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마지못해 예언자가 된 모세 by 책의 민족 : 유대인 디아스포라 4천년의 역사

책의 민족 : 유대인 디아스포라 4천년의 역사 p45
에 있는 내용~
모세에 대한 다양한 견해와 시대적 가설 그리고 프로이트 왈도 있어
경우에 따라선 심도있게 생각해볼만한 주제라 함께 나누고자 올려용ㅋㅋ
요 링크도 같이 보세용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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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 마지못해 예언자가 된 모세
요셉과 그 형제들, 그리고 그의 부족 사람들에게 호의를 베풀었던 친절한 이집트인들은 누구였는가? 다행히도 고고학자들의 노력이 이 놀라운 민족과 그들의 고대 문명에 관해 많은 것을 밝혀주었다. 역사가들은 이집트의 고대 역사를 30개 왕조로 나누고, 다시 그 왕조들을 다음의 4시기로 분류한다. 전왕조 시대(기원전 4500~3500년), 고왕국 시대(기원전 3500~2400년), 중왕국 시대(기원전 2400~1600년), 제국 시대(기원전 1600~1100년).
전왕조 시대에는 이집트 상하 왕국이 하나였고, 상형 문자가 개발되었으며, 달력이 발명되었고, 최초의 종이(파피루스)가 제조되었다. 고왕국 시대에는 시각 예술의 발달이 절정에 이르렀고, 피라미드 건설이 시작되었다. 이집트가 해상 강국이 된 것도 바로 이 시대이다. 중왕국 시대는 이집트 문학의 '고전 시대'로 불린다. 이 시대에 새로운 건축물과 새로운 예술 형태가 생겨났다. 마지막으로, 제국 시대는 큰 번영의 시대였다. 이집트가 국경선을 팔레스타인과 그 너머까지 확장하고 아시리아와 바빌로니아와 대결하기 시작한 것도 바로 이때이다. 제국 시대는 유대인들에게도 매우 중요한 시대였다. 제국 시대가 시작되자마자 이집트 귀화 총독 요셉이 초대하여 유대인들이 이집트로 들어왔다. 그리고 제국의 시대가 끝나 갈 무렵, 이집트 귀화 왕자 모세의 명령으로 이집트를 떠나게 된다.
처음에 유대인들에게 친절했던 이집트인들이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을 노예로 만든 이유는 무엇일까? 이 질문의 답은 고고학자들이 밝혀냈다. 기원전 16세기 초에 힉소스로 알려진 아시아 부족 - 아마도 셈족이었을 것이다. - 이 이집트를 정복했다. 그들은 이집트의 지배자가 되어 새 왕조를 세웠고, 팔레스타인 국경 근처의 아바리스를 새 수도로 건설했다. 유대인들과 기근으로 어려움을 겪은 다른 민족들을 이집트에 정착시킨 사람이 바로 이 힉소스 파라오였다. 150년 후 역사적 상황이 변했다. 이집트인들이 힉소스 지배자들을 몰아내고 그들은 물론 그들이 초대한 다른 민족들까지 노예로 삼았다. 새 이집트 파라오중 하나였던 람세스 2세는 아바리스를 람세스(라암셋) - 성경에도 이 도시가 언급된다. - 라 불리는 새로운 수도로 재건했는데, 이 재건 작업에 동원된 것이 힉소스인들과 이집트에 살던 외국인 노동자들이었다. 유대인도 여기에 포함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고고학자들이 지금까지 발굴해낸 모든 것은 성서의 이집트 탈출 사건이 역사적 사실임을 입증했다. 물론 정확히 언제 이집트에 탈출했는지는 역사가들도 아직 확신하지 못한다.

