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로마 신화의 이질적인 도덕성에 대해 말하다.

Realize 2020. 12. 4. 23:59

 

 

 

장영란의 그리스신화 p243

에 있는 내용이다.

 

그리스로마 신화의 이해하기 어려운

이질적인 도덕성에 대해 조큼이나마 알 수 있는 기회가 될거다.

 

 

신들에게 인간의 도덕을 묻다.

 

1. 신들은 왜 비도덕적인 사랑을 할까?

 

신화 속에서 만나는 그리스 신들은 별로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은 존재처럼 보인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인식되고 있는 신의 개념과 맞지 않는다. 우리는 서양 중세 신학으로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신의 완전한 '선'에 대해 끊임없이 얘기해오지 않았는가? 실제로 대부분의 종교는 '선과 악의 투쟁'에 대해 말하며 '악에 대한 선의 승리'에 대해 말한다.

 

그러나 그리스 신화의 신들은 이 부분에 있어 아랑곳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스 신화는 중세 기독교 신학보다도 시대적으로 훨씬 앞서 있다. 아직 윤리적 의식이 충분히 발전하지 않았기 때문에 엄격하고 체계적인 도덕 질서와 법칙을 적용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하여튼 그리스 신들은 도덕적이거나 윤리적인 면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제우스와 바람난 가족

 

그리스 신화를 읽을 때 가장 많이 접하게 되는 상황은 남신들이 아내 이외의 여신들이나 여인들을 쫓아다니며 바람을 피우는 것이다. 그리스 남신들의 성적 태도는 2가지 특징을 보인다. 우선 자연스럽기보단은 일방적이고 강제적으로 관계를 맺는다. 다음으로 대부분의 경우에 바람만 피울뿐 책임을 회피한다.

 

제우스는 아내인 헤라 이외에 수많은 여신이나 여인들과 관계를 맺지만 헤라의 눈을 피하기 위해 무책임하게 행동한다.

 

이오는 제우스로 인해 암소로 변해 오랜 세월 동안 수많은 고통을 받는 대표적인 경우이다. 에우로페도 반강제적으로 제우스와 결합하기는 마찬가지다. 우연히 바닷가에서 친구들과 놀고 있던 에우로페를 본 제우스는 3가지 색깔을 가진 특별한 황소로 변해 나타나 호기심으로 접근한 에우로페를 태우고 줄행랑을 치고 만다. 세멜레는 제우스와의 결합 때문에 분노한 헤라의 농간으로 태중에 아이를 가진 채로 제우스의 벼락에 맞자 죽는 아주 끔찍한 최후를 맞는다.

 

이러한 특징은 제우스만에게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아폴론은 제우스처럼 공식적인 결혼을 하지 않아 자유로운 상태였지만 책임을 회피하기는 마찬가지다. 아폴론은 아크로폴리스에서 크레우사라는 처녀를 납치하여 관계를 가진 후 외면해버린다. 크레우사는 처녀의 몸으로 아폴론의 아이 이온을 낳지만 할 수 없이 아폴론과 만났던 장소에 아이를 버리고 만다. 제우스는 델포이로 아이를 데려와 기르게 하고 크레우사는 다른 남자 크수토스와 결혼을 한다. 한참 후 자식이 없었던 크수토스는 크레우사와 함께 델포이 신전에 와서 신탁을 구했다. 신탁은 이온이 크수토스의 아들이라고 말한다. 크수토스는 이온을 아들로 삼지만 크레우사는 못마땅하게 여겼다. 결국 훗날 서로 얼굴을 모르는 어머니 크레우사와 자식 이온이 피비린내나는 싸움을 하는 불행에 휩싸이게 된다. 어머니가 아들을, 아들이 어머니를 살해하려는 비극적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마지막에 신이 개입하여 오해가 풀린다. 하지만 왜 신의 희롱으로 인간은 죽음을 넘나드는 극단적인 고통을 맛보아야 하는가?

 

 

그리스 성문화와 성도덕

 

그런데 과연 그리스 신들은 비도덕적인가? 우리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다양한 관점을 도입해야 한다. 무엇보다 그리스 신화에 나타나는 성문화를 우리의 도덕적 잣대로 평가할 수는 없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각 문화와 민족에 따라 성에 대한 관념이 다를 수 있다. 그리스인들에게 성과 관련하여 대상이나 종류 및 방법은 도덕적 판단 기준에 해당되지 않는다.

