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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 히브리어 올람 - 그 시간과 공간

달빛정화 2023. 5. 29. 23:32

 

 

성서 히브리어 올람 - 그 시간과 공간

 

이환진

 

들어가는 말

 

성서 히브리어 “올람”(םלוע)에서 공간개념을 찾아내려는 것이 본 글의 목적이다. 특별히 성경이 죽음을 말하거나 죽은 이가 아래 세상으로 내려간다고 말하는 문맥에서 올람은 “저 세상” 또는 “아래세상”이라는 공간을 가리킨다는 점을 밝히려 한다. 곧 시간개념이 공간개념을 나타내는 현상을 찾아보고자 한다.

시간개념인 올람을 이렇게 공간개념으로 읽을 수 있는 이유는 다음의 다섯 가지이다. (1) 올람을 시간개념으로만 읽을 때 성경 곳곳에서 이해가 되지 않는 구절이 발견된다는 점이다(렘 20:17, 51:39, 57, 시 24:7, 9, 143:3, 애 3:6, 겔 26:20, 전 12:5, 욥 22:15, 잠 10:25, 합 3:6 등). (2) 북서방 셈어 무덤 새김글에서 같은 뿌리말(םלע)이 공간개념인 “무덤”이란 뜻으로 쓰이기 때문이다(KAI 1:1, 214:1). (3) 최근에 앨런 쿠퍼나 헐버트 니어같은 학자들이 올람의 공간개념을 말하기 시작했다. Alan Cooper, “Ps 24:7-10: Mythology and Exegesis.” JBL 102 (1983): 37-60;, “MLK ‘LM: Eternal King' or ‘King of Eternity’." Love and Death in the Ancient Near East: Essays in Honor of Marvin H. Pope (ed. John H. Marks and Robert M. Good; Guilford, Conn.: Four Quarters, 1987)의 1-7쪽; Herbert Niehr, “Über Semantik von nordwestsemitisch ‘lm als ‘Unterwelt’ und ‘Grab’.” Ana šadî Labnãni lû allik: Beiträge zu altorientalischen und mittelmeerischen Kulturen. Festschrift für Wolfgang Röllig (ed. B. Pongratz-Leisten et al.; AOAT 247; Neukirchen-Vluyn: Neukirchener, 1997)의 295-305쪽.

(4) 또한 성서이후 히브리어에서 올람이 “세상, 세계”라는 공간개념으로 사용된다(1QHa xi 18, xiv 31; 미슈나 아보트 1:2 등). 그리고 (5) 성서 히브리어에서 시간과 공간개념을 공유하는 낱말들이 여럿 있다는 사실이다(תירחא, רוד, םדק, תישאר, קוחר 등).

 

1. 시간을 가리키는 올람

 

히브리성서 속에서 올람은 대부분 시간을 나타낸다. Ernst Jenni, Das Wort ‘ōlām im Alten Testament (Berlin: Verlag Alfred Töpelmann, 1953). 같은 저자, “םלוע ‘ōlām Ewigkeit." Theologisches Handwörterbuch zum Alten Testament (Hrgb. E. Jenni und Claus Westermann, 2 Bd. München: Chr. Kaiser Verlag, 1984)의 228-42쪽. H. D. Preuss, “םלוע ‘ôlām םלע ‘ālam.” Theologisches Wörterbuch zum Alten Testament (Hrgb. Johannes Botterweck, Helmer Ringgren und Heinz-Josef Fabry, 6 Bd. Stuttgart: Verlag W. Kohlhammer, 1978)의 1144-1159쪽.

“올람”은 흔히 태곳적 먼 과거 또는 먼 미래인 영원을 가리킨다. 그리고 영원이라는 개념에서 발전하여 계속되는 현재를 가리키기도 한다. 신 15:17, 삼상 27:12, 욥 40:28에 나오는 “영원한 종”(םלוע דבע)은 그 대표적인 예이다(BDB s.v. םלוע 2a). 우가릿의 『케렛』(KTU 1.14 ii 2, iii 23, 35-36, vi 20)에 등장하는 “영원한 종”(‘bd ‘lm)을 참조하라.

특별히 방향을 나타내는 전치사들과 함께 또는 홀로 쓰여 시간개념을 나타내기도 한다. “영원부터 영원까지”라는 뜻의 םלוע(ה) דע(ו) םלוע(ה)מ (ןמ)이라는 구문(시 90:2 등)은 그 대표적인 표현이라 할 수 있다(BDB םלוע 항목의 2m).

여호수아의 고별사(수 24장)나 요나의 기도(욘 2장)에서 우리는 이러한 올람의 시간적 쓰임을 잘 발견할 수 있다. 이하의 성서본문은 특별히 명시하지 않는 한, 『표준새번역 개정판』에서 인용함.

 

 

옛날에(םלועמ)

아브라함과 나홀의 아비 데라를 비롯한 너희 조상들은

유프라테스 강 건너에 살면서 다른 신들을 섬겼다(수 24:2).