얼마나 오랫동안 유대인들이 이집트에서 노예 생활을 했는지는 말하기 어렵다. 유대 역사에서 가장 위대하면서도 가장 역설적인 인물인 모세가 등장하기 전까지 유대인들이 자유를 위해 싸웠다거나, 어떤 해방자가 그들을 해방시키기 위해 노력한 이야기는 전해지지 않는다. 예수가 기독교에서 차지하는 위치만큼이나 모세도 유대교에서 절대적인 위치를 차지하지만, 유대인들은 기독교인들이 예수를 대했던 것처럼 모세의 생애와 관련된 사건들을 축제일로 만들지 않았다. 복음서는 예수의 말에 기초를 두고 있지만, 모세5경에 모세의 말은 한마디도 없다. 모세는 유대인들을 이집트의 속박에서 벗어나게 한 해방자였지만, 그의 이름은 이집트 탈출을 기념하는 유월절 집회 때마다 유대인들이 낭송하는 이야기인 하가다에 단 한 번, 그것도 지나가듯이 언급될 뿐이다. 모세는 유대교의 기둥과 같은 문서인 십계명을 기록했지만, 유대인들이 가진 유일한 모세 형상은 르네상스 시대의, 그것도 유대인이 아닌 기독교인 미켈란젤로가 만든 조각상뿐이다. 이 뿔달린 모세 조각상은(많은 주석자들은 미켈란젤로의 모세 조각상의 뿔은 성경을 오해한 데서 나왔다고 설명한다. 성경은 모세가 시나이산, 시내산에서 십계명을 받고 내려왔을 때 그의 얼굴이 '빛났다'고 기록하는데, 이때 사용된 단어가 '코란koran'이다. 이 단어는 'keren'이라는 어근에서 온 것인데, '빛나다' 혹은 '광선'이라는 뜻과 함께 '뿔'이라는 뜻도 지닌다. 하지만 오늘날 흔히 채택되는 해석은 '빛났다'이다.)은 사람들의 의식에 새겨져, 모세에게 그의 성취에 합당한 영예를 준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절대로 모세를 신격화하지 않는다. 이처럼 모세는 유대 역사에서 가장 모호한 인물, 즉 존경받으나 숭배되지 않는 인물이 된다.
고대 세계의 모든 영웅들의 삶이 그렇듯이 모세의 삶도 전설에 가려져 있다. <출애굽기>에 따르면 '요셉을 알지 못하는' 파라오가 유대인들의 급격한 인구 증가를 억제하기 위해 모든 유대인 사내 아이는 태어나자마자 죽이도록 명령한다. 우리 생각에 파라오는 유대인들의 인구 증가를 값싼 노동력 자원으로 환영했어야 하는데도 말이다. 여하튼 이렇게 위험한 시대에 레위 부족의 한 남자가 같은 부족의 아내를 취하여 모세를 낳고, 3개월 동안 숨겨 키웠다. 집 안에 두는 것이 너무 위험해지자, 부모는 모세를 방수 처리된 상자에 넣어 나일강에 띄워 보냈다. 파라오의 딸중 하나가 마침 목욕하러 강가에 나왔다가 모세를 발견하고는 불쌍히 여겨 양아들로 삼기로 결정했다. 이렇게 모세는 궁에 들어가 그곳에서 이집트 왕자로 교육받았다.
모든 전설적 영웅이 그렇듯이 모세의 경우도 어린 시절과 청년 시절에 대한 정보가 베일에 가려 있다. 30살이 되었을 때, 그는 이집트 노동 감독관이 유대인 노예를 구타하는 것을 목격한다. 그때 그의 마음이 형제들, 즉 유대인들에게 쏠려 이집트 노동 감독관을 살해하고 만다. 파라오의 격노를 피해 미디안으로 도망친 모세는 그곳에서 미디안 제사장 이드로의 딸 십보라를 만나 결혼한다. 어느 날, 호렙산 근처에서 장인의 양 떼를 돌보다가 모세는 여호와와 운명적으로 만난다. 여호와는 자신을 아브라함의 하느님이라 소개하고, 모세에게 이집트로 돌아가 유대인들을 자유로이 해방시킬 것을 명령했다. 모세는 하느님의 계속되는 격려와 협박 가운데 그 명령을 마지못해 수락한다.
마지못해 예언자가 된 이가 이제 유대인을 이집트에서 탈출시키는 역할을 맡았다. 그는 유대인들을 갈대 바다(홍해)를 지나 시나이 사막으로 이끌었다. 시나이 반도를 우회하는 여행길은 약 40년이 걸렸는데, 그동안 나이 든 세대가 죽고 새로운 세대가 성장했다. 바로 이 시나이 사막에서 모세는 그의 백성에게 십계명을 포함한 모세 율법을 주었다. 모세 율법은 이후 유대 민주주의와 국가관의 토대가 된다. 자신의 사명을 완수한 모세는 약속의 땅에 발을 디디지 못하고 죽는다. 그가 어떻게 죽었는지는 신비에 싸여 있으며, 무덤의 위치도 알려져 있지 않다.
지금까지 설명한 모세의 생애는 많은 당혹스런 의문을 불러일으킨다. 모세가 이집트의 왕자로 자랐다면 어디에서 히브리어를 배웠을까? 그리고 왜 자신을 이집트 왕자가 아닌 히브리 노예로 여겼을까? 그는 미디안 사람들과 대화할 때도 아무런 어려움이 없는데, 어떤 언어로 대화했을까? 모세와 여호와의 만남 장면 - 이 장면은 아브라함과 하느님의 만남을 연상시킨다. - 은 더 당혹스런 의문을 품게 한다. 여호와는 아브라함에게 했던 것과 똑같이 모세와 언약을 맺는다. 여호와는 모세에게 유대인들을 가나안 땅 - 즉 여호와가 아브라함을 인도했던 그 땅 - 으로 인도할 것을 명령하고, 모세와 그가 이집트에서 탈출시킨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아브라함의 경우처럼 할례를 명령한다. 이집트에 살던 유대인들은 이 할례 의식을 버렸는가? 이후에 살펴보겠지만, 모세의 아들은 할례를 받지 않았다. 왜 아브라함의 언약에 따라 그의 부모는 생후 8일 만에 아들에게 할례를 하지 않았을까?