 

그리스 남신들이 이 연신 또는 저 여인을 쫓아다니거나, 혹은 그리스 여신들이 이 남신 또는 저 남자 등과 관계를 맺는 것 자체는 별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있다. 실제로 그리스 성문화에 비추어본다면 이것은 반드시 비도덕적인 행위라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스에서 남성들이 아내뿐만 아니라 첩과 여자 노예 및 창녀들은 물론 소년이나 성인 남자를 사랑하는 것은 전혀 법적으로 문제되지 않았으며, 나아가 도덕적으로도 비난받지 않았다. 그리스의 사회 제도나 관습에서 결혼한 남자가 아내 이외에 첩이나 여자 노예와 결합하는 것은 단지 개인적 선택의 문제일 뿐이다.

 

푸코에 따르면 그리스인들이 성에 대해 도덕적 판단을 하는 기준은 단지 '과도함'에 있다고 한다. 그리스인들은 성적 쾌락의 도덕적 기준을 정상과 비정상으로 구별하는 질적인 측면에 관심을 두기보다는 양적인 측면에 관심을 두었다. 즉, 그들은 지나치리만큼 과도한 성적 쾌락을 누리려는 것을 무절제로 보고 있다. 무절제는 욕망을 통제하거나 지배하지 못하는 것이다. 무절제는 인간을 쾌락과 욕망의 노예로 만든다. 그리스인들은 이것을 수치스러워했다.

 

그리스인들은 절제를 통해 욕망과 쾌락을 지배하여 자유로워지려고 했다. 자기 자신을 지배할 줄 알아야 다른 사람도 지배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스인들은 자신을 통제하지 못할 정도로 욕망의 노예가 되는 경우처럼 양적으로 '지나친' 경우에 도덕적 판단을 적용한다. 따라서 그리스 문화에서는 제우스가 아내를 두고도 수많은 다른 여신과 여인들과 관계를 맺었지만 바람을 피운 사실 자체는 크게 도덕적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리스 동성애의 특징

 

그리스에서는 동성애(혹은 소년애)도 허용되어 있었다. 그리스의 성인 남자들은 어린 소년들을 연인으로 삼아 함께 지내는 것은 통상적인 일이었다. 그것은 대부분 아직 결혼을 하지 않아 자유로이 성관계를 가질 수 있는 미혼 남성이 가질 수 있는 특권이었다. 결혼 후에도 여전히 소년애를 하는 경우가 있었는데, 이것은 바람직하게 받아들여지지는 않았다.

 

그리스의 성인들이 소년들을 단지 소녀나 여성을 대신하여 사랑한 것은 아니다. 그들은 오히려 소년의 젊음이 발산해내는 이상적인 아름다움을 사랑하였다. 그리스 신화에서도 제우스가 트로이의 왕자였던 아름다운 가뉘메데스를 납치하여 올림포스에서 자신의 시종으로 삼은 이야기나, 포세이돈이 탄탈로스의 아들 펠롭스를 사랑하였던 이야기를 찾아볼 수 있다. 더욱이 아폴론의 경우는 휘아키토스와 퀴파리소스와 같은 미소년과의 연애 사건 등으로 인해 동성애의 신이라 불리기도 한다.

 

물론 그리스와 같은 가부장적 사회에서 동성애를 긍정적으로 수용하는 것은 극히 예외적인 현상이다. 대부분의 가부장적 사회가 이성애를 권장하며 동성애에 대해 혐오감을 표현해왔다. 그러나 유독 그리스 사회에서 이러한 특징이 나타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그리스 사회의 교육이 근본적으로 동성애 관계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에는 나이 어린 소년이 나이 많은 성인을 따라다니며 세상에 대한 경험과 지식을 배우며 육체적으로도 관계를 맺었던 관행이 있었다. 가령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에 나오는 유명한 아킬레우스와 파트로클로스의 관계는 젊은이들 간의 경쟁 의식과 우정을 북돋우는 촉매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스인들이 대체로 동성애에 대해 호감을 표시하고 있다는 사실은 핀다로스와 시나 솔론의 단편 및 플라톤 작품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소크라테스와 같은 유명한 스승의 경우에는 수많은 소년이 따라다닌 것으로 나온다. 그러나 플라톤의 "향연"에 나오는 소크라테스는 동성애의 육체적인 관계에 대해서는 무심하고 정신적인 관계만을 유지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리스의 성인들은 자신이 사랑하는 소년이 훌륭한 성인으로 자라나기를 바라면서 도덕적이며 지적인 교훈을 가르쳤다. 물론 모든 사람이 이러한 목적에 충실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동성애를 대부분 이러한 방식으로 이해했기 때문에 부정적으로 생각되지 않는 것이다.

 

 

2. 제우스는 왜 바람을 피울까?

