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동방박사 대홍수 미카엘 루시퍼 등 성경의 연금술적 해석
연금술이란 무엇인가 p226
성경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어떤 이들은 책을 통해서 연금술에 빠져든다. 풀카넬리의 책을 읽고서 이런저런 상상을 해보다가, 어느 날 문득 직접 실험하기로 결심하는 식이다. 그런데 나는 아니다. 나는 처음부터 실험과 물질에 끌렸다. 그리고 한참 뒤에야 내가 해본 경험들을 책에서 확인했다. 그러다 보니 마흔 즈음이 되어 좀더 알고 싶다는 욕구가 생겼고, 오래된 문헌들을 읽으며 그 기원을 찾고자 공부했다. 옛날 문자들인 그리스어, 라틴어, 히브리어, 심지어 아람어도 좀 익혔다. 카발라를 공부하고, 성경의 여러 번역본을 서로 비교해보기도 했다. 그러면서 나는 연금술이 도처에 존재해왔음을 발견했다. 결국은 그 모든 것이 우주의 근본 원리를 밝혀내려는 작업이니 어쩌면 당연했다.
히브리어 공부는 나에게... 빛이었다. 히브리어는 정말이지 내게 새로운 등불이 되어주었다. 구약성서 속에 있는 여러 실마리들은 히브리어를 통해서만 발견될 수 있다. 그중 일부는 아에 번역이 불가능하다. 일종의 문자 놀이이기 때문이다. 그런가 하면 불량한 번역이 혼동을 일으키거나 뜻을 왜곡한 경우도 있다. 그 의미를 정확히 짚어보지 않은 채 히브리어 단어 전체를 그냥 불어식 문장 안에 번역해 넣음으로써 생겨난 문제들이 가장 흔하다. 히브리어는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읽는다. 그래서 요즘 수호의 목적으로 나오는 물건이나 책, 보석들을 보면 천사들의 이름이 거꾸로 쓰인 경우를 종종 보게 된다. 이것이 왜 문제냐면, 천사를 부르는 대신 악마를 부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내가 흔히 말하듯, 잘 모르는 채로 마법의 힘을 사용하는 것은 백지 수표에다 서명을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연금술사에게 독서는 그야말로 건설적인 일이다. 우리는 이 예술을 독려하는 수많은 정보를 책에서 발견한다. 예를 들어 예수의 탄생을 한번 살펴보기로 하자.
새의 언어로 보면, 그리스도Christ와 수정Cristal은 같은 단어다. 성경에 나오는 소금도 같은 의미로 해석해볼 수 있다. '너희가 곡식 제물을 바치는 모든 예물에는 소금을 쳐야 한다. 너희가 바치는 곡식 제물에 너희 하느님과 맺은 계약의 소금을 빼놓아서는 안된다. 너희의 모든 예물과 함께 소금도 바쳐야 한다.'(레위기 2:13) '모두 불 소금에 절여질 것이다.'(마르코복음 9:49)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그러나 소금이 제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다시 짜게 할 수 있겠느냐? 아무 쓸모가 없으니 밖에 버려져 사람들에게 짓밟힐 따름이다.'(마태오복음 5:13) 연금술사에게 그리스도는 황을 없앤다는 의미의 고통, 즉 열정을 극복해서 결국 빛이 통과하도록 만드는 이다.
동방박사들은 마태오복음에만 등장하는데 그 이름이 무엇이고 몇 명인지가 불분명하다. 그러나 흥미롭게도 6세기에 이르자 이들이 3명이었고 각자 이름이 무엇이었는지까지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리스도교에서 점성학이나 마술을 떠올리게 하는 이 인물들을 예수의 탄생과 결부시키고 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이야기에 따르면, 특별한 일을 기다리던 페르시아의 왕이 12년마다 이처럼 점술가들을 직접 파견했다고 한다.
