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메르 문명과 기독교의 조우 by 수메르 문명과 역사

Realize 2021. 7. 16. 13:22

 

 

수메르 문명과 역사 P172

 

다양한 방향으로 생각해볼거리가 많은 내용이니

찬찬히 읽어보세용~ㅋ

 

 

1. 수메르 문명과 기독교의 조우

 

수메르 민족은 유태인들이 역사의 무대에 등장하기 훨씬 이전에, 그리고 예수 탄생으로부터 치면 무려 2천년쯤 전에 사라져버렸기 때문에 수메르인들이 유태인과 직접적인 접촉을 한 기록은 없다. 하물며 예수 이후에 형성된 기독교와 어떤 접촉을 했을 가능성은 아예 생각조차 할 수 없다. 그러나 이 먼 시간을 격하고 직접 접촉도 없었던 수메르 문명은 기독교와 묘한 인연을 맺고 있다.

 

앞장의 서두에서 수메르를 비롯한 고대 중동세계의 역사가 현대에 재발굴된 과정을 서술했는데, 이 과정에 결정적인 기여를 한 주체는 기독교이다. 수메르인의 존재를 알지 못했고 단지 성경의 내용을 역사적인 사실로서 입증하고자 의도했던 기독교 단체들이 수메르 역사의 재발굴과 복원에 큰 기여를 한 것이다. 그러나 과거로 올라가보면 기독교는 수메르를 비롯한 고대 중동세계의 역사를 애초에 이처럼 오랫동안 인류의 기억에서 지워버리게 만든 장본인이기도 하다. 로마제국이 기독교를 국교로 채택하면서 우상들을 섬기던 다신교의 세계를 철저히 파괴해버렸던 것이다.

 

수메르 민족이 사라지고 망각되게 된 것은 기본적으로 그들이 이웃 민족들과의 싸움에서 패하여 학살당하고, 살아남은 자들은 승리한 민족에게 긴 세월 지배를 받으면서 차츰 동화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앞에서 우르 제3왕조가 몰락하던 시기를 묘사한 "우르의 애가"를 통해 수메르 도시들이 파괴되고 민족이 학살당하던 시기의 광경을 생생하게 볼 수 있었다.(수메르 민족의 일부가 전란을 피해 타지역으로 이주를 했을 가능성도 있으나, 이 부분은 아직 확인된 기록이나 자료가 없다.) 그들이 만든 찬란한 문명도 전쟁의 와중에 파괴되고 잿더미로 변하였다. 그리고 긴 세월이 흐르는 동안 그렇게 파괴된 유적지는 폐허로 방치되어 흙먼지와 모래가 쌓이면서 잊혀져 갔다. 민족이 사라지니 수메르라는 이름조차 차츰 잊혀져 아무도 기억하지 않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기독교가 어떤 책임도 없다. 그러나 지구라트와 설형문자 등 그들이 남긴 많은 유적과 유물들이 다신교의 세게에서는 파괴된 상태에서도 여전히 가시적으로 남아서, 먼 옛날에 살았던 어떤 위대한 민족의 자취를 전해주고 있었다. 수메르 민족의 뒤에 이어 등장한 바빌론과 앗시리아, 페르시아 등 다신교의 제국들은 전쟁이 끝난 후에는 이런 고대 민족들의 유산을 부분적으로 복원하고 활용하였다. 이런 자취조차 사라지게 된 것은 훨씬 후대에 로마제국이 기독교를 국교로 받아들이게 된 사실과 관련이 깊다.

 

AD 4세기말에 로마제국은 중동지방에 남아있던 다신교의 유물과 기록들을 인간들이 전혀 알 필요 없고, 기억할 필요조차 없는 이단의 흔적으로 간주하여 철저히 파괴하고 말살하였다. 그 후 AD 7세기에 등장한 이슬람교 역시 유일신을 섬기면서 같은 정책을 추구하였다. 현대가 시작될 때까지 기독교와 이슬람교 세게에서 인류의 역사는 노아의 홍수 이후 각각 성경과 코란에 기록된 대로 진행되어 왔다는 것이 사람들이 배운 공식적인 역사관이었으며, 그 이외의 역사는 있을 수 없고, 있어도 알 필요가 없는 것들이었다. 이런 세계관으로 인해 수메르를 포함해 그 이후의 앗시리아, 바빌로니아, 히타이트 등의 역사는 현대에 재발굴될 때까지 그처럼 오래 인류의 기억에서 완전히 사라졌던 것이다.