 

나는 땅 속 멧부리까지 내려갔습니다.

땅이 빗장을 질러

나를 영영(םלועל) 가두어 놓으려 했습니다만

주 나의 하나님,

주님께서 그 구덩이 속에서 내 생명을 건져 주셨습니다(욘 2:6).

 

산들이 생기기 전에

땅과 세상이 생기기 전에

영원부터 영원까지(םלוע דע םלועמ)

주님은 하나님이십니다(시 90:2).

 

내가 영원히(םלוע)

주님의 사랑을 노래하렵니다.....

주님의 사랑은 영원토록(םלוע)

굳게 서 있을 것이요,

주님께서는

주님의 신실하심을 하늘에

견고하게 세워 두실 것입니다(시 89:1-2).

 

이렇게 올람은 홀로 또는 방향을 나타내는 여러 전치사(ל, ןמ, דע)와 함께 등장하여 먼 옛날이나 먼 미래를 나타낸다. 이러한 시간적 쓰임은 올람이 다른 낱말을 꾸미는 구문형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창 21:33의 “영원한 하나님”(םלוע לא), 창 9:16의 “영원한 계약”(םלוע תירב), 단 12:2의 “영원한 생명”(םלוע ייח) 등이 그 예이다. 또한 복수형이 꾸밈씨 역할을 하기도 한다. 사 45:17의 “영원한 구원”(םימלוע תעושׁת)이나 시 145:13의 “영원한 왕권”(םימלוע לכ תוכלמ)이 그 예이다.

 

 

2. 무엇이 문제인가?

 

그런데 이러한 올람의 시간 개념이 성서의 몇 군데에서는 잘 이해가 되지 않는 경우가 있다. 우선 예레미야 20:17-18을 읽어보자.

 

내가 모태에서 죽어

어머니가 나의 무덤이 되었어야 했는데

내가 영원히 모태 속에 있었어야 했는데.

어찌하여 이 몸이 모태에서 나와서

이처럼 고난을 고통을 겪고

나의 생애를 마치는 날까지

이러한 수모를 받는가!

 

여기서 “내가 영원히 모태 속에 있었어야 했는데”라고 『표준새번역 개정판』이 옮긴 부분을 칠십인역과 페쉬타역을 포함한 고대역본들과 현대역본들은 모두 “그의 자궁이 영원히 임신했어야 했는데”라고 읽었다. BFC, GNB, NRSV, REB, TOB, ZB 등. 최근에 나온 영어성경 CEV는 이 구절을 생략하였다.

그런데 자궁이 영원히 임신한다는 말이 무슨 말인가? 개역 개정판은 이 어려움을 피하기 위해서 “그의 배가 부른 채로 항상 있지 않게 하신 까닭이로다”라고 풀어서 옮겼다. 히브리어 구문 하라트 올람(םלוע תרה)은 구문형으로, 억지로 옮기자면 “영원한 임신”이란 뜻인데, 이것이 말이 되지 않으므로 주석들은 이 부분을 설명하지 않은 채 침묵을 지키고 있다. John Bright, Jeremiah (AB 21; Garden City, N.Y.; Doubleday, 1965), 134; R. P. Carroll, Jeremiah (OTL; Philadelphia: Westminster, 1986), 402.

룬드봄은 이 표현 때문에 당혹스럽다고 말하기도 한다. J. R. Lundbom, Jeremiah 1-20 (AB 21A; New York: Doubleday, 1999), 874.

 

이번에는 욥기 22장을 읽어보기로 하자. 여기서 데만 사람 엘리바스는, 잘못을 했기 때문에 욥이 그렇게 만신창이가 되지 않았느냐고 말한다. 곧 남편 없는 이들과 부모 없는 어린이들을 혹사시키고 학대했기 때문이 아니겠느냐고 말한다. 또 하느님은 숨어 계시기에 내가 하는 일을 볼 수도 없는 이라고, 그렇게 하느님을 우습게 여겼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엘리바스는 욥에게 말한다(욥 22:15).

 

너는 아직도 옛 길을 고집할 셈이냐?

악한 자들이 걷던 그 길을 고집할 셈이냐?

그들은 때가 되기도 전에

사로잡혀 갔고,

그 기초가 무너져서

강물에 떠내려가 버렸다.

 

여기서 “옛 길을 고집할 셈이냐?”는 『표준새번역 개정판』의 번역은 “네가 옛 길을 지킬 셈이냐?”라고도 옮길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옛 길”(םלוע חרא)이란 어떤 길을 가리키는가? 엘리바스는 나쁜 짓만 일삼는 이들이 걸었던 길을 “옛 길”이라고 부르고 있는가? 그렇다면 좋은 일 많이 하는 사람들은 “옛 길”을 걷지 않았단 말인가? 예레미야는 정말 좋은 사람들이 걸은 길을 “옛 길”(םלוע תובתנ)이라고 말한다(렘 6:16). E. Dhorme, A Commentary on the Book of Job (trans. Harold Knight; London: Thomas Nelson, 1967), 332-33도 마찬가지의 제안을 한다. N. C. Habel, The Book of Job (OTL; Philadelphia: Westminster, 1985), 333 참조.