가설적인 질문을 해보자. 기원전 2000년에 아브라함과 하메 우르를 떠난 '히브리인들'과 기원전 1600년에 요셉을 따라 이집트로 이민간 '히브리인들'은 기원전 1200년에 모세가 이집트에서 탈출시킨 '이스라엘인들'과 동일한 민족일까? 이집트에서 탈출한 이스라엘 사람들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후손이었을까? 아니면 다른 민족이었을까? 이집트 이민 전의 역사를 다루는 <창세기>에서 유대인들은 한 경우를 제외하면 언제나 이스라엘인들이 아닌 히브리인들로 불린다. 그런데 이집트 탈출 이후, 그리고 모세 5경에서 유대인들은 대개 이스라엘 사람으로 불리며, 히브리인으로 불리는 경우는 아주 드물다. 주로 이방인들이 유대인에게 히브리인이라는 명칭을 사용한다. 반면 유대인들은 자신들을 이스라엘인이라 칭한다.(처음에 예외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두 경우가 있다. 첫째, 하느님이 야곱의 이름을 '이스라엘'로 바꾼다. 이스라엘의 의미는 '하느님과 겨룬 사람, 이스로-엘'이다. 이후에 야곱만이 이스라엘로 지칭된다. <창세기 47:27참조. 두 번째, <창세기>의 마지막에서 두 번째 장 49:2에서 야곱이 '이스라엘'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데, 이 경우도 자신을 가리키는 것이다. "야곱의 아들들아, 너희는 모여서 들어라. 너희의 아버지 이스라엘이 하는 말에 귀를 기울여라.")
이중성의 문제는 <구약 성경>의 모세 5경을 관통한다. 모세 5경에 히브리인과 이스라엘인 두 민족이 있듯이 두 모세, 즉 레위인 모세와 미디안인 모세도 있다. 심지어 신도 둘이다. 하나는 (보통 '주'로 번역되는) '여호와'이고 다른 하나는('하느님'으로 번역되는) '엘로힘'이다. 이후의 <구약 성경>에서 우리는 두 왕국도 만난다. 이들은 하나로 합쳐졌다가 다시 둘로 쪼개진다. 성전도 2개가 적수로 존재한다. 하나는 유다 왕국의 예루살렘 성전, 다른 하나는 이스라엘 왕국의 베델(벧엘) 성전이다. 예리한 독자들은 <구약 성경>에 많은 것들이 둘로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성경에 한 이야기의 두 버전이 수록된 것인가, 아니면 서로 다른 두 이야기가 하나로 편집된 것인가?
오랫동안 학자들은 어느 쪽이 모세의 진짜 모습일지 상상해 왔다. 어떤 학자들은 모세가 역사적 실존 인물이 아닐 거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학자들은 유대인을 이집트의 노예 생활에서 해방시킨 모세 혹은 모세라는 이름으로 활동한 누군가가 존재했다는 사실은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성서학자들이 제기하는 복잡한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는다.
하느님이 유대인을 선택했다는 신학적 설명이 당분간 받아들이지 말자. 하느님이 아브라함과 모세를 각각 임명하여 자신의 뜻을 이루는 도구로 삼았다는 설명도 밀쳐 두자. 그 대신 이렇게 질문해보자. 유일신 사상과 선민 사상을 만든 사람이 아브라함이고, 모세는 그것을 다시 소개한 인물이 아니었을까? 아니면 모세가 그 두 사상의 창시자는 아니었을까? 후대의 성서 편집자들이 이스라엘의 기원 이야기에 연속성을 부여하기 위해 모세의 사상을 아브라함에게 역으로 적용한 것은 아닐까? 더 나아가, 일부 학자가 주장하는 것처럼 자신의 종교 사상을 적용할 민족으로 유대인을 선택한 모세가 실은 유대인이 아니었을 가능성은 없을까? 특히 이 가정은 '선택된 민족'이라는 용어의 기원에 대한 비신학적(세속적) 설명에 단초를 제공할 수 있다. 여하튼 모세가 이집트에서 탈출시킨 이스라엘 사람들과 이집트로 요셉을 따라가지 않고 가나안에 남았던 히브리인들이 가나안 땅에서 통합된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이 이야기는 서로 다른 민족의 통합, 서로 다른 두 신의 통합을 말한다. 아니면 그 두 민족은 본래 같은 민족이었는데, 이집트의 4백년 노예 생활 기간에 서로 갈라지게 된 것일까?
