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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방사상과 결합한 보고밀파 카타리파 by 조금은 삐딱한 세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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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방사상과 결합한 보고밀파 카타리파
르네상스가 반기독교적인 활동은 아니었다. 그러나 예술 분야나 이탈리아 꼬무네 등의 활동에서 드러나듯 그간 강조되어온 헤브라이즘적인 가치에 대해 그레코로만의 헬레니즘적인 가치를 확대하는 것은 르네상스 전반에서 중요한 명제였다. 유럽이 1000여 년간 가톨릭의 철저한 지배하에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헬레니즘적인 성향이 완전히 사라진 적은 없었다. 특히 르네상스의 시발점이 되었던 북부 이탈리아 지역은 더욱 그런데, 르네상스를 보다 깊이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지역의 특수한 역사적 종교적 상황을 좀더 살펴보아야 한다.
10세기경 유럽 기독교계의 상황을 보자. 앞서도 언급한 바 있지만 서기 395년 로마제국이 동과 서로 분할되는 즈음에 교회도 양쪽으로 나뉘게 되었다. 서유럽 전역에서는 바티칸으로 대변되는 로마 가톨릭이 발달한 반면, 그리스, 발칸반도 지역과 동유럽, 러시아 등에서는 콘스탄티노플의 비잔티움 제국을 바탕으로 그리스 정교, 즉 동방정교가 발달하게 되었다. 이 두 교회는 세세한 부분에 차이가 있지만 제국의 분열 전후 로마에서 정리한 주요 종교회의 결정사항을 준수하고 삼위일체 등 기독교의 핵심적인 틀을 공유하고 있다. 서로 간에 반목이나 견제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비잔티움 제국은 동쪽의 이교도의 세력으로부터 기독교 세계를 지켜나가는 전위로 15세기 중반 멸망할 때까지 특별한 의미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헬레니즘과 아시아적 전통의 영향력이 다분한 이 지역에는 아무래도 옛날부터 전해오는 민간신앙과 동방의 사상이 기독교와 연관을 주고받으며 득세할 수밖에 없었다. 대표적인 예로 로마제국 말기부터 중세 초기, 즉 첫 밀레니엄의 중후반기에 이 지역에서 맹위를 떨쳤던 마니교를 꼽을 수 있다.
3세기에 마니가 창안한 마니교는 고대 페르시아, 지금의 이란에서 융성했던 조로아스터교에 기독교 및 불교의 요소가 섞인 것이 특징이다. 원래 조로아스터교 사제였다고도 알려진 마니가 이후 종교분쟁으로 화형을 당하게 되는 만큼 마니교는 조로아스터교의 이단으로 시작했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마니교는 이후 중앙아시아, 인도, 중국에까지 진출하지만 10세기경 유럽 지역에서는 그 자체로의 세력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이때를 전후로 마니교에 지대한 영향을 받은 것이 분명한 두 기독교 이단종파가가 그리스 정교의 동유럽과 로마 가톨릭의 서유럽에 동시에 출현하게 되는데, 이들이 바로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여름>에도 등장하는 보고밀파와 카타리파다.
※ 이해를 돕기 위해 이단 종파라는 표현을 사용하지만 이는 기독교적인 시각에서 보는 관점일 뿐이다.
보고밀파는 그리스 정교의 중심 지역인 콘스탄티노플을 비롯해 지금의 불가리아, 크로아티아 등 발칸 지역에서 무시할 수 없는 영향력을 갖고 있었으며 카타리파는 이탈리아 북부와 에스파냐 동부, 프랑스 남부에 걸친 서유럽의 너른 영역에서 여러 도시의 행정과 사회체제 전반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이 지역은 한때 로마 가톨릭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 자치구로까지 발전했고, 이렇게 10세기부터 13세기경까지 이들 종파는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하며 광범위한 지역에서 로마 가톨릭 및 정교회와 대립하게 되었다.
보고밀파와 카타리파의 교리나 체제는 쌍둥이라고 불러도 좋은 만큼 비슷하다. 학자들에 따르면 마니교와 초기 기독교의 영향을 받아 동쪽에서 먼저 발전한 보고밀파의 전도사들이 이후 카타리파의 성립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이들 교리의 가장 큰 특징은 정통 기독교와 달리 세상을 선신과 악신이라는 두 대등한 존재가 다스리는 것으로 파악한다는 점이다. 선신은 영의 세계의 주인인 데 반해 악신은 물질세계를 창조하고 지배하고 있으며 두 신의 힘은 동등하여 서로의 세계에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보고밀파와 카타리파는 이런 논리로만이 지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온갖 재해와 질병, 그리고 선한 신의 활동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고통의 설명이 가능하다고 보았다. 모든 물질계는 악신이 지배하고 있고, 물질계 자체가 악신의 필요로 만든 것인 만큼 본질적으로 악한 것이다. 이에 따라 그들은 구약성서의 야훼, 즉 아브라함에게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고 요구한 신, 모세에게 십계명을 전해준 신을 악신으로 규정했다. 구약성서의 신을 유일신이자 절대신으로 보는 정통 기독교와는 정면으로 대립하는 시각이다.