키텔의 히브리성경 비평본(BHK)과 투르-사이나이는 이러한 문제점을 알아차리고 히브리말 올람의 자음은 그대로 놔둔 채 모음 부호만을 덧붙여 “아빌림”(ם(י)ל(י)וע)이라고 읽을 것을 제안한다. N. H. Tur-Sinai, The Book of Job (2d ed.; Jerusalem: Kiryath Sepher, 1967), 342.

또한 영국에서 나온 번역본인 『새영어성경』(NEB)과 『개정영어성경』(REB)은 이러한 제안을 따라서 “악한 자들의 길”이라고 읽었다. “the course of the wicked man”(NEB), “the course of the wicked”(REB).

미국에서 나온 『현대영어역』(TEV)과 프랑스에서 나온 『쉬운 불어 성경』(BFC) 그리고 독일에서 나온 『복음성경』(GNB)은 올람이란 단어를 아예 생략해 버렸다. 물론 이들 현대 역본들의 공통점은 내용의 동등성을 그 번역원칙으로 삼고 번역한 역본들이라서 이해되는 점도 없지는 않으나, 다른 한편으로 생각하면 “옛 길”이라는 표현이 문제점을 많이 내포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리라.

이번에는 잠언 10장을 읽어보자(10:25).

 

회오리바람이 지나가면

악인은 없어져도

의인은

영원한 기초처럼 꼼짝하지 않는다.

 

회오리바람이 “휙!”하고 지나가면 악인은 없어진다고 했다. 곧 악인의 죽음을 의미한다. 그런데 여기에 반하여 의인은 꼼짝하지 않는데, 마치 영원한 기초처럼 그런다고 말한다. 이는 『표준새번역 개정판』의 이해이다. 『개역 개정판』도 이와 별반 다르지 않다. “의인은 영원한 기초같으니라”고 옮기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히브리성경에는 그렇게 무엇과 “같다”는 말이 들어있지 않다. “회오리바람이 지나가면, 악인은 없다. 그러나 의인은 영원한 토대이다”라고 옮길 수 있는 구절이다. 『신유다출판사역』(NJPS)을 위시한 모든 유럽언어 역본들도 별반 다르지 않게, 이와 비슷하게 이 구절을 옮겼다. 그런데 영원한 토대라니 무엇의 토대란 말인가? 이렇게 “영원한 토대”(םלוע דוסי)라고 올람을 “영원한”으로 읽으면 말이 이상하기 때문에 우리말 번역성경들은 무엇과 “같다”는 말을 집어넣어 옮긴 것으로 짐작된다. 그런데 이렇게 고쳐서 읽어야만 할까? 이는 올람의 시간개념에만 너무 얽매이기 때문에 오는 현상은 아닌가?

위의 세 표현 외에도 시간 개념으로만 읽으면 어색한 표현이 여럿 있다. 에스겔 26장의 암 올람(םלוע םע), 시편 143편과 애가 3장의 므테이 올람(םלוע יתמ), 코헬렛 12장의 베이트 올람(*םלוע תיב), 예레미야 51장의 슈나트 올람(םלוע תנשׁ), 예레미야 10장의 멜렉 올람(םלוע ךלמ), 시편 24편의 피트헤이 올람(םלוע יחתפ), 하바국 3장의 할리콧 올람(םלוע תוכילה) 등이다. 모두 올람과 결합되어 있는 구문형으로, 올람을 시간개념으로만 읽을 때 문제가 되는 구절이다.

 

3. 공간을 가리키는 올람

 

올람은 성경에서 압도적으로 시간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지만, 문맥상 죽음을 말하고 있는 곳이나, 저 세상으로 내려가는 모습을 그리고 있는 곳에서는 반드시 시간개념으로만 읽을 수는 없다. 다시 말해서 메소포타미아인들의 땅과 하늘이라는 모형적 세계관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성경 속에서 올람은 시간과 공간을 모두 아우르는 낱말이다.

먼저 올람의 공간개념을 말할 때 우리는 다음의 몇 가지를 그 근거로 이야기 할 수 있다. (1) 북서방 셈어 무덤 새김글(KAI 1:1, 214:1)에서 근친어인 *알람(םלע)이 “무덤”이란 뜻으로 쓰이고 있는 점, (2) 올람 뿐만 아니라 근친어인 우가릿어 알라무(‘-l-m)와 북서방 셈어 알람 의 공간개념을 최근에 앨런 쿠퍼와 헐버트 니어와 같은 학자들이 논하고 있는 점, (3) 성서 이후 히브리어문헌에서 올람이 “세상”이라는 공간개념으로 쓰이고 있는 점(1QHa xi 18, xiv 31, 미슈나 아보트 1:3 등), 그리고 (4) 성경 내에서 공간과 시간 모두를 아우르는 낱말이 많이 있다는 점이다.

