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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주아와 궁정귀족의 성문화 충돌 by 서양사학입문

옛날에 에노키안 공부하며
근대유럽 역사 보다가 구글에서 찾은 것중 하나에용~ㅋ
여기 올리고 하드엔 삭제!
부르주아와 궁정귀족의 성문화 충돌
서로 다른 문화의 충돌은 문명이 변화하는데 많은 영향을 주었다. 문화충돌은 서로간의 차이 때문에 마찰도 많았지만, 동시에 새로운 발견과 진화를 가져다주었다. 물론 문화충돌은 문화의 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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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먼저 읽어보고~
이후 요 링크들에 있는 "코르티잔"도 함께 읽어보면 잼나용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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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주아의 변질된 성문화
-부정에서 모방으로-
역사문화학과
2007211148
김솔휘
서론
Ⅰ. 부르주아 문화의 형성
Ⅱ. 억압과 차별의 상징 : 매너
Ⅲ. 부부애의 발견
Ⅳ. 여성의 세계
ⅰ) 19세기판 연예인, 정부의 세계
ⅱ) 일하는 여자들, 그녀들의 일생
결론
서론
서로 다른 문화의 충돌은 문명이 변화하는데 많은 영향을 주었다. 문화충돌은 서로간의 차이 때문에 마찰도 많았지만, 동시에 새로운 발견과 진화를 가져다주었다. 물론 문화충돌은 문화의 공통성보다 차이점을, 융합이나 공생보다는 마찰과 대립의 측면을 부각시켰다. 이러한 특성 때문에 대부분의 문화충돌은 폭력을 동반하고 있다. 이번에 살펴볼 부르주아와 궁정귀족의 충돌 또한 평화적이지 않은 방법으로 진행되었다. 암흑시대라고 불리는 중세시대에 권력과 부를 바탕으로 지배집단으로서 군림해온 궁정귀족들과 성직자 다음의 제3신분으로 억압을 받던 주변집단인 부르주아의 충돌은 유럽에 많은 변화를 가져다주었다.
프랑스 혁명과 산업혁명으로 새로운 지배 권력으로 올라선 부르주아 계급은 이전의 지배계급이던 궁정 귀족들의 방종한 성도덕을 부정하였다. 혼전순결과 결혼 후의 충실, 정절을 미덕으로 여겼으며, 귀족들보다 우수하다고 생각하는 자신들의 윤리적인 이상을 중시했다. 그들은 수없이 많은 애인을 두는 귀족들의 문화에 반해 자신들의 문화를 정숙한 아내와 근엄한 남편이라는 긍정적 이미지로 무장하여, 이에 대한 사회적 지지를 획득하는데 성공했다.
그래서 이번에는 부르주아와 궁정귀족의 충돌이 이전과는 달리 전쟁 같은 폭력적인 수단보다는 서로가 서로를 견제하고 복속하기 위해 어떠한 수단을 이용하였는지를 알아보고 그 결과 어떠한 변화가 나타났는지를 알아보고자 한다.
Ⅰ. 부르주아 문화의 형성
유럽사회에서는 상업이 발달함으로써 중세에서 벗어나서 르네상스의 절정을 맞이하였고, 절대주의 시대에 부르주아 계급은 주로 도시를 거점으로 상공업을 통해 부를 축적하였다. 이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서 왕에게 세금을 바치고 그에 따른 보상으로 왕으로부터의 보호를 받으며, 자신들의 부를 축적해 나갔고 이를 통해 정치적인 권리를 서서히 높여나갔다. 그리고 부르주아들은 당시의 지배층이던 귀족과는 구별되는 자신들만의 생활 모습을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당시 귀족층의 무분별한 사치와 불필요한 매너들을 비판하면서 자신들만의 문화를 형성해 나갔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부르주아 중에서도 일부 상류 부르주아들은 궁정의 매너를 따라하면서 귀족들과 같이 사치를 하고, 그를 넘어 귀족들보다도 더 사치에 파묻힌 생활을 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밑 빠진 독과 같은 낭비는 18세기 특권계급 사회의 특징 이였지만, 이는 귀족, 성직자, 부르주아 계급들 중에서도 일부만이 이러한 낭비를 즐길 수 있었다.