 

 

(1) 기독교의 이방 종교 탄압

 

서기 313년 로마제국의 황제 콘스탄티누스 1세(재위 306~337)가 밀라노에서 내린 칙령으로 기독교를 공인하면서 기독교는 박해받던 위치에서 벗어나 다른 종교들과 함께 신앙의 자유를 허락받았다. 종교적 관용의 대헌장이라고 불리는 밀라노 칙령은 로마의 모든 시민에게 스스로 종교를 선택하여 신봉할수 있는 자유를 부여하였다. 그러나 이로부터 기독교의 지위는 차츰 역전되어 박해받던 종교에서 이단을 박해하는 종교로 자리잡게 되었다. 콘스탄티누스 자신은 기독교로 개종했으나, 전래의 다신교를 배척하지 않았다. 그는 330년에 이탈리아의 로마를 떠나 그리스에 새로 지은 콘스탄티노플로 수도를 옮겼는데, 그가 건설한 궁전의 기둥에는 그리스 신화의 인물들이 장식되어 있었다.

 

그로부터 62년이 지난 392년에 기독교인이었던 테오도시우스 1세(재위 379~395)는 로마 제국의 영토 안에서 기독교를 제외한 모든 이교 숭배를 금지하였다. 그는 379년 그라티아누스와 공동 황제로 즉위한 후 자신이 통치하게 된 동방 영토에서 신앙의 통일에 관심을 기울여 381년 제1타 콘스탄티노플 공의회를 소집하고 아리우스파를 추방하였다. 이는 니케아 신조에 입각한 성부, 성자, 성신의 삼위일체 교리를 보편적 기독교 교리로 선언한 것이다. 이때부터 보편적이라는 의미의 '카톨릭'이라는 용어가 사용되었다.

 

그 후에는 "로마인들의 종교를 주피터 신앙으로 할 것이냐, 크리스트 신앙으로 할 것이냐?"는 문제를 원로원에 제기하여 전통적 다신교 신앙을 지지하던 정적들을 제압하고 391년 로마와 이집트에서 일체의 비기독교 의식을 금지하였다. 그 다음 해에는 이 조치가 로마제국의 모든 영토로 확대되었다. 그는 394년에 전통 종교를 지지하던 유게니우스의 군대를 꺾고 동서로마의 유일한 황제로 즉위하였는데, 이것은 로마제국의 모든 영토 안에서 비기독교의 전통이 완전히 단절되는 것을 의미했다.

 

그의 통치시기로부터 로마 제국에서는 모든 이방 신들을 섬기는 행위가 중지되고, 신전들은 폐쇄되었으며, 이방종교의 기념물들은 대대적으로 파괴되었다.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 있던 세라피스 신전에는 한때 세게 최대도서관이 있었는데, 신전과 함께 도서관도 이때 파괴되어 버렸다. 고대 이집트인들이 사용하던 상형문자는 기원전 4세기 그리이스계의 프톨레미 때까지도 사용된 기록이 있으나, 로마제국 이후로는 완전히 잊혀졌다. 고대 그리스에서 열리던 올림픽이 마지막으로 개최된 해가 393년인데, 이 역시 테오도시우스의 이단 박해로 중단되었다.

 

수메르 문명의 본거지였던 메소포타미아 지역은 이 시기에 사산조 페르시아 제국과 로마 제국이 부딪히는 접경지역으로서 수시로 전쟁의 피해를 입었고, 양대 제국의 영향을 교대로 받기도 했다. 서기 615년 동로마제국의 헤라클리우스 황제는 사산제국의 공격에 대한 반격에 나서 연전연승을 거두고 630년에는 메소포타미아를 동로마제국의 속주로 편입하였다. 이 시기에 메소포타미아에서는 기독교의 영향력을 확대되면서 다신교도들의 문화는 점점 이단시되고 잊혀져 갔다.

 

서기 634년부터는 아라비아 반도에서 일어난 이슬람교 세력이 본격적인 포교와 세력 확장에 나서기 시작하였는데, 그들은 수십 년 사이에 동로마제국과 사산제국을 밀어내고 중동과 북아프리카 일대를 정복하게 되었다. 예언자 마호멧의 인도로 다신교와 이단을 떠나 유일신 알라에게 귀의하라고 가르친 이슬람교는 역시 이방신의 흔적을 말살하였다.

