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이 총애/사랑했던 더들리 백작 부자

Realize 2020. 10. 15. 22:40

 

여왕의 시대 p221, p243

에 있는 내용으로 예전에 올린 책의 내용을 보고 이걸 추가로 보면 재밋습니다~

 

로버트 더들리는 존디의 삼촌으로 알려져 있다고 했죠?

 

 

 

여기서 등장하는 로버트 더들리 백작의 양자 에섹스는 요 링크의 에식스입니다.

 

에섹스 = 에식스

 

 

 

 

가련했던 사랑

 

엘리자베스 여왕이 평생 결혼을 하지 않았다고 해서 사랑하는 사람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사실상 그녀에게는 평생토록 구혼자가 줄을 이었다. 의회는 '결혼을 하지 않겠다'는 여왕의 말을 진심으로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여왕은 실제로도 언행일치를 하기 위해 무던히 노력했다. 그 결과 가련한 구혼자들은 엘리자베스의 정치적 도구로 이용만 당한 채 버려졌다.

 

하지만 여왕도 젊은 여인의 몸이었다. 비록 과거의 어두운 그림자가 지워지지는 않았지만 남자에 대한 관심이 자연스럽게 생겨났다. 여느 젊은 여인들처럼 사랑과 결혼을 꿈꿨던 엘리자베스에게 꿈처럼 다가왔던 남자가 있었으니, 바로 로버트 더들리 백작이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그는 이미 결혼한 몸이었고, 엎친데 덮친 격으로 1560년 9월의 어느 날에 더들리의 부인이 계단에서 떨어져 죽고 말았다.

 

이 사건은 세인들의 의혹을 증폭시켰고 질책의 화살로 바로 엘리자베스 여왕과 더들리 백작에게로 향했다. 사람들은 여왕이 더들리와 결혼하기 위해서 꾸며낸 계략이라고 쑥덕거렸다. 이 사건으로 여왕은 엄청난 곤경에 빠지게 되었다. 만약 엘리자베스가 실제로 그와 결혼한다면 사람들의 의혹을 증명해주는 꼴이 될 터였다. 물론 법정에서는 떠도는 소문처럼 그렇게 간단히 여왕을 살해 모략자로 몰지는 않겠지만, 무엇보다 유언비어 자체가 법원의 판결보다 더 지독한 것이었다.

 

하물며 이제 갓 왕위에 오른 젊은 여왕은 지지기반이 그다지 견고하지 않았다. 더들리와의 결혼은 왕위와 맞바꾸는 모험이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결혼을 포기하면 사랑을 잃게 되는 셈이니 사랑에 "빠진 젊은 여인에게는 참으로 가혹한 운명이 아닐 수 없었다.

 

엘리자베스 여왕은 결국 '이성'의 길을 선택했다. 더들리와의 결혼을 완전히 포기함으로써 후에 나타날지 모를 우환을 제거한 것이었다. 사실 더들리 백작은 매력적인 남자 그 이상이었다. 그는 당시 영국 주요 정당의 지도자로서 반대당의 당수인 윌리엄 세실과 종교문제를 놓고 치열한 신경전을 벌이고 있었다. 더들리 백작의 반대파는 연일 그를 비판하는 글을 써댔고 당시 정계는 숨 막히는 긴장감이 돌고 있었다. 이때 만약 여왕이 고집을 부려 더딜리와 결혼을 하게 된다면, 위협을 느낀 반대파 무리가 정변을 일으킬 수도 있었다.

 

당시 엘리자베스 왕권은 그다지 공고히 다져진 상태가 아니었다. 아버지 헨리 8세는 어머니 앤을 죽인 뒤, 스스로 그녀와의 결혼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선언한 바 있었다. 게다가 신교를 믿었던 탓에 로마교황청과는 아예 등을 돌린 상태였다. 이에 교황청에서는 헨리 8세와 앤 볼린의 결혼을 인정해주지 않았다. 그러므로 천주교도의 입장에서는 그들의 결혼이 불법이었을 뿐 아니라 엘리자베스는 그저 사생아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니 원칙대로 따진다면 스코틀랜드의 여왕 즉, 엘리자베스 여왕의 사촌누이이자 헨리 7세의 외손녀인 메리 스튜어트도 튜더 왕조의 피를 물려받은 인물로 왕위계승의 적법한 후보가 되는 셈이었다.