 

그리스 영웅 탄생과 기원

 

제우스는 왜 그토록 바람을 피우는 것일까? 다른 신들도 아내를 두고 바람을 피우거나 자유롭게 성관계를 맺지만 단연 제우스가 돋보인다. 그리스 신화에서 제우스는 여신이나 여인과 관계를 맺는 것뿐만 아니라 때로는 어린 소년을 사랑하기도 한다. 그리스인들에게 성적 대상은 전혀 도덕적 문제가 되지 않는다. 더욱이 제우스는 대부분 처녀와 관계를 맺지만 유부녀도 예외는 아니라서 가정파탄까지 초래한다.

 

제우스가 헤라클레스를 낳기 위해 알크메네에게 접근한 이야기를 보자. 알크메네는 암피트뤼온의 아내였다. 암피트뤼온은 알크메네의 형제들을 죽인 종족과 전쟁중이어서 아내와 오랫동안 헤어져 이었다. 제우스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알크메네를 보고 마음을 빼앗겼다. 그러나 알크메네가 워낙 정숙한 아내였기 때문에 결코 다른 인간이나 신에게 자신을 내어줄 여인이 아니라는걸 알았다. 과연 제우스는 어떤 방법을 사용했을까? 그는 알크메네의 남편 암피트뤼온으로 변신하였다. 알크메네는 남편의 모습을 한 제우스에게 감쪽같이 속았다. 다음 날 돌아온 진짜 암피트뤼온은 자신을 반기지 않는 알크메네를 이상하게 생각하였다. 더욱이 알크메네는 이미 제우스부터 어떻게 전쟁에서 승리하였는지를 들었기 때문에 진짜 암피트뤼온의 이야기에 별로 귀기울지 않았다. 암피트뤼온은 아내의 부정을 알고 분노하여 아내를 불에 태워 죽이려 했지만 제우스가 폭우를 퍼부어 불길을 막아 겨우 사태를 진정할 수 있었다.

 

제우스와 결합한 수많은 여인은 대부분 그리스 사회에서 가장 영웅적이라 불리는 인물들을 낳는다. 헤라클레스는 단순히 인간이라고 말하기에는 너무나 탁월한 존재였다. 따라서 헤라클레스를 낳은 인간 아버지가 있지만 신적인 기원이 부가된다. 즉, 인간이 낳은 최고의 영웅 헤라클레스에게는 제우스라는 신적인 아버지가 있었다. 제우스 외에도 올림포스의 많은 남신과 여신이 인간과 결합하여 수많은 영웅을 낳았다.

 

대부분의 영웅 신화를 보면 영웅들에게는 인간적인 아버지나 어머니 외에도 신적 아버지나 어머니가 있다. 테세우스의 경우 아들이 죽은 줄 알고 자살까지 했던 비운의 아버지인 아테네의 왕 아이게우스가 엄연히 있지만 포세이돈이라는 신적인 아버지가 있었다. 아킬레우스는 아예 인간 어머니는 없고 인간 아버지인 펠레우스가 테티스 여신과 결합하여 낳은 영웅 중의 영웅이다. 이처럼 영웅들은 신과 인간이 결합하여 낳은 존재로 불멸과 사멸의 중간적 존재이다. 특히 제우스가 다른 남신보다 유독 많은 여인과 결합한 것은 최고신으로서의 제우스가 지닌 강력한 힘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그리스 민족과 건국 신화의 기원

 

그리스 신화에서 제우스가 바람을 피우는 것은 단순히 성도덕의 문제와 관련된 것은 아니다. 때로는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건의 기원을 설명하려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말하자면 한 민족이 발생하고 국가가 탄생하는 사건은 인간의 정신과 문명이 발전하는데 중요한 계기가 된다. 따라서 이와 같이 인간의 관점에서 아주 놀라운 사건을 설명하기 위해 신과 같은 초월적인 존재를 자연스럽게 끌어들이게 된다. 올림포스의 최고신 제우스는 권력의 상징이었기 때문에 각 지역에서 민족이나 도시의 기원을 설명하기 위해 끌어들이게 되었을 것이다. 역사적으로 보이기 위해 특별히 제우스는 각 지역의 주요 여신이나 여인들과 관계를 맺게 된 것이다. 다른 많은 지역에서도 특별히 숭배되는 신과 관련하여 건국 신화를 만들어 자신들이 바로 그 신의 후손임을 자랑하였다.

 

제우스는 신탁을 내리고 번개로 위협하여 아르고스의 헤라 신전의 여사제인 이오와 관계를 가졌다. 이오는 헤라가 의심을 품고 다가오자 다급해진 제우스에 의해 흰 암소로 변한다. 이후 이오의 삶은 고통의 연속이었다. 의심 많은 헤라가 100개 또는 1000개의 눈을 가진 아르고스에게 이오를 지키게 만들어 꼼짝없이 암소의 모습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게 된다. 다행히 헤르메스가 아르고스를 살해하지만 헤라는 또다시 등에를 보내 이오를 괴롭힌다. 이오는 헤라의 의심의 눈초리를 피해 수많은 곳을 방랑하면서 고통을 당한다.