자, 그러면 실마리를 한번 따라가보자. 이 세 사람은 페르시아의 왕이 보냈고 가지가 5개인 별 하나를 쫓아갔다. 이 별빛이 수직선을 그으며 닿은 곳의 동굴에 크리스토스, 즉 유대인의 메시아가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전설은 사실상 다른 세상에서 일어난 일을 우리 세상에 비추어 말해주고 있다. 세 별자리, 즉 처녀자리와 당나귀자리(이후에 게자리 혹은 가재자리로 이름이 바뀌었다)와 황소자리의 회합이다. 하늘의 별들을 땅에 있는 동굴에 맞추다 보니 세 별자리가 소, 당나귀, 여자로 변신했다. 머지않아 동굴마저 마구간으로 바뀌었고 양치기들도 끼게 되었다. 이처럼 예수 탄생의 묘사는 재미있게도 시대마다 신도들의 눈높이에 맞춰서 여러 번 바뀌었다.(예를 들어 베들레헴에 거주했던 예수 탄생과 관련된 인물들이 오늘날 우리가 연상하듯 파란 눈의 금발일 가능성은 거의 없다)
머리에 월계관 - 금이 거기에 있다(l'or y est) - 을 쓰고서 5개의 가지를 지닌 별을 따라온 이 세 동방박사의 피부색은 각각 검은색, 하얀색, 붉은색이었다. 즉 오랫동안 흑색 작업, 백색 작업, 적색 작업을 해오며 '빛'을 좇은 사람들이다. 비트리올(땅속을 방문하라. 그러면 숨겨진 돌을 발견할 것이다.)이 그들에게 입김을 불어넣었고, 정말로 땅속이라고 말할 수 있는 동굴 안에 한 아기가 있었다.
이 동방박사들의 이름은 페르시아어에 의해서만 풀이될 수 있다.
제일 늙은 이가 멜키오르, 풀어보자면 마엘-아오르다. '난쟁이들의 우두머리'라는 뜻으로 땅의 위력을 아는 존재다. 영적 지식을 뜻하는 그노스(그리스어로는 그노시스)와 난쟁이를 뜻하는 '그놈gnome'의 유사성을 살펴보라. 예로부터 난쟁이들은 땅에 관한 한 천재들로 여겨졌고, 역사적으로도 광산에 고용되어 일하곤 했다.(베네치아의 난쟁이 설화를 떠올려보라) 멜키오르는 대지처럼 흑색의 인간이며, 흐르는 시간을 상징하는 크로노스와 같이 노인이다. 그는 몰약을 선물로 가져왔는데, 몰약은 시체를 보관하는데 쓰이는 약제다. 이른바 흑색 작업, 즉 외적 죽음을 암시한다.
3명중 가장 젊은 이는 가스파르다. 이란어로 풀면 '보물 지킴이'라는 뜻이다. 그는 대지의 힘을 보관하는 사람인데, 선물로 금을 가져왔다. 히브리어로 금은 사랑 혹은 빛을 뜻한다.
마지막 인물은 발타자르인데, 풀이하면 Baal Zar이다. 즉 그는 바알(Baal, 신의 다른 이름)의 수호자다. 혹은 우연(hasard)의 수호자로 해석할 수도 있다. 나이로 보면 위 두 사람의 중간 정도다. 그는 향을 가져왔는데, 향은 종교 의례에서 위와 아래를 잇는 도구로 사용된다.
위와 아래의 힘을 합치시키는 것. - 즉 이 동방박사 3명은 연금술이라는 위대한 예술을 상징하고 있다. 이들이 찾고 있는, 가지가 5개인 별은 연금술사가 용기의 한가운데서 발견하는 결정체로서, 여기선 그리스도로 표현되고 있다. 곧 용기 중앙의 완전한 수정(Christal)이다.
그런데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예수의 가족은 동방박사들이 가져온 선물을 받은 후에 상자 하나를 그들에게 건네며 이렇게 말한다. "댁에 도착하기 전까지 절대 열지 마십시오." 그런데 동방박사들은 귀가하는 길에 참지 못하고 그 통을 열게 된다. 통을 열어보니 웬 빨간 돌 하나가 있는게 아닌가! 그들은 실망하여 돌을 우물에 던져버린다. 그러자 우물에 불이 붙는다. 그들은 잘못을 깨닫고 돌을 다시 꺼내려 하지만 이미 늦어버렸다. 그들이 가져올 수 있는 것은 그 불뿐이었다. 그들은 그 불을 들고 고향으로 돌아와서 불을 추앙하는 사람들(조로아스터교도)과 나눠 가진다. 즉 이 불에 의해 그리스도교와 조로아스터교는 하나의 빛을 공유한다고 볼 수 있다.