기독교의 전부라도고 할 예수와 그의 핵심적인 행적인 부활 등을 바라보는 보고밀파와 카타리파의 관점은 더 독특하다. 물질세계가 악신에 의해 창조된 것인 만큼 선한 신의 화신인 예수는 육신을 가질 수 없다. 따라서 예수는 인간의 몸으로 태어난 것이 아니라 영 그 자체 였고 단지 육신이 있는 것처럼 보였을 뿐이다. 육신이 없었으니 십자가에서의 죽음과 그에 이은 부활도 의미가 없고, 이는 모두 인간을 가르치기 위한 일종의 드라마로 연출된 것이다. 또 최후의 심판도 없고 그에 앞서 죽은 자가 육신을 되찾는 일은 더욱 벌어지지 않는데, 선신에게로 복귀해야 할 인간의 영이 악의 산물인 물질, 즉 육체를 필요로 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단지 불필요한 정도가 아니라 그들은 육체를 벗기 위해 모진 애를 썼는데 그 이유는 악신이 만든 이 현실세상이 바로 지옥이기 때문이다.
이런 사실에 대한 명확한 이해를 바탕으로 충분한 수양과 선행을 통해 영혼을 정화함으로써 죽은 후 다시 인간으로 태어나지 않고 순수한 영의 형태로 선한 신의 세계에서 살아가는 것이 그들의 목적이었다. 이는 불교의 윤회사상의 영향이 강하게 느껴지는 부분인데, 성직자와 수도승에게 살생과 육식, 성관계 및 재산 소유를 철저히 금하는 점이나 일반 신도에게는 이런 계율이 강요되지 않는 것도 불교와 비슷하다.
이런 보고밀과 카타리에게 구약성서의 야훼를 신봉하며 지상에서 권력과 사치를 누리고 있을 뿐만 아니라 최후의 심판 날에조차 육신을 벗지 못한다고 주장하는 로마 가톨릭과 콘스탄티노플의 정교회는 간교한 악신에 의해 인간을 지상에 묶어놓기 위해 이용되는 악마의 앞잡이 그 자체였다. 이 정도 되면 주류 교단의 입장에서는 이단도 보통 이단이 아니다.
그럼에도 보고밀파와 카티라파가 스스로를 정통 기독교라고 여기는 데는 나름대로의 역사적인 배경이 있다. 그것은 그노시스파, 즉 초기 영지주의 기독교적인 사고방식을 그대로 빌려왔기 때문이다. 그노시즘은 로마제국에서 기독교를 공인하던 4세기경까지 다른 여러 종파와 함께 번성하던 기독교의 한 갈래였다.
※ 그노시스는 고대 희랍에서부터 쓰던 표현으로 '영적인 지식'을 의미한다. 이후 로마의 그노시스파 기독교에서 신비주의적인 색채가 보다 많이 가미되었고 지중해 주변 지역에서 다양한 형태의 사상으로 발전했다. 그 영향은 뉴에이지 등 현대 신비주의에까지 이어지고 있으며 기독교에 국한되는 개념은 아니다.
그러나 기독교 공인을 위해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교리의 틀을 잡는 과정에서 당시에 유행하던 서로 다른 신앙 형태들을 동시에 받아들일 수는 없었고 결국 그노시스파는 이단으로 배척되었다.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삼위일체와 최후의 심판 등의 교리는 이때 종교회의를 거쳐 로마제국이 공인한 기독교로 배타적인 권위를 갖게 되었다. 이후 그노시즘은 기독교 세계에서 탄압 퇴출되었는데 700년이 지난 시점에서 보고밀과 카타리파라는 이름으로 부활하게 되었던 것이다.
선신과 악신의 이원론은 기독교나 유대교의 전통이 아닌 아시아 계통의 사상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조로아스터교와 마니교가 공히 서로 다른 신에 의해 지배되느 정신계와 물질계를 그리고 있었고, 메소포타미아와 인도 등 오래된 동방문명의 사상들도 유일신의 사상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다. 이런 수천 년된 사상적 전통은 중세의 유일신 도그마의 힘과 권위에 눌려 있을지언정 완전히 소멸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보고밀과 카타리파 및 그들이 10세기부터13세기경까지 다스리던 지역, 즉 발칸 일원과 남프랑스, 북이탈리아 지역의 분위기는 로마 가톨릭이 지배하던 곳과는 사뭇 달랐다. 이들은 전도에 열정적이지만 기본적으로 종교를 남에게 강요하지 않았기 때문에 무슬림 및 이교도들이 비교적 자유롭게 왕래하며 문화 및 경제생활을 공유할 수 있었다. 또 물질과 육신을 악으로 보았기 때문에 성직자들이 사치나 방탕, 타락을 일삼는 것은 생각할 수조차 없었고 백성에게 모범을 보이는 철저한 무소유의 경건한 삶을 살았다.
이런 이유로 무시무시한 독신과 이단이 횡행해야 할 보고밀과 카타리의 지역들은 오히려 여타 유럽에 비해 훨씬 자유스럽고도 평화로운 분위기가 감돌았으며, 성직자 계급의 모범적인 삶을 통해 신뢰와 존경이 유지되는, 중세 속의 이례적인 사회상을 연출하게 되었다. 일반 신도들은 고기와 술을 먹고 자녀를 낳았지만 원칙적으로 부의 축적이 영혼의 해방에서 멀어지는 일이라는 관념 때문에 물욕보다는 선한 행동과 수양이 중요시되는 생활습관이 전체적으로 퍼졌다.
※ 이는 예수의 직접적인 가르침이기도 한데, 현실에서 이 부분을 희석, 합리화하기 위해 유럽과 서구, 그리고 자본주의 사회가 들인 이론적인 노력은 중세 교황청에서부터 종교지도자 칼뱅, 막스 베버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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