 

이때 이오가 지나간 곳은 각 지역의 기원이 된다. 가령 이오가 지나간 연안은 이오니아 만이라고 명명되기도 하고, 또한 유럽과 아시아의 경계인 곳을 가로질렀다고 해서 '암소가 건넜다'를 의미하는 보스포로스라는 이름도 붙여졌다. 이오는 이집트에서 겨우 암소에서 벗어나 본래의 인간 모습을 되찾을 수 있었다. 그곳에서 다시 제우스와 결합한 이오는 '제우스의 손길'을 의미하는 에파포스라는 아들을 낳았다. 에파포스는 이집트 나일 강의 신의 딸 멤피스와 결혼하여 이집트의 주요 도서 건국 신화와 관련될 뿐만 아니라 많은 민족의 시조가 된다.

 

에우로페의 신화는 크레테의 위대한 왕의 탄생 신화와 테베 건국 신화와 연관된다. 에우로페는 튀레(혹은 시돈)를 지배하던 하게노르 왕의 딸이었다. 아게노르는 이오의 아들인 에파포스의 딸 리뷔아가 포세이돈과 결합하여 낳은 아들 중의 한 명이다. 아게노르에게는 에우로페라는 한 명의 딸과, 카드모스와 포이닉스 및 킬릭스라는 3명의 아들이 있었다.

 

에우로페가 제우스에게 납치되어 사라지자 갑자기 사라져버린 딸 에우로페를 찾기 위해 시리아의 아게노르 왕은 카드모스를 비롯한 자신의 아들들을 보내어 여동생을 찾을 때까지는 돌아오지 말라고 명령하였다. 길을 떠난 형제들은 여동생을 찾지 못하고 킬릭스는 킬리키아, 포이닉스는 포이니키아(페니키아)를, 카드모스는 테베를 세웠다는 건국 신화가 생겨난다.

 

 

다양한 신화의 흡수와 통합

 

제우스가 수많은 크고 작은 중요한 여신 및 여인들과 관계를 맺는 것은 다양한 지역 신화들의 통합과 관련되어 있다. 그리스의 올림포스 신화는 헬레네 민족 이전에 그리스에서 살던 원주민들의 신화들을 흡수, 통합하는 과정에서 체계화되었다. 그리스 신화는 그리스 각 지역에서 숭배되고 있던 수많은 여신을 통합하는 방법으로 제우스라는 최고신이자 남신이 여신들과 때로는 공식적으로 때로는 비공식적으로 결혼을 하여 각 여신의 기능과 역할 및 힘을 흡수하는 것으로 나온다. 가령 제우스는 원래 날씨의 신이었다. 도데체 어떻게 그는 일약 그리스 최고신이 되었을까? 아무리 고대 사회에서 '날씨'가 인간의 삶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인정하더라도 쉽게 이해하기 어렵다. 그러나 제일 먼저 메티스를 삼킴으로써 지혜를 갖게 되고, 테미스와 결합하여 우주와 인간 세계의 질서와 법칙을 지배하게 되고, 가장 강력한 여신인 헤라와 결합함으로써 공식적으로 그리스 최고신의 반열에 오른다. 이처럼 제우스는 최고신이 되기 위해 다른 어떤 신보다도 수많은 여신의 힘을 흡수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이와 같은 관점에서 제우스가 신호 속에 여러 여신이나 인간 여인들과 관계를 갖는 것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4. 제우스는 정의로운 신일까

 

제우스의 부정의와 프로메테우스의 고난

 

그리스 신화에서 프로메테우스는 인간에게 가장 호의적인 신이라 할 수 있다. 프로메테우스는 인류 문명의 기원이 되는 불을 가져다주었다. 이 일로 인해 프로메테우스는 제우스의 진노를 사서 카우카소스 산에 있는 바위에 묶여 독수리에 의해 간을 파 먹히는 형벌을 받는다. 아이스퀼로스의 작품 "결박된 프로메테우스"는 프로메테우스가 결박되는 장면을 배경으로 제우스의 독재에 대한 프로메테우스의 비판이 중심 주제이다.