 

메리 스튜어트는 천주교도인데다 스페인의 지지를 한 몸에 받고 있었다. 메리 여왕 역시 엘리자베스의 등극 초기부터 반발 움직임을 내비쳐 엘리자베스와 반목하였다. 엘리자베스를 전복시키고자 하는 음모가 메리를 중심으로 끊임없이 획책되었으나 스코틀랜드 신교도들에 의해 메리의 아들인 제임스가 왕위에 오르고 메리가 잉글랜드로 피신하는 신세가 되면서 그 위협은 어느 정도 사그러들었다. 그러나 엘리자베스 여왕은 스코틀랜드의 이 골칫거리를 장장 19년 동안 유폐시켰고, 나중에는 결국 반란음모가 발각되는 바람에 할 수 없이 사형에 처하고 말았다. 튜더가의 비극이 다시 재연되는 순간이었다.

 

엘리자베스의 왕위계승은 이처럼 순탄하지 않았으나 지혜롭고 담대했던 여왕은 온갖 위기를 이기도 강한 군주, 강한 영국의 초석을 놓았다.

 

 

 

광대한 제국, 처량한 말년

 

대영제국이 화려한 영광의 시대로 접어들 무렵, 여왕은 이미 노년에 접어들고 있었다. 인간은 결국 세월을 이기지 못하는 법, 엘리자베스가 그토록 총애했던 더들리 백작, 프랜시스 윌리엄 등은 하나둘씩 그녀의 곁을 떠나갔다. 한때 사람들로 북적였던 궁궐에는 노쇠한 윌리엄 세실, 즉 벌리 남작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도 곧 정사에 참여하지 않게 되면서 여왕에게서 멀어졌다.

 

오래된 측근들이 떠나간 후, 여왕은 젊은 남성들을 곁에 들이기 시작했다. 그녀는 벌리 남작의 차남이었던 로버트 세실, 미주 식민사업의 개척자였던 롤리 경, 더들리의 양자였던 에섹스(Essex) 백작 등 몇몇 젊은이들을 마음에 들어 했다. 제국은 이미 안정기에 접어든 터라 엘리자베스 여왕은 갈수록 성적인 쾌락에 빠져들었다. 그녀는 젊은 청년들의 매력에 매료되었고 그중 에섹스 백작을 가장 총애했다.

 

하지만 이 에섹스 백작이 영국 역사에 길이 남을 대사건을 일으킨 후, 우울증에 빠진 여왕은 결국 세상을 등지고 말았다. 에섹스 백작은 과거 여왕과 연인관계였던 아버지를 핑계로 엘리자베스에게 접근했다. 그는 뛰어난 재능에 호탕한 웃음을 지닌 쾌활한 젊은이로 단숨에 여왕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그리하여 곧 그는 여왕의 침궁을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권리를 얻게 되었다.

 

1596년 카디즈항을 정복하는데 성공한 에섹스 백작은 점차 오만방자한 사람으로 변해갔다. 원래 침착하고 겸손했던 백작의 모습은 오간데 없이 안하무인의 난봉꾼으로 돌변한 것이다. 그는 의회에서든 사적인 자리에서든 심지어 여왕의 앞에서도 불경한 말을 늘어놓기 일쑤였다. 하지만 이것이 다가 아니었다. 비록 에섹스의 오만방자함은 눈감아줄 수 있다 하더라도 점점 커져가는 그의 야심은 여왕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었ㄷ.

