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 최고의 발명 연옥, 지옥을 이용하는 종교 by 중세를 오해하는 현대인에게

Realize 2023. 12. 31. 23:59

중세를 오해하는 현대인에게 p129

 

사람은 참 대단하죠~?

대동강물 팔아먹은 봉이 김선달도 한수배웠다고 그랜절할듯........

 

 

연옥, 중세 최고의 발명

 

간혹 사후 세계에 대해 상상해 보곤 한다. 모든 사람이 한 번쯤은 사후의 운명에 관해 진지하게 고민했을 것이다. 영화 <이웃집에 신이 산다>는 죽음과 사후 세계가 인간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코믹하게 보여준다. 이 영화의 주인공으로 브뤼셀의 한 아파트에 사는 신은 아내와 자식들에게 걸핏하면 소리 지르고 인간을 괴롭히면서 즐거워하는, 한마디로 심술궂고 고약한 성격의 절대자다. 아들인 예수는 이러한 아버지 신에 반기를 들고 가출해 버렸고, 현며한 딸인 에아는 새로운 신약 성서를 쓰기 위해 여섯 명의 사도를 찾아 나선다. 영화 최고의 장면은 에아가 아버지의 컴퓨터에 몰래 들어가 지상의 인간들에게 남은 수명을 문자로 전송하는 부분이다. 즉 에아가 아버지의 전지전능한 힘의 원친인 인간 죽음의 비밀을 봉인 해제한 셈이다.

 

영화는 죽음이라는 무거운 주제를 유머러스하게 그려 내고 있지만 일상의 삶에서 죽음과 사후 세계는 때론 현실보다 더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다. 그런 점에서 사후 세계가 현세의 삶을 무겁게 짓누른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중세와 근대 유럽의 많은 예술품이 사후 세계를 그렸다는 점에서도 잘 알 수 있다. 게다가 근대의 탄생기로 간주되는 르네상스 시기에는 최후의 심판 그림이 오히려 늘어났다. 무시무시한 지옥도는 인간들에게 죽음과 사후 세계에 대한 공포를 시각적으로 증폭시키기에 충분했다. 오래전에 베네치아 토르첼로섬에 있는 성당 벽면에 그려진 지옥도를 본 적이 있는데, 현대에 살고 있는 나조차도 서늘한 느낌을 받았다.

 

그러나 중세 유럽에서 죽음과 지옥의 공포에 짓눌려 떨고 있던 인간들에게 한 줄기 빛이 찾아왔다. 영화 속 에아가 아버지가 가진 절대 권력의 원천인 생명 시간을 인간들에게 전송한 것처럼 중세 유럽은 새로운 사후 세계의 지도를 만들어 냈다. 그것은 바로 연옥이라 불리는 새로운 공간의 탄생이었다. 연옥이라는 개념이 만들어지기 전까지 유럽 기독교인들은 사후 세계를 지옥과 천국으로만 구분했다. 신을 믿고 선행을 한 사람은 천국으로, 그렇지 않은 사람은 지옥행이었다. 이러한 구도하에서는 지옥에 떨어진 사람들은 영원히 구제받을 수 없었다. 그러나 연옥이 생기면서 희망의 가능성이 열렸다. 연옥은 불로써 자신의 죄를 정화하고 최종적으로 천국으로 갈 수 있다는 중간 단계의 공간이었다. 전적으로 의로운 사람은 바로 천국으로 가겠지만 가벼운 죄인들은 연옥으로 가서 불로 죄를 씻고 종국에는 구원받을 수 있었다. 당시 교회는 죄를 유발시키는 원인으로 교만, 시기, 분노, 음욕, 탐식, 탐욕, 나태를 7죄종으로 규정했는데 현실의 삶에서 이러한 죄를 한 번도 범하지 않고 살 수 있을까? 그런 점에서 보통 사람들에게 연옥은 희망의 공간이었을 것이다.

 

프랑스 역사가 자크 르 고프는 <연옥의 탄생>이라는 책에서 12세기에 연옥이라는 개념이 형성되기 시작했음을 상세히 밝혀냈다. 중세 최고의 연옥 설계자는 단연코 단테였고, 그는 자신의 작품 <신곡>에서 연옥을 환상적으로 표현했다. 단테의 연옥은 일곱 개의 원반이 포개져 정상으로 갈수록 원의 반경이 줄어들고, 각 원에서는 죄인들이 순서대로 교만, 시기, 분노, 나태, 탐욕, 탐식, 음욕의 죄를 씻는다. 단테의 시의 언어로 묘사한 연옥은 여러 화가들에 의해 그림으로 재탄생했다. 그 결과 중세 후반 유럽 기독교인들에게 연옥은 구체적인 이미지를 지닌, 실재하는 공간이 되었다.

