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의 역사 4권 - 낭만주의 시대의 악마 by 루다님

Realize 2023. 5. 30. 1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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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9년에서 1848년 사이에 일어난 혁명으로 인해 1500년 전에 콘스탄티누스 대제로부터 시작되었던 기독교와 국가 사이의 오랜 공생 관계가 흔들렸다. 나폴레옹이 유럽을 재편하게 되면서, 과거의 정치적 법적 체계들이 일소되었고, 교회들이 주로 의지했던 군주와 귀족들의 정치 세력들이 급격하게 줄어들게 되었다. 상업과 산업 분야의 엘리트들이 점차 귀족들을 대신해서 정치, 문화계의 지도자로 부상하게 되었다. 이 새로운 엘리트들이 기치로 삼는 경쟁과 이윤을 강조하는 자본주의적인 가치들은 기독교와 공유할 수 있는 기반이 거의 없었다.

 

자본주의 사회의 지도자들은 여전히 기독교를 포용하는 편이 정치적으로 유용하고, 적어도 그렇게 하는 듯이 보이는 것이 유용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런 와중에서도 두 가지 잠재적인 요인들이 점차적으로 감지되었다. 사회 지도층들의 종교에 대한 태도가 더욱 명목적이고 피상적으로 되어갔고, 학계의 지도자들은 종교적인 가치에 대해 더욱 노골적으로 회의적인 태도를 보였다. 더욱이, 19세기 동안에 서구 유럽의 상당 부분에서 빠르게 진행된 산업화와 함께, 전통적인 종교적 관습을 유지하고 있던 교외로부터 익명성과 열악한 노동 환경을 지닌 살기 힘든 도시로의 엄청난 인구 변동이 발생했다. 전통적인 가치로부터 멀어진 산업 프롤레타리아는 궁극적으로 마르크스주의와 같은 새로운 이데올로기에 의해서만 위안을 받기는 했지만 절망감과 무력감에 빠져드는 경향을 보였다. 이런 사회에서, 초월적인 믿음은 쇠퇴하고, 기독교 신학은 적실성을 상당히 상실한 듯 보였다.

 

이러한 변화에 대한 태도들은 급격하게 바뀌었고, 1789년 혁명은 사회의 변화를 상징하게 되었기 때문에, 혁명에 대한 태도는 악마에 대한 태도에 필적하였다. 군주제주의자들과 전통적인 가톨릭주의자들은 혁명을 악마의 소행으로 보는 경향이 있었고, 군주제를 부활하는 것이 사탄에 대한 그리스도 왕의 승리라고 생각하였다. 이러한 정치적 반동은 혁명에 대항하는 가톨릭에 공통의 원인을 제공하였듯이, 공화주의자들과 혁명주의자들은 기독교를 공격했고 반대편들 – 최대의 적은 사탄이었다 – 의 규범을 조롱하였다. 그리스도는 왕이었고, 모든 왕들은 사악했다. 그러므로 최고의 왕이 최대의 악인 것이다. 혁명주의자들은 사탄을 부당한 질서와 구체제의 전제정치, 그리고 그 정치를 보좌하는 제도 – 교회, 정부, 그리고 가족 – 에 대항하는 반란의 상징으로 인식하는 경향을 보였다. 개인주의와 공격적인 경쟁을 미덕으로 간주하는 급진주의자들뿐만 아니라 부르주아들도 상징의 변화를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전통 봉건시대의 악마는 영주에 대항하는 반역자로 비난받았지만 이제 위선과 맞서 싸우는 개인주의자인 악마는 성인이나 순교자로 추앙받을 수 있었다.

 

사탄에 대한 이러한 긍정적인 견해들은 문학적이라기보다는 상징적이었다. 사탄이라는 존재가 객관화되고, 하나의 상징으로 환원되며, 성경이나 전통으로부터 묶여 있던 상징을 풀어낸다는 것은 악마라는 개념이 전통적인 의미로부터 자유롭게 유통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였다. 19세기 악마는 악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선했고, 난폭하기도 했지만 점잖기도 했고, 투쟁의 신일 뿐만 아니라 사랑의 옹호자이기도 하였다. 18세기 말부터 1860년경까지 이 시기에 악마의 역사는 신학적이기보다는 상징적이어서, 이 장에서는 철학적인 면보다는 문학적인 면을 더욱 강조하였다.

 

이 시기의 주요한 철학자들과 신학자들이 몰두한 주제는 악마나 급진적인 악에 대한 문제가 아니었고, 유물론, 실용주의, 그리고 종교에 대한 회의주의 등이 지배적이었다. 오귀스트 콩트는 실증주의 이론을 체계화하였는데, 이 이론에 의하면 인간사회는 세 단계를 통해서 진보한다고 전제되었다. 신학적 단계(계시에 의해 이해하려는 노력), 형이상학적 단계(논리를 통해 이해하려는 노력), 실증적 단계(경험 과학에 의해 이해하려는 노력). 근대를 의미하는 실증적 단계는 경험적으로나 과학적으로 설명될 수 없는 모든 것들을 거부한다는 특징을 지니고 있었다. 비록 실증주의가 총체적인 인간의 진보라는 것이 존재하고, 현실은 궁극적으로 물질적이며, 인간의 정신은 이러한 물질적인 현실을 포착할 수 있다는 경험적으로 증명할 수 없는 신념에 의존하지만, 이 이론은 열정적으로 추진되었고, 그 영향력은 엄청났다.

 

루드비히 안드레아스 포이에르바하는 실증주의를 이용해서 기독교를 공격했다. 포이에르바하는 물질을 제외하면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밖의 모든 것은 기초도 없는 사변에 불과하다. 우리가 신에게 부여한 모든 속성들은 실제로는 신에 투영한 인간의 관념들이다. 당연히, 악마에 대해서도 같은 예가 적용된다. 제레미 벤담이나 존 스튜어트 밀과 같은 도덕 철학자들은 악이라고 하는 초월적인 힘을 참조하지 않고 자신들의 체계를 수립하였다. 신학자들은 이 문제를 회피했고, 당시의 가장 독창적인 신학자 쇠렌 키에르케고르 – 소외, 불안, 그리고 절망이라는 개념에 대해 많은 언급을 했지만 – 는, 악마라는 개념이 너무도 하찮아져서 실제로 악이라는 문제에 대한 우리들의 감각을 무디게 하였다고 주장했다.

 

1815년 이후에 다시 활기를 띤 가톨릭은 사회 속에 악마를 입증하는데 거의 기여하지 못했다. 여전히 교회는 전통적인 교리를 계속 유지하였다. 그레고리 16세는 교회가 쇠락하는 왕정주의와 운명을 같이하게 되는 것을 우려하면서 가톨릭 신학을 스콜라주의로부터 자유롭게 하려고 하였으나, 곧 자신의 자유주의를 제한하게 되었다. 피오 9세는 1848년의 혁명에 충격을 받아 잠깐 동안 자유주의에 호의를 보였지만, 바로 엄격한 전통주의적 견해로 회귀하였다. 조셉 드 메스트로는 이미 혁명, 무질서, 불화, 도덕적 타락, 권위, 특히 교황이나 왕에 대한 불경을 악마와 동일시하였다. 피오 9세는 [무오류론]에서 자유주의를 비난했으며, 존 헨리 뉴만과 같은 역사적이고 발전론적인 접근방식을 지지하는 사람들에 대항해서 스콜라주의로의 회귀를 옹호하였다. 스콜라주의자들의 승리는 토마스주의적 신학이야말로 영원히 유효하다고 선언한 레오 13세의 회칙 “영원한 아버지”에 의해 확인되었다. 이런 분위기에서, 사람들은 전반적으로 악마의 객관적인 실재를 받아들이게 되었다. 1960년대까지, 가톨릭은 성경과 전통에 관한 자신들의 인식론적인 기반에서 후퇴하기 시작하면서, 개별적이 실체로서 악마의 존재가 가톨릭 교회의 공식 입장에 포함되었다.

 

프로테스탄트주의에서는, 교회의 통합과 사도들의 계승을 점점 더 소홀히 하면서 전통의 권위를 오랫동안 훼손하였다. 한층 성서에 대한 고등 비평이 점점 더 받아들여지면서 성경에 대한 권위 역시 훼손되었다. 기독교의 인식론을 떠받치던 이 두 개의 기둥과 최초의 신학자들, 그리고 목사들, 마지막으로 평신도들이 약화되면서 기독교 신앙은 거의 모든 측면에서 문제가 제기되었다. 천국, 영혼, 불멸성, 죄, 구원, 그리고 당연히 지옥과 악마까지도. 1898년까지, 영국의 정치자이자 목회자였던 윌리엄 에워트 글래드스톤은 지옥을 기독교인들의 마음 어두운 구석에 숨어 있던 실체도 없는 것으로 언급할 수 있었다. 인식론적인 닻을 올리면서, 자유주의적 프로테스탄트주의는 악마(궁극적으로 신까지도)를 진부하고 시대에 뒤진 개념으로 거부하는 경향을 보이며 세속적인 흐름과 유행에 표류하였다. 19세기 신학 가운데서 떠오르고 있던 한 가지 경향은 결국 사탄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이 구원받을 것이라고 믿는 보편주의였는데, 이는 두 부류로 구분될 수 있다. 자유주의적인 세속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진보주의에서 기인된 설득력이 부족한 진보주의적 낙관론을 주장하는 “온건한” 보편주의자들, 그리고 악이 실재한다는 것뿐만 아니라 악을 선으로 바꾸는 신의 자비로운 계획을 확신하는 “강경한” 보편주의자들. 어떤 형태로든, 보편주의는 자유의지와 도덕적인 선택을 약화시키면서 급진적인 악을 부정하는 상대주의를 조장할 위험을 안고 있다.

 

성서를 바탕으로 하는 종교개혁의 신념에 충실한 사람들과 성육신, 부활, 그리고 성경의 권위에 입각한 기타 기독교의 교리들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압력을 가함으로써, 자유주의적인 프로테스탄트주의에 반대하는 대항 세력은 점차로 자신들의 입장을 확인하였다. 세속주의와의 타협을 거부하고 고등 비평의 유효성을 부인하면서, 이러한 “보수주의자들”은 전통적인 로마 가톨릭이나 동방 정교회와 함께 악마의 실재를 인정하는 경향을 보이기도 하였다. 하지만, 전통을 배제할 만큼 성경의 권위를 강조한 보수적인 프로테스탄트들은 스스로 모순을 낳게 되었다. 루터와 같은 보수주의의 옹호자들은 사탄에 대한 기독교의 교리가 성경에 의존하기보다는 전통에 의거한 것이라는 사실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사탄이라는 관념의 씨앗이 분명이 신약성서에 나오지만 완전한 교리로는 매우 점진적으로 발전하였다. 모든 기독교 교리를 역사적이고 발생론적인 특질로 인식하는 사람들에게는 문제가 되지 않지만, 진리는 초기 기독교 교리문에만 존재하고 악마에 관한 신학은 – 그리스도를 삼위일체 가운데 두 번째 존재와 동일시하는 것과 같은 역사적으로 발전된 개념들과 마찬가지로 – 불확실한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에게는 문제가 도니다. 각자의 방식대로, “자유주의” 진영과 “보수주의” 진영 모두 나름대로의 형식과 정의를 부여하는 기독교의 역사적 발전으로부터 스스로를 단절시키는 경향이 있었다. 견고한 인식론적인 기반으로부터 단절된 기독교는 대체로 지적으로 훨씬 더 일관된 실증주의와 유물론의 세력에 직면하면서 계속 후퇴하였다.

 

18세기 하반기에 발전된 모호한 개념인 낭만주의는 실증주의보다 훨씬 더 강하게 19세기 초반을 지배하였다. 17세기 이래로 예술을 지배했던 신고전주의에 대한 문학적 예술적 반동만큼이나 지적인 운동은 아니었던 낭만주의는 다양한 형태로 1860년대부터 심지어 1914년에 이르기까지 서구사상에 영향을 주었다.

 

명확히 정의내리기 어려운 이 운동에는 이성적이고 지적인 경향에 반대해서 심미적이고 감성적인 면을 강조하는 요소가 포함되었다. 어떤 사태가 강력하게 영향을 미치는지의 여부는 그것이 진실인지의 여부보다 더욱 중요하였다. 감성은 지성보다 더 확실한 인생의 지침이 되었다. 이러한 신념은 19세기 후반의 심층 심리학의 탄생을 준비했던 심리학적인 통찰을 강화하였다. 낭만주의는 이성적이고 과학적인 계산에 반대하여 사랑, 동정, 그리고 자비라는 미덕을 찬양했지만, 이성을 경시하는 경향은 결국 희망에 의거한 사유, 개인주의와 이기주의, 그리고 훌륭하거나 고귀하거나 섬세하지 않게 여겨진 것들에 대한 자기만족적이고 엘리트주의적인 경멸을 초래했다. 주관적이고 내적인 삶을 강조하게 됨으로써, 낭만주의 사상은 전통적인 기독교와 새롭게 나타나는 과학에 맞서게 되었다. 감성적으로 그리고 심리적으로 자극적인 것을 찾음으로써, 기적적인 것, 초자연적인 것, 기묘한 것, 그리고 기괴한 것에 대한 취향을 부추겼다. 19세기 초반에 나온 천일야화와 같은 동방의 설화와 1815년 이후의 중세주의에 대한 강한 기호를 나타냈다.

 

18세기 말의 “숭고”라는 개념은 낭만주의의 핵심에 근접해 있었다. 에드문트 버크와 같은 가장 확실한 지지자들이 표현한 것처럼, 숭고는 단순한 미와는 대조되는 것이었다. 자연에서 숭고는 장엄, 불분명함, 광대함, 결핍, 그리고 웅대함으로 나타나고, 주로 체험자들의 두려운 경험과 동반되었따. 인간에게서 숭고란 역경을 극복하고 존경과 영광을 개별적으로 추구하는 것이다. 공포, 고통, 위험, 그리고 영웅주의는 가장 심오하고 강력하게 인간의 감성을 건드리고 최상의 인간 정신을 나타내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신과 악마는 궁극적인 숭고의 상징들이었지만, 버크와 낭만주의자들은 신보다는 자연이나 인간에게서 영감을 받은 숭고성을 따라갔다.