돌에 대한 언급은 예수 탄생 이전부터 있었다. 구약성서에서 살로몬은 돌 덕분에 사원을 지을 수 있었다. 모세의 성궤에서도 볼 수 있다. 성궤 안에는 십계명이 새겨진 석판과 신비로운 음식 만나(manna)가 있었고, 모세가 홍해를 가르기 위해 사용한 아론의 지팡이 위에도 이 돌이 있었다고 한다.
모세는 약속의 땅으로 향했는데, 약속의 땅이라는 표현에서도 제1물질을 찾는다는 의미를 짐작할 수 있다. 제1물질은 빛과 가장 가까운 물질이다. 약속의 땅은 곧 하느님에게로 향하는 하나의 문이다.
한편 '만나'라는 음식 이름도 히브리어로만 이해할 수 있는 일종의 말장난이다. 만man은 의문, 물음을 뜻한다. 출애굽기16:15를 읽어보자. "이것을 보고 이스라엘 자손들은 그것이 무엇인지 몰라 이게 무엇이냐고 서로 물었다. 모세가 그들에게 말하였다. '이것은 주님께서 너희에게 먹으라고 주신 양식이다.'" 이 대목은 그들이 40년간 의문을 품고 살았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모든 의문이 풀리자 비로소 약속의 땅을 찾게 되었던 것이다.
성경의 연금술사의 빛에 비추어 읽어보면, 빛을 찾아 헤매온 인간의 역사를 알게 된다. 이브가 깨물었다는, 먹으면 안되는 그 유명한 열매만 해도 그렇다. 그것은 사과가 아니라 석류였다. 석류는 그 지역에서 훨씬 흔할 뿐 아니라 우주의 상징으로 흔히 언급되는 과일이다. 겉은 하나지만 속은 다중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먹으면 안된다는 말이 정말로 '앎의 나무'에 접근해서는 안된다는 의미일까? 아니다! 접근 금지를 당한 대상은 사실 따로 있었다. 빛나는 창을 가지고 있는 날개 달린 황소 - 이 짐승은 히브리어로 케루반인데, 여기에서 게루빔(지품천사)이라는 단어가 만들어졌다. 하지만 이 짐승은 날개 달리고 통통한 천사들과는 거리가 멀다 - 가 그 대상이었다. 즉 앎 자체가 금지된 것이 아니라 케루반의 접근만이 금지되었던 것인데, 이것은 엄연히 다른 의미다.
성경 속의 또 다른 죄인인 롯의 아내 이야기도 살펴보자. 롯의 가족은 뒤돌아보지 말고 도망가라는 명령을 받는다. 하지만 롯의 아내는 기어코 이를 어기고 뒤를 돌아봄으로써 불복종의 죗값으로 소금 동상이 된다. 여기서도 원래의 단어를 살펴 다르게 해석해볼 수 있다. 소금(sel)이 된다는 말을 봉인된다(sceller)는 의미로 보면, 그녀는 오히려 비밀을 간직한 존재이며 보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소금은 봉인하는 것이니까.(le sel scelle) 그녀는 하느님의 불을 고정시켰다. 소금은 불을 고정시킨다. 이것이 바로 연금술적인 설명이다. 소금으로 정신을 붙잡는 것이 연금술사의 일이다. 다시 말해 죄를 저질러 벌을 받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의 의미가 된다.