프로이트는 <모세와 유일신교>에서 재미있는 이론을 제시한다. 즉 모세가 이집트의 이스라엘 사람들과 가나안의 히브리인들을 한 민족으로 묶은 비유대인이라는 것이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모세는 이집트 왕자였거나 이집트 제사장이었고, 유대인에게 유일신 종교를 전했다.(필자는 모세가 이집트 왕자였다는 주장에 항의하는 사람들을 이해할 수 없다. 그들은 이미 유대 민족의 창시자 아브라함이 바빌로니아 사람이라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았는가? 아브라함은 75세까지 유대인이 아닌 바빌로니아 사람으로 살았다. 유대 민족의 이야기를 굉장하게 만드는 것은 그들이 제안한 사상들이다. 만약 유대인들이 모세를, 그가 이집트인이었건 미디안인이었건 아니면 히브리인이었건 상관없이 추종했다면 그것은 그들이 잘한 일이다.) 프로이트는 이 이집트인 모세가 자신의 새 종교 사상을 이집트인들에게 전하려 했으나, 그들이 모세의 이상하고 이단적인 신 개념, 즉 보이지 않는 신 개념을 거부했다고 주장한다. 당시 모든 사람들은 지구가 평평하고, 태양은 지구 주위를 돌며, 모든 신들은 눈에 보인다고 믿었다. 그런데 모세는 광신 교주처럼 의도적으로 당시 이집트 사회의 노예였던 이스라엘 사람들을 선택해(이것이 '선택된 민족'이라는 말의 세속적, 즉 비신학적 설명이다), 자신의 새 종교를 받아들이면 노예 생활에서 자유롭게 해주겠다고 약속했다는 것이다. 이런 프로이트의 이론에 어떤 역사적 증거가 있는가?
이스라엘인들이 이집트에서 노예 생활을 할 무렵, 이집트는 아멘 호테프 4세(이그나톤)가 다스렸다. 그는 다신 종교, 즉 많은 신에 대한 믿음을 유일신 종교로 바꾸려 했다. 이를 위해 그는 이집트의 태양 신들중 하나였던 아톤을 최고 신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 보이지 않는 전능한 신을 두려워했다. 유일신 정책으로 직장을 잃게 된 제사장들도 아톤 신에 반대했다. 이 혁명은 이집트 전체로 퍼졌으며, 거의 1백년간 지속되면서 이전의 종교 질서를 다시 회복했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이집트 혁명의 혼란 속에 잘 알려지지 않은 사건이 발생했다. 모세라 불린 이집트 제사장 혹은 이집트 왕자가 죽어 가는 아톤 신앙을 살리려는 열정으로 불탔다는 것이다. 바울이 기독교를 세우려는 열정으로 불탔던 것처럼 말이다. 프로이트의 추정에 따르면, 이집트인들이 아톤 신앙을 받아들이지 않으려 하자 모세는 그 신앙을 유대인에게 전파했다. 이것은 전혀 황당무게한 이야기가 아니다. 다시 바울의 예와 비교할 수 있다. 유대인이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자 바울은 복음을 이방인들에게 가져가지 않았는가? 역사의 아이러니다!
프로이트의 이론에 따르면, 모세는 유대인이 새 종교를 시작하기에 가장 적합한 민족이라 여기고 그들을 '선택'했다. 그들은 이집트에 있었고, 노예였고, 자유를 열망했다. 이에 협상이 이루어진다. 자유의 대가로 유대인들은 모세를 그들의 지도자로 삼고 그의 종교를 받아 들이기로 했다. 여기서 기억해야 할 것은 기독교도 초기에는 주로 사회적으로 천대받던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졌다는 사실이다.
모세가 유대인이 아니라 이집트인이었을 것이라는 프로이트의 가정에는 성서적 근거가 있는가?(관심있는 독자들은 카를 아브라함의 논문 <아멘호테프>를 참조하기 바란다. 프로이트의 책 <모세와 유일신교>도 참조하라.) 우선 '모세'라는 이름이 이집트식 이름임을 지적할 수 있다. 성경에 따르면 파라오의 딸이 '모세'라는 이름을 지어주면서 히브리어로 "내가 그를 물에서 건졌다."라는 의미라고 설명한다. 이 이야기는 파라오의 공주가 어려운 히브리어 문법의 세밀한 내용을 알고 있어야 성립한다. 그러나 언어 전문가들은 '모세'라는 이름이 히브리어가 아니라 '아들'을 의미하는 이집트어라고 지적한다. 모세는 람세스(라-모세, '라의 아들')나 투트모세(토트-모세, '토트의 아들') 같은 이집트 이름 - 이 이름들은 오늘날의 Johnson('존의 아들') 같은 이름과 같은 방식으로 지어졌다. - 에도 등장한다.