 

이슬람교는 유태교와 기독교를 크게 보아 '경전의 종교'로 인정하면서 관용을 베풀었지만, 다신교를 섬기던 시대는 '무지의 시대'라고 간주하여 인간들이 전혀 알 필요가 없다는 입장을 견지했다. 이에 따라 그나마 중동 지역에 남아 있던 고대의 유적과 유물들은 보존할 가치가 없는 악의 유산으로서 더욱 철저히 파괴되거나 방치되었다. 이렇게 해서 지구라트를 만들었던 수메르와 아카드, 바빌론, 앗시리아의 모든 흔적들과 피라밋을 만들었던 고대 이집트인의 흔적들은 소리없이 사라지게 되었다.

 

현대에 고고학자들이 고대 중동문명의 유산을 발굴한 대부분의 지역 이름에는 '텔'이라는 아랍어가 붙어있다. 이것은 버려진 고대 유적지가 긴 세월이 지나는 동안 흙벽돌이 무너지고 그 위에 모래먼지가 덮여 하나의 동산을 이룬 지역을 말한다. 후대의 아랍인들은 그런 곳들을 그냥 동산이나 언덕으로 생각하고 그 위에서 살아온 것이다.

 

오늘날에도 시리아와 이라크에서 말썽을 빚고 있는 이슬람국가(IS)는 현대에 들어와 힘들게 복원한 고대 유적들을 다시 파괴하고 있다. 한국에서도 극단적인 기독교 신도들이 단군상을 목자르고 불교 사찰에 들어가 소동을 부리는 뉴스들이 나오는 것을 보라. 이성을 배제한 신에 대한 맹목적 믿음이 권력과 결부된다면, 끔찍한 폭력적 결과가 나온다는 사실을 우리는 역사를 통해 확인할 수 있고, 지금도 볼 수 있다.

 

하늘과 땅, 바다에는 많은 신들이 있고, 여러 민족은 각기 자신들의 신을 믿는다고 생각하던 시절에 사람들은 이방의 문화에 대해 대체로 관용적이었다. 위대한 정복자였던 페르시아의 키루스나 그리스의 알렉산더는 이방인들의 문화를 존중했다. 신바빌로니아를 정복하고 페르시아 제국을 건설한 키루스는 정복지에서 포로로 잡혀와 있던 약소민족들을 고향으로 돌아가서 자신들의 문화 전통에 따라 살도록 허락해주었다. 그로 인해 바빌론에서 포로생활을 하던 유태인들은 이방신을 섬기던 키루스를 야훼가 부르신 해방자로 묘사했다.

 

기원전 334년 동방 원정에 나선 그리스의 알렉산더는 2년 후 이집트를 정복하고 멤피스에서 이집트 사제들에게 기름부음을 받으면서 태양신 아몬-라의 아들로 선포되고 파라오로 즉위하였다. 그 후 페르시아를 정복하고 나서는 다시 동방의 의식에 따라 페르시아의 황제 샤한샤로 즉위하였다. 그의 필생의 꿈은 페르시아 제국을 무너뜨리는 것이었는데, 그는 그 소원을 성취한 후 페르시아 제국을 세운 키루스의 무덤을 찾아가 예의를 표시하고, 전쟁의 와중에 약탈당한 그 무덤을 복원하도록 지시했다.

 

알렉산더가 세운 광대한 헬레니즘 세계에서도 고대 다신교의 유산은 그대로 보존되었다. 기원전 3세기에 바빌론의 사제였던 베로소스는 여전히 다신교를 숭배하는 바빌론의 역사를 기록했다. 그와 같은 시대의 이집트 사제였던 마네토는 역시 많은 신들이 관여해온 이집트의 유구한 역사를 기록하였다. 그 후 로마제국도 기독교가 국교로 정해지기 전까지는 다신교를 숭배했으며, 이방인들의 종교에 대해 관용적이었다. 그들은 유태인들처럼 극렬하게 저항하는 민족은 말살시켜 버렸지만, 복종하는 민족은 로마에 세금을 내면서 자신들의 전통에 따라 살 수 있게 허락하였다.

