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alize

남의 의지에 맡기지 말거라.

달빛정화 2020. 12. 27. 23:27

 

 

소년의 의식은 괴물을 담은 시야에서 떠나 마음 깊은 곳에서 다른 광경을 보고 있었다.

 

번뜩인 섬광에 이끌린 것처럼, 밑바닥 깊은 곳에 존재하는 벼락을 자신의 손으로 움켜쥐고 들고 올리듯.

 

어린 시절의 기억을 덮은 낡은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남의 의지에 맡기지 말거라."

 

할아버지의 목소리가 말했다.

 

"정령이 됐든 신이 됐든 마찬가지란다. 하물며 나는 아무 말도 안할거다."

 

할아버지의 목소리가 고했다.

 

"누군가가 시켜서가 아니라, 스스로 결정하거라."

 

할아버지의 눈빛이 호소했다.

 

"이건 너의 이야기란다."

 

할아버지의 웃음은 아주 오래 전부터 그렇게 가르쳐주었다.

 

 

- 던전에서 만남을 추구하면 안되는 걸까 11권 p395 -

 

 

 

 

"전부 망해버렸잖아......!"

 

그가 손을 썼던 계획은 단 한 마리의 '괴물'에게 산산이 박살이 났다.

 

이제까지 맛본 적이 없는 실의에 잠겼던 헤르메스는 이를 악물고 진심으로 가증스럽다는 표정으로 칠흑의 미노타우로스를 노려보았다.

 

-그와 동시에, 환희가 뒤섞인 표정으로 눈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아아 젠장, 그래 좋다, 인정하마!! 내가 졌다! 이딴 광경을 어떻게 상상할 수 있었겠어!!"

 

고함과 포효, 성원과 기도. 격렬하게 싸우는 소년과 괴물에게 사람들은 도망치는 것조차 잊고 진짜 투쟁에 끌려 들어가고 있었다. 적의와 실의는 완전히 뒤집어져 열광만이 소용돌이쳤다.

 

설령 헤르메스의 의도가 계획대로 돌아갔다 하더라도 이렇게는 되지 않았을 것이다. 신의 손바닥 위에서는 이렇게까지 사람들의 마음을 얻어낼 수 없었으리라. 당연하다. 가고일과의 싸움 속에서도 소년은 여전히 괴로워했고, 항상 저항했으니까.

 

이 '모험'을 능가하는 광경 따위 전지전능한 신이라 해도 만들어낼 수 없었을 테니까.

 

"그런거요? 그런 말을 하려는 거요, 제우스?! 당신은 이걸 깨닫고 오라리오를 떠났던거요?!"

 

등 뒤에서 흠칫 숨을 멈추는 권속과 함께 헤므레스는 어둠을 씼어내는 번갯불과도 같은 그 광경에 넋을 놓았다.

 

"신의에 저항하는 자야말로 이렇게나 찬란하게 빛난다는걸!"

 

-세계는 '영웅'을 원한다.

 

고대의 암흑을 갈랐던 칼날을, 비원을 초월할 빛을, 지독히도 고결한 생명의 포효를.

 

신들에게 놀아나는 꼭두각시가 아니라, 수천 년이나 되는 정체를 깨뜨릴 하계의 '가능성'을.

 

순수한 의지로 자아내는 "파밀리아 미스"를.

 

"결국...... 저 시커먼 짐승은 실을 드리운 자를 태워버리고 길을 제시하는 '극성'이었던 셈이군."

 

나원, 이래서나 내가 피에로지.

 

헤르메스는 자신의 신의를 능가하는 '미지'의 광경에 분함을 느끼면서도 몸을 떨었다.

 

"현자의 지혜도, 용사의 책략도, 그리고 신의 의도마저도 깨부순 것은...... 순수한 '힘'이었구나."

 

굴욕을 삼키며.

 

헤르메스는 눈을 가늘게 떴다.

 

"아아, 이 얼마나 아름다운 '살육애'인가......"

 

사람들의 마음을 움켜쥐고 놓아주지 않는 소년과 괴물의 투쟁에- 영웅담의 일막에 신은 경의를 표했다.

 

 

- 던전에서 만남을 추구하면 안되는걸까 11권 p434 -

 

 

 

"하계도 영 쓸모가 없는건 아니야."

 

세상의 어떤 이가 말했다.

 

이 하계에서 펼쳐지는 온갖 이야기는 어디까지나 아이들의 드라마지만, 그 배후에는 신들이 엄연히 존재한다. 그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머리 위에서 실을 드리우더라도, 무대 뒤에서 속삭이더라도, 희곡의 시나리오가 바뀌더라도 말을 듣지 않는 '고집쟁이'들이 있다.

 

그들은 종종 무대 위에서 날뛰고, 직시할 수 없을 만한 실수를 저질러 만인의 실소를 사기도 하지만, 때로는 예정조화를 뒤집는다.

 

흔해빠진 가극을 아무도 본 적이 없는 경치로 바꾼다.

 

"우리와 세계를 놀라게 하는건 언제나 너희, 아이들이었지."

 

세상의 어떤 이는 흐뭇하게 웃었다.

 

 

- 던전에서 만남을 추구하면 안되는걸까 11권 p43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