학자들은 모세가 태어나자마자 할례받지 않은 이유를 두고 여전히 논쟁한다. <출애굽기> 4장 24~26절에서 하느님은 이집트 탈출의 사명을 유대인의 할례 의식도 지키지 않은 사람에게 맡겼음을 나중에야 깨닫고 모세를 죽이려는 듯하다. 모세는 유대교에서 잠깐 떠나 있었는가? 아니면 본래 할례받지 않은 이방인이었는가? 그의 아내 십보라는 하느님의 분노를 달래기라도 하듯 할례 의식을 행한다. 더구나 십보라는 처음 모세를 만났을 때 그를 이집트인이라 생각했다. 미디안의 제사장이었던 십보라의 아버지도 마찬가지다. 그뿐 아니라 성경은 모세가 언어 구사에 문제가 있음을 지적한다. 모세는 하느님의 사명을 거부하는 핑계로 자신이 말을 더듬는다고 말한다. 성경을 읽던 독자들은 모세가 그 말을 할 때 다소 놀란다. 모세가 말을 더듬는다는 사실이 그때까지 전혀 언급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하튼 하느님은 모세에게 대변인으로 일해줄 아론이 있음을 상기시키는데, 모세에게 형이 있다는 사실도 여기서 처음 언급된다. 이 모든 것을 고려할 때, 프로이트에 따르면 다음과 같은 추정이 가능해진다. 모세가 대변인이 필요했던 것은 그가 말을 더듬는 약점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히브리어를 몰랐기 때문이다.
※ (출 4:10) 모세가 여호와께 고하되 주여 나는 본래 말에 능치 못한 자라 주께서 주의 종에게 명하신 후에도 그러하니 나는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자니이다
물론 이것이 모세가 이집트인이었다는 결정적 증거는 되지 못한다. 그러나 적어도 그런 추정의 정황적 증거는 제공한다. 이제는 성경 주해, 즉 성경에 대한 비평적 해석을 통해 초기 유대 역사를 관통하는 이중 개념의 수수께끼를 풀어보자.
성서학자들은 <구약 성경>이 'J', 'E', 'JE', 'P' 문서로 구성되었다고 추정해 왔다. 즉 4개의 서로 다른 이야기들이 하나로 묶인 것이 <구약 성경>이란 말이다.(5번째 이야기인 <신명기> 문서, 즉 'D' 문서는 다음 장에서 다룰 것이다.) 'J' 문서에서는 하느님을 언제나 '여호와'로 지칭하기 때문에 여호와의 첫 자음을 따 'J' 문서라고 한다. 이 문서는 가장 오래되었으며 기원전 9세기경에 남유다에서 쓰인 것으로 여겨진다. 하느님이 '엘로힘'으로 불려서 'E' 문서로 불리는 이야기는 'J' 문서보다 약 1백년 후인 기원전 8세기에 북이스라엘에서 쓰인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P', 즉 '제사장' 문서는 'E' 문서보다 2백년 정도 후인 기원전 600년경에 만들어졌다. 기원전 5세기에 유대 제사장들이 'J'와 'E'의 일부를 결합하고 자신들이 내용을 조금씩 첨가한(이를 '경건한 거짓'이라고 한다) 문서는 'JE' 문서로 불린다. 이 문서에서는 하느님이 '여호와 엘로힘(주 하느님)'으로 불린다.
5경으로 불리는 모세의 5권의 책이 최종적으로 편집된 것은 기원전 450년경이다. 다시 말해, 그 책에 기술된 사건이 발생한지 짧게는 800년, 길게는 1600년이 지난 후에 완성된 것이다. 기록 문서가 만들어지기 전인 그 당시, 이야기들과 전설들이 구전으로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전달될 때 많은 변화와 수정이 있었으리라는 것을 예상할 수 있다. 더구나 이미 살핀 것처럼 제사장과 예언자, 그리고 정책 입안자들은 이 기간에 책을 편집하느라 무척 바빴다.