연금술사의 빛에 비추어 읽어야 할 또 다른 일화로 성 크리스토프의 이야기가 있다. 크리스토프는 그리스어로 그리스도를 짊어지는 사람이다. 그는 사람들을 등에 짊어지고 강을 건너는 거칠고 건장한 거인이다. 어느 날 그는 한 아이를 업고 강을 건넜는데, 아이가 너무 무거운 나머지 그 자신도 강에 주저앉을 뻔했다. 이 아이가 바로 그리스도, 곧 빛이다. 빛은 물질에 압력을 가한다.(안티몬 기름통이 얼마나 무거운지는 앞에서 이미 언급했다) 크리스포트는 아직 성인이 아니라서 빛을 통과시키지 못했는데, 자신이 짊어진 아이가 그리스도임을 알자마자 그 무게를 더 이상 느끼지 않는 은총을 받는다. 빛이 그리스도의 수정체(cristal)를 통과하고 뒤이어 크리스토프도 통과한 것이다. 교정되고 성화된 크리스토프는 계속 자신의 길을 나아갈 수 있게 된다. 그것도 전보다 훨씬 가뿐하게.
이 장에서 성경의 모든 내용을 다시 쓸 수는 없다. 하지만 새로운 조명을 좀더 비춰주기 위해서, 노아의 방주 때로 잠시 여행을 떠나 홍수에 관해 한번 살펴보겠다. 그러면 천문학과 언어학 사이를 오가야 하니까 안전띠를 단단히 매기 바란다.
세상 곳곳에서 내려오는 전설들 중에, 아주 오래전에는 지구의 자전축이 기울어지지 않았고 달도 2개가 떠 있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때의 지구는 천국과 다름없이 행복한 곳이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2개의 달중 하나가 떨어져나가며 지구가 뒤흔들렸고 엄청난 파도가 일어싸. 호주 원주민들은 이것을 '최후의 파도'라고 부르는데, 그 파도가 지구 전체를 휩쓸었다고 한다.
천문학적인 관점으로 보면 얼토당토않은 말많은 아니다. 실제로 달은 황도면(태양을 도는 지구의 궤도)에 있지 않다. 태양계 행성들은 같은 선상에 위치해 있어서 마치 하나의 수면 위에 떠 있는 공들과 같다. 하지만 달은 거기서 동떨어져 있다. 그래서 높이와 위상이 변한다. 달이 차오르는 것은 태양의 위치 때문이다. 달은 태야의 빛을 반사할 뿐 스스로 빛을 내지 않는다. 달의 상승과 하강 또한 지구의 자전축 기울기(23.26도)에 의해 달라진다.
이런 이야기를 상상해볼 수 있겠다. 지구에 계절이 존재하지 않았던 때, 즉 지구가 기울지 않았던 때가 있었다. 그때는 1년 내내 과일이 풍성했다. 과일로 충분해서 동물들은 먹이를 찾아 옮겨 다닐 필요가 없었다. 인간도 마찬가지였다. 에덴동산처럼 말이다. 그런데 엄청난 충격이 일어났다. 지구의 축이 움직인 것이다. 그래서 생긴 첫 번째 결과는 육지가 흔들리면서 대양을 뒤흔들었다. 육지에 있는 누군가가 보기에 높이 2000미터가 넘는 파도가 밀려온다. 참고로 말하자면, 2011년 3월 11일에 일어난 쓰나미는 파도 높이가 14미터였다.
처음엔 엄청난 고요가 세상을 덮는다. 다음으로 어떤 무거운 숨소리 같은 것이 멀리서 다가오는 듯하다. 그 다음 파도의 벽이 다가오며 지평선을 덮는다. 파도의 벽에 삼켜지는 세상을 목격하게 된 사람들의 놀라움을 상상해보라. 대양에서 멀리 있던 사람들은 그 광경을 보지 못했겠지만, 굉음만큼은 선명히 들렸을 것이다. 엄청난 지진, 분출하는 화산, 천재, 천국의 종말, 세상의 종말.
이 엄청난 파도가 지나간 후에 기후의 변화가 생겨났다. 지구의 축이 기울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간은 먹이를 찾아 계절마다 이동해야 했고 동물들도 같은 상황을 맞았다. 아마 빙하기도 찾아왔을 테다. 이런 상황은 천국에서 쫓겨난 것과 다름없었다.