 

프로메테우스는 제우스에 대해 가혹하고 제멋대로 정의를 행사한다고 주장한다. 더욱이 그 자신이 티탄족 신들을 어느 정도 설득하여 제우스가 전쟁에서 승리하는데 일조를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배은망덕하게 자신에게 가혹한 벌을 주고 있다고 불평한다. 그렇지만 그가 처벌을 받는 이유는 바로 제우스가 인간 종족을 모조리 없애버리고 다른 종족을 만들려고 하였는데 자신이 반대하여 죽음을 면하게 하였기 때문이다. 단지 인간을 동정한 이유로 프로메테우스는 견디기 힘든 고통을 당할 운명에 처하게 된 것이다. 아이스퀼로스가 그려내고 있는 프로메테우스는 단지 억압받는 의인일 뿐이며 제우스는 전혀 정의롭지 못하며 배은망덕한 폭군에 불과하다.

 

 

왜 프로메테우스는 벌을 받을 수밖에 없는가

 

과연 프로메테우스는 정의로운 신이고 제우스는 부정의한 신이가? 프로메테우스에 관한 전반적인 이야기를 종합해볼 때 프로메테우스의 행위에도 몇 가지 문제가 있다. 가장 중요한 점은 신들이 자신에게 맡긴 일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신들이 이 세계에 동물을 만들고서 빛 가운데로 나오게 하기 전에 각기 고유한 능력을 나눠줄 것을 결정하였다. 특별히 프로메테우스와 에피메테우스에게 임무가 맡겨졌다. 에피메테우스는 자신이 모든 것을 처리한 후에 프로메테우스가 점검하는 방식으로 일을 하자고 제안하였다. 프로메테우스는 흔쾌히 수락했다. 그런데 마지막으로 프로메테우스가 모든 일이 제대로 되었는지 확인하는 과정에서 인간들이 아무 것도 받지 못한 채로 남아 있는 것을 보고 고심을 하게 된다. 그는 하늘로 올라가 신들의 불을 훔쳐 인간에게 가져다주는 것으로 일을 마무리한다.

 

프로메테우스가 불을 훔친 행위는 인간에게는 아주 중요한 사건이었다. 인간은 불을 통해 문명을 이뤘기 때문이다. 인간의 입장에서 본다면 프로메테우스는 아주 훌륭한 신이었다. 그러나 신들의 입장에서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까? 프로메테우스는 명백히 규율을 깨고 신들의 세계에서 불을 훔친 자로 당연히 처벌을 받아야 하는 존재였다. 여기서 '불'이라는 것은 단순히 물리적인 의미의 불만이 아니고 인간과 동물을 구별해주고 신과의 유사성을 나타내주는 "이성의 불"을 상징하기도 한다. 즉, 프로메테우스는 본래 엄격하게 구분되어 있는 인간 세계와 신의 세계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들어 우주의 질서를 혼란시킨 중대한 범죄를 저지른 자였다. 그렇기 때문에 신들의 세계를 지배하는 제우스로서는 이러한 프로메테우스에게 적절한 처벌을 내리는 것이야말로 정의로운 행동이었다.

 

 

신과 인간의 도덕은 다르다

 

그리스 신화는 나름대로 정의와 도덕 등에 대한 가치평가를 갖고 있다. 헤시오도스는 특히 제우스의 정의와 질서에 대해 강조한다. 우라노스와 크로노스는 자신들의 부정의 때문에 벌을 받았지만 제우스는 정의로운 신이기 때문에 영원히 지배하는 위치에 있다고 생각하였다.

 

헤시오도스의 경우 선악의 개념이 보다 뚜렷하다. 헤시오도스는 근본적으로 이원론적 세계관을 표명하였다. 그는 이 세계의 밝은 측면과 어두운 측면에 대해 각기 설명하였다. 우주발생에 관해 설명하면서 처음부터 이 세계의 어두운 측면이 존재하였다고 주장한다. 태초에 카오스로부터 가이아와 타르타로스 및 에로스가 태어났다. 카오스는 다시 밤의 여신 닉스와 어둠의 신 에레보스를 낳았다. 이것은 자연 현상인 밤과 어둠이 존재하는 이유를 설명한다. 그런데 헤시오도스는 바로 밤의 여신이 어둠의 신과 결합하여 '죽음'의 신 Thanatos, '비난'의 신 Momos, '고통'의 신 Oizys, '불화'의 신 Eris 등과 같은 악의적인 자식을 낳았다고 말한다. 여기에는 이미 이 세계에 대한 인간의 부정적 가치관이 개입되어 있다. 더욱이 그는 인간 세계에도 악이 존재하는 이유를 최초의 여인인 판도라가 탄생한 것 때문이라고 2번이나 거듭하여 설명한다. 또한 인류가 타락해가는 과정을 5단계로 나누면서 인류 파멸의 원인을 인간이 자초한 부정의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이것은 기본적으로 선한 사람은 상을 받고 악한 사람은 벌을 받는다는 인과응보 원리에 기초하고 있다.