여기서 다시 '선택된 민족'과의 언약이라는 개념을 처음 고안한 사람이 모세라고 가정해보자. 5경을 관통하는 이중 개념이 실제로 서로 다른 두 민족에서 기인한 것은 아닐까? 즉 아브라함의 히브리 민족과 모세의 이스라엘 민족은 각각 다르게 히브리인들이 '여호와'라 부르는 신과 이스라엘 사람들이 '엘로힘'이라 부르는 신을 섬겼을 가능성은 없는가? 이 두 민족이 모세의 지도로 처음으로 하나로 통합되었던 것은 아닐까? 모든 히브리인이 요셉을 따라 이집트로 내려간 것은 아님을 기억해야 한다. 많은 히브리인이 가나안 땅에 남아 족장들인 아브라함, 이삭, 야곱이 가르쳐준 여호와 종교를 이어 갔다. 모세가 이스라엘 사람들을 가나안 땅으로 데려왔을 때 판관들, 왕들, 예언자들의 사명은 그 두 민족을 하나의 통일된 나라로, 그 두 종교를 하나의 통일된 종교로 묶어내는 것이었다. 우리가 이 견해를 받아들이면 아브라함과 여호와의 만남을 성경 편집자가 후대에 가필한 것을 설명할 수 있다. 더 나아가, 인종적으로 가깝지만 종교적으로는 구별된 민족들에게 동일한 하느님 신앙을 부여함으로써 왕들이 그 두 민족을 하나로 통합하려 했을 가능성도 생각할 수 있다. 이를 위해 그들은 아브라함과 모세가 여호와 엘로힘, 즉 주 하느님으로 불린 신으로부터 동일한 계시를 받는 성경이 필요했을 것이다.
모세의 국적이나 이스라엘 사람들의 기원에 관한 가설들을 지금까지 장황하게 설명했지만, 나는 그 가설들이 참이라고 주장할 생각이 전혀 없다. 단지 우리가 역사를 보는 관점에서, 모세가 유대인이었는지 여부 혹은 히브리인과 이스라엘인이 같은 민족이었는지 여부 혹은 하느님이 처음 어느 민족과 언약했는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음을 지적하고 싶다. 유대 역사의 핵심은 그들이 언약과 관련된 사상을 수용했다는 사실이다. 그 언약이 누구를 통해, 그리고 어떻게 주어졌는지는 부차적인 문제다. 모세가 유대인이었든 이집트인이었든 다음 사실만은 변함없다. 모세와 함께 기존의 유대교가 내용과 형식 면에서 완전히 바뀌었다는 것이다. 모세는 예언자로 알려진 하느님의 사람 가운데 유대 민족의 신을 최초로 보편화한 인물이다.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에 포함된 모세 이야기의 핵심은 율법 수여, 즉 모세 법전의 제정이다. 이 사건 이전의 모든 것은 전주이고, 이 사건 이후의 모든 것은 후주에 해당한다. 율법을 제정한 사건은 새 국가를 세우는 일에 해당한다. 출애굽기의 큰 줄거리는 원시 부족의 입문 의식을 연상시킨다. 전자가 후자보다 윤리적이고, 상징적이며, 고차원이라는 점에서만 다르다. 원시 부족 사회에서 청소년이 어른 사회의 성원이 되려면 다음의 5요소를 포함하는 입문 의식을 통과해야 했다. 상징적 죽음, 상징적 부활, 동지 의식 함양을 위한 상징적 절단, 새 이름 수여, 마지막으로 부족 법의 습득. 이 5요소를 포함한 입문 의식이 출애굽기에도 그대로 나타난다. 지도자 모세를 따라 유대인들은 시나이 사막을 40년간 방황했다. 그 기간 동안 옛 세대는 죽고 새 세대가 태어났다. 이것은 출애굽기의 '입문 의식'에서 상징적 죽음과 상징적 부활에 해당한다. 당시 모든 이스라엘 남자는 할례를 받았다.(상징적 절단) 그리고 히브리인들은 새 이름, 즉 이스라엘 민족이라는 새 이름을 받았다. 마지막으로 새 법, 즉 토라가 그들에게 주어졌다.(일반적으로 토라는 율법서를 가리킨다. 구약 성경은 율법서인 토라와 예언서, 그리고 성문서로 구성되어 있다. 이중에서 가장 중요한 책이 토라이다. 토라는 곧 모세5경인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5권의 책을 가리키나 더 넓은 의미에서 성경 전체를 가리키기도 한다.)
토라느 그때까지 존재한 모든 것을 앞지르는 큰 진보이며, 미래를 향한 대담한 도약이었다. 성문법 앞의 평등 개념은 셈족에게서 처음 생겨난 듯하다. 기원전 2500년에 이미 법전을 마련한 수메르인들은 성문법을 가진 최초의 민족이 되었지만, 그들에게는 모세 율법이 보여주는 정의를 향한 열정은 없었다. 500년 후에 수메르 법전은 바빌로니아인들에 의해 증보되어 함무라비 법전으로 통합되었다. 그러나 이 법전도 토라에 담긴 민주적 정신은 갖추지 못했다. 차별 없이 모든 이에게 적용되는 성문법은 기원전 300년까지 이집트인에게도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로마인들은 기원전 2세기에 가서야 비로소 성문법을 만들었다.