절대주의시기에 작첩(作妾)제도는 궁정귀족이나 도시 부르주아 양측 모두에게 보편적인 제도였다. 그렇기에 첩을 둘 재력이 없는 남자들은 부르주아로서 큰 열등감을 느꼈다. 또한 돈은 있지만 귀족이 될 수 없는 부르주아들과 재력이 없어서 신분상승이 불가능한 중․소 부르주아들은 이러한 절대주의의 낭비를 즐길 수 없었다. 이러한 분위기는 순수한 부르주아 문화를 탄생시킨 배경이 되었다. 부르주아 계급이 의식적으로 궁정관습에 반대한 나라들 중에는 이처럼 그 나라의 부르주아 계급의 성격이 특별히 강했다기 보다는 오히려 흉내를 내고 싶어도 그럴 수 없을 만큼 빈곤했기 때문이라는 증거가 되기도 한다.
그리하여 부르주아들은 귀족들의 무분별한 연애를 비판하면서, 연애결혼을 통한 부부간의 사랑과 어린이들에 대한 사랑을 부르주아의 특징으로 삼으며 궁정귀족들의 불필요한 매너와 낭비를 비판하며 자신들만의 문화를 형성해 나갔다.
Ⅱ. 억압과 차별의 상징 : 매너
중세에는 봉건적 궁정예절이 가장 큰 존중의 대상이 되었던 시대이다. 이 시기에는 봉건적 대영주의 궁정에서 영주와 기사 사이의 의존 관계에서 형성된 봉건적 ‘궁정예절’이 지배하였다. 이 단계에서는 본능적 충동에 대한 제재가 대단히 미약했고, 좋은 매너와 나쁜 매너 사이의 구분 기준이 현대와 같이 명확히 구분 되어 있지 않았다. 예를 들어 도시에서 집에서 목욕탕에서 가기 전에 집에서 옷을 벗고 가는 것이 예사였다.
17세기부터 귀족적 궁정사회에서 왕과 귀족, 그리고 부르주아 사이의 의존관계에서 형성되는 절대주의적 궁정 예절이 이루어진다. 상공업의 발달로 도시가 발달하면서 농노들이 도시로 이동하면서 봉건제도의 기본이 무너지면서 국왕을 중심으로 하는 권력의 집중화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그 결과 그 동안 장원을 중심으로 지역의 주인 역할을 하던 봉건 귀족들은 경제적으로 곤란을 겪어야 했다.
결국 그들은 왕에게 기댈 수밖에 없었고 왕이 지배 아래 들어가게 되었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 그들의 권력을 일부 내려놓아야 했고 그러기 위해 필요했던 것이 매너였다. 왕은 귀족들이 가지고 있던 권력이나 그들의 폭력성을 제거하는 수단이 되었던 것이다. 또 이후 부르주아가 귀족들의 새로운 경쟁자로 등장하면서 귀족들의 생존 또한 위협을 받게 되었다. 이러한 경쟁적인 관계에서 전통귀족들은 세련된 행동양식을 발전시켜 자신들을 부르주아와 차별하면서 자기 보호의 경향을 증가시킨다.
즉 더욱 세련된 매너의 발달은 궁정귀족이 자신을 쫓아오는 부르주아들을 구분시키려는 방어수단이었다. 따라서 귀족들은 일상의 모든 행위에 대해 복잡하기 이를 데 없는 예절들을 만들어 자신들의 특수성을 부각시켰다. 예를 들어‘발걸음이 너무 늦어도 또 너무 빨라서도 안 된다’라는 규제는 이후 ‘귀족은 하인처럼 빨리 걸어서도 안 되고 부인네처럼 느릿느릿 걸어서도 안 된다’는 것으로 변하였다. 밑에 계층과는 다른 귀족만의 특성으로 매너를 만들어버린 것이다. 이러한 세련미의 발달은 억압과 동시에 사회적 차별의 기준이 되었다.