 

인간 속에서 벌어지는 선과 악의 투쟁에 지나치게 관심을 가졌던 낭만주의자들은 기독교의 상징들을 대체로 원래의 신학적인 내용에 대해 고려하지 않고, 기본적인 의미로부터도 자유롭게 심미적이고 신화적인 목적으로 사용하였다. 감성에 의존하는 논리를 피하는 세계관에서는 많은 모순들이 발생할 수밖에 없었다. 선과 악에 대한 낭만주의자들의 관심 때문에 그들은 세상에 대해 매우 양면적인 태도를 취하게 되었다. 한편으로 그들은 인간의 진보는 전제정치를 끝장낼 것이라는 낙관적인 신념을 지지하게 하였고, 다른 한편으로 이기주의와 악덕으로 똘똘 뭉친 존재로 인간을 바라보았다. 이러한 양면적 관점 때문에 더욱 사려 깊은 몇몇 낭만주의자들은 대립물간의 일치를 가능한 것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즉, 신과 사탄의 궁극적인 통합, 인간의 영혼에 내재하는 대립되는 요소들 사이의 결합과 초월, 다음 세기가 시작되면서 칼 G, 융의 견해들은 낭만주의를 위해 준비되었고 낭만주의에 의해 예견되었다.

 

낭만주의자들은 또한 혁명 이후 부르주아들을 지배하고 있던 생각에 불만을 표시하였다. 그들의 미적인 취향은 부르주아들이 의도한 행동, 의복, 매너, 그리고 입장들을 채택하게 해서 실리주의자들을 당황하게 하였다. 이 세기 말에, 낭만주의가 데카당스와 댄디즘으로 옮아갈 때, 오스카 와일드는 자신의 초록색 카네이션, 무명 벨벳 정장, 아편, 풍자시, 그리고 파렴치한 성생활 등과 더불어 전통적인 인습을 비아냥거리곤 하였다.

 

교회에 대해 혐오감이 있는 낭만주의자들은 보복을 당했고, 성직자들이 낭만주의자들을 공격함으로써, 기독교는 악하고 이에 반대하는 것은 선이라는 낭만주의자들의 입장만을 강화시켜 주었다. 전통적인 기독교의 최대 적이 사탄이라면, 사탄은 반드시 선해야 한다는 결론이 나왔다. 이것은 악마의 핵심적인 의미와도 모순되는 철학적으로 일관성이 없는 진술이었고, 사실 낭만주의자들은 이러한 진술을 신학적인 명제가 아니라 오히려 상상에 의한 공격이나 정치적인 강령으로 삼을 작정이었다. 악마가 부당하고 퇴행적인 권위에 맞서 반란을 일으킬 때, 악마는 영웅이엇다. 숭고라는 개념에서 유래된 영웅이라는 낭만주의적 관념은 자신의 가족과 민족을 위해 헌신하는 고전적인 서사시에 나오는 영웅의 관념과 모순되는 것이다. 낭만주의적인 영웅은 이 세상에 단독자로 혼자 맞서 자유와 미, 그리고 사랑을 향해 나아가는 길을 가로막는 사회체제에 저항하는 자기 확신에 차고 야심 있고 강력한 해방자이다. 낭만주의자들은 밀턴의 사탄에게서 이런 특징들을 읽는다. 하지만 그들은 악마를 자신들이 선으로 간주한 것을 상징하는 것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사탄에 대한 찬양 자체 – 악을 숭배하는 것은 아니므로 – 가 사탄주의는 아니었다.

 

예술에 나타난 악마적인 특성은 네 가지로 나타난다. 첫째는 작곡가가 음악적으로 불협화음을 사용한 것을 가지고 마력을 가졌다고 오해하는 것과 같이, 대중들이 예술가의 의도를 오해하는 것이다. 두 번째는 실제로 악을 비난할 의도를 가지면서 일부러 악마적인 것을 묘사하는 것 – 무소르그스키의 민둥산의 밤이나 쇼스타코비치의 전쟁과 평화 4중주처럼 – 이다. 세 번째는 20세기 후반의 특정한 록 뮤직 그룹들의 활동에서처럼, 실제로 악을 찬미하는 것이다. 네 번째는 낭만주의자들의 특성처럼, 악마적인 것의 상징을 악으로부터 선으로 고의로 이동시키는 것이다. 낭만주의자들의 선에 대한 입장은 기독교인들의 입장과 근본적으로 다르지는 않기 때문에, 그리고 낭만주의자들 스스로가 상징들을 바꿀 정도로 변덕스러웠기 때문에, 그들의 상징주의는 논리적인 일관성이 없었다. 그들은 기독교의 신을 악의 상징으로, 인간에 대한 기독교의 생각을 신(인간이 궁극적인 관심이 됐다는 의미에서)으로, 기독교의 사탄을 영웅으로 바꾸어놓는 경향을 보였다.

 

그토록 급격하게 상징들이 바뀌면서 생기는 어려움 때문에, 몇몇 낭만주의자들은 저항적인 영웅을 제시할 때 사탄보다는 신화에 나오는 존재들을 선택했다. 18세기에 부르투스는 반역자에서 혁명적인 영웅의 모습으로 정치적 상징이 바뀌었다. 낭만주의자들은 자신들의 도덕적 심리적 상징주의에 따라 프로메테우스와 카인(비록 유다는 아니지만)을 찬양하곤 했다. 상징들이 결정적으로 변화한 것 가운데 하나는 프로메테우스와 사탄이 융합된 것이다. 전통적으로 프로메테우스와 사탄은 공통점이 상당히 많았다. 신의 권위에 대한 저항, 피할 수 없는 패배와 운명, 그들을 영원히 속박하는 판결, 그러나 커다란 차이도 있다. 프로메테우스는 이기심이나 증오가 아니라 인간을 돕고자 하는 욕망에서 신에게 도전하였다. 이 두 영웅이 결합되면서 프로메테우스가 가진 긍정적인 요소들이 사탄에게 전해지게 되어, 결국 악마도 역시 인간을 해방시키는 고귀한 존재로 나타날 수 있었다.

 

낭만주의적인 사탄이 항상 긍정적인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은 아니었다. 그어 역시 악해서, 고립, 불행, 강퍅한 마음, 부족한 사랑, 무감각, 추함, 풍자 등을 상징했다. 중세주의가 성장하면서 악한 악마라는 중세적인 의미가 복원되었고, 낭만주의자들은 악마를 인간의 정신이 진보하는 것을 방해하는 존재로, 그리고 영혼 속의 파괴적인 힘을 대표하는 존재로 보았다. 당시에 낭만주의적 사탄은 하나도 없었다. 그러나 실재로는 낭만주의자의 숫자만큼이나 많은 사탄들이 존재했다. 그들이 사탄을 이용할 때 좀처럼 악의 원리에 대한 진지한 비판을 가하지 않았고, 심지어 그렇게 할 때도, 논리학, 과학, 계시, 전통, 성경, 아니면 다른 특정한 자료에 의한 인식론적인 기반이 부족하였다. 기독교인이든지, 관념론자이든지, 아니면 유물론자이든지 과학자이든지 상관없이 이러한 견해가 비논리적이고 일관성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악마에 대한 낭만주의적인 관념은 악마의 개념에 결정적인 영향을 거의 주지 않았다. 오늘날 사람들은 전통적인 입장이나 계몽주의적인 입장을 취하지, 낭만주의적인 입장은 거의 취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낭만주의는 몇 가지 족적을 남겼다. 인간 영혼 속의 선과 악이 벌이는 실질적인 투쟁을 극화함으로써, 악이라는 문제에 대한 자기만족으로부터 과격하게 기독교 사상을 흔들어놓음으로써, 20세기 악이라는 문제에 대한 진지한 신학적인 관심이 부활하는 데 기초를 놓았다.

 

악을 낭만주의적으로 다룬 것 가운데 한 가지 재고해볼 만한 것은 고딕 소설 또는 로망 누아르였는데, 이는 처음에 영국에서 유행하다가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초에 전 유럽으로 퍼져나갔다. 1834년에 이르러, 로망 누아르는 이미 절정에 달했고, 테오플 고티에 같은 이는 [피가로]지에 기고한 글에서 이제 신비주의적이고, 천사나 악마와 같은 개념 혹은 카발리즘적인 개념으로 꾸며지지 않은 소설을 읽고, 연극을 관람하고, 이야기를 듣지 않을 수는 없게 되었다고 썼다. 20세기의 공포 영화처럼, 고딕 소설은 “숭고”를 이용해서 – 또는 약화시켜서 – 전율을 자아냈다. 이 소설의 주된 주제는 겉으로는 선하고 이성적이며 친숙한 것의 이면에 숨어 있는 타락이었다. 이런 양상은 인간의 본성에 들어 있는 기괴하고 퇴폐적인 면 뿐만 아니라 자연이나 이 세상의 거친 면모 – 바위산, 동굴, 그리고 성들 – 에 풍부하게 나타났다. 육체적 도덕적 기형, 새디즘, 성적 광란, 먼 나라 그리고 중세적인 시대 풍조 등이 전형적인 구성 요소들이었다. 마녀나 유령, 환영, 흡혈귀, 그리고 악령들을 포함해서 초자연적인 것들의 무시무시한 모습들이 특히 선호되었다. 악마는 주로 독자들을 즐겁게 하고 전율하도록 기획된 많은 악한 괴물들 가운데 하나로 나오지 심각한 악의 상징으로는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가장 악마적인 고딕 소설들 가운데 하나는 매튜 루이스의 [수사]였는데, 이 작품은 영국, 프랑스, 그리고 독일 문학에 엄청난 영향을 주었다. 루이스가 겨우 19세 때 쓴 이 소설에는 유령, 근친상간, 독약, 환상, 강간, 마약 등의 소재가 포함되었고, 당시 성에 집착한 청소년들이 마음속으로 상상할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포함되었다. 겉으로는 금욕주의자로 보이는 수도사 암브로시오는 성적인 욕망에 들끓고 있었다. 영적인 자만심에 지배된, 그토록 악명 높게 타락하고 육욕에 빠진 몸을 지닌 가톨릭 교회의 성직자는 쉽게 사탄에 의해 타락한다. 악마의 교사를 받아, 그는 더욱 더 깊고 더욱 기괴한 죄에 빠져들게 되어, 마침내 안토니아 라는 처녀를 어두운 지하실의 죽은 지 오래된 수도사들의 뼈 위에서 강간하였다. 안토니아에게, “좁고 견딜 수 없는 수도원의 독방에서 비참한 일생을 보낸다는 것은 ……그녀는 안절부절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암브로시오가 그녀를 살해할 것이므로. 영어권 독자들은 루이스의 끔찍한 글을 즐기는 동안 가톨릭에서 말하는 악에 대한 가르침을 받는 것과 같은 도덕감을 향유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암브로시오의 악은 작가가 가지고 있는 청년기의 미숙한 육욕이라는 좁은 범위로 제한된다. 사드가 그랬던 것처럼 그리고 이후에 로트레아몽이 그랬던 것처럼 심층적으로 이해하지는 못한다. 더 나아가, 이러한 부절제는 풍자가들에게 도움을 주었는데, 그들은 악마를 더욱 더 희화화하는 데 공헌했던 고딕적인 이야기들을 수없이 패러디하였다. 유령이나 도굴 귀신과 더불어 사탄은 이전보다 훨씬 우스꽝스러운 존재가 되었다.

 

아마도 이 시기에 가장 독창적인 예술가이자 작가는 윌리엄 블레이크였는데, 그의 신화론과 상징주의는 낭만주의적인 특성을 보이고 있지만 너무나 독특해서 범주화할 수 없었다. 기독교의 전통을 거부하고 기독교의 예배를 회피했던 블레이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어떤 종교를 가져야만 하고 가질 것이다. 인간이 예수라는 종교를 갖지 않으면, 아마도 사탄이라는 종교를 가질 것이다”라고 단언하였다. 블레이크는 자신만의 종교를 구축하였다. 인간의 정신을 초월하는 영적인 실체를 그가 믿었건 그렇지 않던 간에, 그는 자신만의 상상력 속에서 자신의 종교적 근원과 상징들을 발견하였다.

 

그가 채택한 상징들은 외견상으로 일관성이 부족하였으므로, 악마를 통해 그가 의도했던 바가 무엇인지를 정의하기는 어렵다. 낭만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블레이크에게도, 악마와 신은 도덕적으로 모호했다. 결과적으로, 블레이크가 악마에 대해 말할 때, 아주 가끔씩이기는 하지만 관습적이고 부정적인 의미로 그 상징을 사용하였다. 그리고 신에 대해 언급할 때면, 기독교인들이 악마라는 말을 사용할 때와 마찬가지로 부정적인 의미로 그러한 상징을 사용하였는데, 이는 전통적인 용법에서 벗어난 것이었다. 블레이크에게 선이라고 하면, 그것은 시적인 상상력, 예술적인 영감, 창조성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것은 신이라고도 악마라고도 할 수 있었다. 그는 시적인 영감이 발휘되는 순간은 악으로부터 자유로운 것이었다고 말했다. 블레이크에게서 신성이란 그 자체가 음악, 미술 또는 문학으로 표현될 준비가 된 현실을 전달하면서 어디에든 존재하는 것이었다. 감성, 감수성, 사랑, 그리고 헌신 등은 모두 신성한 영으로 현시되었고, 반면에 “예술이나 직관적인 천재성을 가로막는 모든 것은 사탄적인 것(악)이다.”하지만, 블레이크는 이러한 악은 신에 대한 전통적인 견해에서도 나타났다고 믿고 있었고, 여러 노골적인 별칭 가운데 그것을 노보데디(Nobodaddy, 어느 누구의 아버지도 아니다)라고 불렀다. 이런 의미에서, 셸리의 주피터나 스윈번의 “최상의 악, 신”과 마찬가지로 신은 악한 전제군주였다. 최상의 악인 신은 분명히 전통적인 악마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블레이크나 낭만주의자들에게 신이란 종종 “악마”를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낭만주의자들이 생각하는 “신”이라는 이름에서 악한 것을 기대해야 할 것이다. 이런 식으로 상징들을 바꾸면서 낭만주의자들이 주목했던 것은 전통적인 기독교의 의도는 실제로 악한 전제군주였던 신을 창조하는 것이었다는 것이다. 예수는 진정한 종교를 사랑, 감수성, 영성을 가진 것으로 이해했지만, 기독교인들은 그러한 종교의 본질을 망각하고, 그 대신에 이성과 형식적인 도덕성을 지닌 전제적인 체계를 창조했던 것이라고 그는 믿었다. 블레이크는 관념적인 추론을 악의 핵심이라고 파악했고, 적어도 전통적인 기독교만큼이나 계몽적인 합리론을 경멸했다. 블레이크가 보기에 계몽사상가들은 기독교를 비판한 점에서는 옳았지만 그들이 취한 방향은 전적으로 잘못된 것이었다. 마치 감정과 사랑이 목사든, 왕이든, 선생이든 아니면 부모이든 간에, 모든 형식적인 권위를 대신하였던 것처럼, 이성도 거부되고 감정과 사랑을 지지해야 했던 것이다. 루소와 마찬가지로, 블레이크도 인간의 본성이란 본질적으로 선해서 거짓된 형식적인 제한들로부터 정말로 해방되어 사랑을 바탕으로 하는 창조성이 솟아나게 해야 한다고 믿었다. 하지만, 그는 계몽주의가 가지고 있는 안이한 낙관론 또한 공격하였다. 그는 “인간은 유령이나 사탄으로 태어나고 전적으로 악이므로 계속 새로운 자아를 필요로 한다”고 말했다.

