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스 아퀴나스의 철학과 신앙 by 3천년 기독교 역사2

Realize 2021. 11. 24. 23:37

3천년 기독교 역사2 : 중세 종교개혁사 p124

크리스찬이든 크리스찬 위칸이든

이 책 시리즈 3권은 필히 읽어봐야 함~ㅋㅋㅋ

3. 토마스 아퀴나스 : 철학과 신앙

요아킴이 예언했고 수많은 사람들이 예상했던 것처럼 1260년은 세상의 종말이 아니었다. 13세기 중반은 클뤼니의 개혁과 함께 시작했던 시대의 절정이었다. 사람들은 도미니크회 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의 경력이 절정에 이르는 것을 지켜보았기 때문이다. 그레고리우스가 11세기 교회의 가장 결정적인 인물이었고, 클레르보의 베르나르가 12세기의 가장 위대한 설교자였다면, 13세기에 아퀴나스의 사상체계인 토마스주의가 중세 서방 신학의 결정적 순간을 대표한다. 그는 남부 이탈리아 아퀴노 출신의 귀족 아들이었지만 그의 경력은 당대의 국제적 특성을 보여준다. 당시에는 라틴어를 알면 스톡홀름부터 세비야까지 사회에서 중요한 인물들과 충분히 교류할 수 있었다. 도미니크회에 가입한 후, 그는 이탈리아뿐만 아니라 파리의 쾰른에서 계속 공부하며 사역했다. 아퀴나스의 방대한 저작은 아리스토텔레스(아퀴나스에게 그는 간단하게 '그 철학자'였다)에 대한 서유럽 열정의 정점을 표시하며 그는 당시에 알려진 아리스토텔레스의 모든 저작을 라틴어로 번역하는 작업에 힘을 불어 넣었다. 특히 13세기 후반에 신학자들의 많은 반대와 의혹에 시달린 후 아퀴나스 저서는 아리스토텔레스 사상이 기독교 신앙에 끼칠 부정적 영향에 대한 교회의 두려움에 종지부를 찍었다.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체계와 합리적 분석이 신앙의 중심을 부정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의 진리를 드러내며 심지어 증명해준다고 확신했다. 범주와 형상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논의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인간의 본성(이것은 합리적 영혼 속에 자신의 형상을 갖고 있으며, 자연스럽게 이성과 함께 작동하는 경향이 있다)을 보여주었다. 우리의 이성에 반하는 어떤 것도 제시되어선 안된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진리에 이르는 길이다. 그리고 그것은 지적으로 용납할 수 있는 결론 형성을 위해 주장과 반-주장 속에서 전투적으로 사용되어야 한다. 이것은 아퀴나스보다 100년 먼저 시작된 스콜라주의의 대단히 논쟁적인 방법이었다. 아퀴나스가 아리스토텔레스를 매우 유용하다고 생각했던 이유는 합리적인 주장을 통해 신앙에 접근하는 과정 때문이었다. 특히 최근에 번역된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과 형이상학에 대한 저작들이 그러했다. 창조된 모든 것은 자신의 존재 원인을 갖고 있음에 틀림없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에 기초하여, 아퀴나스는 묘사될 수 있는 모든 것이 인과론의 고리 속에서 만물의 제1원인인 하나님에게까지 연결된다는 체계를 구성할 수 있었다. 이 하나님이 바로 "부동의 동자"이며, 플라톤의 완벽하면서 감정의 동요가 없는 하나님이다. 따라서 아퀴나스가 아리스토텔레스를 좋아해서 플라톤을 버렸다고 주장하는 것은 지나친 단순화임에 틀림없다. 그는 자신의 체계를 구성하기 위해 자신이 사용할 수 있는 일체의 지적 자원들을 활용했다. 이것은 그의 위대한 저작인 신학대전에서 가장 충분하게 드러난다.