이 재앙은 무엇을 남겼을까? 이 사건은 인류의 역사 속에서 구전되었고, 인류의 집단무의식 속에 대홍수, 최후의 파도라는 기억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그래서 언젠가는 잃어버린 천국을 다시 찾으리라 희망하면서 지금은 죽어라 땀을 흘리며 일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지금부터 비밀을 밝히려고 하는 노아의 방주도 명백히 이와 같은 맥락에서 전해져온 이야기라고 볼 수 있다.
성경에 언급된 그대로를 보면, 페르시아 전설을 각색해서 짜집기한 이야기임을 알 수 있다. 상징적인 요소들을 이해하려면 히브리어에 대해 두세 가지 정도 알아둘 필요가 있다. 원래 히브리 문자는 자음으로만 되어 있다. 예를 들어 야훼는 YHVH로 쓴다. 읽을 때는 모음을 넣게 되지만 쓸 때는 자음만 쓴다. 유대 전통주의자에게 히브리어는 사어, 즉 죽은 문자여서 시체나 다름없다. 그래서 토라를 천으로 싸서 상자에 넣어둔다. 여기서 상자는 관이고, 천은 수의를 상징한다. 책을 상자에서 꺼낼 때는 손으로 건드리지 않고, 책을 읽을 때도 특별한 막대기(YAD)를 이용한다. 시체는 건드리지 않는 법이니까.
토라는 노래하듯이 읽는 책이다. 글에 생명을 주기 위해서 단어들 속에 숨, 즉 철자들 속에 영혼을 불어넣어야 한다. 그렇게 해야 비로소 진정한 문장이 된다. 여기서 모음은 우리를 통해 저절로 흘러나오는 하느님의 입김이다. 그래서 모음을 알지 못하면 글을 읽을 수가 없다. 구전으로 내려온 비밀스러운 모음이 기록된 문자(자음)를 보완한다.
그런데 이 비밀을 잘못 이해한 고대 그리스인들은 모음을 뜻하는 기호들을 글 속에다 집어넣었다. 예를 들어 여호와의 경우, 누군가가 YHVH를 해석하면서 끼적인 기호들이 필사자들에 의해 아에 철자 속에 포함되어 단어로 굳어진 것이다. 카발라에서는 행간을 읽을 줄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 이 말은 곧 (다른 해석을 넣지 말고) 있는 그대로만 읽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 문자들의 틈새를 보려면 말이다. 흰 종이 위에 검게 쓰인 문자들은 우물과도 같다. 우리는 그 우물 주위의 빛까지 봐야 한다.
기본적으로 알아야 할 또 다른 사항은, 히브리어로 단어를 만들려면 처음부터 문자들을 짝지어서 구성해야 한다는 점이다. 히브리 문자들은 짝지어서 사용된다. 마지막 사항으로, 특히 노아의 방주 이야기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히브리어에서 각 문자는 하나의 숫자에 해당하기도 한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이런 사항들을 염두에 두고 성경을 다시 보기로 하자. 성경에는 방주의 크기가 정확하게 쓰여 있다. '방주의 길이는 300암마, 너비는 50암마, 높이는 30암마이다.'(창세기 6:15) 이 수치를 미터로 환상하면 길이가 대략 137미터, 너비가 26미터, 높이가 16미터다. 결과적으로 좀 길쭉한 배 모양이 나오기는 하지만 항해를 하기에는 그리 적절해 보이지 않는다. 노아의 방주를 재현해 놓은 대부분의 모형을 보면, 배라기보다는 거의 상자에 가깝다. 그렇다면 이 숫자들은 히브리어에서 무슨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일까? 여기서 사용된 문자는 쉰(300), 눔(50), 라메드(30)이다. 이 3가지 문자를 합하면 lachon이라는 단어가 되는데, 이것은 히브리어로 '언어'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방주 안에는 무엇이 있는가? 창조의 말씀이 있다. 방주 속에서 쌍을 이루고 있는 동물들... 왠지 상자 속에 보관된 토라를 연상시키지 않는가? 토라의 문자들도 히브리어 규칙에 따라 쌍을 이루고 있으니 말이다.