그러므로 모세 율법은 최초의 성문 실정법이며, 다른 어떤 법전보다 보편적 휴머니즘, 정의를 향한 열정, 민주주의에 대한 사랑을 잘 구현하고 있다. 모세 율법은 새로운 유대 정체성을 확립하고 유대인의 사상을 새로운 길로 이끌어 유대인을 이웃 민족과 더욱 구별되게 만들었다.
모세 율법의 이념적 내용은 매우 흥미롭다. 모세 율법에서 우리는 유대인의 국가관과 법철학을 볼 수 있다. 모세 율법은 크게 개인과 개인 사이의 관계를 다루는 법, 개인과 국가의 관계를 다루는 법, 그리고 개인과 하느님의 관계를 다루는 법 세 범주로 나뉜다.
모세 율법은 하느님이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약속한 국가를 염두에 두고 있다. 이 당시 유대인들은 여전히 떠돌이 유목민이었지만, 모세 율법은 유목민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모세 율법에서는 개인의 권리가 국가의 필요에 절대 종속되지는 않지만, 단순히 부족이 아니라 국가를 보존하기 위해 입법되었다. 이 율법의 고상한 철학은 (예언자가 개혁하기 전) 800년간 지속된 민주적 형태의 정부가 출현하는데 촉매제가 되었다. 고작 200년을 견뎌온 미국은 헌법과 비교해보라.
모세 율법은 정교 분리를 위한 최초의 원리를 기록하고 있다. 이 개념은 3000년 후 18세기 계몽주의 시대에 와서야 세계 역사에 다시 발견된다. 모세 율법에서 국가 권력은 제사장 권력과 독립적으로 존재한다. 제사장들이 모세 율법이 특별히 다루지 않는 영역에서 사법 기능을 수행한 것은 사실이지만(신명기 17:8~12),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정부 위에 군림한 것은 아니다. 제사장들은 정부가 모세 율법의 정신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감시하는 책임을 졌다. 미국의 대법원이 연방 정부 위에 군림하는 것은 아니지만 연방 정부가 헌법의 틀안에 머물도록 감시할 책임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모세는 민주주의에 필요한 또 하나의 '분리'를 위한 기초도 마련했다. 그는 독립적인 사법 기관도 창설했다.
미국 헌법의 철학과 모세 율법의 철학 사이에는 신기한 유사성이 있다. 연방 정부가 헌법이 부여한 권한만 지니는 반면에 개별 주정부들은 그들에게 명시적으로 금지된 것을 제외하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듯이, 유대인들도 모세 율법이 금지한 것을 제외하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었다. "이런저런 것을 하라"라고 말하는 대신에 모세 율법은 보통 "이것 혹은 저것을 하지 말라"라고 말한다. 긍정문의 형태일 때도 그것은 보통 부정 명령에 대한 보충이거나 부정 명령에 의해 제한된 것이다. 다시 말해 "네가 이것을 한다면, 그것은 하지 말라"라는 식이다. 예를 들어, 십계명은 3개의 긍정 명령(~하라)과 7개의 부정 명령(~하지 마라)으로 이루어진다. 3개의 긍정 명령은 다음과 같다. "나는 너희의 하느님이다.", "안식일을 신성하게 지켜라.", "너희 부모를 공경하라." 한편 7개의 부정 명령은 하지 말아야 할 것을 분명한 언어로 규정한다. 부정 명령을 어기지 않도록 하기 위해 추가 명령을 내릴 때 모세는 긍정 명령을 사용한다. 이것은 유대인에게 엄청난 자유를 허락한다. 그들은 율법에 명시적으로 금지된 그것을 하지 않는 한, 자신들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현대 미국 시민처럼 말이다. 모세의 영향을 받아 유대인 철학자들도 부정문의 형태로 생각을 표현하기를 좋아한다.
이런 생각의 차이는 기독교인들은 예수의 말로 여기지만 유대인들은 유대교의 위대한 랍비인 힐렐의 말로 생각하는 어떤 격언을 통해 잘 드러난다. 기독교인에 따르면 예수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다른 사람들이 너에게 해주었으면 하고 바라는 대로 네가 다른 사람들에게 해주어라." 유대인에 따르면 예수보다 100년 전 사람인 힐렐은 이렇게 말했다. "다른 사람이 너에게 하지 말았으면 하는 것을 네가 다른 사람들에게 해서는 안된다." 이 두 표현에는 엄청난 철학적 차이가 있다. 이 둘을 곰곰이 따져본 후, 어느 것이 자신에게 적용되었으면 좋겠는지 따져보기 바란다.