 

근본적으로 그리스 신화는 세계와 인간에 대한 깊은 통찰로부터 시작된다. 따라서 그리스 신화에는 세계의 질서와 인간의 도덕법칙에 대한 사유가 내재되되었다. 비록 그리스 신들이 개별적으로 인간의 일상적 삶 속에 투영될 때 임의적이고 독자적인 방식으로 행동하는 듯한 특징을 보일지라도, 전체적으로는 자연의 필연적 법칙과 인과응보의 원리에 지배를 받는 것으로 나타난다. 즉, 인간뿐만 아니라 신도 필연적인 운명의 법칙에 지배받는다.

 

따라서 그리스 신들이 표면상으로 비도덕적이고 반도덕적으로 보일지라도 그것은 그리스인들에게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리스인들은 신들이 표출하는 사랑과 질투 및 싸움 등과 같은 인간적인 감정을 통해 신들이 훨씬 더 생생하게 살아 있음을 느꼈기 때문이다. 우리는 단순히 현대적인 도덕 개념에 의해 그리스 신들을 난도질할 수 없다. 그리스 신들도 나름대로 자신들의 법칙에 따라 행동한다. 인간이 임의로 인간의 잣대를 들이대 신들의 도덕성을 판가름할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7장 인간의 비극적 운명을 슬퍼하다

 

2. 인간이 가야 할 길은 어디일까

 

인간이란 무엇인가

 

근본적으로 인간은 죽을 운명을 가진 존재이다. 더욱이 죽을 때까지 고통에서 벗어날 수 없는 존재이다. 그리스 서사시에서 인간들은 신들에 비해 너무나 하찮고 불쌍한 존재로 나온다. 호메로스에 따르면 인간은 늙어가며 죽게 되고 자주 불행을 만나는데 비해, 신은 영원히 죽지 않고, 늙지도 않으며, 항상 행복하고 삶을 아주 수월하게 살아간다. 아무리 뛰어난 인간이라도 언젠가는 죽을 수밖에 없다. 가령 헥토르는 트로이인들에게 신과 같이 떠받들어졌지만, 아킬레우스에 의해 죽은 후 전차에 묶여 끌려다니며 들짐승의 먹이가 된다. 인간의 찬란한 영화는 한순간에 사라질 수 있다. 제우스는 모든 것 중에서 인간을 가장 비참한 존재로 여긴다. 헤파이스토스도 죽은 자들을 위해 신들이 다투어서는 안된다고 주장하며, 아폴론도 나뭇잎같은 하찮은 인간들을 위해 다른 신과 싸우는 것을 거부한다. 인간의 죽음은 언젠가는 오고야 말 것이고 피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들이 어차피 죽을 인간을 위해 다툴 필요는 없는 것이다.

 

인간의 삶은 덧없는 한순간에 불과하다. 그것은 기껏해야 좋은 것과 나쁜 것이 섞인 것이고, 때로는 나쁜 것으로 이루어진 삶도 있다. 지금 아무리 행복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한순간에 불행의 나락에 빠질 수 있다. 인간의 삶은 궁극적으로 비참할 수밖에 없다. 제우스는 인간에게 줄 좋은 선물이 든 항아리와 나쁜 선물이 든 항아리를 2개 가지고 있다. 모든 인간의 운명은 이 2개의 항아리에 들어 있는 좋은 선물들과 나쁜 선물들이 섞여 있거나, 또는 나쁜 선물들로만 이루어진다. 즉, 궁극적으로 인간들에게 항상 행복한 삶은 허용되어 있지 않다. 어떤 때는 행복하다가 때로는 불행한 삶을 살기도 하며, 아에 불행하기 짝이 없는 삶을 살기도 한다. 운명은 때로는 맹목적이다. 우리의 삶이 어디로 가는 것인지를 누가 알 수 있겠는가? 영원한 행복은 인간에게는 한낱 꿈에 불과하다. 아킬레우스의 아버지 펠레우스는 일개 인간으로서 테티스 여신과 결혼하는 행운을 얻었을 뿐만 아니라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아들 아킬레우스도 얻었다. 그렇지만 그는 늙어서 아들이 자기보다 더 일찍 죽었다는 소식을 들어야 했다. 더욱이 트로이의 프리아모스 왕은 금은보화가 풍족한 도시에서 아들만 50명을 낳았지만 전쟁을 통해 그 많은 아들을 모두 잃고 비참하게 살해당했다.