 

블레이크의 “악마”는 두 개의 상반된 의미를 지녔다. [밀턴]이라는 작품에서, 사탄은 자신의 독선 때문에 약해졌지만, 신이라는 전제군주에 맞서 저항하면서 선해졌다. 블레이크가 보기에, 밀턴이 그리고 있는 신은 적어도 사탄과 마찬가지로 약하다.

 

원래 블레이크는 대립물의 일치라는 생각에 매료되었는데, 이러한 그의 생각은 일찍이 자신의 삶에 영향을 미쳤던 임마누엘 스웨덴보그의 [천국과 지옥]을 부분적으로 설명하기 위해서 집필했던 [천국과 지옥의 결혼]이란 작품에서 분명하게 표출되고 있다. [천국과 지옥]의 결혼이란 작품에서, 사탄은 창조성의 상징으로 나온다. 사탄은 적극적이고 자유로워지려는 에너지로 충만했다. 블레이크는 능동적인 악이 수동적인 선보다 낫다는 것을 밀턴이 무의식적으로 깨달았으리라고 믿는다. “밀턴이 천사나 신을 속박된 존재로 서술하고, 악마나 지옥을 자유로운 상태로 묘사했던 이유는 그가 진정한 시인이었고 의식하지 못했지만 악마의 편에 있었기 때문이다.” 예수 자신은 율법에 따르지 않고 기꺼이 “모든 계율을 깨뜨리며” 충동적으로 행동했다는 점에서 정말로 사탄적이었다. 사랑스런 예수는 여호와, 하나님 아버지, 밀턴이 생각하기에 정말로 악한 심판하는 신과 대비되었다.

 

블레이크에게 선도 악도 절대적이지 않았다. “모든 신성은 인간이라는 짐승 안에 귀속되며”, 영혼을 이루는 어떤 요소들도 전적으로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다. 진정한 악은 영적인 요소들이 부족하게 결합되어 생기는 것이다. [천국과 지옥의 결혼]의 원본 표지에, 블레이크는 천사와 악령이 껴안고 있는 모습을 그려넣었다. 이성과 정열, 사랑과 증오, 수동성과 능동성, 명백한 선과 명백한 악은 창조적 정신하에 탁월하게 통합된 전체 안에서 모두 융화되어야만 한다. 진정한 신은 시적 창조력, 즉 영혼, 시인, 작가인데 그는 예술뿐만 아니라 실재적 의미에서의 온 세상을 만든다. 왜냐하면 전 우주는 시적인 영의 창조물이기 때문이다. 궁극적으로 블레이크가 외재적인 우주는 위대한 창조자인 신의 시적인 산물이라고 믿었는지 아니면 인간들이 자신들의 우주를 직접 만들었다고 믿었는지는 불명확하다. 이성을 궁극적인 진리로 이끄는 안내자로 보지 않았기 때문에, 블레이크는 철학적이며 우주론적인 정합성에는 별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다. 진정한 신은 인간의 창조성 속에서 자신을 표출했다. 이것만이 그가 알아야 할 모든 것이었다.

 

[유리젠 1서]에서 다시 “신”과 “악마”라는 말이 혼용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유리젠은 과거의 창조자 신이고, 상제이며, 눈먼 전제군주이다. 그는 여호와, 구약에 나오는 율법의 신, 이성의 원리를 대표한다. 그의 창조 행위는 악하다. 왜냐하면, 그의 행위를 통해 이 우주에 계율과 제한이 가해졌고, 그렇지 않았더라면 창조성이 자유롭게 표출될 수 있었을 것이다. 유리젠에 대립하는 오르크는 혁명과 전체정치로부터 자유롭게 하는 세력을 대표하는데, 오르크의 폭력성과 반항심 떄문에 좋은 의미에서뿐만 아니라 나쁜 의미에서도 그는 사탄적인 존재가 되었다. 블레이크가 그리고 있는 모든 초자연적인 존재들, 조아스는 사탄적인 성격을 한두 가지 가지고 있지만 – 자연 자체도 선과 악이 모호하다 - , 이 모든 혼란스런 투쟁 속에서도, 우애와 사랑으로 분류되는 것이 있다. 예수에게서 가장 잘 표출되는 이런 전형을 볼 수 있을 정도로 블레이크는 기독교적이었고, 예수의 추종자들이 예수를 전제적인 그의 아버지처럼 다시 변형시킨 것은 잔인한 아이러니라고 생각했다. 이 세상의 창조자는 매우 잔인한 존재라고 생각하며 그리스도의 숭배자가 된 나는, “아들이여, 그는 얼마나 아버지와 다른가!”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블레이크에 친숙하지 않은 사람이라도 [병든 장미]에서 가장 신랄하게 표현된 깊은 감정이 개입된 악에 대한 그의 이해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오 장미여, 당신은 병들었나이다!

밤에만 날아다니는

눈에 보이지 않는 벌레가

울부짖는 폭풍 속에서

당신의 침실을 발견하고는

진홍빛 쾌락에 겨워

그리고 그의 어둡고 은밀한 사랑은

당신의 생을 정말로 파괴합니다.

 

신비주의자들을 제외하면 블레이크와 낭만주의자들은 전례가 없을 정도로 영혼의 심층으로 향하는 인식의 문을 열었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그들은 진정한 악의 본질에 대한 이해를 증진시켰다. 그들이 악마의 개념에 공헌한 것은 그런 상징들을 특이하고도 모순되게 사용한 점이 아니라 바로 자신들의 방식으로 이해했다는 점에서 찾아야 한다.

 

영국에서 블레이크는 조지 고든이나 바이런 경과 같은 고급 낭만주의 시인들에 의해 추종되었다. 바이런은 젊었을 때 칼뱅주의적 교육에 반감을 가졌었고 그래서 일생 동안 악에 대한 기독교의 전통적이 관점에 반대하였다. 그의 원죄와 구원이라는 문제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의문을 가졌다. “우리가 태어나기도 전의 일로 희생자가 되어야 하고 이런 알 수도 없고 형언할 수도 없는 죄에 대해 속죄하는 죄인이 되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여전히, 바이런은 블레이크와 같이 악의 문제를 날카롭게 인식하고 있었다. 사실, 그가 창조자는 선할 수 없다고 확신한 것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악의 정도 때문이었다. 바이런의 카인은 묻는다. “나의 아버지(아담)는 신이 전능하다고 말한다. 그가 선한 존재라면 왜 악한가?” 나중에, 루시퍼는 카인에게 물었다. “너의 신은 무엇을 사랑하는가?” “모든 것들을 사랑한다고 나의 아버지는 말한다. 그러나 지금 자신들의 운명 안에 그런 사랑이 없다는 것을 고백한다.” 루시퍼가 자신도 영원한 존재라고 주장하자, 카인은 재빨리 인간들에게 선행을 베풀 수 있는지 여부를 묻고는 만일 그럴 수 있다면, 왜 진작 그러지 않았느냐고 받아쳤다. 루시퍼도 재빨리 응수한다. “여호와는 왜 안 그랬는가?”

 

이런 세상에서, 바이런은 인간의 자유가 궁극적으로 승리하리라는 낭만주의적인 낙관론과 현실의 관찰에서 기인한 바관론 사이에서 갈팡질팡하였다. 루시퍼는 우리들, 카인의 후손들에게 기다리고 있는 운명에 관해 알고 있는 바를 가차없이 말한다. “6천 번째 세대는 / 음울하고 축축한 타락 속에 있을 것이다”. 인간의 존엄성은 자유를 향한 끝없는 투쟁 속에 존재한다. 비록 성공하리라고 기대해서는 안 되지만. 은유적으로 말하면, 우리는 한때 우리의 자의식 때문에 타락했던 천진무구한 시대에 살았었다. 이러한 자의식 때문에 우리는 압제적인 법률이나 규칙, 그리고 영혼의 삶을 구속하고, 우리를 쇠약하게 하는 이성적인 전제들에 묶이게 되었다. 사랑과 자유를 앎으로써 우리는 정부, 교회, 철학, 과학, 그리고 도덕이라는 횡포에 저항할 수 있게 되었고, 이 모두는 우리의 신성한 창조력을 억압하는 것이다. 예술적인 창조 행위는 순응적인 것에 대한 가장 훌륭한 저항이고, 자유와 강렬한 경험을 향한 공세이다. 바이런이 보기에, 물개나 참새들이 보여주는 자연 발생적인 조화는 조화와 강도의 균형을 필요로 하는 인간에게는 적합하지 않았다. 관습과 횡포에 맞서 저항하는 시인은 기독교와 고전의 전통에 나타나는 위대한 저항의 존재들과 연결된다. 즉, 사탄, 카인, 그리고 프로메테우스가 그들이다.

 

바이런의 악마는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난다. 극시 [카인]에는 악과 저항에 대한 바이런의 입장이 가장 잘 표현되어 있다. 이 시는 창세기에 나타난 원래의 모습에다가 인간에 대한 자비라는 프로메테우스적인 요소와 숭고라고 하는 사탄적인(밀턴적인)요소를 가미해서, 카인의 장을 재구성한 것이다. 루시퍼라고 하는 등장인물은 그 자체로 이중성을 갖는다. 전제군주에 대해 저항하는 카인을 돕는다는 점에서는 선하게 나타나지만, 인간의 고통으로부터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다는 점에서는 악하게 나타난다. 그의 본질적인 결함은 구원에 필요한 사랑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일찍이 이 시에서 루시퍼는 카인에게 가르치기를 신은 엄격하고 부당한 율법으로 이 세상을 다스린다고 하였다. 카안의 부인/여동생 아다는 신은 선하고 전능하다는 전통적인 견해를 나타내지만, 바이런이 보기에, 여호와는 이중성을 지니고 있어서 악하면서도 선하다. 여호와는 인간의 분투에 관한 눈물겨운 상징이다. 자신의 고독함과 고립감을 덜기 위한 노력으로 계속해서 세상을 창조하고 차례차례 그것들이 결점이 있음을 알고는 다시 파괴한다. 이렇듯 심한 횡포에 카인은 분개하지만 그것이 여호와의 본성인 것이다. 대부분의 고전문학이나 특정한 시에서처럼, 여호와는 창조자이며 동시에 파괴적이다. 여호와는 선하면서도 악하고, 이 우주는 아름답고도 잔인하게 만들어졌다는 이중적인 진실을 루시퍼는 드러낼 준비가 되어 있다. 그는 바이런을 대신해서 이렇게 말한다. 이 세상을 아름답게만 혹은 잔인하게만 보는 그런 식의 이해는 거짓이다. 여호와의 이중성에 비추어보면, 여호와가 선악과를 에덴 동산에 심은 것이 우리를 도우려고 한 것인지 방해하려고 한 것 인지, 아담과 이브가 자신들을 위해 그 열매를 따먹어도 무방한지 여부가 분명하지 않다. 여호와가 요구하는 것과 루시가 요구하는 것 사이에 충돌이 발생함으로써 인간 영혼 안에서의 충돌이 드러난다. 이것은 선과 악 사이에서 나타나는 충돌이 아니라 초월되거나 통합되어야 하지만 결코 그럴 수 없는 여러 형태의 모호함 사이에서 나타나는 충돌이다.

 

루시퍼는 카인에게 누가 진짜 악마인지를 비웃듯이 묻는다. 아담과 이브가 지혜를 얻기를 원했던 자, 뱀을 부추겨 나무에 대한 진실과 그들을 에덴동산에서 쫒아내 죽음으로 내몬 여호와에 대한 진실을 말하도록 부추긴 자는 바로 루시퍼이다. 그러나 비록 여호와가 율법에 얽매이고 무심하며 때로는 잔인하지만, 반항적인 기질을 가진 루시퍼도 그가 상대하는 여호와 못지않게 악하다. 사실은 그 이상인데, 왜냐하면, 여호와는 창조력을 부추기는 사랑에 매력을 느끼지만, 루시퍼는 그것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여호와는 지적인 자유와 진보를 장려하지만, 루시퍼는 일부러 맹목적이고 자기도취적이며 이기적이다. 루시퍼는 창조에 대해 논하기는 하지만 결국 아무것도 창조하지 못한다. 신의 차가운 합리성에 독설을 퍼부으면서도 루시퍼는 자신은 이성과 변증법을 사용해서 냉소적으로 자신의 주장을 펼친다. 루시퍼는 이 세상의 잔인함을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숨기면서 카인에게 거짓말을 한다. 이미 불만과 쓰라림을 맛본 카인은 루시퍼가 나타나자 기꺼이 그의 말을 듣게 되지만 한편으로 아다에게 루시퍼는 좀처럼 나타나지 않는다. 가장 최악의 사태는, 루시퍼가 선한 우주로 가는 유일한 길, 자신과 여호와의 통합을 거부하고, 대신에 모든 것을 신의 탓으로 돌리기를 더 좋아했고, 그러면서 인간들이 신에게 예속되지 않고 자신에게 예속되어야 한다는 주장했다는 점이다. 신이 창조한 우주에 대한 그의 복수심과 증오는 끝이 없다.

 

루시퍼는 장엄하고 숭고하다는 점에서 밀턴적이고/사탄적인 미덕을 가지고 있으면서 역경을 이기는 저항과 끈기를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낭만주의의 영웅과도 같은 미덕을 지녔따. 바이런을 대신해서 그는 말한다.

 

우리를 그들의 불멸성에 도전하게 하는 영혼

감히 그의 영원한 얼굴에서 전능한 전제군주의 모습을 보고

감히 그의 악은 선하지 않다고 말하는 영혼! ([카인])

 

하지만, 루시퍼에게는 사랑이 부족하기 때문에, 우주에서 벌어지는 투쟁은 우주가 끝장날 때까지 계속된다. 궁극적으로, 루시퍼의 악은 영원히 신에게서 독립해서 살고자 하는 욕망에서 기인한다. 영원히 존재할 수 있다는 그의 주장은 그가 이기심을 죽이는 사랑을 포용할 수 없음으로 인해 영원히 소외된다는 의미에서만 옳다고 할 수 있다.

 

여호와와 루시퍼 모두 카인 속에 있어서 카인의 생각을 알고 있다. 인간 대중을 대표하는 카인은 두 세력 사이의 투쟁을 잘못된 방식으로 해결한다. 그들을 통합하는 대신에, 그는 루시퍼의 제안에 따라 혼자서 여호와를 공격한다. 루시퍼에게 이끌려, 여호와라는 폭군에게 일격을 가한다는 망상에 사로잡혀 자신의 동생 아벨을 죽인다. 복수에 대한 욕망 때문에 사랑을 저버린다. 형식적인 정의를 추구한 나머지 동생이 처한 생생한 현실을 보지 못한다. 그의 행동 떄문에 인간들은 서로를 굳게 엮어주는 사라의 문을 여는 데 실패한다. 바이런은 성공할 확률이 아무리 적더라도 이전의 실패를 만회하려는 노력과, 선과 악을 통합하려는 노력을 계속해야 한다고 믿었다. 신과 악마 모두가 사탄적인 것을 공유하지만 어느 누구도 진짜 악은 아니다. 정말로 사탄적인 것은 그들 사이에 존재하는 풀리지 않는 긴장관계이다. 진정한 악은 이 두 가지 영적이 원리를 대립시키고, 진정한 선은 두 원리를 화해시킨다.