 

여러 면에서 연옥은 기발한 아이디어였다. 이 사후 공간은 교회에 엄청난 부를 안겨 주기도 했다. 연옥에서 고생한 불쌍한 망자들을 위해 살아 있는 사람의 노력이 중요했고, 산 자의 기도와 봉헌 여하에 따라 연옥 수감 기간이 달라질 수 있었다. 산 자들의 기도와 봉헌을 중재하는 곳이 바로 교회였다. 살아 있는 사람들이 할 수 있는 가장 손쉬운 일 중 하나가 교회가 발행하는 면벌부를 구입하는 것이었다. 이제 교회는 산 자뿐만 아니라 죽은 자들에 대해서도 권위를 가지게 되었다. 16세기 초 교황청이 바티칸 대성당 재건 사업을 위해 면벌부를 남발하고 루터가 면벌부와 그와 연관된 연옥 신앙을 부정하면서 종교개혁이 일어났지만 연옥과 면벌부는 보통 사람들에게는 손쉽게 구원을 확보할 수 있는 편리한 방편이기도 했을 것이다.

 

오랜 역사에서 인간의 과학 지식은 무한히 증가했지만, 사후 세계에 대한 지식은 티끌만큼도 발전하지 않았다. 그래서 과학이 아니라 여러 종교에서 계속해서 이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사후 세계에 대한 성찰은 현실과 동떨어진 문제가 결코 아니다. 왜냐하면 알 수 없는 사후 세계가 현실의 삶을 규정하고 제약하는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후 세계의 지도를 어떻게 상상하느냐는 너무나 중요한 문제인 것이다. 때론 사후 세계에 대한 두려움에 떨지 말고 오늘을 즐기라는 고대 현자들의 조언을 따라 보는것도 나쁘지 않을 듯하다.

 

 

지옥을 이용하는 종교

 

대학 시절 간혹 명동에 나가면 어김없이 '예수 천국, 불신 지옥'을 소리 높여 외치는 사람들을 만났다. 지금은 이런 광경을 그때처럼 자주 보지는 못하지만, 그렇다고 지옥의 공포를 조장해서 믿음을 강요하는 외침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대다수 종교는 지옥의 공포를 통하여 신자들에 대한 통제력을 확보했다. 불교식 사후 세계와 심판 그리고 지옥을 흥미롭게 구성한 영화 <신과 함께>에 나오는 지옥의 모습은 끔찍한 공포를 불러일으키기보다는 약간의 코믹함을 선사한다. 그러나 불교 탱화에 나오는 지옥도는 서늘한 공포를 조장하기에 충분하다. 불교의 지옥도는 망자가 사후에 통과해야 할 과정을 보여 준다. 불교에서 망자는 사후 열 명의 지옥 대왕들에게 심판을 받는다. 사후 49일 동안에는 일곱 명의 지옥 대왕의 심판을, 100일째에는 여덟 번째 지옥 대왕의 심판을, 1년째에는 아홉 번째 지옥 대왕의 심판을, 3년째에는 열 번째 지옥 대왕의 심판을 받는다. 최종 심판에 따라 망자는 지옥도, 아귀도, 축생도, 아수라도, 인간도, 천상도라 불리는 6도에서 다시 태어난다. 선한 업에 따라 망자는 아수라도 인간도 천상도에 환생하며, 악한 업에 따라 망자는 축생도 아귀도 지옥도에 떨어진다. 가장 악한 자들은 지옥에 떨어져 엄청난 고통을 겪게 된다. 죄의 경중에 따라 여러 종류의 지옥이 배정되는데, 초반지옥 도산지옥 화탕지옥 한빙지옥 검수지옥 발설지옥 독사지옥 거해지옥 철상지옥 풍도지옥 흑암지옥 등이 있다. 하지만 불교에서 진정한 지옥은 팔열팔한지옥이라고 불리는 열여섯 개의 지옥이다. 그중 하나인 아비지옥에는 부모를 죽인 자, 세상의 존경을 받을 만한 성자를 죽인 자, 부처의 몸을 상하게 하여 피를 흘리게 한 자, 교단의 화합을 깬 자 등 5역죄를 지은 죄인들이 온몸이 마르고 피까지 말라 버리며, 불구덩이에 던져지기도 하며, 눈을 파 먹히기도 하는 고통을 ㅂ다는다. 이 지옥은 고통과 괴로움이 한순간도 쉬지 않고 계속되기에 무간지옥이라 불리기도 한다. 그러나 불교의 지옥은 영원하지 않다는 점에서 기독교의 지옥보다는 희망적이다. 일정 기간이 끝나면 다시 심판을 받고 6도 중 한 곳에서 환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불교의 지옥은 기독교의 연옥과 유사하다..

 

자하남이라 불리기도 하는 이슬람의 지옥은 한마디로 불의 고통을 받는 곳이다. 그런 연유로 쿠란에서 지옥은 자주 불지옥으로 불린다. 15세기에 그려진 한 지옥도에는 무함마드와 천사 가브리엘이 지옥에서 고통받는 여인들을 보고 있는데, 그 여인들은 매춘을 한 죄로 영원히 불에 타는 고통을 받고 있다. 일반적으로 이슬람의 지옥은 하느님을 따르지 않는 불신자들이 가는 곳이다. 그렇지만 죄의 경중에 따라 지옥에서 받는 벌과 고통도 차별화된다. 이 지옥을 관리하는 사람을 하느님께서 보낸 19천사들이며, 불신자들은 지옥의 화염 속에서 불의 고통을 겪으며 한탄과 통곡을 한다. 쿠란에 따르면 죄인들은 지옥에서 영원히 살게 될 것이다. 하지만 이슬람 학자 중 일부는 지옥에 떨어진 영혼은 최종적으로 용서를 받고 천국으로 갈 수 있다고 주장한다.

