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그게 왜 그렇게 되냐!?'

"로제마인, 대답은 어떻더냐? 졸업식 에스코트를 누구에게 맡긴다더냐?"
"졸업식 에스코트는 친족에게 부탁하겠답니다."
"다른 자들이 받아온 대답과 똑같지 않으냐. 쓸모없는 녀석."
내 대답에 아나스타지우스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이렇게나 나를 기다리게 한 결과가 그 대답이냐."
라며 회색 눈동자로 째려보았다.
하지만 그것 외에 해줄 대답이 없었다.
"아나스타지우스 왕자님께 도움이 되지 못해 죄송합니다.
하지만 에그란티느 님이 어느 쪽도 선택할 수 없다고 하신 건 사실이에요."
그럼 전 이만......하고 얘기를 마무리 지으려고 했다.
그때 아나스타지우스가 손을 쓱 들어서 나를 제지했다.
"잠깐, 로제마인. 어느 쪽도 고를 수 없다는 게 무슨 말이냐?
에그란티느에게 형님도 아니고, 나도 아닌 다른 사람이 있다는 말이야?"
'그게 왜 그렇게 되냐!?'
(중략)
"에그란티느 님은 연인을 만들 상황이 아니세요.
그건 아나스타지우스 왕자님도 잘 아시죠?"
(중략)
"넌 뭘 알고 있지? 에그란티느에게 무슨 말을 들었냐."
"아나스타지우스 왕자님이라면 알고 계실 거라고 생각하는데요......"
"알든 모르든 그건 내가 판단한다. 말해."
(중략)
"에그란티느 님은 전 왕녀님이셨는데 정변 때 가족들을 잃으셨죠?"
"그렇다."
"그래서 고르고 싶지 않다고 하셨습니다.
왕이나 아우브 클라센부르크가 명령을 내린다면 따르겠지만,
자신은 어느 쪽도 선택하고 싶지 않다고요.
에그란티느 님께서 권력 싸움의 불씨가 되기를 기피하시는 것 정도는 다들 알고 있으시죠?"
내가 머뭇거리며 반응을 살피자, 아나스타지우스는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에그란티느는 왕족으로 돌아가고 싶은 것 아니었었나? 나는 그렇게 들었다만......"
아나스타지우스의 입에서 예상외의 말이 튀어나왔다. 나도 깜짝 놀라 눈을 깜박였다.
"에그란티느 님을 왕족으로 돌려 보내고 싶은 건 에그란티느 님을 양녀로 들여서 왕족의 지위를 뺏어 버렸다며
후회하시는 할아버님이라고 저는 들었는데요."
내가 그렇게 말하자, 아나스타지우스는 "선대인가."라며 중얼거리고, 천천히 숨을 내뱉었다.
"......그럼 에그란티느 자신은 왕족이 되길 원하더냐?"
"제가 듣기로는 그분은 평온을 바라고 계세요."
번거롭게 돌려 말하는 귀족의 방식 때문인지,
이렇게 중간에 사람을 끼고 의견을 물어서 그런 지,
고작 두 번 만난 내가 아는 사실을 그는 몰랐다.
여기서 이미 에그란티느와 아나스타지우스의 인식이 어긋나 있다.
"이건 제 혼잣말이니까 어린애의 헛소리라고 흘려 넘겨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에스코트 운운하기 전에 먼저 왕자님과 에그란티느 님이
서로 바라는 것을 직접 마주 보고 얘기를 나눠보시면 어떤가요?
제 눈에는 서로의 마음과 생각이 전혀 통하지 않은 것처럼 보입니다."
"통하지 않은 것 같다니 무슨 뜻이냐?"
울컥한 아나스타지우스가 인상을 찌푸렸지만,
지금 이 상태를 보고도 통한다고 생각하는 쪽이 오히려 이상하다.
"에그란티느 님은 두 왕자님이 구혼한 이유가 왕위에 오르기 위해서라고 하셨어요."
"아니야. 나는 에그란티느를......"
"그 뒷말은 제가 아니라 에그란티느 님께 직접 전달하십시오."
이렇게 몸이 안 좋은 상태로 남의 사랑 얘기 따위 듣고 싶지 않다.
오히려 어서 돌아가고 싶다.
"아나스타지우스 왕자님의 마음이 권력 싸움이라는 벽에 막혀서 상대방에게 오해를 사고 있어요.