 

셸리(1792-1822)는 젊었을 때부터 공포의 장엄함이 주는 심미적 효과에 이끌려 악마적인 것과 비교에 관심이 있었다. 셸리는 [무신론의 필요성]이라는 소책자를 발간했다는 이유로 1811년에 옥스퍼드에서 쫒겨났고, 일생 동안 줄기차게 전통적인 기독교와 모든 “조직 종교”를 거부하였다. 점차로 그는 자연과 인간 속에 있는 사라의 영이라는 개인적인 종교를 받아들였지만,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성은 잔인함과 연관되기 때문에 자신이 영이라고 한 것을 신이라고 부르기를 거부하였다. 그는 예수 자신도 조직 종교에 대한 저항으로 사랑의 복음을 가르쳤다고 주장했다. 셸리의 종교관은 에라스무스 다윈의 영향을 받아 진화론적이면서 상당히 생기론적이고, 헤갤의 관념론적인 진보주의와 유사하다. 사랑의 영은 인간의 우주를 더 좋고, 자유로우며, 더욱 사랑으로 충만한 미래로 향하게 한다. 셸리는 악이 이러한 온건한 진보를 계속해서 가로막고 있다는 것을 깊이 인식했지만, 우리가 알 수 있는 모든 것은 인간 정신의 산물이라는 측면에서 기독교의 악마를 부인했다. 셸리는 사탄을 인간 내부에 있는 방해하고 퇴행적인 경향이라고 인식하였다.

 

[악마에 대하여]라는 책은 셸리가 가지고 있는 악에 대한 강한 선입견을 잘 드러내준다. 그는 마니교가 기독교 이상의 진실성을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정신의 진상에 더 잘 들어맞는다고 믿었다. 균형 잡힌 힘과 반대되는 성향을 지닌 두 개의 영이 존재한다는 마니교의 입장은 인간 영혼의 분리된 상태에 대한 통찰을 나타냈다. 악마가 신의 의지에 종속되어 있다든지 특히 기독교 자유주의에서 주장하는 약화된 사탄이라는 기독교의 견해는 셸리에게는 심리적인 현실을 외면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한 셸리도 블레이크나 바이런처럼 사탄의 모습에 대해서는 애매한 입장을 취했다. 한편으로 그는 진정한 사탄의 모습이란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인간의 악을 나타내는 것일 필요가 없다고 주장했다. 다른 한편으로 그는 사탄을 기존의 억압하는 세력에 저항하는 진보적인 영혼의 상징으로 간주했다. 블레이크와 마찬가지로, 셸리는 밀턴의 작품에 등장하는 사탄이야말로 숭고하게 저항하는 영혼이며 그 본질이 폭정에 저항하는 것임을 보여주는 전형적인 낭만주의적 영웅을 가장 뛰어나게 문학적으로 보여준 것이라고 칭찬했다.

 

[실낙원]에서 표현되었듯이, 사탄이라는 인물이 지닌 정열과 장엄함을 능가할 존재는 아무도 없다. 그가 대중적인 악의 화신이 되기를 의도했을 수도 있다는 가정은 잘못된 것이다. …..도덕적인 존재로서 밀턴의 악마는 신보다 훨씬 우월하다. 역경과 고통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최상의 존재라고 생각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인내하는 존재로서, 자신이 승리할 것임을 의심할 바 없이 확신하면서 자신의 적에게 가장 무서운 복수를 감행하는 존재로서의 신보다….. 신에게는 악마를 압도할 어떠한 도덕적 우월성도 없다고 밀턴은 강하게 주장했다. 그리고 신이 이처럼 대담하게 직접적인 도덕적 목적을 무시한 것은 밀턴의 수호신(악령)이 우월하다는 것을 가장 결정적으로 증명해주는 것이다.

 

밀턴이 자신의 서사시를 이런 식으로 해석했더라면 불만스러웠겠지만, 이러한 해석은 낭만주의자들이 이 작품을 읽는 데 전형이 되었고, 밀턴이 묘사하는 사탄은 가장 위대한 낭만주의적 악마들, 낭만주의 시대의 영웅의 전형이 되었다.

 

셸리가 보기에, 악은 선하거나 적어도 애매모호한 도덕적인 성격을 가진 사탄보다는 인간 속에 들어 있는 악마성에 의해 더 잘 표현되었다. 고딕적인 분위기가 나는 연극 [첸치]에 등장하는 프란세스코 첸치는 냉담하게 자신의 딸을 유혹하고 아들의 죽음을 즐기는 아주 악한 인물이다. 셰익스피어의 이아고에서 볼 수 있는 외부적인 힘으로부터 인간의 영혼으로까지 악이 전이되는 과정을 프란세스코는 보여준다. 무엇이 악마를 필요로 하는가, 언제 우리는 인간성을 지니는가?라고 셸리는 묻고 있는 듯하다. 악마란 우리 자신의 악을 외부적인 것이 반영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존재이다. 악의 근원과 중심은 악마가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이다.

 

[사슬에서 풀려난 프로메테우스]에서, 셸리는 프로메테우스(바이런이 카인을 이용했듯이)를 저항의 상징으로 이용했다. 서문에서, 셸리는 자신의 작품과 [실낙원]이 유사하다고 주장했다. 프로메테우스가 용맹스럽고, 위엄이 있으며, 전능한 신에게 저항한다는 의미에서 밀턴의 사탄과 비슷하다고 했다. 하지만, 바이런과 마찬가지로 사탄을 자기 작품의 영웅으로 만들었을 때 결점들을 발견했다. 낭만주의적 사탄은 너무 이중적이었지만, 셸리에게 그의 영웅이 사랑의 화신일 필요가 있었고, 반면에 사탄은 반역자였을 뿐만 아니라 야심이 있고 질투심이 많으며 복수심에 불타 있었따. 프로메테우스는 더 적절한 상징이었다. 그가 저항하고 패하고 속박당한 것은 그의 잘못 때문이 아니라 인간에 대한 사랑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프로메테우스가 상징하는 것은, 자기 민족을 위해 자신을 희생한 그리스도, 사랑의 영에 이끌려 자유를 향해 투쟁하는 인간애, 그리고 사랑과 창조적인 어휘가 어둠에 대항하는 무기가 되는 시인이다. 그러므로 프로메테우스를 둘러싸고 있는 다양한 상징들은 그리스도, 인간애, 시인, 셸리, 그리고 사탄(선한 측면에서)등이 포함된다. 프로메테우스의 적은 너무나 악한 전제자 주피터이다. 주피터를 둘러싸고 있는 다양한 상징들은 여호와와 사탄(악한 측면에서) 등이 포함된다.

 

프로메테우스는 티탄이었는데, 고전 시대의 신화에서 올림피아의 신들에게 대항한 불경스런 반역자들로 나오는 종의 구성원이다. 그러나 셸리의 프로메테우스는 인간을 사랑해서 올림피아의 신들에게 속박당하고 무시당하는 인간을 보며 괴로워한다. 이 작품은 올림피아의 주피터를 비난하면서 시작된다. 주피터는 불손한 오만함 때문에 스스로 영원히 사랑으로부터 거리를 두었다. 프로메테우스가 인간에게 준 지식이라는 선물 때문에 주피터는 무서운 형벌로 보답한다. Ll 고귀한 티탄은 “하늘의 날개를 단 사냥개와 같은” 한 마리의 맹금류가 그의 간 – 그의 고통을 연장하기 위해 영원히 재생된다 – 을 파먹는 동안 영원히 바위에 묶여 있어야 했다. 프로메테우스의 자기희생은 그리스도의 희생에 필적하지만, 그가 겪은 곤경은 인간들도 폭군의 사슬에 묶여 있었기 때문에, 인간들이 겪은 곤경과 같은 것이다. 여전히, 인간들은 진리를 알고 있지만 그에 따라 행동하기를 거부함으로써 스스로를 속박하고 있다. 주피터는 우리 자신의 고의적인 무지와 이기심, 그리고 복수심에 놓여 있는 포악함을 반영한 것일 뿐이다. 프로메테우스는 자유롭게 되어서야 비로서 자기자신과 현실을 이해해서 자신의 운명과 우주 그리고 신들에게 저주를 내리지 않을 것이다. 그는 주피터를 증오하지 말아야 하고, 자신이 선택한 냉정함과 고독에 대해 스스로를 불쌍히 여길 줄 알아야 한다.

 

셸리는 바이런보다 낙관적이었다. 셸리에게, 자유롭고 사랑으로 충만한 세상은 진짜로 실현 가능한 것처럼 보였다. 악은 인간의 정신에서 그리고 우리가 선택한 이기심과 증오에서 기인한다. 이 세상의 악을 제거하려면, 그렇게 하기로 결심만 하면 된다. 우리는 우리의 마음속에서 주피터를 만들어냈기 때문에, 그를 없앨 수도 있고 더 좋은 신으로 만들 수도 있다. 이렇게 만들어진 새로운 신은 비록 폭정에 저항하기는 하지만, 증오와 저항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과 우리가 창조해낸 주피터를 포함해서 모든 사람에 대한 사랑에서 나온다. 주피터의 가장 큰 악은 자신만의 오만한 고독을 버리지 않은 것인데, 그것 때문에 사랑을 배울 수 있는 프로메테우스보다 열등하게 된다. 우리가 우리 안에 있는 프로메테우스와 주피터의 대립을 통합해서 초월할 수 있으면, 이해, 자유, 그리고 사랑이 있는 푸른 나라를 거쳐 위로 나 있는 평화로운 길로 나아갈 준비가 된 것이다.

 

셸리의 부인 메리는 좀 더 어두운 견해를 가지고 있다. 메리 셸리의 작품 [프랑켄 슈타인 또는 현대의 프로메테우스]는 대체로 작가의 철학적인 메시지는 무시되었지만 읽을거리로서 지속적인 인기를 끌었다. 메리 셸리는 괴물들과 공포에 대한 고딕적인 사랑이야기를 끌어들였고, 프랑켄슈타인은 고딕 시대와 근대의 공포 이야기 사이의 다리가 되었다. 이 책은 고딕적인 줄거리에 약간의 변화를 줌으로써 과학 소설의 시조 가운데 하나이기도 한다. 괴물을 만든 프랑켄슈타인 박사는 이제 더 이상 사기꾼이나 마법사가 아니라 과학자였다. 이 괴물은 중세의 악령이나 유령이 아니라 실험실에서 피와 살로 만들어진 물질적인 존재이다. 프랑켄슈타인은 과거의 초자연적인 공포를 근대의 실증적인 공포로 대체하였다.

 

작가는 이러한 변화를 작품 속에서 명확하게 드러내지는 않았다. 사실, 프랑켄슈타인과 기타 인간 등장인물들은 이 소설 속에서 이 괴물을 “데먼”, “피엔트”, “데블”이라고 계속해서 부른다. 그러나 악이 괴물보다는 인간에게 존재하기 때문에 여기서 메리 셸리의 의도는 역설적이다. 괴물은 인간에게 악을 배웠기 때문에 악해진다. 여기서 또 다른 상징적 변화가 일어나는데, 이제 인간은 자신의 자만심과 이기심이 드러나면서 창조를 망치고 마는 창조자를 상징한다. 하지만, 괴물(이름도 없는)은 악을 경험함으로써 타락한 인간의 순진하고 솔직한 측면을 나타낸다. 개별적인 인간은 순진하게 태어나서 타락한다고 메리 셸리는 암시한다. 인간은 그를 둘러싼 세상의 사악함 때문에 파멸된다. 괴물은 울부짖는다. “나는 자비롭고 착했었다. 고통이 나를 악마로 만들었다. ㄴ나를 행복하게 해다오 그러면 난 다시 자비로워질 테니.” 이 괴물은 [실낙원]이나 다른 책을 읽으며 독학한다. 그는 자신을 선하게 창조되었다가 비참해진 아담과 비교하고, 고독감 때문에 불행해진 사탄과 비교한다. 하지만 사탄마저도 “동료-악마들”이 있었다고 그는 소리친다. 괴물은 만나는 사람마다 그를 멀리하고 두려워하거나 경멸하자, 그의 성격도 점차로 일그러져 마침내 사람들이 확신하는 살인을 저지르는 악마가 된다.

 

이 괴물의 마지막 희망은 여자 친구를 만들어주겠다던 프랑켄슈타인과의 약속이었다. 그러나 새로운 연구를 진행하던 도중에, 이 과학자는 극도의 혐오감에 흔들려 반쯤 만들어진 여자와 장비들을 파괴해버린다. 그러나 괴물은 끈질긴 복수심으로 그 박사를 쫒고 그러는 한편, 박사도 자신의 창조물을 찾아 파괴하려 한다. 바이런의 신과 마찬가지로, 프랑켄슈타인도 세계를 만들지만 결국 후회하고 파괴하기를 원했다. 그들 각각은 서로를 추적하면서, 프랑켄슈타인과 그가 만든 괴물은 동일한 존재임이 밝혀진다. 그들은 인간의 성격 안에서 으르렁대는 두 가지 측면을 상징한다. 만일 우리가 우리 내부적인 투쟁을 초월할 수만 있다면, 우리는 평화로운 세상으로 들어갈 수 있다. 하지만 메리가 내린 결론은 바이런과 비슷하게 비관적이다. 이상하고도 끈질긴 추적 끝에 그 둘은 만난다. 하지만 프랑켄슈타인은 오랜 추적에서 오는 피로함 때문에 죽고, 괴물은 자신의 창조자에 대한 좌절된 복수와 좌절된 사랑을 동시에 느끼면서 차가운 어둠 속으로 영원히 사라진다. 프랑켄슈타인과 인간이 지닌 화해와 통합이라는 양쪽 측면 중 어떤 것도 일어나지 않았고 사라져버렸다.

 

고딕적인 것, 중세적이며 초자연적인 것은 영국뿐만 아니라 독일이나 프랑스에서도 광범위하게 나타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랑스 낭만주의의 실질적인 창시자 프랑세즈-르네 드 샤토브리앙은 혁명적인 변화를 반대했고, 그래서 밀턴의 사탄을 바이런이나 셸리와는 다르게 보았다. [실낙원]에 관한 그의 긴 에세이 [그리스도교의 정수]에서 기독교적인 상상력의 가장 세련된 산물로서 밀턴의 사탄이 보여주는 장엄함에 찬사를 표시했지만, 합법적인 권위에 대한 사탄의 반란은그를 악당보다 못한 영웅으로 만들었다고 결론지었다.