 

 

너무 지나치지 마라

 

그리스 신화가 인간에 대해 끊임없이 경고하는 한 가지 중요한 교훈이 있다. 그것은 욕망에 대한 것이다. 그렇다고 욕망을 무조건 억눌러야 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너무 지나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욕망이란 그 자체로 부정적인 것은 아니다. 인간에게 욕망이라는 것이 없다면 도데체 무엇이겠는가? 인간은 욕망을 갖는 한에서 살아 있는 존재가 아니겠는가? 아무런 욕망을 가지지 않는 존재란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다. 다만 어떠한 욕망을 갖고 살며, 욕망의 크기가 어느 정도인가가 문제인 것이다. 욕망에는 먹고 마시려는 욕구나 성적 본능을 만족시키려는 육체적 욕망도 있지만 진리를 추구하고 인식하려는 이성적 욕망도 있다. 따라서 모든 욕망을 부정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인간이 근본적으로 자신의 한계를 알지 못하고 지나치게 욕망을 추구할 때 휘브리스, 즉 '오만'을 범하게 된다. 신들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휘브리스를 범하는 자는 항상 가혹한 벌을 받고 비참하게 삶을 마감하게 된다. 우리는 익히 알고 있다. 소크라테스가 말한 "너 자신을 알라."는 실제로는 모르면서도 안다고 생각하는 것에 대해, 그리고 알면서도 행동하지 않는 것에 대해 경계하고 있다. 그러나 원래 델포이 신전에 새겨져 있는 "너 자신을 알라."는 인간이 얼마나 유한하며 신과 다른 존재인지를 알라는 격언이었다. 그리스 신화는 유한한 존재인 인간에 대해 신과의 비교를 통해 끊임없이 상기시키고 있다. 만약 인간이 자신의 한계를 알지 못한다면 언젠가는 불행의 나락에 빠질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그것은 인간에게 단순히 현재의 삶에 안주하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궁극적으로 인간이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이 있다. 가령 인간은 본질상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인데도 불구하고 죽지 않으려고 한다든가, 또는 인간이면서도 감히 신들을 시험하려고 하거나 신들처럼 되려고 하는 것을 말한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이카로스 이야기는 특히 휘브리스와 관련하여 중용의 정신을 잘 보여주고 있다. 크레테의 다이달로스는 미노스 왕의 분노를 사서 자신이 만든 미궁에 갇힌 적이 있었다. 도데체 어떻게 하면 탈출할 수 있을까 궁리하다가 밀랍으로 새의 깃털들을 붙여 커다란 날개를 만들었다. 그는 아들 이카로스의 등에 날개를 달아주며 "너무 높게도 너무 낮게도 날지 말라."고 당부한다. 너무 낮게 날면 날개가 물에 젖어 무거워 떨어질 것이고 너무 높게 날면 깃털들을 붙인 밀랍이 태양빛에 녹아 날개가 떨어져 추락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러나 이카로스는 자만심으로 아버지의 충고를 들으려 하지 않고 태양 가까이 날다가 바다에 떨어져 죽은 것으로 나온다. 현대에 들어 이카로스는 젊은이의 이상을 상징하는 긍정적인 의미로 받아들여지지만, 그리스에서는 인간의 한계를 모르고 오만을 범하였다가 신들에게 정당한 벌을 받은 자로 인식된다.

 

너무나 잘 알려진 시쉬포스의 경우도 인간은 근본적으로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을 타고났는데도 불구하고 죽음을 피하려다 돌이킬 수 없는 죄를 저지른 인물로 등장한다. 시쉬포스의 손자인 벨레로폰(혹은 벨레로폰테스)도 비록 영웅적인 모험을 한 인물이지만 마지막에 견디기 어려운 벌을 받는 존재로 등장한다. 그는 자신의 이름이 의미하는 대로 코린토스의 참주 '벨레로스를 죽인 자'였다. 그래서 그는 티륀스의 프로이토스 왕에게 갔다가 왕비 안테이아(혹은 스테네보이아)의 유혹을 받지만 물리치게 된다. 그러자 안테이아가 오히려 벨레로폰테스가 자신을 유혹하려 했다고 뒤집어씌웠다. 프로이토스는 벨레로폰테스를 자신의 장인 이오바테스에게 보내며 죽이라는 전갈이 들어 있는 편지를 한 통 보냈다. 이오바테스는 편지를 받고 벨레로폰테스에게 키마이라를 죽이라는 임무를 주었다.