영원이 세상에서 언어를 빼앗아갔다. 그리고 재앙과 파멸을 내렸다. 그러니 무엇이 남았겠는가? 연금술적으로 보면, 수은(정신)을 걷어내고 나면 소금이 남는다. 그것은 정신이 결여된 소금, 황과 요동과 분노로 가득한 소금이다. 상상해보라. 엄청나게 짜고 요동치는 곳에 떠 있는 상자? 그렇다. 대양 위에 떠 있는 배다.
대홍수는 흑색 작업으로 간주된다. 이 이야기는 육지가 멀지 않았는지를 알아보려고 노아가 까마귀를 날리면서 종말에 도달한다. 까마귀는 되돌아왔고, 이는 육지가 없다는 의미였다. 그러나 노아가 다시 비둘기(백색 작업)를 날려 보냈더니 작은 올리브나무 가지를 물고 되돌아왔다. 육지가 멀지 않은 곳에 있다는 의미였다. 그리하여 비둘기는 땅이 있는 방향을 향해 사라지고, 거기에서 새로운 빛이 뿌리를 내리게 된다. 이것이 바로 대업의 완성이다.
이 이야기 속의 직사각형 방주는 진짜 배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다. 인류와 하느님 사이에 놓인 다리인 무지개 또는 성궤와 비슷한 의미로 쓰인 단어다.
잘 알려진 대천사인 성 미카엘(불어로는 생미셸이다)에 대해 알아보며서 성경 훑어보기를 이만 끝내겠다. 성 미카엘은 땅에서 군대를 이끈 장군이자 연금술적인 탐험을 해낸 인물로도 묘사되는데, Mikael을 거꾸로 읽으면 Alkemi가 된다는 점에 주목해보라.
미카엘은 히브리어로 '하느님과 같은 이'라는 뜻이다. 그는 중용의 여정을 수호한다. 그는 마아트의 역할을 맡게 되는데, 마아트는 세상의 균형을 담당하는 이집트의 여신이다. 마아트처럼 미카엘도 저울로써 영혼의 무게를 잰다. 저울의 한쪽에는 심장, 다른 한쪽에는 날개 깃털 하나를 올려 그 영혼을 저울질한다. 심장에 감정의 무게가 실려 있지 않다면 저울은 평형을 이루며 중용의 길을 열어준다. 미카엘은 용을 처단하고 있는 전투사로 묘사되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을 진짜 싸움으로 보고 용을 악의 상징으로 여기는 것은 오류다. 실상은 성 미카엘이 용을 풀어주기 위해서, 용에게 손을 내민 것이다.
용은 아래의 불, 곧 물질 속에 갇혀 있는 빛을 나타낸다. 바로 그런 이유로 용은 불을 내뿜는 모습으로 묘사된다. 하느님이 빛나는 창과 함께 보낸 미카엘은 위에서 온 불을 상징한다. 그는 용을 죽이려는 것이 아니라 용의 두꺼운 피부를 뚫으려 할 뿐이다. 위의 빛이 아래의 빛과 서로 만날 수 있도록, 마치 비밀을 꿰뚫듯이 용을 뚫는 것이다. 이 말을 기억하라. - '구멍을 뚫으라. 그러면 보일 것이다!' 이것은 싸움이 아니라 마주 봄, 일체가 되기 위한 의미 있는 만남이다.
용에게는 2가지 가능성이 있다. 첫 번째는 받아들임이다. 그러면 위의 빛이 용 자신의 피부 속으로 스며든다. 이것이 일체가 되는 만남이다. 이렇게 위의 빛이 아래의 빛을 만나게 되면 창조가 완성된다.
두 번째는 거절이다. 위의 빛이 용에게 다가오지만, 용은 그것을 거절한다. 결국 용은 바닥으로 내동댕이쳐진다. 다음의 만남이 있을 때까지. 용이 자유로워질 때까지는 성 미카엘도 자유로워질 수 없다. 그래서 감옥에서 함께 머물며 안내자 역할을 맡게 된다.