 

결국 여왕은 에섹스를 멀리하고 로버트 세실을 중용했다. 그러자 에섻는 이대로 모든 것이 끝나버릴까 불안해졌다. 그는 만약 다시 한번 카디즈항에서와 같은 승리를 얻어낸다면 여왕에게 누가 더 탁월한 인재인지를 증명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당시 엘리자베스 여왕은 아일랜드 문제로 골머리를 썩이고 있었다. 이에 에섹스는 자신이 아일랜드를 정벌하겠노라 자청하며 큰소리를 쳤다. 여왕은 그를 영국군 총사령관으로 임명하고 대규모의 군사를 파견했다. 하지만 빈 수레가 요란한 법. 첫 번째 교전에서 대패한 에섹스는 자신의 부대를 적진에 내팽개친 채 혼자서 런던으로 도망쳐왔다. 충동적이고 나약하기 그지없던 에섹스는 런던에 돌아온 직후, 곧바로 여왕의 침궁으로 뛰어 들어갔다. 비록 여왕과 은밀한 쾌락을 즐기는 사이라고 하더라도 이토록 무례한 궁궐 난입은 여왕의 존엄성을 짓밟는 결코 용서받을 수 없는 행위였다.

 

하지만 에섹스 역시 자신이 목격한 광경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잠옷을 걸친 채 침대에 걸터앉은 여왕은 너무나 초라한 모습이었다. 미처 화장으로 가리지 못한 주름진 피부는 무척이나 창백했고 머리느 온통 백발로 뒤덮여 있었다. 막 잠에서 깨어난 연인의 두 눈은 움푹 패여 있었다. 이 모든 것이 에섹스에게는 충격이었다. 이후 그의 어머니에게 이 이야기를 전했고 그녀는 대경실색했다. "여왕도 여자일진데, 어찌 그런 모습을 보고도 용서받을 수 있겠느냐. 정말 큰일이구나!"

 

하지만 여왕은 항상 제멋대로인 젊은 연인에게 아무런 질책도 하지 않은 채 그가 변명을 늘어놓는 모습을 그저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렇게 에섹스는 화를 면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결국 여왕의 반역음모에 가담하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고 말았다. 물론 수많은 암살과 정변의 위기를 넘겨온 여왕은 이 우스꽝스러운 반란을 순식간에 평정해냈다. 1601년, 길고도 고통스러운 시간 끝에 엘리자베스 여왕은 마침내 에섹스의 사형판결문에 서명을 했다.

 

그러나 이후, 여왕의 성정은 매우 포악하게 변해버렸다. 여왕의 시종들, 궁궐 대신 그리고 백성들은 거칠게 변해버린 여왕 때문에 가슴을 졸이며 살아야 했다. 또 연이어 발발한 정벌전쟁에 영국 사회는 긴장 국면으로 돌입했다. 제국은 점점 확장되었지만 실제로 사람들에게 돌아오는 이득은 거의 없었다. 삶은 여전히 곤궁하기만 했다. 결국 영국 국민들은 여왕에 대해 불만을 가지기 시작했다.

 

1601년, 의회는 여왕이 특허권(전매권)을 남발하는 문제에 대해 이의를 제기했다. 여왕은 대영제국 확장에 군사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일부 상인들과 제조업자들에게 특정상품의 독점 제조 및 판매를 허락하는 권리를 제공했다. 이로써 세금을 대납할 수 있도록 한 것이었다. 하지만 상인들은 이 특허권을 이용해 시장을 독점하기 시작했고, 상품가격은 대폭으로 상승했다. 사회는 국민들의 불만으로 들끓기 시작했다.

 

의회와 여왕은 심각한 의견충돌을 보였다. 하지만 분노를 가라앉힌 여왕은 곧바로 냉정을 되찾았고 결국 자신의 실책을 인정하게 되었다. 엘리자베스는 생애의 마지막 순간에 스스로의 잘못을 바로잡았다. 그녀는 의회에서 제시한 각종 구제정책과 전매권 폐지조항에 동의했다. 그리고 1603년 3월 24일, 여명이 밝아올 무렵에 엘리자베스 여왕은 70세의 나이로 세상과 작별을 고했다. 영국 역사에서 가장 극적인 무대를 연출했던 여왕의 퇴장은 의외로 쓸쓸하게 이루어졌다. 그러나 여왕의 사후, 엘리자베스 1세는 대영제국의 번성기를 마련한 영웅으로 평가받고 있으며 '엘리자베스 1세의 시대'는 영국 역사상 가장 강성한 시대로 후세인에게 각인되었다.

 

 

설정

트랙백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