 

1) 낱말의 뜻을 결정하는 문맥

 

우선 한 낱말을 연구할 때 우리는 두 가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하나는 어원이고 다른 하나는 문맥이다. 지난 세기까지 학자들은 모호한 단어의 뜻을 알아내기 위해 그 낱말의 어원을 추적하는 작업을 많이 해왔다. 특별히 성서 히브리어 사전을 뒤적이면 지난 세기의 학자들이 각 낱말을 어떻게 연구했는지 금새 드러난다.

1857년에 영어로 번역되어 나온 윌리암 게제니우스의 성서 히브리어 사전은 매 항목마다 아랍어에서 그 뜻을 찾아내려고 한 것을 알 수 있다. William Gesenius, A Hebrew and English Lexicon of the Old Testament including the Biblical Chaldee (trans. Edward Robinson; 8th ed.; Boston: Crocker and Brewster, 1857). 1910년에 나온 쾨니히의 사전도 마찬가지의 경향을 보이고 있다. Eduard König, Hebräisches und aramäisches Wörterbuch zum Alten Testament (Leipzig: Dietrich'sches Verlagsbuchhandlung, 1910) 참조.

그 이후 20세기 초반에 나온 유명한 브라운-드라이버-브릭스 사전(BDB)을 살펴보면 매 항목마다 아카드어와 아랍어 그리고 아람어와 시리아어 때때로 이디오피아어와 비교한 것을 알 수 있다. Francis Brown, S. R. Driver and Charles A. Briggs, A Hebrew and English Lexicon of the Old Testemant with an Appendix containing the Bibical Aramaic (Oxford: Clarendon Press, 1907).

이러한 경향은 게제니우스-불 히브리어 사전을 보면 20세기 내내 별 변화 없이 진행된 것을 알 수 있다. Franz Buhl, Wilhelm Gesenius' Hebräisches und Aramäisches Handwörterbuch über das Alte Testament (17. Auf.; Berlin: Springer-Verlag, 1962).

그러다가 쾰러-바움가르트너 사전(KBL)에 와서야 우가릿어가 첨가되어 연구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 Ludwig et Walter Baumgartner, Lexicon in Veteris Testamenti Libros (Leiden: E. J. Brill, 1985).

이러한 경향은 현대 히브리어로 쓰여져 있는 벤 예후다의 사전과 에벤-쇼샨의 사전에서도 계속된다. 엘리에제르 벤 예후다, 『고대 및 현대 히브리어 완성 사전』 (뉴욕: 토마스 요셀로프, 1959); 아브라함 에벤-쑈산, 『새 사전』 (4권, 예루살렘: 키르얏-쎄페르, 1993).

 

그러다가 지금도 간행되고 있는 클라인스의 사전은 이러한 항목을 아예 없앴다. David J. Clines. ed. The Dictionary of Classical Hebrew (Sheffield: Sheffield Academic Press, 1993- ).

이는 문맥을 강조하여 각 낱말을 연구하는 현대의 연구경향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이다. 곧 한 단어의 뜻은 그 낱말이 쓰인 각 문맥이 결정한다고 하는, 지난 세기 후반부터 강조되어 온 경향을 반영한 것이리라. 모셰 헬드라는 유대인 학자는 이러한 경향을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Chaim Cohen, “The ‘Held Method' for Comparative Semitic Philology.” JANES 19 (1989):10-20. Baruch A. Levine, “Assyriology and Hebrew Philology:A Methodological Re-examination.” Mesopotamien und seine Nachbarn (ed. J. Renger et al.; XXVe Recontre Assyriologie. Berlin, 1982)의 521-30쪽 참조.

 

 

- 어원론보다는 각 낱말이 각 문맥에서 어떻게 쓰이고 있는가를 철저히 살핀다.

- 각 낱말의 근친어가 어떻게 쓰이는가를 엄밀하게 분석하고 살핀다.

- 어원이 다른 말이라 해도 의미론적으로 같거나 가까운 낱말을 추적한다.

 

이렇게 (1) 문맥에서의 쓰임 (2) 근친어의 쓰임 그리고 (3) 의미론적으로 같은 낱말의 쓰임을 추적하는 것이 요즘의 연구경향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렇다고 해서 어원 연구가 전혀 쓸모가 없다는 얘기가 아니다. 다만 문맥을 무시한 어원 연구가 한 단어의 연구에 걸림돌이 되기 때문이다. 문맥을 고려한 어원추적은 한 낱말의 뜻을 풍부하게 이해하는 데에 오히려 더 많은 도움을 준다. 이러한 어원과 문맥의 연결고리는 뒤에서 언급하기로 한다.