 

이런 전통은 위에서 말한 것처럼 서기 392년 로마황제 테오도시우스가 이방신을 금지하는 칙령을 내리면서 단절되었다. 이방의 종교에 따르는 모든 행위가 금지되고, 그에 관련된 기록과 유산들은 파괴되었다. 대제국들의 시대에 수메르인의 존재는 이미 오래 전부터 잊혀졌지만, 기독교와 이슬람교의 시대를 지나면서 아예 그 흔적조차 찾아보기 어려운 상태로 땅 속에 묻혀버린 것이다.

 

 

(2) 수메르인들과 유태인의 관계

 

수메르 문명은 오래 전에 사라졌지만, 유태인들이 신의 계시를 받아 적었다고 하는 성경 속에 일정한 흔적을 남겼다. 지금부터는 이 부분을 집중적으로 살펴보고자 하며, 그에 앞서 수메르인들과 유태인들의 관게에 대해 먼저 검토를 해보고자 한다.

 

수메르인들과 유태인들은 어떤 관계가 있었을까? 우선 유태인들의 등장이 시대적으로 수메르인들보다 훨씬 후대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구약성서의 창세기 11장에 따르면 유태인들이 '믿음의 조상'으로 간주하는 아브라함은 아버지 테라를 따라 칼데아 우르에서 떠나 가나안 땅으로 들어왔다고 되어 있다. 그 도중에 하란에서 데라는 죽고 아브라함은 야훼로부터 그의 후손이 번영하여 그가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될 것이라는 약속을 받았다. 이후 아브라함은 '많은 민족의 조상'이라는 의미로 종전의 아브람에서 이름을 바꿨으며, 그의 아내 사래도 사라로 개명하였다. 이 아브라함으로부터 야훼 신앙이 정립되었으며, 지금의 유태인들은 그의 후손이라고 간주되고 있다.

 

현대 초기에 이르기까지 기독교가 지배적인 세계에서는 성경의 기록에 대해 의문을 갖는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창세기의 이런 내용이 역사적 사실에 부합하는가에 대해 많은 논의가 진행되고 있다. 그에 대한 학자들의 견해는 차이가 크다. 성서고고학의 거장인 미국의 올브라이트는 창세기의 묘사가 역사적인 사실이라는 점에 대해 의문을 가질 이유가 없다고 말한다. 장로회신학대학의 문희석 교수는 좀더 구체적인 데라가 우르로부터 하란으로 떠난 시기가 기원전 1975~1950년 사이에 위치한다는 사실에 아무런 의심도 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텔아비브 대학의 고고학자인 핑켈스타인은 아브라함의 존재를 역사적으로 확인하려는 모든 시도는 실패했다고 말한다. 이런 각각의 입장에서 논의를 전개하는 글은 매우 많다.

 

이 문제가 성서의 역사성을 둘러싼 신앙의 문제로 이어지기 때문에 많은 학자들은 좀더 조심스러운 표현으로 접근한다. 저명한 종교학자인 미르시아 엘리아드의 다음과 같은 표현은 저명한 학자의 글 치고는 상당히 모호하다.

 

"아브라함과 그의 아들 이삭, 그의 손자 야곱, 그리고 요셉의 모험에 관한 역사는 족장들의 시대라고 알려진 시기를 형성한다. 오랫동안 이 족장들은 전설상의 인물이라고 간주하는 비판이 있었다. 그러나 지난 반세기 동안, 특히 고고학적 발굴에 비추어, 일부 학자들은, 최소한 부분적으로라도, 족장 전승의 역사성을 인정하는 방향으로 기울어져왔다. 분명히 말하건대, 이것은 창세기의 11-50장이 역사적인 문서라는 사실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말을 빙 둘러 왔지만, 그의 결론은 결국 창세기의 아브라함과 족장들의 이야기는 역사적인 문서로 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일단 아브라함을 실존 인물로 간주하고 그의 등장 시기가 기원전 20세기 전후라는 주장을 받아들일 경우, 이는 수메르인들이 이신 - 라르사 시대를 거치면서 소멸 단계로 들어서던 시기에 해당된다. 수메르인들은 그보다 3000년이나 앞서 등장하여 찬란한 문명을 건설하고 활동한 후 이제 역사의 뒤안길로 들어서던 시기에 유태인은 비로소 한 부족으로 등장하게 되는 것이다.