약 3000년 전에 작성된 모세 율법을 읽을 때 우리는 그 율법 안에 있는 휴머니즘 정신에 놀라게 된다. 이 법 정신이 오늘날 보편적으로 채택된다면 세상은 훨씬 살기 좋아질 것이다. 당시 유대의 노예들은 1850년대 미국의 노예들보다 훨씬 인간적인 대접을 받았다. 자유민에게 적용되는 모든 법들은 노예들에게도 적용되었으며, 노예 상태에서 7년이 지나면서 다시 자유인이 되었다. 모세 시대의 이혼법은 오늘날 영국의 이혼법보다 더 진보적이었다. 당시 여자들은 매우 존중받았다.
기원전 1200년 전 유대인의 성 개념을 간단히 훑어보는 것도 재미 있을 것이다. 성이 죄라는 청교도 사상은 유대교에서 한 번도 득세한 적이 없다. 성적 욕망은 정상적인 것으로 여겨졌으며 아울러 결혼 제도 안에서만 충족되어야 한다고 여겨졌다. 따라서 조혼이 장려됐다. 남자와 여자의 성적 결합은 즐거운 것이지만, 자발적이어야 했다. 한쪽 - 남편이건 아내이건 - 이 의도적으로 성관계를 피하면 범죄로 여겨졌고 그 행위가 지속되면 이혼 사유가 되었다. 남성 독신은 금기시되어서 모든 남성은 결혼해야 한다고 여겨졌지만, 여자의 경우에는 독신으로 지내는 것이 용인되었다. 그러나 결혼을 한다면 아주 일찍 해야 했다.
모세 율법은 성범죄가 일어날 것임을 예견하고, 미혼모의 아이들을 위한 안전 장치도 마련했다. 합법적으로 부부가 될 수 없는 관계 - 예를 들어 간통 관계나 근친 관계 - 에서 태어난 아이들만 '사생아'로 여겨졌다. 그 외에 미혼모에게서 태어난 모든 아이들은 합법적인 개인으로 간주되어 상속에서 제외되지 않았다. 미혼 남녀 사이에 순결은 매우 중요한 덕목이었고, 매춘은 수치로 여겨졌으며, 특히 이교도 사이에 유행한 성전 매춘은 혐오스러운 행위로 간주되었다. 남자들 사이의 동성애는 중대한 범죄였으며, 여자들 사이의 동성애는 수치스런 행동이지만 범죄로까지는 취급되지 않았다.
우상 만들기를 금하는 제2계명은 유대인의 정체성에 깊은 영향을 끼쳤다. 프로이트는 매우 흥미로운 관찰을 한다. 하느님의 우상이 허용되지 않았다면, 하느님에게는 이름도 얼굴도 없다는 뜻이 된다. 또한 이것은 보이지 않는 하느님에 대한 예배로 귀결된다. 프로이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상 만들기가 금지되었을 때, 그것은 심오한 의미를 지닐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감각에 따른 지각을 추상적 사고에 종속시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영성이 감각에 승리한 것이다."
하느님을 물질 우상이 아닌 비가시적 영으로 간주함으로써 유대인들은 하느님의 물리적 모양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영성을 자유롭게 바꿀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을 성공적으로 한 사람들이 예언자들, 구원자들, 그리고 랍비들이다. 돌로 된 우상 대신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섬김으로써 유대인들은 문화적 우월감을 지니게 되었다. 이렇게 모세는 유대인들에게 자긍심을 심어주는데 성공했다. 이것은 독특하다는 피상적 자랑과는 다르다. 유대인들의 지성은 하느님을 추상화한 결과로 나타난 성품이다. 하느님을 추상화해서 얻은 또 하나의 성품은 잔인함과 폭력을 거부하는 마음이다.
제2계명에는 부작용도 있다. 제2계명은 유대인의 예술 정신을 질실시켰다. 유대인들은 하느님의 이미지를 제작할 수 없었기 때문에 미술, 조각, 건축 같은 분야를 멀리했다. 예외도 있었다. 유대인들이 제2계명을 무시하기 시작한(기독교인들은 약 2000년 동안 그렇게 해왔다) 19세기가 되면서 유대인들도 미술가, 조각가, 건축가들을 배출하기 시작했다. 19세기까지 유대인의 정체성은 이미 확고히 성립되었기 때문에, 유대인들인 조형 예술 분야에 종사한다고 해서 그들의 정체성이 흔들리지는 않았다.
모세의 출현은 신성한 법을 수여함으로써 이루어졌다. 모세의 사명도 완수되었다. 이제 그는 죽어야 했다. 모세에게서 신성한 법을 받은 젊은이들이 유대 민족의 운명을 이을 준비가 되었다. 아브라함의 위대한 비전은 환상이 아니었다. 모세, 그 마지못한 예언자가 그것을 현실로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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