신학대전은 하나님의 존재와 본질에 대한 가장 추상적인 질문들을 다룬다. 하지만 그것은 또한 일상생활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그리고 하나님의 목적의 일부로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같은 매우 실천적인 문제들도 논의한다. 결론을 향해 달려가는 질문과 분류를 통해, 이 책으느 하나님의 지상과 천상의 창조에 대해 균형잡힌 견해를 보여준다. 이런 구조 속에서 그레고리우스 7세의 후계자들은 자신들을 하나님 체계의 지상적 절정으로 간주할 수 있었다. 신학대전 서두에서 그는 오래 전에 아레오파고스의 디오니시우스가 내린 결론, 그리고 비잔티움 신학자들 사이에서 훨씬 더 익숙했던 결론으로 독자들을 이끈다. "우리는 하나님을 언급하기 위해 어떤 단어도 사용할 수 없을 것 같다." 이런 주장은 표준영어판의 경우 분량이 61권이나 되고, 1274년에 아퀴나스가 사망할 당시에 여전히 미완성이었던 저작에 있어서 매우 낯설어 보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스콜라 신학자들 중에서 가장 위대한 이 사람이 깨달은 것은 하나님에 대한 모든 언어는 곁눈질, 비유, 은유를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아퀴나스의 진리판단은 개연성에 대한, 주장들의 균형에 대한 요약으로 표현된다. 그래서 확실성을 위해 그의 위대한 저작을 찾는 사람들이 가끔씩 이 부분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다. 구체적인 것과 말없음 사이에서 아퀴나스의 균형은 그의 신학대전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친 그의 저작, 즉 그의 위대한 성찬식 찬송인 "팡에 링구아"(찬양하라 나의 입술아, 영화로운 몸과 고귀한 피의 신비를)에서 가장 탁월하게 드러난다. 그는 1264년에 교황 우르바노 4세의 요구에 의해 성체성혈대축일이라는 새로운 축일을 위해 이 글을 썼다. 수 세기 동안 가톨릭 신자들은 서방의 라틴 예전에서 가장 극적인 한 순간에 팡에 링구아의 마지막 두 구절을 경험해 왔다. 즉 1215년 제4차 라테란공의회의 조금 늦었지만 궁극적 표현인 성례전의 축도 말이다. 이런 성찬식 신앙이 서방의 라틴전통에서는 낯선 것이다. 그것은 성체성혈대축일로부터 발전했으며, 중세 서방인들의 눈에 유일한 단점으로 비친 것은 겨우 1년에 한 번밖에 경험할 수 없었다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그 이후 교회에서는 '성체(성찬식의 빵) 비축'이란 관습이 생겨났다. 즉 미사에서 축성된 성체 일부를 예배 후에 따로 비축하여 교회에서 안전한 장소에 보관해 두었다. 그 장소는 교회에서 가장 멋진 장식과 덮개로 가치를 높였다. 곧 그렇게 비축된 빵은 일반적인 용어로 간단히 "성체"로 알려지게 되었다. 흔히 성체보관함이라고 불리는 이 함은 예배자들이 자신들의 경배를 위한 초점으로 사용할 수 있고 성직자들이 신자들을 경건한 기도로 인도하기 위해 이 보관함 앞에 사람들을 모으는 것이 인기 있는 관습이 되었다.

아퀴나스의 사후 300년 이상 동안 성체가 단지 이런 식으로 보존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성체는 예배에서 강복으로 알려진 핵심적이고 중심적인 요소가 되었다. 가장 정교한 형태의 축도에서 사제나 부제가 화려한 예복을 입고 성체보관함에서 축성된 성체를 가져와서 자신 앞에 있는 예배자들을 축복하기 위해 사용한다. 제단으로부터 천천히 그리고 경건하게 들어 올리면서, (일반적으로 집례자의 손은 그 용기와 직접적인 접촉을 피하기 위해 베일로 가려져 있는데) 성체는 십자가를 그리며 이동되고, 이를 통해 영적 상징이 물리적으로 드러난다. 강복만큼 그리스도의 실재적 현존이란 서방 교리를 강력하게 구체화하는 것은 없다. 사제가 하나님의 축복을 이런 식으로 모으기 위해 준비할 때, 참석한 사람들은 아퀴나스의 팡에 링구아의 절정 부분인 "탕굼 에르고"를 부른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분 앞에 엎드려 이 위대한 성체를 경배합니다. 형태와 그림자는 끝이 있지요. 그래서 더 새로운 것이 지금 여기에 있습니다. 믿음, 친근함에 대한 우리의 외적 감각이 우리의 내적 비전을 분명하게 합니다. 성부와 성자와 영광과 축복을 드립시다. 명예, 전능, 그리고 찬양을 영원토록. 두 분이면서 한 분이신 두 분의 사랑을 고백하면서.

"믿음, 친근함에 대한 우리의 외적 감각이 우리의 내적 비전을 분명하게 합니다." 어떤 말로도 하나님을 묘사할 수 없다는 신학대전이 제기한 문제의 해법입니다. 강복이 끝나고 절정의 순간이 지나면 사제는 아퀴나스가 지은 다음의 기도로 자신의 무리를 이끈다.

오, 위대한 성찬식을 통해 우리에게 당신의 수난을 기억하게 하신 하나님, 당신께 간구하오니, 당신의 몸과 피의 거룩한 신비를 우리가 진심으로 경배하게 하사, 우리 몸 안에 당신의 구속의 열매를 영원토록 지니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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