 

2) 죽음과 내려감 - 공간을 가리키는 올람의 문맥

 

시간개념의 올람이 문제가 되는 곳은 공통적으로 죽음을 말하는 곳이나 또는 아랫 세상으로 내려간다고 말하는 곳이다. 히브리성경에서는 죽음을 내려간다는 말로 표현하기도 한다. 그런데 아래 세상으로 내려간다는 말은 신화적 표현이다. 성경을 신화라고 말하기에는 어렵지만, 성경 속에는 신화적인 표현이 무수히 등장한다. 곧 수많은 신화소(神話素)가 성경 속에는 박혀있다는 말이다. 이는 성경을 쓴 이들이 고대 중동의 신화적 세계에서 산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경 속에 들어있는 내려감이라는 신화소를 추적하다보면 시간적 올람이 공간적 올람으로 사용되는 것을 알 수 있다.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공간적 올람의 배경은 내려감이라는 모티브를 포함한 죽음을 말하는 곳이다.

성경을 포함한 고대 중동 문헌에서 말하는 죽음은 그들의 세계관과 관련이 있다. 곧 중동사람들의 신화를 살펴보면 왜 그들이 죽음을 아래 세상으로 내려간다고 말했는지 잘 알 수 있다. 고대 시리아-메소포타미아 신화에서 “내려감”(descent) 모티브는 “올라옴”(ascent) 모티브와 함께 중요한 주제이다. 수메르 신화인 『이난나의 내려감』과 아카드 신화인 『이쉬타르의 내려감』에 전형적으로 이 두 모티브가 등장한다. 아니 오히려 이 두 신화는 “내려감”과 “올라옴”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두 신화의 비교 분석은 Hwan Jin Yi, The Biblical Hebrew ‘ÔLĀM(“Afterworld”) in Time and Space: The Spatial Use of a Temporal Term (Ph. D. diss., New York University, 2002)의 205-239쪽 참조.

아래 세상으로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오는 대칭적 구조가 이 두 신화의 구조이다. 히브리성경에도 이러한 내려감과 올라옴의 대칭적 구조를 보여주는 신화소가 자주 등장한다(삼상 2장, 욘 2장, 사 38장, 시 49편 등). 웅덩이 속에 갇혀 있다가 올라온 요셉의 이야기(창 37장)나 예레미야의 이야기(렘 38장)은 웅덩이(רוב)를 저 세상으로 표현하는 히브리성경의 쓰임으로 미루어 볼 때, 실제적인 죽음의 경험을 말하는 이야기들이다.

 

그리고 우가릿 문헌인 『바알』에서도 이 두 모티브는 바알이라는 한 신을 중심으로 벌어지는 일련의 진행 속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특별히 바알의 왕권을 상징하는 신전 건축이 그 주제라고 말할 수 있는 세 번째와 네 번째 토판에서 내려감 모티브는 중요한 주제로 등장한다(KTU 1.4 viii). 바알신화의 내려감 주제에 대한 분석은 이환진의 앞의 논문, 239-256쪽 참조.

그리고 올라옴 모티브는, 토판이 깨져있기 때문에 분명하게 알 수는 않으나, 죽음의 신인 모투의 영역에서 다시금 올라오는 얘기를 하고 있는 여섯 째 토판에 등장하다.

이러한 내려감과 올라옴의 대칭적 구조는 아니지만 얍복강 부근에서 1967년에 발견된 데이르 알라(Deir ‘Alla) 새김글은 내려감 모티브를 잘 보여준다. 이환진의 앞의 논문 256-274쪽 참조.

기원전 8세기 경의 문헌으로 추정되는 이 새김글은 아카드 신화인 『이쉬타르의 내려감』의 시작과 똑같이 일련의 집이 등장한다(ii 6-7). 곧 북서방 셈어 판 『이쉬타르의 내려감』이라고 부를 수 있을 만큼 전형적인 메소포타미아 신화의 내려감 모티브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Baruch A. Levine, “The Deir ‘Alla Plaster Inscriptions.” JAOS 101 (1981): 202; 같은 저자, Numbers 21-36 (AB 4A; New York: Doubleday, 2000), 269-270.

 

특별히 데이르 알라 새김글이 공간적 올람에 중요한 이유는 이 새김글의 두 번째 토판에 “저 세상에 있는 집”(ןמלע תיב) 또는 “저 세상에 있는 너의 이부자리”(ךימלע יבכשׁמ)라는 표현이 나온다는 사실이다. 또한 데이르 알라 새김글은 이사야 14장에 나오는 스올 신탁이나 욥기와 마찬가지로 같은 “엘 서고”(El archive)에 속해 있는 문헌으로, 레빈의 앞의 책 267-268쪽. 욥기와 데이르 알라어의 공통점에 대해서는 이환진의 앞의 논문 272-273쪽 참조. 레빈은 “엘 서고”를 “엘 문학”(El literature) 또는 “엘 레퍼토리"(El repertoire)라고도 부른다. “엘 서고”라는 문학은 하나의 가설로, 히브리성경 속에서 야훼 신앙이 엘 신앙을 채택하여 자기 것으로 만들기 이전에 있었을 것으로 짐작되는 문헌을 통칭하여 부르는 말이다.

북서방 셈어를 사용하던 사람들의 죽음 이해에 대하여 귀중한 정보를 제공한다.

