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alize

헤스티아 : 신성한 불꽃을 지키는 부뚜막의 여신 by 유재원의 그리스신화

달빛정화 2025. 5. 13. 23:00

 

유재원의 그리스신화1 p114

약간 과장된 부분도 있지만 대체적으로 좋네용☆

 

 

 

 

헤스티아 : 신성한 불꽃을 지키는 부뚜막의 여신

 

제우스의 누이들

 

올림포스에는 여신이 여섯 명 있었다.이들 중 헤스티아와 헤라, 데메테르는 크로노스와 레아 사이에 태어난 제우스의 누이들이다. 제우스의 딸인 아테네와 아르테미스가 젊음과 활달한 건강미를 자랑하고, 바다 거품에서 태어난 아프로디테가 관능미를 가지고 있다면, 제우스의 누이들은 원숙한 여인의 안정감과 중후함을 느끼게 한다. 어딘가 엄격하고 위엄 있는 어머니 같은 여신들이다. 나이에 따라 알맞은 직분과 성격을 부여한 그리스인들의 지혜와 재주가 새삼 놀랍다.

 

제우스의 누이들인 이 세 여신은 메소포타미아나 이집트 신화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그리스 고유의 신격과 직분을 갖고 있다. 이들에 대한 신앙은 올림포스 신앙이 생기기 훨씬 이전 시대에 이미 시작되었다. 아테나와 아폴론, 그리고 아르테미스가 비교적 후대에 생겨난 올림포스 신앙에 어울리는 전형적인 그리스적 신들이라면, 이들은 올림포스 시대 훨씬 이전에 존재했던 그리스 토착신앙에서 유래한 신들이다. 따라서 이들에 대한 신화에는 올림포스 신앙보다 훨씬 오래된 토착신앙의 특성이 곳곳에 드러난다. 그래서인지 제우스도 이들에게는 명령하거나 함부로 하대하지 못하고 항상 정중하고 부드럽게 대한다.

 

 

부뚜막의 신, 헤스티아

 

그리스 말로 헤스티아는 화덕을 나타내는데, 이 낱말의 의미는 수천 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변함이 없다. 현대 그리스어에서도 화덕은 아직도 에스티아라고 불린다. 낱말 첫머리의 흐읗(ㅎ)이 탈락했을 뿐이다. 그리스어의 보수성을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헤스티아는 말 그대로 '부뚜막의 신'이다. 이 여신은 화덕이 집안 한가운데 부동의 자리를 지키는 것과 마찬가지로 항상 올림포스에 조용히 머물 뿐이다. 따라서 이 여신에게는 이렇다 할 신화가 없다. 다른 신들처럼 특별한 모험담이나 사연이 없다. 전쟁이나 싸움에 끼어들지도 않는다. 대부분의 신들이 편을 갈라 트로이아 전쟁에 참가했을 때도 헤스티아는 변함없이 올림포스에 남아 있었다. 호메로스의 서사시에는 이 여신에 대한 언급이 없다. 아마도 호전적인 성향의 호메로스에게 가정을 지키는 조용한 이 여신은 매력이 없었는지도 모른다. 헤시오도스에 이르러 비로소 헤스티아는 크로노스와 레아의 맏딸로 등장한다. 올림포스에서 이 여신의 위치는 확고부동하다. 순수한 불꽃의 여신답게 그녀는 처녀신이다. 이 여신은 제우스로부터 순결을 지킬 권리와 인간이 올리는 제물의 첫 번째 몫을 받을 권리를 인정받았다. 그녀는 가장 온화하고 인자한 신이다. 누구든 그녀의 성소로 피신하면 보호를 받았다.