 

프랑스 낭만주의가 시작되면서부터 악마를 진지한 상징으로 다시 끌어들임으로써, 샤토브리앙은 다른 중요한 작가들이 당대를 통해 추종했던 풍조를 결정지었다. 운문 서사시 [나체즈]에서 사탄은 기독교에 반대하는 이교도, 미국 인디언들을 타이르는 모호하고 애매한 악의 영으로 나온다. [나체즈]의 사탄은 실재와 상징의 경계에서 동요한다. 왜냐하면 가장 무섭고 악한 존재는 사탄이 아니라 르네 – 프랑스 문학에서 오랜 동안 악당의 계보를 이어온 모범이었던 – 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교의 정수]에서 샤토브리앙은 시적 상징, 의식, 의례, 상징주의, 그리고 기독교의 도덕성은 찬양했지만, 전통적인 신학에는 거의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상당한 영향력을 지닌 그의 운문 서사시 [순교자]에서는 디오클레티안 황제에 의한 초기 기독교인들의 박해를 혁명과 공포정치 하에서의 박해와 비교한다. 밀턴을 모방해서, 사탄이 지옥에서 그의 동료들과 회합하면서 이야기하는 장면에서, 샤토브리앙은 악마가 인간을 겉으로는 공정하게 다루지만 속으로는 인간을 파멸시킬 음모를 꾸미는 것으로 묘사했다. 사탄이 로마인들로 하여금 기독교인들이 박해하도록 부추겼고 디오클레티안을 통해 자신의 악행을 저지른 것처럼, 그는 공포 정치를 선동하고 자신의 의지를 로베스피에르를 통해 관철시켰다. 이 점을 납득시키기 위해서, 심지어 샤토브리앙은 사탄으로 하여금 “라마즈세예즈”(프랑스 국가)를 인용하게 하였다.

 

샤토브리앙과는 달리, 그를 추종했던 대부분의 프랑스 작가들은 악마에 대한 관심을 다시 유행시키면서 사탄을 비꼬는 듯한 회의론으로 다루거나, 악마 – 악령, 유령, 망령과 함께 – 를 이용해서 고딕적인 공포의 전율을 자아내려고 하였다. 많은 진지한 작가들에게 악마는 너무 평범한 소재가 되어버려서 악을 다룰 때 효과적으로 이용할 수 없고 샤토브리앙의 르네와 같은 인물로 악을 묘사하는 편이 더 낫다고 느끼게 되었다. “신의 유일한 변명은 자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라는 조롱으로 유명한 스탕달은 [적과 흑]에 나오는 악마를 줄리안 소렐 같은 인간으로 묘사하였고, 호노레 드 발자크는 고딕 소설 속에서가 아니라 자신의 작품 [인간희극] 속에서 진정한 악의 문제를 제기했고, 그 작품에서는 악마가 개입하지 않아도 인간은 선천적으로 잔인하고 어리석으며 악하다고 폭로하였다.

 

소수의 작가들은 기독교의 상징을 더욱 진지하게 차용하면서 샤토브리앙을 추종했다. 아이였을 때, 알프레드 드 비니는 용을 죽이는 미가엘이라는 라파엘의 그림을 보고 매혹되었고, 그에게 일생 동안 사탄은 강렬한 상징으로 남아 있었다. 바이런의 [카인]이란 작품은 이 젊은 시인 비니의 악마에 대한 관심을 강화시켰지만, 기독교 신화를 이용한 목적은 전적으로 미학적인 이유에서였다. 왜냐하면, 그는 선이라든지 전능한 신이라는 기독교의 개념을 어리석은 간주했지 때문이다. 인간의 삶이 불행해지고 비참해진 이래로, 기독교의 신성은 오용되거나 무기력할 수 밖에 없었고, 오히려 신은 존재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편이 더 나았다. 비니의 작품들은 자기 만족에 빠진 기독교의 낙관론에 대한 절규이고, 악의 문제를 외면하지 말고 미망에 사로잡히지 않고 직시해야 한다는 요구이다. 1819년과 1823년 사이에 씌어진 미완의 시, “최후의 심판”과 “사탄”은 자신의 걸작 “엘로아, 마그네스의 수녀”보다 먼저 나왔다. 엘로아는 나사로가 죽을 때 예수가 흘린 눈물에서 태어난 여자 천사였다. 그녀의 가슴은 자기와 같이 만들어진 동료들에 대한 연민으로 가득하다. 그리고 하늘 나라에서는 모든 사람들이 행복하기 때문에, 자신의 도움이 필요한 누군가를 찾아 우주를 방황하기 시작한다. 그녀는 쫒겨난 천사의 목소리를 듣는다. 그 천사는 사랑과 동료애를 그리워하며 홀로 슬퍼한다. 이 천사가 바로 사탄이라는 것, 그리고 사탄이 정말로 악한 짓을 행했다는 것도 모르고, 예수가 나사로에게 흘렸던 눈물처럼 그 천사를 동정하는 눈물을 흘린다. 물론, 사탄은 이런 비밀을 내색하지 않기로 한다. 대신에 사탄은 자기가 오해를 받고 있다고 그녀를 설득한다.

 

그들이 사악하다고 부르는 자는 사실은

노예를 위해 눈물 흘려 위로하고 그 노예를 주인으로부터 해방시켜 주고자 하는 사람이다. 자신의 사랑과 고통으로 노예를 구하는 자이다.

같은 고통을 공유하고 있으므로

그는 비참에 빠진 자들을 동정하고 그 모든 고통을 잊을 수 있게 축복하기도 한다. (“Eloa”)

 

비니의 사탄은 젊지만 허약하고 방탕하며, 전형적으로 나약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그러한 아름다움은 낭만주의자들이 이상적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그는 엘로아라는 존재를 부담스럽게 여긴다. 사탄은 자만심과 오만함 때문에 죄를 짓고 하늘의 아름다움에서 멀어지게 되어 후회와 슬픔으로 황폐해지는 자신의 모습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사탄은 신에 대한 증오를 극복할 수 없고 자신의 미모와 꾸며진 순수함, 그리고 가장된 동정심을 발휘해서 엘로아를 감동시킨다. 그리고 그는 예수와 엘로아가 진심으로 흘렸던 눈물과 대조를 이룰 정도로 거짓된 눈물을 흘린다. 엘로아가 보여준 사랑에 대해 사탄은 어리석게 반응한다. 마치 [파우스트]에서 메피스토펠레스가 어린 천사들에게 보인 태도처럼 어리석었다. 사탄은 엘로아를 유혹하기로 마음먹는다. 신에 대한 사탄의 적대감을 우려한 엘로아는 그의 유혹을 뿌리친다. “당신이 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나를 사랑하시겠어요?” 마침내 그녀가 한 발 물러서려 하는데, 사탄이 잠시 동안이나마 뉘우치는 기색을 보이려고 하는 순간에, 그녀는 혼란스러워져 그의 정체를 알아채지 못했다. 이 순간이 지나자, 사탄은 다시 증오심에 빠진다. 이런 상황에서, 엘로아의 사랑도 그의 고통을 덜어주지 못하고 사탄은 그녀를 저 아래 지옥으로 데리고 간다. 이 시의 마지막 줄에 가서야, 그녀는 진실을 깨닫기 시작한다. “도대체 당신은 누구인가요?” 그녀가 울면서 말하자 그는 대답한다. “나는 사탄이다”.

 

이 시는 증오와 절망이라는 지독한 장애물을 극복하는 데 사랑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해 깊은 회의를 드러낸다. 이 부분에서, 비니의 관점은 바이런과 같다. 그는 속편을 계획했고, 여기서도 악마는 마침내 구원을 받게 되지만, 이 시는 결코 낙관적으로 끝나지 않고, 우리는 어두운 전망만을 갖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니는 종교적인 회의론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는 감정을 불어넣어 심리학적으로 설득력 있게 사탄을 묘사했는데, 이는 밀턴 이래로 그 누구도 하지 못했던 일이다. 빅토르 위고는 악마가 지닌 슬프고 고립된 성격을 더욱 강조하였고 그 모습을 더욱 더 동정적인 모습으로, 시적으로 묘사했다.

 

빅토르 위고가 묘사한 사탄은 바이런과 더불어 낭만주의 시대의 악마를 가장 효과적으로 그린 것에 속한다. 이성주의자로 출발한 위고는 젊었을 때 자신의 미적 가치관에 따라 가톨릭으로 개종하였으나, 곧 포기하고 만다. 위고의 사상은 어느 한 곳에 머문 적이 없다. 일생을 통해, 그는 다양한 견해 – 신비주의, 그노시스주의, 오컬티즘, 범신론, 유물론, 이원론 – 를 섭렵했다. 진정한 낭만주의 사조 안에서, 그는 판단을 내릴 때, 지적인 근거보다는 미학적이고 감정적인 입장을 취했다. 그는 만일 신이 동정심과 자비를 가지고 있다면, 원죄라든가 십자가를 통한 구원이라든가, 지옥이라는 전통적인 교리를 혐오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선하고, 신은 원래부터 자비로웠다고 그는 믿었다. 그는 신에 대한 기독교의 관념들을 잘못된 것으로 보았지만, 예수 자체는 고결한 윤리 의식을 지는 존귀하고 사랑이 넘치는 선생이며, 사랑이라는 실제적인 진리를 추구하는 모범으로 보았다. 그토록 많은 계몽주의, 낭만주의 사상가들을 부각시켰던 예수와 기독교 사이의 알려진 긴장관계와 성서비평에 지적 기반을 두고 전통적 예수 이면의 역사적 예수를 발견하려는 시도들로 인해 근본적 문제들이 제기된다. 계몽사상가들과 낭만주의자들이 기독교 자체에 반대한 것이 아니라, 진정한 예수의 가르침을 왜곡하는 거짓된 기도교에 반대해서 개혁하려 한 것이고, 따라서 자신들이야말로 전통에 사로잡힌 기독교인들에 대항하는 진정한 기독교도들이라는 주장이 최근에 나오고 있다. “조직 종교”를 거부하고 윤리적, 미학적으로 또는 감성적으로 예수에 접근하려는 사람들에게서 많이 보이는 이 견해에도 논리적 모순과 불일치가 엿보인다. “역사적 예수”에 대해 밝혀진 것도 없고 밝혀질 수도 없다. 우리는 역사적으로 예수가 “실제로” 무슨 말을 했고 무슨 일을 했는지 알 길이 없다. 역사가 할 수 있는 일이라야 매우 안전하고 정확하게 기독교의 발전 과정이나 기독교라는 테두리 안에서 예수가 취했던 입장의 추이를 보여주는 것이다. 즉, 우리가 역사적으로 알 수 있는 예수의 모습은 시대를 통해 발전되어온 전통에 입각해 예수를 파악하는 것이다. 기독교를 객관적으로 정의하는 유일한 방법은 역사적으로 실존해온 모습에 따라 정의하는 것이다. 이 밖의 모든 정의들은 증명되지 않은 가정들을 전제한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역사적으로 형성되어온 것 이외의 다른 모습을 가질 수도 있다”라는 진술은 의미가 없다. 왜냐하면, 이런 말들은 증명될 수도 없고 정당하지도 않은 신념에 따른 가정에 의존해서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위고와 낭만주의자들은 기독교에 의해 숨겨진 진짜 예수를 찾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 일은 가능하지만 증명될 수는 없다.

 

이렇게 악의 역사 4권의 낭만주의 시대의 악마 파트 타이핑이 끝났습니다!

지금은 이사야 벌린의 낭만주의의 뿌리를 읽고 있고, 다음 타이핑은 아마 이 책이 될 듯 합니다!

위고가 자신의 견해를 이성적으로 옹호하지 못했다는 것은 그에게 그렇게 중요하지 않았다. 위고에게는 오히려 자기의 감정에 따른 증거가 더 중요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필요할 때마다 이성적으로 판단하였다. 그는 악의 문제를 매우 잘 이해하고 있었고, 매우 호의적이고 관대하게 생각해서, 신이 악을 막을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하지 않기로 하였다는 생각을 부인하였다. 또한 그는 자신의 의도를 결핍에 대한 전통적인 플라톤주의와 기독교의 논의에 맞추면서 전통적인 악마를 거부하였다. 악은 일조의 부정이고, 부정은 실제로 존재할 수 없다. 긍정적인 것만이 존재한다. 만일 신이 악하다면, 그 무엇도 존재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뭔가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러므로 뭔가를 존재하게 하는 원리는 선일 수밖에 없다.

 

위고는 절대 악이 존재한다는 것을 부인하지만, 이 세사에서 악이 발휘하는 효과에 대해서는 강한 관심을 보였다. 기본적으로 선을 바탕으로 하는 인간애는 점차로 완전한 사랑과 자유를 지향하고 있었지만, 악이라는 유혹에 끌려 잔인해지고 이기적으로 되어 더 발전하지 못하고 가로막혔다. 하지만, 우리가 이 세상을 창조하지도 않았고, 우리 안에 있는 그림자를 창조한 것도 아니므로, 차라리 우리의 죄를 탓하기 보다는 우리 자신의 불행에 대해 동정해야 한다.

 

위고의 관심은 언제나 변화중이었으므로 사탄을 이용하는 방식도 일관성이 없었다. 중세적이고 소름끼치는 것을 좋아하는 고딕 양식을 그도 공유했으므로, 그가 그리는 악마의 모습은 공포와 전율을 즐기는 환상적인 존재나 악령 또는 괴물이었다. 그는 기괴한 것들, 마녀들, 그리고 꼽추들을 함께 이용하면서 독특한 중세의 어두운 느낌을 전달하는 [노트르담 드 파리]와 같은 중세풍의 연극을 지지하였다. 중세풍으로 설정함으로써 세칭 중세적 정신에 대해 논평한다는 구실을 가지고 위고는 역설적으로 환상적인 장면에 탐닉할 수 있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그는 중세적으로 표출된 가톨릭의 견해를 풍자함으로써, 가톨릭교회를 풍자할 수 있었다. 위고가 말하는 중세라고 하는 것이 역사적으로 실재했던 중세와는 별 상관이 없다고 해서 중세의 대중성과 효과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사탄은 또한 혁명을 상징하기도 했다. 위고가 샤토브리앙의 영향을 받았던 젊었을 당시에 혁명의 상징인 상탄은 악의 상징을 의미하기도 했다. 나중에, 위고가 혁명을 인간의 진보로 보게 되면서, 사탄의 혁명은 선을 상징하기 시작했다. 사탄은 압제적인 사회나 정부를 상징할 수도 있고, 그 반대를 의미할 수도 있었다. 즉, 자유라는 이름의 억압에 대한 저항. 사탄은 사탄/신, 선/악이라는 이중적인 모습 가운데 하나로 사용될 수도 있었는데, 이는 인간이 타고난 선으로부터 소외됨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위고는 잔인함이나 이기심처럼 소외, 패배, 슬픔, 그리고 후회 같은 것들도 악에 고유한 것이라는 점을 깊이 깨달았다. 위고는 그때까지 무시되어왔던 악의 새로운 면모를 묘사했다. 즉, 죄인들이 느끼는 뼈에 사무치는 슬픔과 고독함. 사탄은 창조와 인간애를 갈망하는 하나의 은유였다. 자신들의 어리석음과 이기심 때문에 쫒겨났던 삶으로부터 충성스러운 영의 삶으로 다시 통합되고자 하는 갈망이 그것이다.