 

고대 역사에 등장하는 많은 부족들은 소수의 같은 뿌리에서 계속 갈라져 나왔다는 사실을 창세기가 시사하고 있다. 노아의 세 아들로부터 인류의 모든 종족이 나왔다는 성경의 기록을 역사적 사실로 믿기는 힘들다고 하더라도 특정한 조상으로부터 시작된 부족들이 계속 갈라져 나왔다는 사실은 충분히 유추할 수 있다. 먹을 것이 충분하지 않았던 시대에 목초지를 따라 떠돌던 유목민들은 가족의 규모가 커지면 분가를 하여 새로운 가족을 만들고 세월이 흘러 그 후손들은 누군가 강력한 가부장 아래 새로운 부족을 형성해 나왔다.

 

성경은 아브라함과 함께 다니던 그의 조카 롯이 떨어져 나가 모압족과 암몬족의 조상이 되었고,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으로부터 나온 두 아들 에서와 야곱은 각각 에돔족과 유태인들의 조상이 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아브라함의 다른 아들 이쉬마엘은 황야에서 살았다고 나와 있는데, 그는 오늘날 아랍인들의 조상이 된 것으로 간주하고 있다.

 

성경은 명백하게 아브라함-이삭-야곱으로 이어지는 혈통을 야훼가 선택한 것으로 묘사하며, 야곱의 12아들중에는 유다가 우두머리가 될 것이라고 기록하였다. 유태교와 기독교의 고전적인 믿음은 창세기와 출애굽기를 비롯한 모세 5경은 야곱의 12아들중 레위의 후손인 모세가 기록했다는 것이다. 지금은 모세가 실존인물인지, 그렇다면 그가 언제적 사람인지에 대해서도 많은 논의가 있다. 문희석 교수는 모세가 이끈 출애굽이 기원전 13세기에 있었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핑켈스타인은 성경에 묘사된 바와 같이 대규모의 출애굽 사건이 역사 속에 실제로 있지 않았다는 사실을 부정할 여지가 없다고 단정적으로 표현한다. 그는 이런 성경의 기록은 기원전 622년 유다왕국의 요시야 시절에 정치적 목적으로 편찬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요시야왕은 앗시리아 제국이 무너지던 시절에 강력한 종교개혁을 통해 왕국을 강화하고 이스라엘의 옛 영토를 회복하고자 했다. 일부 학자들은 모세 5경이 오늘날과 같은 형태로 편찬된 것은 기원전 400년경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단정적인 표현들에 반해 출애굽과 모세의 역사성에 관한 엘리아드의 표현은 또 한 번 애매해진다.

 

"이스라엘의 종교에서 극도로 중요한 어떤 사건들의 역사성을 회복하는 일은, 기대에도 불구하고, 가능하지 않았다. 물론 이 말은 그 사건들이 역사적으로 실재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모세라고 알려진 인물의 역사적 실재를 의심할 이유는 없다. 그러나 그의 전기와 개인적 특성들은 우리의 추적을 벗어난다."

 

이 글은 필자에게는 마치 법정에서 자신의 학설을 부인하고 돌아서 나오면서는 "그래도 지구는 돈다"고 중얼거렸다는 갈릴래오의 일화와 같은 느낌을 준다. 출애굽이 있지 않았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출애굽에 대한 기록을 찾을 수는 없다. 모세를 부정할 수는 없지만, 모세라는 사람에 대해 구체적으로 알 수는 없다. 위의 글은 딱 이렇게 해석하면 맞을 듯하다.

 

미국의 성서고고학자인 에릭 클라인도 출애굽에 대해서는 애매한 입장으로 서술한다.

 

"지금까지 성서에 기록된 대로 아이들을 제외하고 60만의 장정들이 거대한 가축떼와 함께 사막에서 40년간 걸어서 헤맸다는 흔적은 전혀 찾을 수 없다. 이것은 그런 일이 안 일어났다는 것이 아니라 아직 고고학적 증거를 발견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의미할 뿐이다."

 

어찌 되었던 셈족의 한 지파로 등장한 유태인들은 수메르인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먼 나중에 등장한 민족이다. 수메르 민족의 흔적은 셈족의 일파를 아모리인들이 세운 고바빌론 왕국을 마지막으로 완전히 사라진 것을 앞 장에서 살펴보았다. 셈족의 지파 가운데 앗시리아를 건설한 앗수르족과 신바빌로니아를 건설한 칼데아족은 훨씬 후대에 나오는데, 성경은 유태인들과 이 두 제국과의 조우를 집중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유태인들은 수메르를 알았을까?