Ⅲ. 부부애의 발견
당시 궁정귀족들에게 결혼은 가문유지의 수단,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귀족남편은 아내에게 사회적 신분유지와 정치권력의 획득을 요구 했다. 이에 아내는 활발한 사교 활동을 바탕으로 남편이 안정적인 지위를 유지할 수 있도록 했으며, 남편의 지위와 부를 이용해 호화로운 생활을 영위할 수 있었다. 이들의 결혼은 상호 계약적이었기 때문에 부부는 서로에게 얻을 수 없는 사랑을 각자의 애인에게서 찾았다. 대부분의 궁정귀족은 남녀를 불문하고 배우자 외에 애인을 두어 폭넓은 관계망과 연애기교를 발전시키는 일에 몰두하였다.
반면 부르주아들은 이를 비판하며 결혼은 남녀 서로의 자유로운 의사에 근거해서 성립되어야하며 부부는 깊은 애정과 굳건한 정절을 기초로 결합되어야 한다는 이상적인 결혼관이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졌다. 이러한 이론은 결혼에 있어서 배신 없는 사랑, 즉 ‘일부일처제’의 형태로 나타나게 되었다.
18세기 산업혁명이후 부르주아들은 엄청난 부를 획득하게 되었고 이를 사유재산화 하여 소유하였다. 이 재산을 유지하고자 하는 부르주아들은 일부일처제의 찬성하였고 적자에게만 자신의 재산을 물려주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경제적인 조건 위에 세워진 가족형태는 오로지 남자의 경제 이익을 위한 것이기 때문에 남자의 지배와 그 상대자인 여자의 억압이라는 결과를 초래했다. 막대한 재산의 증가와 사유재산제의 발생은 여자에게만 일부일처제를 요구했던 것이다.
혁명이후 지배세력으로 등장한 부르주아들은 궁정귀족들에 비해 건전하다는‘도덕적 평가’를 통해 그들의 권력을 유지하려 하였고, 때문에 부르주아 남성은 근면하고 성실한 아버지의 이미지를 이룩하려 하였다. 그들의 아내에게는 정숙하고 성스런 아내의 이미지를 요구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관계로 남성들은 정숙한 아내로는 채울 수 없는 성적갈증이 쌓여갔고 이는 매춘과 정부(情婦)로 나타나게 된다.
Ⅳ. 여성의 세계
부르주아와 궁정귀족의 충돌로 소외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여성이었다. 혁명 초기의 자유로웠던 분위기와는 달리, 또한 초기 부르주아가 주장한 자유연애와 부부애와는 달리 이후 여성은 정치에 참여하지 못하는 집단으로 분리되어 사적영역인 가정에서 아내와 어머니의 역할에 매몰되었다. 비록 살롱과 사교계에서의 여성의 활동이 있었지만 이러한 여성들은 극소수에 불과하였고 일부를 제외한 여성들은 열악한 시설에서 노동에 시달려야 했다. 남성들이 성적환상을 찾아 매춘을 선택했다면 여성들은 생존을 위해 매춘을 강요받았던 것이다.
ⅰ) 19세기판 연예인, 정부의 세계
위에서도 말했듯이 당시 귀족과 부르주아, 두 계층 모두 정부를 두는 것은 자신들의 능력을 과시할 수 있는 수단이었다. 그러기에 당대의 대 귀족이나, 상류 부르주아의 정부들은 여기저기서 많은 관심을 받았는데, 19세기 내내 이러한 정부였던 여인들의 이름은 신문지상에 오르내렸다. 그녀들은 오늘날의 유명연예인과 비슷하게 많은 화제를 남기고 대중적인 인기를 누렸다. 세간에서는 그녀들을 가리켜 ‘반쪽짜리 사교인’이라는 뜻인 ‘드미 몽뎅demi-mondain’이라고 불렸다. 귀족으로 태어나지 않으면 사교계에 들어갈 수 없었던 18세기에 비해 돈과 미모만 있으면 번듯한 사교인으로 행사 할 수 있는 19세기의 신풍조를 비꼬아 부르는 말이었다.