 

3) 히브리성서의 내려감 모티브 이환진의 앞의 논문 114-191쪽에 나오는 제4장(“성서의 아래세상과 내려감 모티브”) 참조.

 

 

우선 예레미야가 구덩이에 갇혔다가 풀려난 사건은 히브리성서의 내려감 모티브가 실제적으로 죽음을 의미한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렘 38장). 시리아-팔레스틴 고고학자인 엘리자벳 블로흐-스미드는 철기 시대 남 레반트 지역에서 가장 흔한 무덤 형태는 구덩이(רוב)라고 말한다. Elisabeth Bloch-Smith, “The Cult of the Dead in Judah: Interpreting the Material Remains.” JBL 111 (1992): 214와 같은 저자의 Judahite Burial Practices and Beliefs about the Dead (JSOTSup 123; Sheffield: JSOT Press, 1992), 25-29쪽 그리고 Philips J. King and Lawrence E. Stager, Life in Biblical Israel (Library of Ancient Israel; Louisville: Westminster John Knox, 2001), 366-367쪽 참조.

이러한 실제적 사건에 반영되어 있는 내려감 모티브는 예언서와 성문서 곳곳에 잘 나타난다. 예언서 가운데에는 이사야의 스올 신탁(사 14장)과 히스기야의 기도(사 38장), 이집트와 여러 민족에 거슬러 에스겔이 선포하는 신탁(겔 31-32장)에서 내려감 모티브는 죽음을 의미한다. 성문서 가운데에서는 탄원시인 시편 88편이 내려감 모티브를 잘 보여준다. 그리고 잠언의 지혜 찬양부분(1-9장)에서는 여신 이쉬타르에 빗대어 내려감 모티브를 바로 죽음에 이르는 길로 묘사한다(2, 5, 7장). 성문서에서 우리가 특별히 관심갖는 책은 욥기이다. 욥기에는 내려감 모티브가 성경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며, 특별히 앞서 언급한 메소포타미아 신화의 반복되는 주제인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땅”(Kurnugia)이라는 표현이 곳곳에 언급된다. 메소포타미아 신화의 주요 주제를 잘 간직하고 있는 책이 욥기라고 말할 수 있다.

흥미로운 사실은 “엘 서고”에서 많은 자료를 활용하여 썼을 것으로 추정되는 스올 신탁(사 14장), 에스겔이 여러 민족을 거슬러 선포한 신탁(겔 31-32장) 그리고 욥기에 내려감 주제가 집중적으로 등장한다는 것이다. 같은 “엘 서고”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데이르 알라어 새김글 역시, 앞서 언급한 대로, 북서방 셈어판 『이쉬타르의 내려감』이라고 부를 수 있을 만큼, 내려감 모티브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곧 데이르 알라 새김글는, 고대 시리아의 『바알』과 함께 메소포타미아 신화와 성서와의 간격을 메우면서 동시에 북서방 셈어를 사용하던 사람들의 죽음 이해를 더욱 풍부하게 하는 자료이다. 우리가 여기서 궁금하게 생각하는 것은 “엘 서고”라는 한 가정적인 문헌모음에 왜 그토록 죽음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등장할까 하는 점이다.

 

 

4) 공간적 올람의 문헌학적 근거

 

(1) 북서방 셈어 무덤 새김글의 알람(םלע) 이환진의 앞의 논문 33-43쪽에 나오는 제1장(“북서방 셈어 םלע[“무덤”]”) 참조.

 

 

기원전 10세기 페니키아의 아히람 석관 새김글은 이런 내용으로 시작한다(KAI 1:1).

 

그발의 왕 아히람의 아들 이토바알이

그의 아버지 아히람을 무덤에 모실 때(םלעב התש כ)

그를 위하여 만든 석관.

 

위의 번역은 풀어 옮긴 것으로, 위에 괄호에 넣어 인용한 페니키아어 문장은 “그(이토바알)가 그(아히람)를 무덤에 모실 때”라고 옮길 수 있는 부분이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하려는 부분은 베알람(םלעב)이라는 표현이다. 많은 학자들은 이 표현을 “영원히”라고 옮겼는데, Zellig S. Harris, A Grammar of the Phoenician Language (New Haven, Conn.: American Oriental Society, 1936), 84(“unto eternity”), 133 (“in(for) eternity”); Kurt Galling. ed. Textbuch zur Geschichte Israels (3d. ed.; Tübingen: J. C. B. Mohr, 1979), 49 (“für die Ewigkeit”).

불행히도 히브리어 올람을 포함한 북서방 셈어 근친어가 이처럼 장소를 나타내는 전치사 베이트(ב)와 함께 사용된 곳이 아직은 발견되지 않는다. 제2경전인 집회서 4:23의 게니자 사본(A)에는 “세상에서”(םלעב)란 뜻으로 사용되기도 한다.그러나 게니자 사본(C)는 이 표현을 “적절한 때에”(ותעב)로 바꾸어 읽었다. 이는 공간적 올람에 대한 거부감을 나타내는 이독은 아닐까? 『벤시라서』 (예루살렘: 히브리어 아카데미, 책의 전당), 5쪽(히브리어) 참조.