 

위고는 사탄이 선과 재통합될 수 있다는 낙관적인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열렬한 보편주의자로서 그는 빛의 영은 무한히 자비롭고 궁극적으로 모든 잃어버린 피조물들을 사랑으로 통합시켜 줄 것이라고 믿었다. 그런 행복한 순간이 오기까지, 악은 준엄한 현실로 남아 있을 것이다. “사탄은 탐욕스럽다. 한 마리의 돼지처럼 게걸스럽게 모든 사상을 먹어치운다. 그는 어두운 심연이라는 흘러넘치는 잔으로 술을 마셔 취해 있다. 그는 오만해서 숭배해야 할 대상에도 무릎을 꿇지 않는다. 자기의 손을 피로 적시면서 즐거워하는 자만에 빠져 있다. 사탄은 우리 안에 사는 모든 괴물들이 발광하는 무시무시한 동굴과 같은 배를 가지고 있다.”

 

시구로 되어 있는 역사 드라마 [크롬웰]의 서문에서, 위고는 그로테스크 – 악마를 포함해서 – 가 근대문학의 필수적인 요소라고 선언하였다. 그는 [오드와 발라드]에서 민속학적이며 중세적인 스타일로 악마를 묘사하였다. [자비로운 초월자]에서는 지옥을 폐지하고 모든 피조물들을 자비롭게 용서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동방박사]에서는, 악을 선에 대립하는 것으로 보았다. “인간들은 그것을 야만이나 범죄라 부르고, 하늘은 그것을 밤이라 부르며, 신은 사탄이라고 부른다”. 그는 악마를 프랑스인들이 지지하는 방식으로 조롱하는 듯하고, 빈정대며, 거만하고 염세적인 메피스토펠레스라고 상상할 수도 있었다.

 

그는 근심스런 눈을 가졌고,

주름진 이마 위에

비틀린 두 개의 뿔은

너무나 확실히 보였다.

그의 갈퀴 같은 발이 양말을 비집고 튀어나왔따.

지옥에서 떠난다는 것이 너무 좋아서, 그는 신선한 공기를 들이마셨다.

그의 이빨이 가짜는 아니었지만,

그의 눈짓이 진실하지도 않았다.

그는 먹이를 준비하기 위해 땅으로 내려왔다.

철 같은 손톱이 달린 손으로

그는 신에게서 허락받고 다시 루시퍼에게 확인받은

사냥 허가서를 움켜쥐었다.

그는 바알세불에 필적했다.

나는 그를 그 자리에서 알아보았다.

숨길 수 없는 찌푸린 얼굴 때문에

그에게서 사악한 신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위고는 자신의 미완의 장편 서사시 삼부작에서 밀턴 이래로 가장 깊이 있게 사탄을 묘사한다. “여러 세기의 전설”(여기서 신과 에브리스, 그리고 악마는 각자 자신들의 창조력을 걸고 내기를 한다), “신”, 그리고 “사탄의 최후” 등이 그것이다. 전체적인 구도는 인간을 빛과 자유, 그리고 사랑으로 열어주는 자유에 의해 악이 파멸되는 것을 묘사하는 것이었다. 유고로 증보출판된 [신]에서, 위고는 악을 실체도 없고 존재할 수도 없는 신의 그림자라고 말한다. “신은 자신이 입고 있는 옷의 주름 안에다 악마를 숨겨두지 않았다”라고 그는 말했다. 1854년에 시작했지만 역시 유작으로 발표된 [사탄의 최후]에서, 악마는 생기 있고 설득력 있는 인물로 나온다. 그는 정말로 죄를 지었고, 자신의 맹목성과 이기심으로 자기자신과 세상을 왜곡했다. 하지만 스스로에 의한 소외 때문에 받는 고통은 그를 동정하게 만든다. 사탄이 상징하는 것은 평온과 평화, 그리고 균형의 결핍이고, 적당한 사랑과 자유 안에서의 휴식으로부터 소외된 인간이었다. 사탄과 마찬가지로, 우리들도 내적 세계에 갇혀 있어서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현실을 볼 수 없다. 현실은 나무와 새, 그리고 인간적인 목소리로 우리에게 말을 걸어오지만 우리는 그것들을 외면한다. 우리가 아무리 비참한 상태에 빠져도, 사랑의 영은 우리를 이끌어 결국 모두를 구원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 이 세상의 영은 모두가 다시 자신에게 돌아오기를 바라면서 무한한 사랑과 자비를 베푼다. 이러한 사랑의 힘에 대항하여 영원한 승리를 얻을 자 누가 있겠는가? 더 나아가 악은 그 자체로 무이다. 악은 결핍으로만 일시적으로 존재할 뿐이다. 그러나 종말이 오면 이러한 불완전한 것들도 정화된다. 대립물들도 서로 화해하고, 이 우주는 사랑과 자유로 다시 통합될 것이다.

 

이 시는 사탄의 타락으로 시작된다. 그가 타락하면서, 천사의 본성은 변형된다. “갑자기 그는 자신의 몸에서 박쥐의 날개가 자라는 것을 본다. 자기자신이 괴물로 변하는 것을 지켜본다. 자기 안의 천사가 죽자, 이 반역자는 후회스러운 가책을 느낀다”. 오만한 신에 대한 질투는 더욱 쓰라린 회한의 질투로 바뀐다. “신은 푸른 하늘을 가졌지만, 나는 어둡고 텅 빈 하늘을 갖는다.” 무서운 목소리가 반박한다. “저주받은 것, 네 주변에 있는 모든 별들도 사라질 것이다.” 그는 추락한다. 천년 동안 한 해도 거르지 않고. 그가 추락하자 점차로 별들도 사라져, 하늘은 더 어둡고, 텅 비어, 더욱 고요해진다. 단 세 개의 희미한 점으로 남을 때까지 그러다가 마침내 하나만 남는다. 그는 고갈되어가는 자신의 모든 노력을 이 마지막 사라져가는 별에 집중한다.

 

지평선에서 희미하게 떨리고 있는 별을 향해

그는 다급해서 여기저기에 있는 어두운 발판을 밟으며 뛰어갔다.

그는 뛰면서 날아가면서 소리쳤다. 금빛 나는 별이여!

형제여! 나를 기다리라! 내가 간다! 아직 사라지지 마라!

나를 홀로 내버려 두지 마라……

그 별은 이제 불꽃처럼 되었다.

그 불꽃은

어두운 심해의 가장 깊은 곳에 있는 하나의 빨간 점이 되었다……

그 별을 더 밝게 빛나게 하고 싶어서

석탄에 대고 하는 것처럼 그 별에 대고 있는 힘껏 불었다.

그러자 극심한 고통이 그의 무서운 콧구멍으로 타올랐다.

그는 그 별을 좇아 1만 년 동안 날아갔다. 1만 년 동안,

자신의 창백한 목과 미친 손가락을 길게 늘이며

그는 날아다녔지만 어느 한곳도 쉴 만한 곳을 찾지 못했다.

수시로 그 별은 어두워졌다가 사라지곤 했다.

무덤의 공포로 인해 어두운 천사는 몸을 떨어야 했다.

별에 가까워지자

안간힘을 다하는 수영선수처럼 사탄은

자신의 다 닳아 갈고리 같은 날개를 앞으로 뻗었다. 지친 유령처럼.

숨 막히고 부러지고 지치고 땀 때문에 열을 내며,

그는 어두운 경사면의 모서리에 부딪혔다.

이제 별은 거의 빛을 잃고 있었다. 그 어둠의 천사는 너무나 지쳐서

목소리도 숨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 별은 그의 고통스런 눈빛 아래서 사라져가고 있었다.

그러다 마침내 별이 사라져버렸다.

 

사탄과 신이 벌이는 싸움을 묘사하는 데 세 절을 할애한다. 구약시대를 다루는 “검”, 신약을 나타내는 “교수대”, 근대를 상징하는 “감옥”. 구약시대에, 사탄은 인간에 대한 신의 영향력을 부정하거나 아니면 적어도 최소화하려고 싸운다. 신은 일시적이나마 인간을 정화하는 데 성공하지만 결국 홍수로 온 세상을 쓸어버린다. (위고가 보기엔)신의 사랑이 이상하게 발현된 예이다. 파멸된 천사의 날개에서 깃털 하나가 떨어져나오는데, 그 깃털은 아름다운 천사(비니의 엘로아처럼)의 모습을 하고 있다. 그 천사의 이름은 자유이다. 결과적으로 사탄이 일으킨 악한 저항은 그 안에 미래에 사랑과 자유로 되돌아온다는 의미를 지닌 천사가 남긴 표시였다.

 

바로 그때, 신은 자유가 지옥으로 내려가 사탄을 만나도록 허락한다. 또한 신은 그녀가 땅에 내려가 인간들을 해방시켜 주는 것도 허락하였다. 하지만 그녀는 악마에게도 허락을 받아야 한다. 처음에는, 자신의 잘못에 대해 자기 입장에서 생각하다가 사탄은 허락하려 하지 않았다가 마침내 그녀의 간청에 마지못해 필요한 말만 내뱉는다. 가라! 자유는 인간들을 고무시켜 악에 저항하게 하고 인간의 자유를 가로막았던 감옥 – 바스티유로 상징되는 – 을 부수게 한다. 그래서 혁명은 자유라는 천사의 과업을 신과 악마의 허락하에 완수한다. 화해가 시작된 것이다.

 

사탄은 온 우주가 자신을 거부한다는 사실을 알고는 괴로워한다.

 

온 우주에서 나는 이런 말을 듣는다. 꺼져라!

똥더미에서 킁킁거리는 돼지조차도 “사탄을 경멸한다.”

밤도 내가 자신을 능멸한다고 생각하는 것을 나는 알 수 있다.

한때 순백의 빛, 새벽이었던

내가. 바로 내가! 나는 빛나는 눈썹을 단 대천사였다.

하지만 나는 질투가 났다. 그게 나의

죄이다. 이런 말을 들었다. 신의 입술은

나를 악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신은 나를 구덩이에 쳐넣었다.

아, 나는 그를 사랑하노라! 이는 공포와 격정이다!

나는 어찌될까, 지옥으로 떨어진단 말인가? 나는 신을 사랑하노라!

지옥에는 신이 영원히 존재하지 않는다

지옥은 사랑이고 울부짖음이다, “오, 나의 빛은 어디 있는가,

나의 생과 나의 계시는?”

“내가 처음 떨어졌을 때, 나는 기고만장했다.”

이러한 신, 세상의 중심, 이 눈부신 아버지.

천사, 별, 인간, 그리고 짐승은 그 안에서 지탱한다.

이것을 중심으로 그가 창조한 존재들이 모여있다.

이 존재, 생명의 근원, 홀로 진실하며, 홀로 필연적인,

나는 그 없이는 아무 일도 할 수 없다, 나는 벌 받은 거인.

하지만 나는 그를 사랑한다!

나는 진실을 알고 있다! 신은 영이 아니라 마음이다.

우주의 중심을 사랑하는 신은 자신의 신성한 정신으로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을 꽃실과 뿌리를 연결한다.

“신은 모든 창조물을 사랑한다.”

하지만 사탄은 영원히 버림받고, 슬픔에 빠져, 책망받는다.

신은 나를 무시하고, 나와 함께하기를 그만둔다. 나는 그의 영역 안에 존재한다.

만일 내가 존재하지 않았으면 신은 무한할 것이다.

수만 번이나 나의 맹세를 되뇌인다.

나는 사랑한다! 신은 나에게 고통을 주지만, 나의 유일한 모독,

나의 유일한 광란, 나의 유일한 절규를 나는 사랑한다는 것이다!

나는 하늘이 흔들릴 만큼 사랑하노라! 하지만 헛되도다!

 

이제 위고가 이 작품의 대단원으로 계획한 바에 따라 신은 대답한다. 사탄은 소리친다. “사랑은 나를 증오하는구나!’ 하지만, 신은 대답한다.

 

아니아, 나는 너를 증오하지 않는다!

사탄아, 너는 이렇게 말하기만 하면 된다. 나를 살게 해주소서!

이제, 너를 가둔 감옥은 열릴 것이고 지옥은 사라질 것이다!

보라, 천사 자유는 너의 딸이자 나의 딸이다.

이처럼 숭고한 가문은 우리를 하나로 만들어준다.

대천사는 다시 태어나고 악령은 죽는다.

불길한 어둠을 거둬내서 이제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

사탄은 죽었노라, 다시 태어나라, 하늘의 루시퍼여!

자, 너의 이마에 서광을 담아 그림자로부터 올라오라.

 

이처럼 신랄한 사탄의 초상은 시적 도덕관을 표현한 것이다. 우리의 이기심과 어리석음으로 인해 우리는 우주의 진상으로부터 멀어진다. 진정한 우주의 모습은 사랑인데, 그 사랑은 무한하고, 오래 참으로며, 자비롭다. 이기심과 분노, 그리고 자만심은 맹목적인 거부이고 현실을 부정할 뿐이며 그 자체로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우리가 이해할 때까지 사랑은 기다린다. 이와 같은 결점에 눈을 뜨기만 하면, 사랑의 계시가 밀려오고, 공포와 수치심에 싸여, 우리가 빠져 있던 어둠을 응시하며 홀로 서 있었던 자신을 알게 된다. 우리의 어두운 눈에 사랑의 빛이 처음으로 들어오는 순간 곧 바로 알 수 있다. 우리가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으면, 사랑은 어둠을 뚫고 빛으로 충만할 때까지 채운다.

 

때때로 낭만주의자들은 상징을 극단적으로 바꾸어 사용했다. 낭만주의자들의 목적은 신과 사탄을 통합하는 것이라는 믿음에서 출발한 수도원장 알퐁스 루이 콩스탕은 조르주 상드의 영향을 받아 사탄은 독단적인 신의 저주로 인해 불공평하게 비난받아 왔다고 믿게 되었다. 비교에 빠진 콩스탕은 자신의 이름을 엘리파스 레비라고 바꾸고, 사탄을 긍정적인 영적인 세력으로 묘사하는 책을 여러 권 저술했다. 프랑스에서 사탄은 정치적인 경향을 보이는데, 위고의 생각과는 정반대로 전개되었지만, 레비도 예외는 아니었다. 1840년대에, 레비가 그리는 사탄은 혁명과 자유의 상징이었다. 그러다가 레비가 나폴레옹 3세를 추앙하게 되자 사탄도 위계적인 법과 질서를 지지하게 된다. 이처럼 사탄을 비의적이고 긍정적으로 해석함으로써 허식가들뿐만 아니라 천박하고 어리석은 사람들을 유혹하는 사소한 움직임일지라도 이따금씩 심각해지는 세기말 사탄주의의 기반이 형성되었다.

