산을 적극 계승하고 발전시켰다. 이같이 중세 이슬람 세계가 한층 발전시킨 고대 그리스철학과 학문의 유산이 12세기 유럽 기독교 세계로 역수입된 것이다.

 

강한 저항과 반대가 있었지만 12세기 이후 기독교 세계는 이슬람 등 외부 세계로부터 많은 것을 수용하여 발전시켰고, 반면 15~16세기 이슬람 세계는 아바스왕조 시절과는 달리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는 데 주저했다.

 

 

중세 유럽인들의 이상한 뼈 사랑

 

중세 유럽 기독교 사회에서 볼 수 있는 이상한 관행 중 하나는 남다른 뼈 사랑이다. 당시 사람들은 수많은 성인을 만들어 냈고 그들의 유해 즉 성인의 뼈를 숭배했다. 그레고리우스 대교황은 이교 신전을 개축해 만든 새 교회에 성 유골을 안치할 것을 명했다. 프랑크왕국의 카롤루스 대제는 모든 서약은 교회 안에서나 성 유골에 해야 한다은 칙령을 반포했다.

 

이처럼 중세 기독교인들이 뼈에 집착한 것은 성인의 유해가 기적을 행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교회 입장에서 성 유골은 재정 수입원이었다. 신앙심 깊은 신자들은 성 유골을 보유하고 있는 교회와 수도원에 아낌없이 기부를 했다. 10세기에는 건축비를 조당하기 위해 성 유골을 들고 지역을 순례하는 관행까지 등장했다. 중세 후반에는 성 유골을 순례하고 참배하는 사람들에게 면벌부를 부여했다.

 

 

잠자리까지 통제한 사회

 

유럽 역사에서 성을 특히 더 억압했던 시대는 중세였다. 중세 기독교의 가르침에 따르면 음욕은 구원받지 못하고 지옥으로 떨어지게 만드는 7죄 중 하나였고, 성욕은 다연스러운 생리적 욕구가 아니라 철저하게 단죄해야 할 육체적 죄악이었다. 중세 교회가 성을 억압하는 태도를 고수한 핵심 이유는 성행위가 원죄의 결과라는 인식 깨문이었다. 기독교 초기 교부들은 이러한 개념을 체계화시켰고, 아우구스티누스는 성행위를 통해 원죄가 전달된다고 주장했다.

 

중세 의학 또한 성행위가 건강에 해롭다는 해석을 내놓으면서 성 억압에 동참했다. 이런 상황에서 11~13세기 성행위가 건강유지에 좋다고 이야기하는 이슬람 의학서가 라틴어로 번역돼 기독교 사회에 소개되면서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잠자리는 시시콜콜한 부분까지 교회가 통제해야 할 대상이었다. 교회는 관계를 가질 수 있는 날과 방식까지 규제했다. 7세기 축제일이 273일 정도였던 점을 고려하면 중세 부부에게 허용된 평균 성행위 횟수는 일주일에 한 번 꼴도 되지 않았다.

 

중세 교회가 신도들의 일상생활에서 가장 혹독하게 단죄하고자 했던 것이 성윤리였다.

 

 

불임은 악마의 계략

 

중세 유럽 기독교는 불임을 의학적 관점에서 합리적으로 설명하기보다는 신의 저주, 원죄의 결과, 악마의 소행이라는 종교적 관점에서 이해하고 비난했다. 구약에서 단 한 번 불임을 처벌의 의미로 사용했음에도 불구하고, 중세 교회는 불임이 원죄에 대한 처벌이라고 가르쳤다. 예를 들어, 토마스 아퀴나스는 불임을 사악한 죄악으로 묘사했으며, 신의 형벌이라고 말했다. 그는 신성한 결혼 생활을 위반한 결과가 불임이라고 생각했으며, 신성모독이나 간통과 같은 행위가 불임을 일으킨다고 믿었다.