이러한 문제점 때문에 옌니와 타윌은 기원전 5세기 이집트-아람어 파피루스에서 “집”이란 뜻의 베(יב)에서 착안하여, 이 표현을 베이트 올람(םלע תב)의 줄어든 형태로 본다. Ernst Jenni, “Das Wort ‘ōlām im Alten Testament.” ZAW 64 (1952): 207-208; Hayim Tawil, “A Note on the Aḥiram Inscription.” JANES 3 (1970-1971): 35.

가장 최근에 나온 페니키아 사전을 펴낸 크라말코프도 그의 사전에서 이와 비슷한 견해를 보인다. Charles R. Krahmalkov, Phoenician-Punic Dictionary (OLA 90/15; Leuven: Uitgeverij, Press, 2000), BT ‘LM 항목.

그러나 기원전 10세기 새김글을 후대의 문헌에 근거하여 그렇게 추정하는 것은 논리적 비약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다.

오히려 “…에 두다, 놓다, 모시다”는 구문에 주의를 기울이면 장소를 나타내는 전치사 때문에 생기는 어려운 점은 해소된다. 근친어 동사와 장소를 나타내는 전치사가 함께 쓰인 예는 우가릿어의 『바알』와 『아크핫』 그리고 성서의 시편 88편에서 발견된다. 재미있는 점은 모두다 죽음이라는 문맥에서 이러한 표현이 쓰인다는 점이다.

 

아낫은 바알을 위하여 울었다. 그리고 묻었다.

땅에 있는 큰 구덩이에 그를 모셨다(tštn bḫrt ilm arṣ) (KTU 1.6 i 16-18)

 

나는 곡하고 그를 묻을 것이다.

땅에 있는 큰 구덩이에 그를 둘 것이다(ašt bḫrt ilm arṣ) (KTU 1.19 iii 5-6)

 

님은 저를 저 밑바닥 구덩이에 두셨어요(תויתחת רוננ ינתש)

어두운 곳에(םיכשחמב)

깊은 그 곳에(תולצמב). (시 88:7)

 

이 세 인용문의 공통점은 문맥이 죽음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다. 여기에 페니키아어 구문 “.....에 두다”(*־ב תש)는 근친어인 우가릿어에서 “.....에 두다”(*št b-)라는 구문으로 반복적으로 나타나고, KTU 1.19 ii 18, 25, iii 20, 34.

성서 히브리어인 시편 88편(*־ב תישׁ)에서도 똑같이 등장한다는 점이다. 시편의 경우 장소를 나타내는 전치사(ב)가 세 번이나 반복된다. 이는 이 전치사가 시간이 아닌 장소를 나타내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예이다. 문맥이 죽음을 말하는 곳은 아니나, 기원전 3세기 초반의 것으로 추정되는 페니키아어 새김글(KAI 43:7)에도 같은 구문이 등장한다(“나는 아버지가 살아계시는 동안, 아버지의 동[銅] 흉상을 밀카르트 신전에 모셨다”[תרקלמ שדקמב ... תשי]).

우가릿 문헌에 장소를 나타내는 전치사(b)를 따라 나오는 표현은 “아래세상의 신들과 함께 하는 아래세상”이라고 옮길 수도 있는 말이다. 그리고 시편 88편도 마찬가지로 장소를 나타내는 전치사(ב)와 함께 따라나오는 표현들은 모두 성경에서 저 세상을 가리키는 은유적 표현들이다.

따라서 페니키아어 알람은 시간을 나타내는 말이기도 하지만, 무덤 새김글이라는 장르에서는 “무덤”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는 것을 알 수 있다. 다만 “영원”이라는 속뜻을 그 속에 품고 있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페니키아어 알람만 이런 뜻으로 쓰인 것은 아니다. 기원전 8세기 경 아람어로 씌어진 파나무(Panammu) 새김글에도 이와 비슷한 표현이 등장한다. 곧 장소를 나타내는 전치사와 결합되고 또한 소유격 대명사가 함께 쓰인 경우이다.

 

내가 하다드를 위하여 이 동상을

내 무덤에(ימלעב) 세웠다.

 

파나무 새김글은 진절리(Zinjirli)에서 발견된 무덤 새김글로 이 표현을 학자들은 다양하게 읽어왔다. 소유격 어미와 함께 전치사 베이트(ב)가 붙어 있는 이 표현을 “나의 영원을 위하여” 또는 “내가 젊었을 때”라고 읽은 것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H. Donner - W. Röllig. Kanaanäische und Aramäische Inschriften. Band II (3. Auf.; Wiesbaden: Otto Harraswitz, 1973), 217 (“für meine Fortdauer”); John C. L. Gibson, Textbook of Syrian Semitic Inscriptions. Vol. II: Aramaic Inscriptions including inscriptions in the dialect of Zenjirli (Oxford: Clarendon, 1975), 65, 70 (“in my youth”).