 

역사적으로 유태인들이 수메르인들보다 훨씬 늦게 출현한 민족이라는 사실을 검토해보았다. 그러면 유태인들은 수메르에 대해 알고 있었을까? 알았다면 어느 정도로나 알고 있었을까? 창세기 10장은 대홍수 이후 살아남은 노아의 자손들로부터 인류가 다시 시작되는 이야기를 담고 있는데, 노아의 아들 함으로부터 나온 자손들을 설명하는 부분에 이런 내용이 있다.

 

"6. 함의 아들은 구스와 미스라임과 붓과 가나안이요. 7. 구스의 아들은 스바와 하윌라와 삽다와 라아마와 삽드가요 라아마의 아들은 스바와 드단이며 8. 구스가 또 니므롯을 낳았으니 그는 세상에 첫 용사라 9. 그가 여호와 앞에서 용감한 사냥꾼이 되었으므로 속담에 이르기를 아무는 여호와 앞에 니므롯 같은 용감한 사냥꾼이로다 하더라 10. 그의 나라는 시날 땅에 바벨과 에렉과 악갓과 갈레에서 시작되었으며 11. 그가 그 땅에서 앗수르로 나아가 니느웨와 르호보딜과 갈라와 12. 및 니느웨와 갈라 사이의 레센을 건설하였으니 이는 큰 성읍이라."

 

여기에는 지금껏 우리가 살펴본 수메르 역사에 관련된 주요 도시들의 이름이 나와 있다. 바벨(바빌론), 에렉(우르크), 악갓(아카드), 갈레(칼루), 니느웨 등은 이미 친숙한 이름들이다. '시날 땅의 바벨'이라는 표현에서 시날은 어원이 명확하지 않지만 유프라테스와 티그리스 '두 강 사이'를 의미하는 뜻으로 그리스인들이 메소포타미아라고 말한 의미와 동일하며, 유태인들이 수메르를 지칭한 용어라고 생각되고 있다. 창세기 14장 1절에는 '시날 왕 아므라벨'이라는 이름이 나오는데, 이것은 '시날 땅의 바벨'과 연결하면 바빌론의 왕 함무라비를 연상시킨다.

 

여기에서 보면 유태인들은 수메르와 메소포타미아의 여러 도시 국가들에 대해 그 이름들을 알고 있었다. 최근에 일부 학자들은 수메르라는 용어 자체가 노아의 아들 셈의 이름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창조과학을 내세우는 기독교계 일부 논자들의 주장에 따르면 대홍수로 세상이 멸망하고 난 후 노아의 아들 야벳, 셈, 함으로부터 인류가 갈라져 나왔는데, 그 중 셈으로부터 수메르인들이 나왔고, 그의 후손들이 인도-유럽어족, 인도-이란족, 심지어 아일랜드와 이베리아 반도의 켈트족, 그리스의 스파르타족까지 이어졌다고 한다.

 

이러한 주장이 학문적으로 검증된 바는 없다. 각 민족의 언어에서 성서에 나오는 단어들과 발음이 유사한 단어들 몇 개로 유추하여 모든 것이 유태인에게서 나왔다고 하는 주장은 세계 모든 문명이 우리 한민족에게서 나왔다고 하는 환단고기식 주장을 연상시킨다. 유사역사학이라고 불리는 환단고기론자들에 따르면 수메르어에서 신을 나타내는 딘기르는 우리의 단군과 같고, 기르는 길, 바드는 밭과 같다. 수메르 민족은 우리 한민족에게서 나왔다는 것이다. 수메르라는 단어 자체가 우리말의 숯머리라고 한다.

 

위의 창세기 구절에 나온 내용을 역사적으로 검증하기는 힘들다. 앞에서 앗시리아 역사와 관련해 언급했듯이 성경은 구스의 아들인 니므롯이 위에 언급된 모든 도시들을 지배했고, 앗시리아는 직접 건설했다고 한다. 지금까지 역사적 사실을 통해 확인된 인물들 중에 이 내용과 부합하는 인물은 파악되지 않는다는 점을 앞에서 설명했다. 고대에 세계를 지배한 어떤 영웅이 있었는데, 그 인물의 이름이 니므롯이라는 식이다.