 

이처럼 교황, 성직자, 신학자, 설교자 들이 불임을 악마의 계략이라고 설파하는데 중세 유럽 일반 기독교인들이 자신들보다 학식과 지위가 높은 이들의 설명을 믿지 않을 수가 있었겠는가? 게다가 임신과 불임이 어떤 생물학적 과정을 거쳐 일어나는지에 대한 지식이 없는 당시 사람들에게는 이 개인적인 불행을 설명할 수 없었기 때문에 악마의 계략이라는 초자연적 존재의 탓으로 돌리는 것니 편했을 것이다.

 

그러나 다티니 부부의 불이에 관한 자료를 조사하면서 연구 초기에 예단했던 것과는 달리 불임을 바라보는 중세 말 유럽 기독교인들의 인식이 상당히 다양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악마의 소행이라는 종교적 사고부터 치료해야 하는 질병이라는 의학적 해석까지 여러 생각들이 혼재했다. 그렇다고 이러한 방법들이 의학적으로 효과가 있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다티니 부부의 불임 연구를 통해 얻은 결론중 하나는 이들을 포함한 당시 이탈리아 도시민들이 불임을 신의 저주나 원죄의 결과, 악마의 소행이라는 비합리적이면서 종교적인 믿음을 공유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는 중세 말 이탈리아 도시의 의학 덕분이었을 것이더. 물론 오늘날 의학과 비교하면 당시 의학 수준은 매우 낮았지만, 어쨌든 피렌체와 같은 이탈리아 도시 거주민들은 당시 유럽 최고 수준의 의사에게 진료와 처방을 받을 수 있었고, 그러한 환경 덕분에 기초 의학 지식을 습득할 수 있었다. 그래서 불임를 좀 더 합리적으로 이해하고 그에 대한 해결책을 찾으려고 노력할 수 있었다.

 

 

기적을 행하는 왕

 

서양 중세 사회는 어둠만이 아니라 빛도 있었다는 해석은 19세기 이후 나타났다.

 

중세 사회에 관한 놀라운 이야기 중 하나는 프랑스와 영국의 왕들이 연주창 환자를 손으로 만져서 치료할 수 있다는 집단적 믿음이다. 프랑스의 카페왕조는 11세기부터, 영국의 노르만 왕조는 12세기부터 이 기적의 치료를 시행했다. 사실 왕이 기적의 치료를 한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치료되었다고 믿었다. 게다가 사람들은 치료가 되면 왕의 치료 덕분이고, 그렇지 않으면 환자의 신앙심이 부적한 탓이라고 생각했다. 오늘날 기준에서 보면 사이비 종교의 교주나 행할 법한 말도 안되는 이 행사에 사람글이 몰려들었다.

 

 

기도하는 자, 싸우는 자, 일하는 자

 

실제로 기독교는 불평등한 신분제도와 이데올로기를 오랫동안 고수했다. 바울과 아우구스티누스는 노예제의 부당함을 인지하지 못했다. 그 대신 스토아철학자들처럼 노예들에게 자신의 도덕적 자유를 발휘해 노예 상태라는 역경을 극복하라고 촉구했다.

 

11세기 성직자들은 '세 위계'라 불리게 되는 불평등한 신분제도를 공식화했다. 불평등한 신분 이데올로기를 만든 이와 같은 성직자들에 따르면 태초부터 인류는 기도하는 자들, 싸우는 자들, 경작하는 자들 이엏게 세 부류로 나누어져 있었고, 이러한 구분은 단순한 기능에 따른 분류를 넘어서 하나의 위계를 형성하고 신분 질서는 신이 만든 질서이기에 이에 반대하거나 저항하는 자들은 신의 뜻을 거스르는 대역죄인이 된다. 이렇게 만들어진 세 위계는 성직자와 기사 신분이 갖는 특권적 권리와 지위를 정당화하고, 평민의 절대 복종을 요구했다. 그러나 중세 성직자들과 신학자들이 만들어낸 세 위계는 교리의 가장 중요한 원천인 성서에 근거하지 않았다.

