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메소포타미아의 물 해결책 by 음식의 제국
음식의 제국 p175
메소포타미아의 물 해결책
6000년 전 이라크는 초강대국이었다. 그들은 다른 나라에 원정군을 보내어 천연자원을 강탈하고 불평등 교역 조약을 체결했다. 그 힘은 농업에서 나왔다. 농업은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이라는 핵심 전략 자산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기원전 3500년경에 수메르 사람들은 이 두 강가의 진흙밭에 도랑과 배수로를 팠다. 수자원 관리의 빽빽한 그물망을 만든 것이다. 이것이 습지를 경작지로 바꾸었다. 수메르는 세계 최초로 잉여 농산물을 안정적으로 확보한 문명중 하나였다.(다른 하나의 문명은 중국이었다)
보리(와 이 보리를 부로 바꾼 거미줄 같은 도로와 항로, 교역 관계)가 우루크(이라크에 있는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도시)의 성벽을 건설하고 <길가메시 서사시>(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바빌로니아의 서사시로 그리스의 오디세이아에 비견할 만하다)를 지었다. 수메르인들은 결국 환경을 파괴하고, 일꾼들을 소흘히 대하고, 경계를 지나치게 달구고, 불안한 국가를 지탱하기 위하여 군대를 혹사하게 된다. 그러나 시작은 좋았다. 그들은 '비옥한 초승달 지대'를 더욱 비옥하게 만들었다.
기원전 7000년경부터 인간은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의 고지대에 살았다.(메소포타미아라는 이름은 그리스어로 '두 강 사이'라는 뜻이다) 농업은 이 지역의 기후가 건조해져서 수렵과 채집만으로는 배를 채우기 힘들게 되었을 때 등장했을 것이다. 처음에는 하늘에서 내리는 비에만 의존했다. 농업은 천천히 뿌리를 내리며 남쪽으로 퍼져나갔다. 농부들은 두 강 사이의 영양분이 풍부한 충적토 범람원(홍수 때 강물이 평상시의 물길에서 넘쳐 범람하는 범위의 평야)으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관개수로를 팠다. 아마도 강둑 주변을 흐르는 도랑을 보고 영감을 받아 이 귀중한 아이디어를 떠올렸을 것이다. 여러 세기에 걸쳐서 풍광은 푸른 밀밭의 조각 누비로 바뀌었다. 무더위의 곡식이 익으면 들판은 황금빛이 되어갔다.
범람원에 세워진 최초의 도시중 하나가 우루크였다.(사실 인류 역사상 최초의 도시중 하나이다) 기원전 3000년의 우루크의 잉여곡물의 정치적 무게를 보여주는 증거였다. 돌로 쌓은 이 도시의 거대한 성벽 안에는 웅장한 지구라트(바빌로니아와 아시리아 유적에서 발견되는 고대 성탑. 둘레에 네모반듯한 계단이 있는 피라미드 모양을 한 구조물로, 신과 지상을 연결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와 사원, 그리고 사제왕(제정일치의 시대에 왕은 사제의 역할을 겸했다)의 권능을 과시하는 왕궁들이 있었다. 우루크가 쌓은 부는 신석기 시대의 기준으로 보아 엄청난 것이었다. 비록 재산의 대부분을 인구의 일부가 독식했지만 말이다. 잉여 식품 생산으로 시작된 우루크의 부는 기원전 3000년경에 이르러 교역로와 낙타 대상과 화물선과 중간상인들로 이루어진 매우 수익성 높은 체계로 형성된다. 우루크와 그 이웃들은 식품 교역으로 부유해졌다.
수메르인들은 3개의 주요 교역로를 통하여 식품을 팔았다. 유프라테스 강은 북쪽의 시리아와 북서쪽의 아나톨리아에 닿았다. 동쪽으로 가는 육로는 메소포타미아와 이란 고원을 연결했다. 남쪽 길은 페르시아만과 딜문(기원전 2000년경 번영했던 고대 독립 왕국으로 오늘날의 바레인으로 추측된다), 마간(오늘날 오만의 일부로 추측된다), 멜루하(하라파 문명 즉 인더스 문명으로 추정) 등의 지역으로 이끌었다. 이들 교역로는 청동기 시대에 존재한 온갖 귀중품이 이동하는 통로였다. 철, 직물, 준보석, 상아, 나무와 갈대, 곡식, 마늘과 양파 같은 향이 진한 야채, 조미료, 기름, 수지, 조가비, (아마도)진주, 그리고 나무와 철과 돌로 만든 몇 가지 수공업 제품까지 지나갔다. 메소포타미아 귀족들의 사치 욕망을 만족시켜준 이 3개의 교역로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남쪽 길이었다. 남쪽 길은 페르시아만으로, 또 인도의 항구들로 이어졌다. 곡물을 가득 실은 소달구지가 땅을 다지며 교역로를 따라갔다. 짐은 다시 배에 실려 동쪽의 여러 부족과 마을로 운반되었다.
메소포타미아는 식량을 주고 구리를 얻었다. 기원전 2000년의 여명기에 아카드(지금의 이라크 중부에 위치했던 고대 제국)라는 도시는 주요 지역에서 경쟁자들을 눌러버렸다. 아카드인들은 돌로 만들던 그들의 낫과 도구를 이제 구리로 만들게 되었다. 그들은 구리의 대가로 식량을 주었다.
이 무렵의 곡물 교역 규모는 놀랍다. 기원전 2100년경의 기록을 보면 2만 1,000리터의 곡식(지금은 곡식을 무게로 계량하지만 고대에는 주로 부피 단위를 사용했다)을 선적했다는 언급이 있다. 또 다른 기록은 71만 4,000리터였다고 한다. 당시 우루크의 1인당 보리 소비량은 하루 1~2리터였다. 위의 양이면 청동기 시대 페르시아만의 가장 큰 사회로 알려진 바레인 요새의 반년 치 식량이다. 우리는 메소포타미아 곡물을 먹고 살았던 해안가 사람들을 추측해볼 수 있다. 그들은 내륙 광산에서 가져온 구리 광석으로 일용할 식량을 얻는 값을 치렀다. 해안 도시들은 크게 번성했다. 내륙 도시들은 더 부유해졌다. 왕들은 금은보화를 사원 보물창고에 쌓아두었다.
이 체제를 지탱하기 위하여 메소포타미아인들은 들판에서 열심히 일해야만 했다. '비옥한 초승달 지대'에 처음 생긴 관개 시설은 단순한 배수로였다. 하지만 나중에 수메르인들은 엄청난 벽돌 작업을 보여주게 된다. 그들은 불로 구워 만든 황색 벽돌로 바둑판 같은 관개수로 체계를 만들었다. 기원전 1800년경에 이르자 관개 면적은 약 260만 헥타르에 달하게 된다. 관개수로가 수메르인들의 힘이요, 식량 안보의 근간이었다. 이것은 또한 수메르 식품 제국의 근간이 되었다. 그들은 당대 최고였다. 단, 하나의 예외만 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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