 

어원적으로 헤스티아는 라틴어의 베스타와 통한다. 그러나 동일한 신격에 대한 두 민족의 신앙에는 차이가 있다. 그리스에서는 헤스티아에 대해 국가적인 제사를 지내지 않았다. 그녀는 어디까지나 안정된 가정생활을 수호하는 신이었다. 그러나 로마의 베스타 여신은 국가적으로 가장 중요한 신으로 간주되었다. 나라에 전쟁과 같은 큰일이 있을 때면 로마인들은 이 여신에게 큰 제사를 지내고 국가적 길흉을 점쳤다. 로마에는 베스타 여신이 성화를 지키는 여섯 명의 여사제가 있었다. 이들은 다섯 살에서 열 살 사이에 선발되어 30년 동안 봉사했다. 이들은 순결을 지켜야 했다. 30년의 봉사기간이 끝난 뒤에는 결혼이 허용되었으나 대부분은 그대로 순결을 지켰다. 그들은 결혼이 별로 행복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헤스티아는 부뚜막을 지키는, 좀 더 정확히는 아궁이의 신성한 불꽃을 수호하는 여신이다. 아득한 옛날 인류가 아직 수렵으로 살아갈 때에, 불씨는 매우 귀한 것이었다. 그 시절에는 불을 일으키는 것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바로 불씨를 꺼뜨리지 않고 지키는 일이었다. 어디를 가든 인간은 보금자리를 마련할 때에 맨 먼저 불을 피우고 화덕을 만들었다. 나머지 생활공간의 배치는 화덕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게 마련이었다. 음식을 만들고 불을 쪼이며 추위를 쫓는 곳이 바로 화덕이었다. 화덕은 안정된 가정생활의 상징이었다. 해가 지면 모닥불에 둘러앉아서 후손들에게 생활의 지혜와 전통을 전해주었다. 인류의 문화 창달도 화덕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헤스티아가 아니었다면 안정된 가정생활도 문화의 창조도 없었을 것이다.

 

불씨를 일으키는 것이 힘들던 시절, 불은 신성한 것이었다. 특히 씨족장이나 부족장의 화덕은 그 집단의 운명을 결정하는 상징적인 의미까지 가지고 있었다. 그 시절, 불은 곧 생명이자 신성한 것이었다. 불씨를 꺼뜨린다는 것은 큰 재앙을 의미하는 것이요 생명을 잃는 것이었다. 아궁이의 불꽃을 지키는 헤스티아야말로 지극히 숭고한 신이었다. 부족이 이동할 때, 가장 소중히 다루어야 하는 것은 불씨였다. 부족의 일부가 다른 지방으로 가서 새로운 식민지를 만들 때, 불씨를 얻어 가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신성한 불씨 없이는 공동체가 성립할 수 없었다.

 

신성한 불에 대한 숭배는 어느 민족에게서나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오늘날에도 신성한 불에 대한 제전은 남아 있다. 현대 올림픽 경기도 올림피아의 헤라 신전 앞에 마련된 성스러운 제단에서 오목경으로 태양빛을 모아 신성한 불씨를 얻는 의식으로 시작된다. 이 성스러운 불씨는 여러 사람들에 의해 올림픽이 열리는 장소까지 봉송된다. 지구 반 바퀴를 도는 일이 있어도, 어떤 악천후에도 성화를 꺼뜨려서는 안 된다. 조그만 불씨 하나를 가져오기 위하여 많은 사람들이 정성을 다하여 달린다. 인류 모두가 신성한 불의 의미를 알고 있다. 성화고 봉송된느 동안 인류는 축제를 맛본다. 조그만 불씨 하나로 인류가 하나가 된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불의 제전인가? 헤스티아는 인자한 미소를 머금고 성화를 바라본다.

 

동방 정교회의 부활절 예배는 장엄하고도 감동적이다. 부활절날 밤, 지난해의 묵은 불은 모두 꺼진다. 예수가 부활하는 순간에 새로운 불이 점화된다. 신성한 새 생명의 불꽃은 촛불에서 촛불로 이어져 온 교회를 빛으로 가득 채운다. 지난 삶은 죽어 버리고 새 생명이 불타오른다. 교인들은 이 신성한 불씨를 고이 지켜 집으로 가져가서는 성화 앞의 등잔에 붙인다. 이 순간 사람들은 숭고한 불의 의미를 깨닫는다. 부활절 예배는 찬란하고 감동 깊은 촛불의 축제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아궁이의 신인 조왕신을 널리 숭배했다. 조왕신은 부뚜막에 살면서 가족들의 건강과 행복을 빌어 주고 조상에게 소식을 전해 주었다. 저승사자도 조왕신의 허락이 있어야 죽은 사람을 저승으로 데려갈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염라대왕 앞에서 죽은 사람을 위해 변명해 주고 조상들께 선처를 호소하는 것도 조왕신의 직분이었다. 헤스티아와 너무도 비슷하다. 시대와 장소는 달라도 아궁이 신이 하는 직분은 언제나 가정의 화목함과 안녕을 지키는 것인 모양이다.