 

 

바야돌리드 논쟁

 

당시 유럽 기독교인들이 아메리카 원주민과 아프리카 흑인 노예를 자신들과 동등한 인간으로 생각하지 않았음은 분명하다. 18세기 미국을 건국한 초기 유럽 출신 백인들은 사이비 인류학을 이용해 아메리카 원주민과 아프리카인을 열등한 인간으로 취급했다.

 

 

멈추지 않는 마녀사냥

 

1486냔에 출간된 마녀를 심판하는 망치는, 1600년까지 28판을 찍을 정도로 당대의 베스트셀러로 성공했고, 16~17세기 마녀사냥을 위한 중요한 안내서 역할을 했다. 이 책이 성공할 수 있게 뒷받침해 준 큰 공로자는 교황이었다. 교황 인노켄티우스 8세는 책의 서문에서 저자들의 마녀사냥 활동을 방해하는 자들을 파문하겠다는 칙서를 내림으로서 이 책이 교회의 공식 입장과 교리임을 천명했다. 퀄른대학교 신학과 교수들의 승인서 역시 이 책의 권위를 높이는 데 일조했다.

 

하지만 이런 터무니없는 이야기를 믿고 무고한 이웃을 고발한 대중들이 없었다면 근대 초 마녀사냥 광풍은 불지 않았을 것이다. 대중들로 하여금 무고한 여성들을 마녀로 고발하게 만든 유혹 가운데 하나는 밀고의 대가로 받는 금전적 보상이었다. 하지만 마녀사냥의 책임을 그들에게만 전가하는 것은 옳지 않다. 그들은 만성적인 기근과 그로 인한 기어, 봉건 영주들의 착취, 전염병 등으로 고통받고 있었고, 이 모든 불행의 원인을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지식을 독점한 교회와 성직자 들의 설명을 믿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다름을 인정한다는 것

 

소수자와 소수 집단은 어떤 국가와 시대에서든 존재했다. 로마제국 초기에 기독교인들은 소수 집단이엇다. 로마인들은 기독교도들이 기괴하고 잔혹하며 반사회적인 의식을 벌인다고 비난햇다. 3세기 초의 한 기록은 기독교인들에 대한 로마인들의 악의적인 비방을 구체적으로 들려준다.

 

"기독교인들은 가장 천한 동물인 당나귀의 머리를 신성시하고 숭재한다. 신참자들의 입교 의식 이야기는 잘 알려진 것처럼 역겹기도 하다. 아무런 의심도 하지 않는 입교자들을 속이기 위해서 갓난아기를 반죽에 씨서 성스러운 의식에 임하는 사람의 옆에 놓는다. 새로 입교한 사람은 반죽 표면을 세게 내려치도록 부추겨진다. 죄 없는 행위로 보이지만 이렇게 해서 갓난아기는 살해되고 만다. 이런 잔학한 행위를! 그들은 그 피를 덥석받아 마시고 사지를 찢어발긴다."

 

이러한 황당한 이야기는 아마 포도주와 밀전병을 먹음으로서 예수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받아 마신다는 성찬식에 대한 오해에서 나왔을 것이다. 그리고 비밀리에 예배를 보고 공동 식사를 하며 서로를 형제, 자매라고 부르는 관행을 모여서 음란한 행위를 하는 것으로 오해하기도 했다.

 

 

역사를 위조하려는 자들

 

중세 유럽은 '위조의 시대'였다. 당시의 위조문서는 우리의 상상을 훌쩍 뛰어넘을 정도로 방대했다. 실제로 프랑스 고대 왕조인 메로베우수 시기에 작성된 문서의 반이 위조문서였다. 문서를 위조한 사람은 주로 성직자들이었고, 이들은 위조를 부끄럽게 생각하기는커녕 오히려 신의 뜻을 따랐기에 천국으로 갈 수 있다고 확신하기까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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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달지가 지향하는 부분

Realize 2023. 12. 10. 13:06

 

유용한 지식은 독점하지 않고 다 같이 공유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공유한 지식에서 새로운 발명이 생기고

 

그 계승과 축적의 사이클이 인류를 보다 좋은 발전으로 이룰 것이다-고

 

 

- 이세계 약국 6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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