 

위고의 장엄한 사탄 그리고 레비의 과시적인 사탄주의 이외에도, 19세기 내내 사탄은 주로 반어적이고 풍자적으로 또는 변덕스런 모습으로 다루어졌다. 사탄을 반어적으로 다룬 최고의 대가는 테오필 고티에 였는데, 그는 파우스트를 희화적으로 개작한 [알베르투스]라고 하는 작품을 썼고, 위고와 비니를 풍자해서 [악마의 눈물]이라는 작품을 썼다. 고티에의 작품에서, 악마는 세련된 외모 뒤에 자신의 악의를 감추고 있는 우아하고 단정하며 재치 있는 멋쟁이로 나온다.

 

고티에의 [오누프리우스]라는 단편에서 역설적인 악마의 모습을 가장 분명하게 보여준다. 중세주의와 초자연성에 사로잡힌 시인이며 화가인 젊은 멋쟁이 오누프리우스는 모든 것에서 악마의 손길을 느끼기 시작한다. 마침내 진짜로 악마가 나타나서 그의 그림과 시를 더럽히고, 가장 적절한 상태에서 그의 계략을 수포로 만들고, 연애도 망친다. 오누프리우스가 쇠레 도서관에서 자신이 지은 시를 읽고 있으면, 악마가 그의 뒤에 와서 단어들을 모조리 작은 망태에 담은 다음, 과장되고 터무니없는 구절들로 바꾸어놓는다. 고티에가 묘사한 악마를 비꼬는 듯한 메피스토펠레스를 너무나 완벽하게 그려내서 미술, 오페라, 문학, 그리고 만화 속에 등장하는 전형적인 인물이 되었다. 단정하고 냉소적인 용모의 젊고 잘생긴 남자, 붉은 황제의 수염과 콧수염, 초록색 눈, 얇고, 창백하며 비꼬는 듯한 입술, 날카로운 표정, 완벽한 멋쟁이였던 그는 검은색 코트와 붉은색 조끼를 입고 하얀 색 장갑과 금색 안경을 끼고 있다. 길고 섬세한 손가락에 커다란 루비를 끼고 자랑한다. 그는 두려움과 증오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비꼬는 듯한 웃음을 흘린다. 결국, 그는 거울에 자신을 비춰보는 냉소적이고 하찮은 근대의 인간이다.

 

사탄을 신사로 묘사하면서, 고티에와 그의 모방자들은 자신들도 멋쟁이였는데, 역설적으로 자신들을 악마와 연관시켰고, 고티에의 악마가 가장 좋아했던 희생자들은 시인이나 화가 등이었는데, 이는 저자가 자신과 같은 예술가들로 일부러 일치시킨 것이다. 이 멋쟁이들은 심미적이고 우아하다. 관습을 무시하고, 자기들에게 관심이 끌려 속물들이 깜짝 놀라도록 옷을 입고 말을 한다. 이국적이고 기괴한 말과 이미지를 사용하고, 섬세하고 거만할 정도로 예민하며, 자기도취에 빠지기를 좋아해서 평범한 도덕성을 일축한다. 그는 성실하고 진지하기보다는 재기 발랄하고 매력적이어서 고위층 사람들의 삶의 태도에 영향을 미친다. [오누프리우스]와 같은 이야기 속에는 여러 수준의 반어법이 등장한다. 시인은 어리석게 생각되는 구태의연한 악마를 조롱한다. 또한 그는 악마에 대한 믿음은 신에 대한 믿음만큼이나 타당한 것이라고 역설적으로 주장한다. “악마가 존재한다는 것은 신과 마찬가지로 가장 존경할 만한 저자들에 의해 증명되었다. 그것은 하나의 신조가 된다.”

 

또 다른 차원에서, 잘 속고 감상적이며 천진한 오누프리우스, 그래서 쉽게 놀라고 건방진 신사 악령에게 놀림을 당하는 오누프리우스의 모습을 통해 고티에는 자신의 동료 예술가들을 풍자한다. 그리고 이 신사 악령 역시 당시 예술가들이 가지고 있던 또 다른 모습이었다. 이러한 모든 반어적인 표현 속에는 마술과 기적을 좋아하는 당시의 풍조에 대한 공공연한 풍자가 숨어 있다. 이런 이야기 속에서는 모든 것들이 다 번뜩이는 조롱거리가 된다. 신, 악마, 우주, 인간, 예술, 그리고 예술가들 자신까지도 말이다.

 

이 세기 중반까지, 예술적 상상력 안에 여러 가지 유형들이 고착되었다. 악마와 신의 도덕적인 모호함, 그들의 통합 가능성, 선을 갈망하면서도 무지와 이기심에 빠진 인간의 정신으로 대표되는 사탄에 대한 심리적 공감, 인간의 조건을 풍자하는 데 이용되는 사탄의 냉담한 목소리 등이 그것이다. 더 새로운 시인들이 나타나면서, 낭만주의는 두 방향으로 차츰 바뀌기 시작했다. 그것은 일상생활을 사실적으로 묘사함으로써 초자연적인 것이나 내재적인 것을 일축하는 자연주의 그리고 댄디즘의 몇몇 요소들과 인간의 타락, 특히 성적인 타락에 대한 심층적인 연구를 결합한 퇴폐주의이다.

 

1828년 초반, 퇴폐주의가 등장하기 훨씬 전에, 비교와 마카브르에 빠진 한 집단이 빅토르 위고의 집에 모여 해골, 단도, 광인, 묘지, 시체, 유령, 성육신, 계약, 그리고 악령 등을 주로 다루는 저작들을 읽기 시작하였다. 1846년 2월에 모여서 시작된 또 다른 젊은 시인들은 속물들을 놀라게 하는 데 전념했는데, 한 모임에서 합작해서 일곱 가지 대죄를 찬양하였고, 극적인 효과를 위해서라도, 발설되지 않는 편이 더 좋았을 말로 자신들의 작품을 사탄에게 헌정하였다.

 

당신, 사탄, 타락한 아름다운 천사에게,

위험한 명예에 빠진 당신에게

부당한 지배에 맞서 싸우기 위해

나는 내 자신을 온전히 그리고 영원히 바치나이다,

나의 정신, 나의 감각들, 나의 마음, 나의 사랑,

그리고 타락한 아름다움을 가진 나의 어두운 시를.

 

댄디들의 이론적인 지주인 사탄은 무정부주의자 피에르 조셉 프루동에게는 매우 상징적인 존재였다. “이리 오라, 사탄이여, 목사와 왕들에게 모욕을 당해왔던 당신, 이제 내가 당신에게 입 맞추고 내 가슴으로 안아주리라”라고 그는 기도한다. 보들레르와 그의 동료들에게도 유행하게 되었던 이런 생각의 영향을 받은 근대의 몇몇 비평가들은 19세기의 악마주의에 대해 언급했다. 분명히 진짜 악마주의들도 더러 있었지만, 그 용어는 조심스럽게 서술될 필요가 있다.

 

미학적인 효과를 얻기 위해 사탄주의를 가장하는 허식가들은 진정한 사탄주의자라고 할 수 없다. 프루동과 같은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는데, 그들은 개인적으로 정치적 혹은 사회적 저항의 상징으로 믿지도 않았던 사탄을 이용하였다. 신과 사탄이 존재한다는 것을 부인하는 사람들을 사탄주의자라고 일컬었던 19세기 기독교인들의 논리는 적절하지 않다. 사탄만이 존재하고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던가 아니면 둘 다 존재하지만 사탄이 선하고 신은 악하다던가 하는 견해를 취했던 몇몇 이상한 사람들도 진정한 사탄주의자라고 할 수 는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실속 없이 말만 바꾸었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선하고 사랑스럽고 자비로운 우주의 창조자를 상탄이라고 부른다면, 그 사람은 비관습적인 이름을 신에 적용하고 있을 뿐이다.

 

사탄주의자라는 말은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적용된다. 진정한 악과 이기심, 그리고 고통에 대한 개별적인 원리를 사탄이라고 믿고, 악마를 그런 식으로 숭배하는 사람들만이 사탄주의자이다. 보들레르나 그의 동료들에게 이 말을 붙이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왜냐하면, 진정한 사탄주의는 매우 제한되어 있고 문화적인 영향력이 미미했기 때문이다.

 

젊었을 때 교회와 인연을 끊었던 샤를 피에르 보들레르는 낭만주의에서 자연주의나 퇴폐주의로 넘어가는 데 중요한 인물이다. 원래부터 회의론자였던 그는 종교뿐만 아니라 과학에까지 자신의 의구심을 확대해나갔다. 그는 당신의 경박한 유물론적 진보주의를 형편없이 터무니없는 것으로 보았고, 무신론을 가지고는 소외나, 악, 그리고 인간 실존이 처한 현실을 심도 있게 다룰 수 없다고 보았다. 위고나 낭만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보들레르도 심미주의자였다. 그는 대부분의 낭만주의자들보다 더욱 사변을 즐기고 도덕적인 문제에 매우 관심을 가졌지만, 신학이나 철학을 체계적으로 가지고 있던 것은 아니었다. 말년에, 그는 스스로를 가톨릭신자라고 여겼다. 그리고 그는 결코 정통주의자는 아니었지만, 그의 작품 속에는 가톨릭주의 그리고 얀센주의자와 마찬가지로 죄에 대한 강한 선입견이 배어 있었다.

 

보들레르가 악에 관심을 가졌다고 해서 그가 악을 옹호한 것은 아니다. 그는 위선, 인색함, 잔인함 등을 혐오했다. 신이 이 세상을 아름다움, 사랑, 그리고 정의로 채우지 않은 것이 불만의 원인이라고 생각했다. 악이 파괴적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론 매력적이기도 하다는 것을 솔직하게 인정했다. “모든 사람들에게 두 가지 경향이 동시에 존재한다. 하나는 신을 향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사탄을 향하는 것이다. 신을 부르는 영혼성은 더 높이 올라가려는 욕망이다. 사탄을 부르는 동물성은 더 아래로 떨어지면서 즐거움을 얻는다.” 악은 우리를 맹목적인 이기심, 고립감, 소외에 빠뜨림으로써 모든 것을 파괴하지만, 이러한 어둠이 가지고 있는 나름대로의 매력은 모든 사람들이 느끼고 위선자들만이 부인하는 것이다. 보들레르는 우리 눈에서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눈에서 위선이라는 장막을 가차없이 거두어들였다. 조르주 상드가 악이 존재한다는 것을 부정했지만, 그는 악마와 지옥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녀의 개인적인 의견일 뿐이라고 신랄하게 주장했다. 보들레르는 감각적인 쾌락과 힘, 특히 젊은이를 압도하는 이러한 힘에 대해 잘 알고 있었지만, 사탄의 가장 강력한 무기는 권태(신학적으로는 나태, 유물론적으로는 권태와 심미적으로 같은 것), 즉 삶의 완전한 공허에 직면한 권태로움이었다.

 

보들레르는 사탄이 지닌 긍정적인 매력을 느꼈다. 그의 작품 속에서 사탄은 위선의 화신일 뿐만 아니라 낭만주의적인 자유를 쟁취한 자로 등장한다. 이 시인은 저항하는 천사에게서 가장 완벽한 형태의 남성미를 지각했다. 하지만, 대체로 보들레르는 사탄을 인간의 악을 상징하는 것으로 심지어는 개인적인 실체로 여겼다. 그는 플로베르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말했다. “외적으로 존재하는 악한 힘을 가정하지 않고는 갑작스런 인간의 행위나 생각을 설명할 수 없다는 생각에 늘 사로잡혀 있어요.” 갈려한 내관적 힘을 지닌 모든 기독교 작가들처럼, 보들레르는 우리의 정신 속에서 매우 파괴적인 이미지나 욕망 그리고 감정들이 불현듯이 예고도 없이 분출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이런 것들은 의식적인 정신을 초월한 어떤 힘을 언급해야만 설명될 수 있다. 그런 힘이 전통적인 기독교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바깥에서 오는 것인지 아니면, 심층 심리학에서 말하는 것처럼 무의식에서 오는 것이든지. 보들레르는 회의론자 자체에 회의적이었다. “나의 형제들이여, 잊지 마라. 발전하는 계몽주의를 찬양하는 소리를 듣게 된다면, 그것은 자신의 존재를 숨기기 위해 우리들을 설득하려는 악마의 간교한 술책일 뿐이다.”

 

보들레르의 걸작을 꼽자면 자신이 선집한 [악의 꽃]이 있었고 [파리의 우울]이라는 산문시집도 추가되어야 한다. 이 두 선집에서 다루어진 중심 주제는 선과 악, 육체성과 정신성 사이의 투쟁이었다. 검열관이나 몇몇 보들레르 자신의 추종자들까지도 그의 의도를 파괴적이라고 잘못 읽은 것 같지만, [악의 꽃] 첫 장에서 “독자들에게”라는 유명한 인사말에 나타난 메시지는 분명해 보인다.

 

이 말들은 악을 거부한 것으로, 인간의 천성에 대해 비관적으로 진술한 것으로, 아니면 사회 속에서 홀로 자신 안에 있는 악을 인식하려는 꿈과 신념을 가지고 있는 시인이나 예술가의 입장에서 악을 받아들인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보들레르는 이 세가지 모두에 의미를 두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의 작품 속에는 개념적으로 역전된 사례들을 찾아볼 수 있다. 즉, 기독교의 신이 악하게 되고 사탄이 여러 상징의 중심이 되는 것이다. 그러한 상징은 예술, 시인, 인간, 미, 감상, 불의에 대한 혐오, 그리고 전제적인 아버지에 대항해서 앞에서 나열한 가치들을 옹호하는 예수까지도 포함된다. 누구든 냉혹한 여호와를 향할 때는 그의 적에 대한 대단한 동정심과 뒤섞여진 혐오감만을 느낄 수 있다. “울지 않고 떨고 있는 나의 몸에는 어떠한 근성도 존재하지 않는다. ‘친애하는 바알세불이여, 나는 당신을 찬미하노라!’”라고 시인은 외쳤다 이 구절들은 “사로잡힌 이들”이라는 시에서 나온 것인데, 이 시에는 미친 것 같기도 하고 영감을 받은 것 같기도 하며, 도덕적 가치가 모호한 악령에게 홀린 듯한 등장인물이 나온다. “미에 대한 찬송”이란 시도 모호하다. 아름다움은 신에게서도 사탄에게서도 나올 수 있다. 미 그 자체에 대해, 어디에서 나온 것이 최상의 이상적인 미인지는 시인에게 중요하지 않다. 이러한 아름다움이 좋은 일에 사용되기도 하고 동시에 나쁜 일에 쓰이기도 한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전적으로 애매모호한 우주에서는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보들레르의 “사탄의 연도”란 시는 그의 사탄주의를 나타내는 징표로 인형되곤 하였다. 이러한 견해는 이 시가 문학적인 전통에서 나온 것이고 다른 모든 보들레르의 시처럼, 반어적으로 여러 가지 차원에서 읽혀질 수 있다는 사실을 무시한 것이다. 보들레르가 찬양한 사탄은 어떤 면에서 보면 전통적이 기독교의 사탄과 같고, 또 어떤 면에서는 예수와 같고, 또 다른 면에서는, 모호한 인간의 마음과 같으며, 예술가 그리고 창조성이라는 끔찍한 양날의 칼과도 같다.