 

헤스티아 신앙은 부족사회에 뿌리를 둔 도시국가 시대에는 그리스에서 매우 중요한 신앙이었다. 그러나 제정 로마 시대에 들어 도시국가체제가 붕괴되고 이른바 사해 동포주의, 즉 코스모폴리타니즘이 성행하자 가정과 부족 공동체의 수호신인 헤스티아가 설 자리가 사라졌다. 그로부터 헤스티아는 사람들 사이에서 점점 잊혀졌다. 아궁이의 불꽃은 여전히 타오르고 있었지마 가정이나 지역사회의 안정과 결속에 대한 관심은 사라져 갔다. 행복한 가정생활도 지역사회의 공동 운명체 의식도 사라지자 사람들은 불안을 느끼기 시작했다. 새로운 공동체 모임이 필요해졌고, 사람들은 이를 제공하는 종교로 모여들게 되었다. 강력한 윤리와 공동체 의식을 강조하는 종교인 그리스도교가 헤스티아를 대신하여 안정된 가정과 사회를 약속했다. 헤스티아는 다시는 가정으로 돌아올 수 없는 운명에 처했다.

 

그러나 산업사회에 들어와서까지도 화덕은 가정생활의 중심이었다. 과학이 게속 발전하여 전기가 발명되고 중앙 난방시설이 집 안으로 들어온 뒤로, 화덕은 의미를 잃게 되었다. 부엌은 더 이상 신성한 곳이 아니다. 헤스티아를 잃은 가정은 중심을 잃었다. 신주를 모시던 집 안의 중심 자리는 이제 텔레비전이 차지해 버렸다. 텔레비전은 바깥세상의 온갖 잡다한 소식을 집 안으로 끌어들이니 집 안이 편안할 리 없다. 때로는 채널 결정권을 가지고 아내와 남편이, 부모와 자식이 서로 다툰다. 헤스티아가 기억에서 사라지자 화목한 가정도 잊혀졌다. 헤스티아가 떠나 버린 가정에는 중심도 화목함도 사라져 버렸다. 공동체의 중심이었던 화덕의 의미가 사라진 뒤에는 공동체 의식도 사라져 갔다. 헤스티아가 기억에서 사라지자 가정이 붕괴되고 사회가 와해되기 시작했다. 세계화가 진척되면서, 인터넷이 널리 보급되면서 더 이상 헤스티아가 머물 곳은 없다. 그러나 물질문명이 아무리 발전해도 우리에게는 헤스티아가 필요하다. 때로 텔레비전을 끄고 촛불 앞에 온 식구가 모여 앉아 이야기꽃을 피워 볼 수 없는 것일까? 우리는 여전히 헤스티아가 필요하다.

 

헤스티아의 불은 대장장이 신 헤파이스토스의 불과 전혀 다르다. 헤파이스토스의 불은 생산과 기술의 진보를 추구하는 불이기에 끝내 아름다운 버섯구름을 가진 끔찍한 핵폭탄에 이르게 될 운명이었다. 그러나 헤스티아의 불은 아궁이에서 평화롭게 타오른 불이다. 우리가 음식을 만들도 몸을 녹이는 불이다. 연인이나 금실 좋은 부부가 식탁 위에 켜 놓은 사랑의 촛불이다. 프로메테우스가 자신을 희생하면서까지 제우스로부터 우리에게 가져다준 불은 쓰기에 따라 유익할 수도 파멸을 불러올 수도 있다. 이 시대에 진정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헤파이스토스가 아니라 헤스티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