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음식 이야기 by 역사는 식탁에서 이루어진다

Realize 2022. 1. 13. 13:58

흥미로운 미식 뒷이야기

성경 음식 이야기

설득력 있는 언변으로 음식에 관해 금욕쥬의를 설파하는 타르튀프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어서는 안 된다. 광야에서 메뚜기를 즐겨 구워 먹었던 미식가 엘리아나 세례 요한 등 몇몇 선지자는 차치하더라도, 성경에 등장하는 대부분 주요 인물은 늘 그들이 초대된 연회나 잔치의 주인공이 된다. 좀 더 자세히 읽어보면 성경을 쓴 사람들이 얼마나 먹는 문제를 꼼꼼하게 다뤘는지 그 세심한 배려에 놀라게 된다. 하나님은 천지창조의 처음 며칠만 해도 아담과 동물들이 굶어 죽지 않게 하는 놀라운 선견지명('신의 섭리'의 현대적 단어)을 발휘하신다. 첫 번째 식사기도는 6일째 되는 날 조물주의 입을 통해 흘러나온다. "내가 온 대지 표면에서 씨를 맺는 모든 풀과, 씨를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이는 너희의 먹거리가 되리라."[창세기 1:29] 하나님은 인간이 채식주의자로 살아가기를 원했던 것은 아닐까 하고 반문하는 사람도 물론 있을 것이다. 세상의 평화와 행복을 보증하는 아담과 이브가 엄격한 에덴동산식 식생활만을 영위한다는 것은 아마도 꿈같은 이야기일 것이다.

이 같은 꿈은 그리 오래가지 않는다. 바로 이어지는 다음 세대부터 형제간 싸움으로 유혈이 낭자하고, 모든 인간관계에 폭력이 난무하게 된다. 하나님의 단호한 결단이 얼마나 필요한지 절감하게 되는 상황이다. 대홍수와 노아의 방주 사건 이후에는 '새로운 음식'의 필요성이 대두됐고 육식이 허용된다. "모든 산 동물은 너희의 먹을 것이 될지라. 채소와 같이 내가 이것을 다 너희에게 주노라."[창세기 9:3] 이 구절은 한마디로 플라젤렛 강낭콩을 곁들인 양고기 뒷다리 구이나 당근을 넣은 소고기 찜 등의 음식의 탄생을 의미한다. 이는 인간의 폭력성 분출을 억제하려는 위대한 식문화의 발전이라 할 수 있다. 특히 이후 노아 덕분에(구약성경에는 노아가 포도밭은 가꾸는 최초의 사람으로 기록돼 있다) 특별한 식사에는 와인을 곁들이게 됐다.

초창기부터 코트로 덮어 가렸으면 좋을 법한 외설스러운 취기의 장면들을 발견하게 된다. 하지만 생 채소로 맏는 샐러드를 전채 요리로 시작하고, 고기와 채소 가니시를 주 요리로 먹으며, 여기에 노아의 방주를 만들었을 상수리나무 오크통에서 숙성된 좋은 빈티지 와인을 곁들이는 식사 메뉴를 구성할 줄 알았다는 것은 얼마나 황홀한 일인가.

구약성경을 계속해서 읽어보면 하나님이 어떻게 매끼 식사에, 예상치 못한 깜짝 초대에 세심하게 관여했는지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아브라함이 마므레의 상수리나무 그늘 아래서 세 명의 방문자를 대접하는 장면(창세기 18장)을 보면 알 수 있다. 이들은 아브라함에게 뜻밖의 후손을 점지해주러 온 사람들이었다. 그날의 식사는 일상적인 주일 미사보다 더 큰 가치와 의미가 있었다. 엉긴 젖으로 만든 기름지고 맛있는 송아지 요리와 고운 가루로 빚어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오븐의 조상격인 뜨거운 돌에 구운 떡은 후세에 세례식이나 첫 성찬식에 등장할 모든 음식을 미리 보여준다. 아울러 결코 우연이라고 할 수 없는 '이삭'이라는 이름으로 불릴 후손의 탄생을 예고한다. 이삭은 "하나님이 웃었다.", 혹은 "하나님이 나를 웃게 했다."라는 뜻이다.

이처럼 하나님, 천사들과 함께 먹고, 마시고, 웃는 종교는 얼마나 행복한 종교인가.

성찬의 순서마다 애굽의 노예 해방 역사와 기억이 녹아 있고,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찬양(압제자의 손에서 우리를 해방시킨 하나님, 시편 135)이 테이블에 둘러앉은 이들의 눈에서 눈으로 이어지며, 맛있는 음식이 코스로 나오는 부활절 축일 식사보다 더 즐겁고 신나는 것이 또 있을까? "이 모든 것을 너는 네 아들, 또 그 아들의 아들에게 가르칠 것이라." 유태교 신앙에 따르면 인류 역사의 리듬을 따르는 것이 바로 식사이며, 민족의 역사는 배를 주린 상태로 기념하거나 축하할 수 없는 것이다.

신약 복음서 역시 요리와 연회에 대한 풍부한 묘사로 가득하다. 그런 대목을 읽다 보면, 위궤양을 앓는 병자가 예수에 대해 늘어놓는 불평 따위는 잊게 된다.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누가복음 15:2]

예수를 비판하던 자들은 이 반-순응주의 종교적 스승이 나쁜 짓을 한 죄인들을 가까이하는 이유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하물며 그들과 함께 식사까지 하다니! 우리의 혀와 위를 창조한 조물주가 하나님이라는 사실과 "무엇이든지 밖에서 사람에게로 들어가는 것은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한다."[마가복음 7:15]는 구절을 잊은 사람에게는 참을 수 없는 죄요, 수치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가르침은 모든 식생활 프로그램의 가장 근본적이고도 획기적인 출발점이 됐다. 물론 패스트푸드 위주의 나쁜 식습관이 음식 맛을 제대로 즐기는 삶을 해칠 위험이 있기는 해도 고미요 가이드가 추천하는 식당들은 예수의 이런 종교적 가르침을 실생활에 적용하려고 노력하는 곳이다.

예수는 자신의 그토록 사랑하던 이들을 떠날 때, 각자에게 베푼 이해할 수 없을 만큼 커다란 사랑을 표현할 방법으로 식사 의식보다 더 좋은 것을 찾기 어려웠을 것이다. 물론 그는 이런 식사 메뉴를 구운 양고기 살과 향신 허브 향처럼 맛있는 것으로 특정하지는 않았다. 그는 단순히 빵을 선택하고 "모두 이것을 먹으라."고 했다. 그렇게 빵은 호메로스 이래 자신을 "빵 먹는 사람"이라고 부른 지중해 사람들의 가장 기본적이고도 '민주적인' 음식이었다.

그는 또한 포도주를 들고 "모두 이것을 마시라."고 했다. 이것은 명백히 연회의 상징이며, 귀족적 잔치든 생사가 걸린 운명의 성찬식이든 참여자가 마시는 음료다. 이런 의식을 거행한 다음날 예수는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다.

영국 작가 G.K 체스터턴은 "예수에게 포도주는 약이 아닌 성례였다."라고 기록했다. 여기에는 간단치 않은 딜레마가 있다. 요리는 과연 생존을 위한 약일까? 아니면 신성한 기쁨이요 살아가기 위한 즐거움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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