 

한편 위에서 언급된 도시들과 함께 아브라함의 일대기에 나오는 '갈대아 우르'는 수메르의 왕조가 있었던 바로 그 도시의 이름이 분명한다. 그런데 칼데아인은 신바빌로니아 제국을 세운 셈족의 지파로서 기원전 11세기경부터 역사 속에 처음 등장한다. 우르에 있던 수메르인들의 위대한 왕국은 기원전 2000년경에 멸망했고, 칼데아인이 신바빌로니아 왕국을 건설한 것은 그로부터 1400년쯤 후인 기원전 7세기가 지나갈 무렵이었다. 유태인들이 포로라 잡혀와 바빌론에서 70년간 억류 생활을 했던 때가 바로 이 신바빌로니아 왕국 시절이다.

 

수메르인의 우르 제3왕조에서 건설했던 커다란 지구랏트가 1500년이 지난 신바빌로니아 시절에도 그대로 남아 있어 기원전 6세기의 나보니두스 왕이 그것을 보수했다는 기록이 있음을 앞에서 언급하였다. 그러니 포로로 잡혀와 있던 유태인들에게도 칼데아 땅의 우르는 유명한 도시였다. 이러한 연대기를 감안하면 '갈대아 우르'라는 창세기의 기록은 우르가 칼데아 땅이 된 이후에 만들어진 것으로 판단할 수 있으며, 아브라함을 기원전 20세기경의 실존인물이라고 보는 해석은 맞지 않게 된다. 그들이 바빌론 유수 이후 알게 된 정보를 유태인 역사에 접목하여 이야기를 만든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비슷한 사례를 팔레스타인족인 블레셋에 대한 언급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역사적으로 팔레스타인족은 기원전 12세기경에 처음 등장한 것으로 간주되는데, 모세 5경은 여러 군데에서 블레셋족과의 싸움을 언급하고 있어 모세 시대에 이것이 기록되었다고 추정하기 어렵게 만든다.)

 

유태인들은 바빌론 포로 시절에 많은 이방인들의 문화에 접하게 되었다. 당시의 바빌론은 오늘날의 미국처럼 전 세계 권력과 정치의 중심지였을 뿐만 아니라 학문과 문화의 중심지였고, 많은 민족들이 들어와 교류하고 생활하던 곳이었다. 유태인들처럼 포로로 끌려와 노예생활하던 민족들도 많았다. 유태인들이 이 시절의 경험을 통해 세계를 보는 눈을 다시 뜨게 되었고, 많은 이방인들의 이야기가 그들의 지식 범위에 포함되면서 성서에 반영되었다.

 

종교 사학자인 그레이스 케언스는 유태인들이 바빌론 포로 시기에 접한 조로아스터교의 영향으로 선신과 악신이 싸우는 우주관을 받아들이게 되었다고 말한다. 유일신이 지배하는 세게에서 그 신과 대적하며 인간을 유혹하는 사탄이라는 존재가 언급되는 유태인들의 종교관은 사실 이성적인 인간들에게는 당혹스런 세계관이다. 바빌론 유수와 그 이후 시기에 유태인들이 이러한 조로아스터적 세계관에 노출되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당시의 바빌론은 말둑을 주신으로 섬기는 세계였지만, 조로아스터교가 그 일대 민족들에게서 광범위한 대중적인 기반을 확보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바빌론을 멸망시킨 페르시아인들의 국교가 조로아스터교였다는 점에서 유추할 수 있다.

 

유태인들을 압제에서 해방시켜준 키루스의 페르시아 군대가 가져온 종교와 문화가 유태인들에게 영향을 주지 않았을 리가 없다. 바빌론 멸망 후에는 페르시아가 200년 이상 세계를 지배했으니, 선신과 악신이 싸우는 이원론적 신관에 입각한 그들의 종교 문화가 그 지배하의 많은 민족들에게 당연히 큰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우리 경우도 해방 이후 미군이 주둔하면서 우리 사회에 많은 영향을 주었고, 기독교와 서구 문화가 크게 보급된 사실을 생각해볼 수 있다.