직접 에그란티느 님의 생각을 들어보는 단계부터 시작하심이 어떠신가요?"
무슨 말을 해도 상대방에겐 왕좌를 얻기 위해서로 보인다는 사실이 충격이었는지
아나스타지우스의 어깨가 축 늘어졌다.
그 모습에
'이렇게나 서로 엇갈리는 에그란티느의 행복을 빌어주고, 그냥 얼른 포기하시지?'
라는 말은 할 수 없었다.
"에그란티느 님은 권력 다툼에서 벗어나 왕족과 결혼하지 않을 방법을 찾고 게세요.
아우브 클라센부르크가 될 걸 그랬다는 말도 하셨는데 아우브가 되면 정말 왕족과 결혼하지 않아도 돼요?"
"......적어도 다른 영지에 시집을 가지는 못하지.
솔직히 여성이 아우브가 되는 경우는 드물지만, 그런 경우에는 데릴사위를 들이게 된다."
"에그란티느 님의 마음을 잡을지, 왕위를 잡을지, 제게 반짝이는 묘안이 있을지 전혀 모르겠지만,
앞으로 선택해서 노력할 분은 아나스타지우스 왕자님이세요."
(중략)
"지금 에그란티느 님의 지위로는 어려울지도 모르겠지만,
저는 에그란티느 님이 조금이라도 마음 편하고, 평화로운 삶을 보내셨으면 좋겠어요."
아나스타지우스는 "나도 같은 마음이다."라고 중얼거렸다. 그때 뭔가가 생각났는지 입꼬리를 씩 올렸다.
"로제마인, 예상외로 좋은 정보였다."
(중략)
'그럼 나도 그 귀한 조언을 그냥 버릴 수야 없지.'
한 번 숨을 내쉰 나는 도청방지 마술구를 꺼냈다. 에그란티느에게 건네자,
에그란티느가 살짝 불안한 눈빛으로 시종을 힐끔 보았다.
"측근을 물리는 것보다는 낫겠지?"
둘만 남는 것보다는, 하고 에그란티느가 고개를 끄덕이며 도청방지 마술구를 손에 들었다.
그녀는 나와 둘만 남는 상황을 경계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지만, 매번 가슴이 아픈 건 어쩔 수 없었다.
마술구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로제마인과 얘기를 했는데...... 그대가 어느 쪽도 고를 수 없다고 했다고 들었다."
"......그날은 제가 말이 조금 많았나 봅니다. 로제마인 님이 너무 귀여우셔서일까요? 못 들은 것으로 해주셔요."
(중략)
"나는 선대 아우브가 아닌, 에그란티느, 그대의 희망을 이뤄주고 싶다.
그것을 알려준 사람이 로제마인이라는 게 조금 짜증나지만,
앞으로는 누구를 통하지 않고, 직접 그대의 소망을 듣고 싶은 바이다.
그리고 나의 소망도 그대가 알아줬으면 좋겠다.
그대가 왕족의 지위를 원하지 않듯이 나 역시 딱히 차기 왕이 되고 싶은 것이 아니야.
형님이 되고 싶다면 형님이 되면 돼."
(중략)
"내가 바라는 건 그대 뿐이다. 나를 선택해다오.
형님이 아니라, 그 누구도 아니라, 나의 빛의 여신이 되어 다오.
물론 이건 명령이 아니야. 그저 나의 소망이다."
낙담과 함께 손에서 힘이 빠진 순간, 에그란티느가
"......너무 솔직한 말씀에 깜짝 놀랐습니다."
라며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역시 너무 솔직했나? 사실 로제마인이 그러더군.
권력 싸움이라는 벽에 막혀 진심이 오해가 된다고.
누군가를 통해서 말하면 절대 진심이 전해지지 않을 거라고."
"로제마인 님께서요?"
(중략)
나는 부드러워진 에그란티느의 미소를 보고, 손을 뻗었다.
지금이라면 받아들여줄 것 같았다.
"에그란티느, 다음에는 정자에서 얘기해보지 않겠나?
그대의 소원을 이루려면 아우브 클라센부르크와 선대를 설득해야 하지 않을까?"
"할아버님을 설득하기는 쉽지 않을 거예요."
명확한 대답은 아니었지만, 연인이 함께 시간을 보내는 정자에서의 만남을 거부하지 않은 건 처음이다.