 

교회와 화해하고 죽은 보들레르는 [악의 꽃]을 위대한 조롱가 테오필 고티에에게 헌정하였다. 그는 자신을 괴롭혔던 악령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를 정확히 몰랐었지만, 그 악령이 자신을 내버려두지 않으리라는 것을 꺠달았다.

 

폴 베를렌은 보들레르의 [악의 꽃]을 14세 때 읽고는 보들레르의 가장 헌신적인 제자가 되어 퇴폐주의 운동의 지도자가 되었다. 베를린의 악이라는 문제에 대해 진지하게 고려하지도 않았지만, 보들레르의 악마적 상징주의를 모방했던 그룹의 이름을 “저주받은 시인들”이라고 지었다.

 

아르투르 랭보는 교회나 교육제도, 그리고 부모들을 포함하는 권위를 공격하며 젊은 시절을 보낸 후에 결국 가톨릭신자로 생을 마감했다. 젊음을 불사르고 예술가로서의 삶을 거부했던 랭보에게는, 악마란 단 하나의 진정한 선, 예술적인 자유를 억압하고 침해하는 흥미 없는 권위의 상징이었다. 그의 산문시 “지옥에서의 한 철”은 다음과 같은 말로 악마에게 헌정되었다. “사탄이여, 사실적이고 교훈적인 기능을 하지 않는 시를 좋아하는 당신이여, 당신을 위해 나는 저주받은 영혼의 노트로부터 이 얼마 안되지만 무시무시한 몇 장을 단숨에 써내려 가노라.” 겉치레와 자기도취, 그리고 절망에 빠진 이 시인은 자기자신을 신의 세력과 사탄의 세력, 죄와 무구함, 선과 악, 과거와 현재가 으르렁대는 전쟁터로 생각한다. 이 시인은 한때 강렬하게 이 싸움에 말려들었다가 다시 악마처럼 냉정하게 이 싸움에서 초연해진다. 위고와는 달리, 랭보는 한 인격 안에서 부딪히는 부분들을 통합하거나 초월하기보다는 그저 그것들을 받아들이고 선과 악이 미분화된 영혼의 전의식 상태로 되돌아가려고 한다.

 

퇴폐주의자들 가운데 가장 악마적인 인물은 로트레아몽이라는 필명을 가진 이시도르 뒤카스였다. 그는 피하려고 하지 말고 가장 강렬하고 충격적인 형태로 악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악을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악을 즐기라고 하였다. 사드의 추종자 로트레아몽은 창조적인 잔인성이야말로 천재성과 정직함의 징표라고 주장하였다. 보들레르가 위선을 경멸적으로 공격한 사실을 그는 일종의 구실, 즉 자기 영혼의 가장 혐오스러운 곳을 탐구해보려는 구실로 여겼다. 그의 암울한 걸작 [말도로르의 노래]에 나오는 등장인물 말도로르는 사드와 가탄, 그리고 자기자신을 뒤섞은 인물이다. 그는 끝없이 이어지는 삐뚤어진 분노를 기도하거나 실행한다.

 

로트레아몽이 미쳤는지 여부는 확실하지 않다. 분명히 그는 자기 마음속에 떠오르는 대로 다 행동으로 옮기지도 않았고, 그런 행동을 지지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사탄주의자인 척하면서 자기자신의 비밀스런 악을 조롱하기도 하는 이 아이로니컬한 댄디는 자신에 대한 환상에 도취되었고, 냉소적인 악과 진정한 악을 구별하기가 어려웠다. 말도로르는 공원 벤치에 앉아 있는 한 아이를 보고는 곧 바로 한 마리의 돼지가 그의 생식기를 갉아 먹으며 몸속으로 파고 들어가는 상상을 한다. 그는 어린 소년들을 고문하고 그들의 피와 눈물을 받아 마시는 꿈을 꾼다. 아이에게 입을 맞추면서, 그는 면도칼로 아이의 뺨을 긋는 공상을 한다. 그는 흡혈귀, 시간, 독신, 수간, 근친상간, 천연, 남색, 그리고 카니발리즘에 사로잡혀 있다.

 

[말도로르의 노레]에서, 시인은 온갖 위선에서 벗어난 인간 영혼의 진정한 모습을 그리려고 하였다. “말도로르는 악하게 태어났고 자신도 이런 사실을 인정하고 스스로 잔인하다고 말했다”. 인간의 본성은 원래 선하다고 하는 계몽주의적 낭만주의의 무미건조한 전제에 반발했던 로트레아몽은 선뜻 납득할 수 없는 또 다른 극단으로 치달았다. 인간은 선하다는 믿음이 악의 근원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듯이, 로트레아몽이 그리는 어두운 우주론도 선의 존재에 관한 설명의 여지를 남긴다. 어느 정도 로트레아몽은 말도로르를 악마적인 농담으로, 초현실주의나 다다이즘을 지향하는 태도로 생각했다. 말도로르의 지나친 행동은 너무 기괴해서 두려울 뿐만 아니라 터무니없어 보이는 것도 사실이지만, 작가는 자신이 의식적으로 통제할 수 없는 어두운 힘에까지 스스로를 드러내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말도로르는 처음에는 자신의 천재성 때문에 잔인함이 주는 즐거움을 나타낼 수 있다는 것을 자랑하지만 결국 자기를 구하러 온 천사를 죽이고 그렇게 해서 상징적으로 자신의 구원을 거부하면서 끝난다.

 

악마를 다룬 작품들과 악에 대한 진지한 연구를 분리하고, 그런 작품들을 기괴하거나 공포스러운 이야기 정도로 격하하는 경향은 미국이 유럽보다 훨씬 강했다. 인간의 악에 대한 탐구를 주요 관심사로 삼았던 나다니엘 호손이나 허만 멜빌도 악마를 상징으로도 자주 사용하지는 않았다. 호손이 진지하게 사탄을 다룬 작품은 [청년 굿맨 브라운]이 유일하다. 브러운이 절망에 빠지자 악마가 나타난다. 브라운은 “나의 신앙은 사라졌다”라고 말한다. “이 땅에 선은 없고 죄는 허울뿐이다. 자, 악마여, 당신에게 이 세상이 주어졌으니.” 사탄이 나타나서, 그를 그의 환상 속에 나타난 악마의 연회로 데려간다. 사탄은 칼뱅의 입장(호손은 이런 입장을 악마적이라고 본다)에서 인간의 본성은 본질적으로 타락한 것이라고 그를 설득한다. 호손이 보기에, 브라운은 인간에 대해 절망하고 신의 선함을 믿을 수 없기 때문에 파멸된 것이다. 멜빌의 [모비 딕]은 문학에서 가장 복합적인 상징적 비유를 가지고 있는 작품 가운데 하나인데, 그러한 상징 가운데 하나는 악마적인 것이다. 모비 딕은 인간의 몸과 영혼을 파괴하기로 작정된 존재이다. 마지막에 그가 퍼커드에 달려들어 그것을 없앴을 때, “받은 만큼 갚아주려는 마음과, 잠시도 참지 못하고 곧바로 보복하려는 마음, 그리고 식지 않는 악의를 가지고 그렇게 한 것이다.” 멜빌의 [사기꾼]에서 악마는 만우절 날에 항해를 시작한 미시시피 증기선, 피델르에 탑승한 대단한 협잡꾼으로 나온다. 이익을 위해서라면 서로를 속일 준비가 되어 있는, 천박하고 탐욕스런 망상에 눈이 먼 미치광이들이 탄 배이다. 결국 그 미치광이들은 협잡꾼, 영원한 사기꾼, 여러 가지 인물과 모습으로 나타나는 이에게 속아 넘어갔다. 그리스도가 보여준 사랑은 사탄이 조장하는 혼란과 냉소에 압도되어 의미를 잃는다는 이야기이다. 단적으로 악마가 운영하는 상점에 붙어 있는 글자 가운데 하나인 “아무것도 믿지 마라”라는 격언이 사탄에 의한 혼란과 냉소주의를 잘 나타내주고 있다. 멜빌의 비관적인 견해는 마크 트웨인이 더욱 더 계승하였고, 그와 마찬가지로 은밀한 악에 대한 호손의 깊이 있는 천착은 도스토예프스키에 의해 더욱 깊이있게 계승되었지만, 트웨인이나 도스토예프스키가 표출한 악에 대한 관점은 낭만주의 시대보다는 근대에 더욱 어울린다.

 

고딕 소설이나 흑소설을 미국식으로 번안한 공포물은 에드가 앨런 포의 작품에서 최초로 강렬하게 표출되었다. 고딕 작가들처럼, 포도 비록 악이 가지고 있는 힘을 잘 알고 있었지만, 그의 작품은 재미를 주고 공포감을 불러일으키려는 것이지, 진지하게 악을 탐구하려는 것은 아니었다. [지옥과 진자], [아몬틸라도 술통], 그리고 [무슈발레마 사건의 진실] 같은 작품에서 포가 진짜 악에 대해 썼을 때도 악마의 역할이 미미했다는 것은 악마라는 주제가 쇠퇴하고 있음을 암시해주는 것이다, 악마는 포의 희극 작품에만 나타난다. 예를 들어, [종루 속의 악마]라는 작품에서 악마는 네덜란드 교회의 종을 13번 치도록 한다. [네 머리를 걸고 악마와 내기를 하지 말라]라는 작품에서, 토비라고 하는 난봉꾼이 경솔하게 사탄과 내기를 하고, “존경할 만한 면모를 가진 왜소하고 늙고 다리를 저는 어떤 신사”가 토비가 머리를 잃게 되는 초자연적인 사건을 일으킨다. 의사들이 머리를 제대로 돌려놓지 못하자 자신의 머리가 없어진 것을 알고 토비는 죽는다. 민간전승에서 부정확하게 유래된 이런 종류의 기발한 이야기들이 미국 악마 이야기의 전형이다. 미국 작가들이 가장 좋아하는 주제는 노골적인 유머에서부터 풍자에 이르기까지 모든 기회를 제공해주는 악마와의 거래였다. 또한 이런 거래를 통해 갖가지 기발하고 새로운 방식으로 주인공은 악마를 이기기도 하고 그들에게 지기도 하였다.

 

19세기에 음악이 발전하면서 변화가 일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몇몇 작곡가들이 악마적인 것과 연관을 맺은 것이었다. 관념론자들이 볼 때, 어떤 음악은 다른 음악보다 유독이 우주와 본질적으로 조화를 이루는 것 같았다. 즉, 그러한 음악은 신이나 우주의 질서는 더욱 가깝게 반영한다. 이런 관점에서, 예를 들면, 바흐나 모차르트는 쇼팽이나 스트라빈스키보다 “더 진실하고”, “더 좋은” 곡을 쓴 것이다. 조화를 강조하는 작곡가들은 일부러 부조화를 끌어들여 음악적인 효과를 낸다. 때로는 들어내놓고 악 그 자체를 묘사하기도 한다. 그러나 조화를 추구하지 않는 음악은 좋지도 않고, 진지하지도 않으며, 현실적이지도 않고, 어쩌면 악마와 같은 것이기도 하다. 불협화음은 혼돈, 우주와 신의 질서정연한 계획의 와해를 반영한다.

 

하지만, 베토벤에서 시작해서(또는 모차르트의 후기 사중주에서도) 작곡가들은 주로 음악과 자신들의 감정이 더 자유롭게 흐르도록 일부러 불협화음을 차용했다. 낭만주의 시대의 작곡가들은 대부분 자신들의 음악이 인간의 모든 경험 – 이성뿐만 아니라 감성, 선은 물론이고 악까지도 – 을 포괄하기를 원했고, 이런 목적을 이루기 위해 불협화음을 사용했다. 파가니니나 “극악무도 왈츠”를 작곡한 프랑세즈 뵐디우와 같은 극소수의 사람들은 악마로부터 영감을 받았다고 주장하였다. 스트라빈스키 같은 근대 작곡가들은 관념론적인 견해를 불신하고 밀어내기 위해서 불협화음을 사용하였다. 그러나 어떤 종류의 음악이 다른 것보다는 더 좋다거나 더 현실적이라고 할 수 있는지는 아닌지는, 음악이 우주를 반영할 수 있다고 믿는지 그렇지 않은지, 그리고 궁극적으로 이 우주가 질서정연하거나 혹은 혼돈스럽다고 믿는지 그렇지 않은지에 달려있다.

 

문학에서의 상상력은 19세기 악마의 개념을 지배해왔지만, 19세기 중반에 가서는 문학과 예술에서 악마에 대한 관심은 시들해지기 시작하였다. 악마는 공포물이나 희극에서 지나치게 많이 이용되었다. 형이상학으로부터 방향을 바꾸면서 사실주의와 자연주의가 나타나게 되고, 점진적이지만 지속적으로 실증주의가 발전하면서 문학의 초점은 악에서 인간의 개성으로 회귀하였다. 여전히 상징을 일관성 없이 모호하게 사용하는 낭만주의적 경향으로 인해 그 의미는 모호해지고 분산되었다. 세속주의와 유물론이 서구 사회의 주도적인 세계관으로 서서히 대체되면서 개별적인 사탄에 대한 믿음은 공공연한 기독교도들 사이에서도 급격하게 줄어들었다. 동시에, 낭만주의의 문학에 등장하는 악마가 쇠퇴하면서 그러한 상징은 신학자들에게 되돌려졌다. 사탄이라는 존재가 결국 20세기에 약간의 권능을 다시 회복하게 되었을 때, 그 모습은 낭만주의적 양태가 아니라 전통적인 양태로 나타났다. 한편, 악에 대한 왕성한 논의는 니체, 트웨인, 그리고 누구보다도 도스트예프스키에 의해 이루어졌고, 이들은 당대 그 누구보다도 악을 잘 알고 있었고, 그들의 어두운 전망은 근대의 모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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