이런 유명 정부들은 누구나 동경할만한 호화스러운 생활의 주인공이었다. 하인은 물론이고 웬만한 부자가 아니면 부리지 못하는 마부를 비롯해 말과 마차까지 갖고 있었다. 생활방식역시 그녀들이 하는 일이라고는 하루 종일 미모를 가꾸는 일과 사교계의 일원으로 처신하는 일이었다.
일단 미모로 사교계에 이름이 알려진 창부들이 점점 더 부자가 되는 것은 쉬운 일이었다. 유명세를 보고 몰려드는 돈 많은 남자들과 시간을 정해 데이트를 해주고 엄청난 수입을 챙겼다. 아무리 정부 혹은 창부이지만 이런 식으로 천문학적인 재산을 벌어들인 경우는 셀 수 없이 많았다.
또한 일반적인 선입견과는 달리 정부를 둔 19세기 권력자들은 자기 애첩이 다른 남자를 만나는 등 자기 애첩의 은밀한 사생활에 대해서는 비교적 관대한 편이었다. 대부분 어엿한 부인이 있는 유부남이었기 때문에 양다리로 자신의 부담이 적어지는 것을 내심 반가워했고, 덤으로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는 미녀를 정부로 두고 있다는 자부심을 누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정부를 두는 것은 당시 권력자들에게는 당연한 권리이자 부와 권력의 상징이었고, 이 때문에 19세기 런던이나 파리 같은 대도시에서 첩을 두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ⅱ) 일하는 여자들, 그녀들의 일생
“사법권의 적용을 받지 않는 자들은 미성년자, 유부녀, 범죄자, 정신지체자이다.”
이는 1804년 나폴레옹이 제정한 <민법(Code Napoleon)>에 있는 문구인데 여자에 대한 당대의 시각이 어떠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프랑스 혁명으로 봉건제 신분제는 타파됐지만 그것은 남성에게만 해당됐을 뿐 19세기 여성의 법적 신분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당연히 19세기에도 먹고 살기 위해 일을 해야 하는 여자들은 존재했다. 뛰어난 미모에다 운까지 타고나서 유명한 창부가 되는 여성은 그리 많지 않았고, 당시 서민층 여성의 삶은 이전 세기와 비교해 더욱 빈곤했다. 농민이나 노동자의 딸로 태어난 여자들에게 당시에 가장 만만한 일자리는 하녀였다. 1896년 기록에 다르면 열 집당 하녀의 수가 평균 8명이었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건 없건 간에 대부분 부르주아 계층의 집에는 적어도 한 명 이상의 하녀가 있었고, 귀족들 중에는 10명 이상의 인을 두는 경우도 많았다. 이렇게 웬만한 집에서도 하녀를 많이 부릴 수 있었던 데는 이들은 먹여주고 재워주기만 하면 따로 월급을 주지 않아도 됐기 때문이다. 하녀의 수요가 많았으니 가진 게 몸뚱이밖에 없는 서민의 딸들은 어릴 때부터 하녀라는 취업 처로 몰려들었다.
하녀로 일했던 여성들 대부분이 글을 읽고 쓸 줄 몰랐던 대해 하녀에 대한 부당한 처우가 당연시되던 시대이다 보니 그녀들의 실생활이 어땠는지에 대해서 동시대인이 남긴 기록은 매우 드물다. 그나마 있는 자료는 대부분 성적인 추문이나 각종 스캔들을 바탕으로 한 가십성 기사나 몇몇 소설이 고작이다. 당시 결혼 전 여자는 순결을 지켜야 했지만 남자에게는 오히려 다양한 성적 경험을 쌓는 일이 권장되던 시대였다. 그러다 보니 사귀기는 하지만 결코 결혼은 하지 못할 가난한 여자들을 가리켜 ‘기다리는 동안 즐기는 여자들’이라는 뜻의 ‘팜므 다텅트 Femme d’attente‘라는 일반 명사가 등장했을 정도였다. 이런 시대에 한 지붕 밑에서 같이 사는 하녀는 남자들이 부담 없이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손쉬운 대상이었다.