나는 무적이 된 느낌이었다.
에그란티느에게 내 마음을 솔직하게 고백하는 것에 비하면 귀족을 대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아우브나 선대와의 협상 따위 별것도 아니다.
- 책벌레의 하극상 4부 2권 -
그리고 외모 뿐만 아니라 저번에 호출했을 때와 어딘가 달랐다.
초조하고 심란해 보이던 느낌이 싹 사라지고,
침착하고 듬직해졌다고 할까, 자신감이 넘쳐 보였다.
온화한 분위기마저 풍겨서 마치 얼굴이 같은 다른 사람으로 착각할 정도다.
"제가 없는 동안 무슨 일 있으셨어요?"
"무슨 일이라니?"
"아니, 왠지 분위기가 사뭇 달라 보여서 에그란티느 님과 관계에 변화가 있었나 싶어서요."
"뭐야. 궁금하냐? 생긴 건 어리면서 연애 얘기를 무척 좋아하는군.
......흠. 네가 알려준 정보 덕분에 상태가 급속도로 진전되었으니 살짝 알려줄 수는 있지."
'엄청 길어질 것 같으니까 됐어요.'
"너와 이야기한 뒤, 에그란티느와 둘이서 얘기를 했지.
네 충고를 받아들여서 얼굴을 마주 보고 에그란티느의 소망과 나의 소망을 확인했다."
"아직 발표하지 않았으니 자세한 얘기는 할 수 없지만, 에그란티느가 기뻐하는 얼굴을 보았지.
처음 본 그녀의 미소는 마치 빛의 여신으로 착각할 만큼 아름다웠어."
그렇게 말하는 아나스타지우스가 환하게 웃었다.
처음 보는 그 부드러운 미소에서 에그란티느를 향한 애정이 온몸에서 뿜어져 나왔다.
솔직히 닭살이 일었다.
더는 남의 사랑 얘기를 듣고 싶지 않았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노력한 보람이 있었고,
아나스타지우스 왕자님이 에그란티느 님의 에스코트 자리를 훌륭하게 거머쥐었다는 거죠?"
"그래. 선대 아우브 클라센부르크를 설득하는 것이 가장 힘들었다.
정말 에그란티느와 몇 번을 찾아갔는지......
아, 미안하군. 자세한 얘기는 금지다."
'이미 듣고 싶지 않아요.'
(중략)
"졸업식 때 제가 아나스타지우스 왕자의 에스코트를 받게 된 건 로제마인 님 덕분이에요."
"아나스타지우스 왕자님의 노력이 대단했다고 들었어요."
"......그건 그렇겠지요. 아나스타지우스 왕자님은 정말 노력해 주셨어요.
왕과 지기스발트 왕자님, 그리고 할아버님을 몇 번이나 찾아뵙고 설득해 주셨어요.
천 번의 달콤한 말보다 그 모습이 제 마음을 사로잡았어요."
'도청방지 마술구를 써서까지 자랑인가요.'
"로제마인 님은 정말 에렌페스트의 성녀세요. 제가 구원받은 기분입니다."
(중략)
흥얼거리며 영상을 보고 있으니 에그란티느와 함께 아나스타지우스가 등장했다.
진지하게 연습했는지, 춤추는 모양새가 제법 그럴싸 했다.
'오오, 아나스타지우스 왕자님의 춤 실력이 늘었어.'
부부신인데 어울리지 않으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다행히 어울려 보여서 정말 기뻤다.
춤을 추면서도 시선을 교환하며 살짝 미소 짓는 두 사람의 행복한 모습을 보고 있자니
나까지 기뻐서 축복해 주고 싶어졌다.
'두 사람의 행복을 축복할게요. 저 행복한 미소가 평생 함께하기를.'
동시에 반지에서 축복의 빛이 뿜어져 나오더니 어딘가로 날아갔다.
- 책벌레의 하극상 4부 3권 -

책벌레의 하극상에서
연애 이야기하면 단연 아나스타지우스와 에그란티느죠~
이 둘의 이야기는 달빛지기를 무수히 감동시켰어요!
몇 년에 걸쳐 몇 번을 다시 봐도 그 감동이 사라지지 않네요.
(못해도 10번은 완결까지 정주행한듯.......)
애달픈 이야기는
결혼&이별의 여신들의 가호를 받은 에렌페스트의 하급기사 다무엘이고요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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