용은 숨겨진 것들에 대한 앎으로 묘사되기도 한다. 용의 색깔은 초록색이다. 여기서 색깔에 대한 이야기를 잠시 곁들일까 한다. 상징의 팔레트에서는 색깔이 무척 중요하다.
연금술적인 표현은 물론이고 일반적인 상징으로서도 초록색(vert)은 비밀의 색깔, 숨겨진 앎의 색깔, 즉 어떤 것이 거꾸로 뒤집혔을 때의 색깔을 나타낸다. 이것은 외우기도 쉽다. 거꾸로(envers)는 초록색으로(en vert)라고 들린다. 새의 언어는 이 색깔과 다양한 동음어들로 톡톡히 재미를 본다. 초록색은 투명함의 상징인 유리(verre)와도 비슷하게 들린다. 빛이 거기를 통과한다.(atra-vers) 귀 기울여보라. - 말씀(verbe : 동사를 뜻하기도 한다), 미덕(vertu), 진실(verite)의 색깔. 완전히 초록색(tout vert)인 것은 곧 열림(ouvert)을 의미하기도 한다. 잠겨 있는(verrou) 것의 반대 말이다. 이런 음률이 당신에게도 들리는가? 당신은 지금 용처럼 말하는 법을 배우고 있는 중이다.
이 초록색 언어는 음유시인들에 의해서 꽃을 피운다. 음유시인(trouvere)은 메시지를 암호화하는데 탁월한 사람들을 가리킨다는 점에서 그야말로 딱 맞는 이름이다. 그 외에 각종 은어에서도 초록색은 평범한 사람들이 찾아내기 어려운 암호를 담는 용도로 쓰여왔다. 초록색은 뽀뽀를 하면 왕자가 되는 요술의 청개구리이며, 피터팬부터 스타워즈의 요다에 이르기까지 비밀을 간직한 수많은 인물들의 색깔이다. 괴테의 동화에 나오는 초록색 뱀도 마찬가지다. 초록색 생쥐를 노래하는 동요(La Petite Souris Verte) 역시 알 사람은 알아차리도록 암호화된, 이 위대한 예술의 모범적 사례다.
이에 비해 삼지창을 든 포세이돈처럼 악마가 전통적으로 초록색으로 묘사되었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악마가 적색으로 묘사된 것은 나중의 일이다. 오랫동안 악마는 '초록색의 아버지(pere-vert)' 역할 - 끔찍하다(pervers)'와 발음이 같다. 역주 - 을 해왔다. 샤르르트 대성당의 유리창에서도 이런 초록색을 볼 수 있다. 초록색은 에메랄드의 색깔인데, 루시퍼가 이마에 달고 있던 돌이 바로 에메랄드다.
자, 루시퍼에서 잠깐 멈춰보자! 문자 그대로 보면 '빛을 드는 이'라는 뜻이다. 빛의 적이어야 하는 악마에게 주어진 요상한 이름이 아닐 수 없다. 우리는 다양한 표현을 혼동해서 쓰는 경향이 있다. - 천사, 악마, 요괴, 루시퍼, 사탄, 마왕... 히브리어로 샤탄은 '장애'를 뜻한다. 따라서 사탄은 특정 인물을 뜻하지 않는다. 사탄은 빛의 장애다. 사탄은 그림자를 드리우는데, 이 그림자를 수호하는 이가 바로 루시퍼다. 우리는 사탄이 영원의 눈을 속였다고 추궁한다. 반면 연금술사의 역할은 우리를 빛으로 되돌아가게 하는 것이다. 바로 그런 의미에서 '근원으로의 귀환'이라는 표현을 쓰며, 곧 빛의 근원으로의 귀환이다. 즉 장애를 더 만들지 않으면서 빛이 우리를 통과하도록 하는 것이다.
루시퍼는 추락의 천사이며, 숨겨진 것에 대한 앎을 가진 천사다. 루시퍼는 이마에 에메랄드를 달고 있었지만 지상으로 떨어지면서 그 에메랄드를 잃어버렸다. 루시퍼는 물질세계 그 자체다. 물질의 3분의 1이 영혼인 이유는 루시퍼가 추락하면서 천사들의 3분의 1을 데려왔기 때문이라고 여겨진다.