 

그렇지만 벨레로폰테스는 이오바테스가 명령한 키마이라를 살해하였을 뿐만 아니라 아마존과의 전투 등 위험한 모험들을 무사히 마치고 돌아왔다. 결국 이오바테스는 그를 자신의 사위로 삼았다. 그러나 그는 인간으로서 자신의 유한성을 깨닫지 못하고 페가소스를 타고 하늘로 날아 올라가려다가 제우스에 의해 내동댕이쳐진 후에는 사람들을 피해 홀로 방황하다가 비참하게 죽었다. 벨레로폰테스는 분명히 한때 신들의 사랑을 받은 뛰어난 영웅이었지만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오만한 행위를 하려다 한순간에 신들에게 버림받아 비참한 생애를 마친 것이다. 그리스 신화에는 이러한 인간이 지나친 욕망에 대해 늘 경계하고 있다.

 

 

신에게 도전하지 마라

 

인간이 자신의 한계를 깨닫지 못하고 저지르는 가장 큰 죄는 신들에게 도전하는 것이다. 이것은 그리스 신화뿐만 아니라 다른 지역 신화에서도 자주 발견할 수 있다. 가장 유명한 이야기는 플라톤도 언급하였던 오토스와 에피알테스 형제에 관한 이야기이다. 포세이돈이 이피메데이아와 결합하여 낳은 두 아들 오토스와 에피알테스는 흔히 알로이우스의 아들들이라는 의미에서 알로아다이라 불렸다. 그들은 해마다 몸통이 한 완척(45cm)씩 불어나고 키는 한 길(1.8m)씩 자라났다. 그러다 보니 9살이 되었을 때는 몸통이 9완척(4.05m)이고 키가 9길(16.2m)이나 되는 엄청난 거인이 되었다. 그들은 하늘로 올라가겠다고 올림포스 산 위에 옷사 산을 쌓아 올리고 옷사 산 위에 펠리온 산을 쌓아 올릴 계획을 세웠다. 더욱이 오토스는 아르테미스와 결혼하려 했고 에피알테스는 헤라와 결혼하려 했다. 결국 아르테미스가 사슴으로 변해 그들 사이로 뛰어 들어가자 서로 사냥감으로 잡겠다고 다투다가 서로가 던진 창에 맞아 모두 죽고 만다. 호메로스는 그들이 너무 위협적이었기 때문에 아폴론이 다 자라기도 전에 둘 다 죽여버렸다고 말한다.

 

플라톤의 "향연"의 전체 주제는 에로스이지만 신들에 대한 인간들의 도전에 관해 아주 흥미로운 설명이 등장한다. 아주 먼 옛날에 인간은 지금과는 다른 모습과 본성을 가졌다고 한다. 처음에 인간은 세 종류로 나누어 있었다. 즉, 현재의 인간을 기준으로 한다면 남성과 남성이 하나인 '남남성'과 여성과 여성이 하나인 '여여성'과 남성과 여성이 하나인 '남녀성'이 있었다. 인간들은 둘이 하나였기 때문에 2개의 머리가 합쳐진 하나의 머리에다 4개의 손과 4개의 다리를 가진 전체적으로 공과 같이 둥근 모습을 가졌다. 그들은 엄청난 힘과 능력을 가졌기 때문에 오만 방자해져서 신들을 공격하려 했다. 제우스를 비롯한 신들은 그렇다고 인간들을 모조리 죽일 수도 없고, 또 더 이상 참을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제우스는 한참 고민한 끝에 인간들을 약하게 만들기로 결정하고 인간들을 반쪽으로 나눈 후에 아폴론에게 치료해주라고 명령하였다. 아폴론은 잘린 곳의 피부를 끌어 모아 배꼽을 만들고 그 주위에 약간의 주름을 남겨 인간들이 예전의 자기 상태에 대해 기억을 하도록 만들었다.

 

우리는 그리스인들이 신들에 도전하는 인간의 이야기를 통해서 무엇을 말하려는 것인지 살펴볼 수 있다. 그것은 인간이 하찮고 나약한 존재이므로 신들이 명령하는 대로 꼭두각시나 노예로 살아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리스인들만큼 인간의 자유를 사랑하고 존중하는 민족은 찾기 드물다. 비록 그들이 노예제를 당연시하는 폐쇄적인 도덕 체계를 가진 세계에 살았다고 하더라도, 인간의 정신적 자유에 대한 끊임없는 탐구는 계속되었다. 그것은 인간이 궁극적으로 자신이 누구이고 무엇인가를 아는 것으로부터 출발한다. 인간은 신 앞에서 유한하고 나약한 존재에 불과하다. 이 말은 인간의 유한성을 단죄 지으려고 하는 의미가 아니다. 오히려 이 세계는 무엇이고 인간이 어떠한 존재인가를 깨달아 가장 지혜로운 삶을 찾아내도록 촉구하는 것이다. 인간의 헛된 욕망은 얼마나 부질없는가! 우리는 진정으로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가장 행복할 수 있는지를 물을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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