19세기 내내 버려지는 아이들의 숫자가 어마어마했던 데에는 바로 이런 사정이 있었다. 일례로, 파리에서 1880년 태어난 5만 6천명의 영아 중에서 무려 1만 4천명이 사생하였고, 그중 3천명 이상이 태어나자마자 버려졌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또 19세기 중반부터 술을 마시면서 춤을 추는 여자댄서나 가수의 공연을 볼 수 있는 카페나 콘서트홀이 유행하면서 공연예술 업종이 여성들에게 떠오르는 직종으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당시 공연에 올랐던 댄서나 가수들의 계약서를 보면 그녀들이 전문 공연인을 가장한 매춘부였음을 한눈에 알 수 있다. 대부분의 계약서에는 손님이 부르면 언제든지 테이블에 동석해야 하며, 공연이 끝난 후 새벽 2시부터 5시까지는 손님과 함께 야식을 먹어야 한다는 수상쩍은 의무조항까지 명시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외에도 여성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세탁부와 공장 노동자정도 밖에 없었는데 당시 법의 보호를 받지 못했던 여성들인 만큼 그들의 환경은 열악하기 그지없었다. 하녀와 마찬가지로 세탁소나 공장에서 일했던 19세기 여성들의 실제 삶의 모습도 베일에 가려져 있기는 마찬가지다. 그녀들의 삶을 다룬 문학이나 미술 작품은 극히 드문데, 이는 여성을 신화 속 여신이나 성모 마리아등 성스러운 이미지로만 표현했던 기존 화가들에 반기를 들고 현실 속에서 살아 숨 쉬는 여성을 모델로 그림을 그린 부르주아시대에 화가들 역시 별반 다를 바 없었다.
결론
사실 오늘날의 부르주아는 자본가계급, 지배계급으로 인식되지만 혁명 이전까지 그들은 귀족과 성직자 다음의 제 3신분으로 혁명을 꿈꾸는 피지배 하층 계급이었다. 혁명으로 인한 정치체제의 변화는 사회에 자유와 낭만을 가져다주었고 사람들은 구시대의 관습과 법률 등에서 벗어나 개인의 행복과 자유를 획득하는데 관심을 두었다.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는 기존의 것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가 주를 이루기 시작했다. 그렇기에 부르주아들은 혁명의 과정을 거쳐 이룩한 새로운 사회에 지배 계급으로서의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기존 귀족들의 도덕성에 대해 강한 비난을 일삼았다.
이에 귀족들은 왕이 자신들을 억압하기 위해 만들었던 매너를 더욱 세련되게 발전시켜 부르주아들에게도 예절을 강조하여 그들이 자신들보다 밑에 있다는 것을 주입하려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매너의 지나친 발달은 혼자 있을 때조차도 세련된 행동만이 가능하게 하여 이에 반대되는 것은 억압하였다. 그리하여 한편으로 본능에 대한 사회적 제재와 본능적 충동이 마음속에서 갈등을 일으키게 되었다. 이러한 억압은 후에 더욱 큰 쾌락을 추구하는 사회를 낳았다.
또한 부르주아는 부부애를 기본으로 한 배신 없는 사랑, 즉 일부일처제를 주장했다. 그러나 이는 아내에게 과도한 의무를 부과했고 여성들을 억압하는데 사용됐다. 그들이 주장한 일부일처제는 결국 강력한 ‘가부장제’ 사회를 만들었고 이는 후에 부르주아들이 원했던 가정과는 동 떨어진 결과를 만들었다. 그 결과 가정에서 소외된 남성은 그들이 공격했던 귀족들의 사치스럽고 방탕했던 가치들을 그대로 재현하는 모순에 빠지게 되었다.