문헌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시간의 종말에서는 루시퍼조차도 전일체로 되돌아가리라.' 이는 성 미카엘이 용을 찔러서 물질을 해방시키니 2개의 불이 하나가 되는 것과 같다. 볼프람 본 에셴바흐가 13세기에 저술한 "파르치팔"을 보면 이런 말이 있다. '영웅이 용을 찌르자 용은 피범벅이 되고, 영웅은 피로 젖은 손을 입에 갖다 대며 용의 피를 맛보는데, 그땐 그는 새의 언어를 이해하게 된다.'
용은 위아래를 오가며 날아다니는 생명체다. 날개는 '비상'을 상징하고 무거운 발은 '고정됨'을 상징한다. 용은 우리에게 아주 쓸모없는 것들 속에도 빛이 숨어 있음을 가르쳐준다. 더 구체적으로는 우리 안에 내재하는 주요 장애들, 고유한 두려움들 속에 말이다. 용들과 싸워서 이기는 기사들은 항상 '두려움이 없고 나무랄 데가 없다'는 식으로 묘사된다. 그들은 곧바르고, 정련되었고, 순수하다. 그들은 두려움을 뛰어넘었기에 승리한다. 성 미카엘이 용을 무찌르는 것은 곧 우리 자신의 두려움을 무찌르는 것을 뜻한다. 우리를 땅에 붙들고 빛으로 다가가지 못하게 하는 두려움, 그것을 뛰어넘는다면 우리는 더 이상 땅에 붙들리지 않고 영성을 되찾게 될 것이다.(다른 장에서 우리는 두려움과 영성이 동일한 입문 여정의 서로 다른 두 양상일 뿐임을 확인하게 될 것이다) 성 미카엘은 연금술사처럼 에고의 두꺼운 피부를 뚫고, 공포를 뛰어넘고, 암흑마저도 용서함으로써 그것을 전일체로 다시 융합시킨다.
나는 여기서 성경을 다시 읽는데 유용한 몇 가지 실마리를 던졌을 뿐이지만, 이런 연금술적인 시각은 성경 외의 문헌과 전통들에도 적용될 수 있다. 원탁의 기사들에서 성배를 찾아 나서는 여정 또한 현자의 돌을 찾는 여정과 다르지 않다. 성배란 것이 결국엔 빛을 담기 위한 잔이니까. 아서왕이나 그의 아버지 유서 팬드래곤, 요저 비비안, 마법사 멀린 - 지빠귀 새(merle)의 언어를 할 줄 아는 자 - 등의 이름만 봐도 그렇다. 라블레(프랑스의 풍자작자)는 자신의 모든 책에 연금술적 실마리를 의도적으로 심어놓았다. 백설공주나 신데렐라, 작은 엄지공주 등 그림 형제가 펴낸 동화들 속에도 그런 실마리가 수두룩하다. "7마리의 까마귀"를 다시 읽어보라. 그냥 그 자체로 연금술 이야기이며, 모든 요소가 연금술적인 상징이다. 돈키호테, 어린 왕자, 길가메시 서사시에 나오는 골렘(거인)들, 루이스 캐럴이 만든 "오즈의 마법사"의 세계, 에르제(Herge, 만화 탕탕의 원저자)의 작품들... 이것들은 다른 시각으로 한번 읽어보라. 여기에 다 펼쳐놓기에는 예시들이 너무나 많다. 그러니 다음 기회를 기약하고 이쯤에서 끝맺기로 한다.
'Realize' 카테고리의 다른 글
카발라 인생의 7단계와 7세상 그리고 백성공주와 일곱 난쟁이 (0) | 2021.02.08 |
---|---|
내가 생각하는 최고의 연금술사 (0) | 2021.02.08 |
생과 사 (0) | 2021.02.07 |
사람의 뇌는 끝을 인식하면 의식적으로 게으름을 피우게 되어 있다! (0) | 2021.02.06 |
모든 것은 신의 뜻대로........ (0) | 2021.02.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