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군 원전. 성지탈환의 이름 아래 행해진 '성전' 그 뒤에 숨겨진 로마교황의 속셈은?

Realize 2021. 7. 9. 23:13

 

 

배신과 음모의 세계사 P62

 

 

십자군 원정은 긍정적 측면도 부정적 측면도 있죠~

 

 

 

1096년 십자군 원전. 성지탈환의 이름 아래 행해진 '성전' 그 뒤에 숨겨진 로마교황의 속셈은?

 

기사도 정신의 뿌리인 십자군

 

 

유럽 기사도의 정신의 충성, 무용, 경건, 겸손, 약자보호를 이상으로 한다. 타인의 평가한다는 점에서 자긍심을 중시하는 동양의 무사도와는 구별된다. 이 기사도 정신은 중세 유럽에서 탄생한 것으로 그 계기가 된 것이 바로 십자군이다.

 

원래 십자군은 크리스트교를 믿는 유럽 제국이 이슬람교도에게서 성지 예루살렘을 탈환할 목적으로 행한 군사원정을 의미한다. 1096년 이슬람 국가인 셀주크투르크의 압박에 고통 받던 동로마(비잔틴) 제국이 로마교회에 지원을 요청하자, 당시의 로마교황 우르바노 2세는 서유럽의 제왕과 귀족에게 "셀주크투르크를 토벌하고 성지 예루살렘을 되찾으라"고 명령한다. 이것이 십자군의 시초였다고 전해진다.

 

십자군은 1097년에 투르크로 들어가서 이듬해에는 예루살렘의 북방 슬라 마을에 당도한다. 병력이 수십 만에 달했다고 하는데 이는 과장이고 실제 병력의 수는 2만명 정도였을 것으로 추측한다. 그래도 당시로써는 큰 세력이었을 것이다. 1099년 7월에 십자군은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이슬람교와 유대교 사원을 파괴한다. 또 이교도의 예루살렘 출입을 금지하고 예루살렘에 유럽 계열의 예루살렘 왕국을 수립한다. 이렇게 제1차 십자군 원정은 성공한다. 하지만 1187년 이슬람교도인 아이유브 왕조의 살라딘 왕이 예루살렘 왕국을 무너뜨린다.

 

크리스트교를 믿는 제국들은 그 후에도 성지 탈환을 포기하지 않는다. 1270년의 제7차 십자군에 이르기까지 계속해서 원정을 반복하지만 끝내 예루살렘은 탈환하는데는 성공하지 못한다.

 

 

성지 탈환은 명분에 지나지 않았다!

 

십자군은 결과적으로 실패했지만 성지탈환계획의 공로자라고 생각된다. 또 순례하러 온 신자들을 보호하고 후하게 대접했다는 일화를 통해서도 기사도 정신의 발상이라고 부르기에 적합하다는 인상을 받는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크리스트교의 측면에서 본 인상에 지나지 않는다. 침략을 당한 이슬람교도와 유대교 측면에서 보면 십자군은 약탈과 살육을 반복한 악인에 지나지 않았다.

 

십자군은 예루살렘을 점령한 후에 예수의 무덤인 성묘교회는 방문하지도 않고 서로 앞 다투어 약탈을 했다고 한다. 살인과 폭행을 서슴지 않아서 예루살렘의 솔로몬 궁전은 이슬람교도의 피로 낭자했다고 한다.

 

도대체 왜 성지탈환을 목적으로 삼았던 십자군이 일개 침략자와 약탈자로 전락한 것일까. 그것은 애초에 성지탈환이라는 십자군 원정의 목적이 명분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게르만인 대이동 이후 4~6세기 무렵 유럽에서는 전쟁과 수탈이 계속됐다. 크리스트교도끼리 서로 살육을 일삼았고 평화로운 삶은 상실된지 오래였다.

 

그래서 로마교황은 동로마제국으로부터 구조요청을 받고 그들에게 새로운 적을 만들어주어야겠다고 생각한다. 투쟁심을 유럽 밖으로 돌림으로써 유럽 내부의 평화를 지키고자 한 것이다. 다시 말해 십자군은 국내에서 폭력을 행사하던 자들의 욕구를 외부로 분출시키기 위해서 로마교황이 꾸민 음모였다.

 

실제로 십자군에 참가한 사람 중에는 동방에서 새로운 판로를 열어 권력을 손에 넣고자 하는 야심가와 가난한 농민들이 많았다. 그들에게는 종교적 동기는 없았다. 약탈과 살육을 저지르면서도 죄책감을 느끼지 않았다. 무엇보다 성지탈환이라는 대의명분이 있었기 때문이다.

 

서양 역사가 중에는 지금도 십자군을 정의로운 전투였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지만, 그 정의의 이름 아래 수많은 이교도가 살해됐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COLUMN 음모의 뒷이야기

 

크리스트교도까지 표적으로 삼았던 십자군

 

13세기 전반부터 약 20년에 걸쳐 알비주아 십자군이 파견됐다. 그들이 향한 곳은 남프랑스였다. 성지탈환을 목적으로 하는 십자군이 왜 남프랑스로 향했는가. 그들의 표적은 남프랑스에 새롭게 탄생한 발도파와 카타리파라고 하는 같은 크리스트교도들이었다. 발도파는 청빈과 성서주의를 중시하는 교파였으며, 카타리파도 마찬가지로 청빈을 중시하는 교파였다. 탐욕스런 고위 성직자들의 눈에 청빈을 추구하는 그들의 모습이 좋게 보일 리가 없었다. 게다가 가톨릭 교회에 속하는 것도 거부했기에 그들을 공격한 것이었다. 십자군의 남프랑스 원정으로 수십만 명의 발도파와 카타리파 농민이 이단으로 살해됐다고 전해진다.

 

 

그 후의 세계사......

 

유럽에서 십자군 원정은 3대 순례지의 형성을 의미한다. 총본산인 로마 바티칸, 성 야곱의 무덤이 있다고 전해지는 이베리아 반도의 산띠아고 데 꼼뽀스뗄라 그리고 예루살렘이다. 상업 르네상스와 화폐경제의 진보를 배경으로 사회경제가 발전함에 따라서 3대 순례지를 방문하는 서민 여행객도 계속해서 증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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