 

이런 점을 고려하면 유태인들은 바빌론 유수를 통해 세계 민족의 역사와 지리, 종교와 문화 등에 대해 새로운 지식을 얻고, 이를 반영해 성서를 새로이 편찬한 것으로 유추할 수 있다. 최초의 인류가 살았던 에덴 동산이 이집트나 가나안이 아니고 바빌론이 위치한 메소포타미아 지역으로 묘사된 것이나, 창세기에 기록된 노아의 홍수 이야기, 시날 땅의 바벨탑 이야기, 그리고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에서 나왔다는 이야기 등은 모두 바빌론과의 연관을 강하게 시사한다. 대홍수 이후 노아의 자손들로부터 인류가 갈라져 나왔다는 내용은 당시 유태인의 현명한 사제들이 파악한 고대 세계의 인류학과 지리학의 첨단 정보였을 것이다. 그들이 알고 있던 세계의 지리적 범위는 가나안을 중심으로 이집트와 그 주위 북아프리카 일대, 그리고 메소포타미아 일대가 사실상 전부였다. 오늘날의 5대양 6대주와 같은 개념은 그 시대에는 존재하지도 않았다. 그들이 당시대의 중국이나 인도, 나아가서 우리의 고조선 같은 나라나 민족들을 알고 있었을 가능성은 매우 낮다.

 

뒤에서 곧 보겠지만 대홍수 이야기는 수메르인들이 기원전 2100년경에 최초로 만들었고, 1000년 이상의 시간이 경과하면서 바빌론, 히타이트, 앗시리아 사람들이 계속 각색하여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었다. 고대 메소포타미아에서 세계적인 베스트셀러였던 <길가메쉬 서사시>가 이 모든 이야기들의 원전이다. 이것이 성서에 기록된 노아 홍수 이야기의 원전이며, 천지창조, 에덴동산, 바벨탑 이야기 등도 모두 바빌론과 관련이 있다는 주장이 지난 100여년 동안에 강력하게 제기되어 오고 있다.

 

그러나 유태인들이 습득한 정보는 당시 세계에서 정통하거나 완전하지 않은 것도 많았고, 이런 정보가 앞서 살펴본 니므롯의 이야기처럼 실제 역사 기록과 맞지 않는 부정확한 기록을 낳은 것으로 생각된다. 이것은 당시 세계가 지금처럼 인터넷이나 TV, 영화, 많은 책들이 있던 시대가 아니고, 문자를 아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해 정보를 구하기가 쉽지 않은 시대였음을 생각하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더욱이 당시 유태인들은 바빌론에 노예로 끌려와 있던 상황임으로 그 세계에서 고급 정보를 접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유태인들이 수메르의 존재를 알았을까 하는 의문에 대해 필자 나름의 결론을 내려보기로 한다. 먼저 성경에는 수메르인들이 활동했던 도시 이름들과 실존 여부가 밝혀지지 않은 일부 인물들의 이름이 나오지만, 수메르인들의 활동에 대한 직접적인 기록은 전혀 없다. 유태인들은 이집트와 가나안 땅에서 자신들이 접한 많은 민족들을 언급했고, 메소포타미아에서는 앗시리아와 바빌론을 중심으로 역시 많은 민족들을 언급했지만, 수메르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은 없다. 기원전 1세기에 유태인들의 역사를 상세히 쓴 요세푸스의 역사책에도 수메르인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다.

 

이 점을 본다면 유태인들은 수메르인에 대해 구체적으로 알지 못했고, 아득한 옛날에 인류의 첫 문명으 만들었던 어떤 전설적인 민족 정도로 알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런 전설 같은 이야기가 어떤 영웅적 인물 니므롯이나 시날 땅의 바벨 같은 막연한 지명 속에 흔적을 남기고 있는 것이다.

 

알지 못했으므로 기록할 수 없었고, 정확히 알지 못했으므로 잘못 기록한 사례는 역사에서 흔히 발견되는 일이다. 기원전 5세기에 중동의 역사를 기록한 그리스의 헤로도토스도 자신의 시대로부터 불과 100여년 안쪽에 망한 신바빌로니아 제국의 네부카드넷자르 대왕을 알지 못했다. 그는 바빌론을 앗시리아의 한 지방 정도로 간주했다. 그의 기록에는 니토크리스라는 바빌론의 훌륭한 여왕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리스인이었던 그가 네부카드넷자르의 페르시아식 이름을 듣고 여성으로 잘못 이해한 것이 아닌가 추정되고 있다.(네부카드넷자르의 페르시아식 이름은 나부크드라차라였다.)

 

그의 역사에도 수메르인에 대한 이야기는 전혀 없고, 심지어 자신과 동시대에 존재했던 유태인들에 대한 언급도 전혀 없다.

 

설정

트랙백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