부르주아가 그들이 부정했던 귀족들의 사치와 향락을 모방하는 단계에 이르자 결국 소외되었던 계층은 여성이었다. 프랑스 혁명 이후에도 법의 보호를 받지 못했던 여성들은 힘든 노동에 시달렸고, 남성들의 수요에 따라 매춘이 번성하는 결과를 만들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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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터게이, 『부르주아 전』, 서해문집, 2005
에두아르트 푹스, 『풍속의 역사Ⅲ 色의시대』, 까치, 1987
에두아르트 푹스, 『풍속의 역사Ⅳ 부르조아의 시대』, 까치, 1986
노버트 엘리아스, 『매너의 역사』, 신서원, 1998
배영수 외 4명, 『서영수 강의』, 한울아카데미, 2000
필립아르에스, 『사생활의 역사3』, 새물결, 2002
이지은, 『부르주아의 유쾌한 사생활』, 지안, 2011
테오도르 젤딘, 『인간의 내밀한 역사』, 강, 2001
장 루이 플랑드렝, 『性의 歷史』, 동문선, 1998
이종완 편저, 『유럽의 살롱문화』, 공주대학교 출판부, 2000
서정복, 『살롱문화』, 살림, 2003
서이자,「절대주의 귀족과 근대 부르주아의 섹슈얼리티(Sexuality)」p.142
1) 원래는 '성으로 둘러싸인 도시(bourg, 독일어 burg, 영어 borough와 같은 어원)에 사는 사람' 즉, '시민'을 뜻하는 말이었으나, 근대에 와서 절대 왕정의 중상주의 경제 정책으로 부를 축적한 유산 계급으로 시민 혁명의 주체가 된 사람을 칭하였다. 시민 혁명 이전의 시기에는 상당한 부를 소유하였음에도 왕과 귀족의 지배를 받는 피지배 계급으로 존재하였다. 하지만 구제도의 모순을 깨뜨리려는 시민 혁명을 주도한 이후 사회의 주체 세력으로 등장하였다.
2) 서이자,「절대주의 귀족과 근대 부르주아의 섹슈얼리티(Sexuality)」, p.142
3) 학문 또는 예술의 재생·부활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프랑스어의 renaissance, 이탈리아어의 rina scenza, rinascimento에서 어원을 찾을 수 있다.
4) 근세 초기 유럽에서 보인 전제적(專制的) 정치형태
5) 에두아르트 푹스 지음, 이기웅/박종만옮김, 『풍속의 역사』, p.182
6) 노버트 엘리아스 지음, 유희수 옮김, 『매너의 역사』, 257p
7) 서이자,『문화충돌, 그리고 너그러움의 진화』p.76.
8) 서이자,『문화충돌, 그리고 너그러움의 진화』p.62
9) 이탈리아 르네상스에서 형식을 갖추기 시작하여 20세기 초에 소멸할 때까지 여성문화와 생활양식의 자유공간을 형성하였던 살롱은 5세기 동안 지속되면서 프랑스, 독일, 영국, 러시아, 이탈리아에서 살롱문화로 발전하여 유럽문화사의 한 단면을 장식하였다. - 하이덴 린쉬, 『유럽의 살롱들』, 16세기말 도시에서 귀족이나 귀족적 배경을 가진 교양 있고 독서량이도 많은 부인들이 운영하던 살롱에는 남녀가 함께 모여 순수한 중세 무용담이 섞인 연애담, 달콤한 소설, 새로운 방향의 문학 작품에 대한 설명회 같은 성격을 띤 모임이었다. 그러나 18세기 후반부터 점차 철학과 정치에 대한 토론 및 활발한 사상의 교류의 무대로 변모하면서 새로운 `살롱문화`가 형성되게 된다. - 서정복,『살롱문화』,
10) 이지은, 『부르주아의 유쾌한 사생활』, 287p
11) 이지은, 『부르주아의 유쾌한 사생활』, 295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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