 

공포의 지옥 이미지를 활용해 신자들을 통제하는 데 있어서 기독교는 불교와 이슬람보다 훨씬 뛰어났다. 중세 유럽 사회에서는 지옥 그림을 엄청나게 많이 그렸다. 그림뿐만 아니라 설교와 문학작품에서도 지옥은 단골 주제였다. 중세 말에 이르러 공포심을 불러일으키는 지옥 이미지는 절정에 달했다. 기독교 역사에서 지옥의 모습을 가장 상세하게 보여 준 사람은 단테일 것이다. 단테를 포함해 중세 유럽 기독교인들이 상상한 지옥은 천국과 마찬가지로 지구상에 실제로 존재하는 공간이었다. 타락한 천사이자 지옥의 대왕 루시퍼가 하늘에서 지구로 떨어지면서 깊은 구멍을 만들었는데 바로 이 공간이 지옥이 된 것이다. 단테가 상상한 지옥은 총 9층으로 구성되어 있고, 아래층으로 내려갈수록 무거운 죄인들이 벌을 받는다, 첫 번째 층인 림보는 미처 세례를 받지 못하고 죽은 아이들이나 그리스도 이전 철학자들이 있는 공간이다. 지옥이긴 하지만 고통과 괴로움이 없는 곳이다. 2층에는 애욕의 죄인들이, 3층에는 탐식의 죄인들이, 4층에는 탐욕의 죄인들이, 5층에는 분노의 죄인들이, 6층에는 이단의 죄인들이, 7층에는 폭력의 죄인들이, 8층에는 사기의 죄인들이, 9층에는 배신의 죄인들이 고통을 받고 있다.

 

단테에게 지옥은 회개나 참회를 통해 구원받을 수 있는 최소한의 희망도 없는 절망의 공간이었다. 그런 연유로 단테는 사후세계 여행기인 <신곡>에서 지옥문 입구 위에 무시무시한 글귀를 만들어냈다. "비통의 도시로 가려는 자, 나를 거쳐서 가라. 영원한 고통을 당하려는 자, 나를 거쳐서 가라. 저주받은 무리 속으로 가려는 자, 나를 거쳐서 가라. 정의는 지존이신 창조주를 움직여 그 성스러운 힘과 최고의 지혜와 시원의 사랑으로 나를 만들었으나니. 나보다 먼저 창조된 이는 영원한 존재 외에는 없으니 나는 영원히 남아 있을 것이로다. 여기 들어오는 너희는 모든 희망을 버려라." 한마디로 지옥은 아무런 희망도 없이 영원한 고통을 감내해야 하는 곳이었다. 불교의 지옥은 시간이 지나면 벗어날 수 있는 공간이지만, 기독교의 지옥은 영원한 형벌의 장소이기 때문에 더욱더 절명적인 곳일 수밖에 없었다.

 

중세 말 프랑스와 이탈리아에서 지옥의 이미지를 연구한 제롬 바쉐는 교회가 지옥 이미지를 장악하고 통제함으로써 죽음의 권력을 전유했다고 해석했다. 무시무시한 지옥의 이미지는 대중들의 삶과 행동을 규제하고 통제할 수 있는 훌륭한 수단이었다. 당시 대중들은 성당을 드나들면서, 설교를 들으면서, 기도서를 읽으면서 일상적으로 지옥의 공포를 체험했고, 이러한 체험을 통해 지옥이 바로 곁에 존재한다는 두려움과 공포를 느꼈을 것이다. 죄의식과 처벌에 대한 공포는 대중이 자신의 잘못을 고해하고 교회의 가르침에 순종하도록 만들었다. 이처럼 교회는 신만이 가질 수 있는 죽음의 권력을 지상에서 장악하고, 신도들의 양심과 품행을 통제할 수 있었다.

 

지옥에 대한 공포는 근본적으로 죽음에 대한 공포로부터 나온다. 인간이 피할 수 없는 숙명인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이용하는 관행은 종교의 오래된 전술이었다. 몽테뉴는 지옥의 공포를 통해 도덕이나 종교를 강제하려는 태도와 종교적 광신주의르 경멸했다. 그는 자신의 저서 <수상록>에서 "나느 내가 양배추를 심고 있을 때 죽음이 나를 찾아오기를 바란다. 죽음에 무심할 때, 그러니까 죽음보다는 아직 완성이 덜 된 내 정원을 더 생각하고 있을 때, 그럴 때 죽음이 나를 찾아왔으면 좋겠다"라고 말하면서 죽음에 무심할 수 있기를 희망했다. 이처럼 그에게 철학을 한다는 것은 죽는 법을 배우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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