사실 전치사보다도 소유격 어미가 붙어있기 때문에 어려움이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깁슨처럼 “내가 젊었을 때” 또는 “내 젊은 시절에”라고 읽을 수는 없다. 기원전 4세기의 페니키아 무덤 새김글(KAI 35:2)에 “내가 살아 있는 동안” 또는“내 평생에”란 뜻의 표현(ייחבמל)이 등장하기 때문에 아람어 알람이 그런 뜻을 지닌다고 말할 수 없다. 또는 “영원”이라는 시간적 개념으로 이 낱말을 읽을 수 없다.

독일인 학자 요쎄프 트로퍼가 잘 지적한 것처럼, 이 무덤 새김글의 제14행에 무덤이란 뜻으로 쓰인 마콤(םקמ)이 “나의 무덤”(ימלע)과 대구를 이룬다고 보아야 한다(KAI 214:14-15). Josef Tropper, Die Inschriften von Zincirli (ALASP 6; München: Ugarit-Verlag, 1993), 75.

 

 

그리고 나는 이 하다드 동상과 ....

파나무의 무덤(ומנפ םקמ)을 세웠다.

 

제 1행에 나오는 “나의 무덤”은 분명히 제14행의 “파나무의 무덤”을 가리킨다. “장소”란 뜻의 마콤이 무덤을 뜻하는 예는 흔하다. 페니키아어 에슈문아자르 새김글(KAI 14:4)이나 성경 곳곳(겔 39:11, 전 3:20, 욥 16:18 등)에서 마콤은 “무덤”이란 뜻으로 사용된다.

이렇게 시간적 올람의 북서방 셈어 근친어인 페니키아어와 아람어 알람은 무덤 새김글이라는 장르에서 공간을 뜻하는 “무덤”이란 뜻으로 사용되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북서방 셈어 근친어의 쓰임이 공간적 올람의 문헌적 근거가 되는 것이다.

 

(2) 성서 이후 여러 유대인 문헌의 공간적 올람

 

성서 이후시대에 등장하는 히브리어 올람 역시 그다지 많지는 않지만 공간을 가리키는 말로 등장한다. 우선 대표적인 문헌은 쿰란 공동체의 『감사 두루마리』(Hodayot)이다. 이 두루마리의 제11난과 제 14난에는 죽음의 이미지가 무수하게 등장하면서 올람이 언급된다. 그리고 4Q184에도 잠언과 비슷하게 여성을 죽음과 비유하면서 올람이 등장한다.

 

나락의 문들(תחש יתלד)이 악을 임신한 이를 짓누르고 있다.

아랫 세상의 빗장들(םלוע יהירב)이 뱀의 마음을 ..... (1QHa xi 18) 야아코브 리흐트, 『감사 두루마리』 (예루살렘: 비알릭, 1957), 82쪽(히브리어); Florentino García Martínez and Eibert J. C. Tigchelaar, The Dead Sea Scrolls Study Edition. Vol. 1 (1Q1-4Q273) (Ledien: Brill, 1997), 164.

 

 

죄의 자식들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전사는 활을 당기고

끝없이 넓은 곳으로 들어가려고

[아래세상] 성벽을 허물어 열 것이다.

그는 아래세상 문들(םלוע ירעש)을 열어

온갖 무기를 끄집어 낼 것이다. (1QHa xiv 30-31) 리흐트, 앞의 책 118쪽; Martínez and Tigchelaar, The Dead Sea Scrolls, 176.

 

 

5그의 베일은 해질녘 그림자이다.

그의 장식은 구덩이의 질병이다.

그의 침대는 구덩이의 침대이다.

6..... 깊은 나락이다.

그의 집은 어둠의 침대이다.

밤의 한가운데에 그의 장막이 있다.

암흑의 토대에 7그는 머물 곳을 세운다.

침묵의 장막에 그는 진을 친다.

아랫세상의 화로(םלוע ידקומ) 한 가운데에. (4Q184 i 7) Theodor H. Gaster, The Dead Sea Scriptures (3d ed.; New York: Anchor Books, 1976)154, 170; Martínez and Tigchelaar, The Dead Sea Scrolls, 165, 177, 377; Michael Wise, Martin Abegg, Jr., Edward Cook, The Dead Sea Scrolls (New York: HarperSanFrancisco, 1996), 94, 100, 241; Geza Vermes, The Complete Dead Sea Scrolls in English (New York: Allen Lane The Penguin Books, 1997)260, 396.

 

 

올람이 등장하는 이 세 곳은 공통적으로 죽음을 이야기하는 곳이다. 학자들은 이들 구절에 등장하는 올람을 “영원”이란 말로 옮기고 있지만, 야아코브 리흐트는 이미 1957년 그의 『감사 두루마리』 주석에서 올람을 스올에 해당하는 말이라고 지적하였다. 리흐트의 앞의 책, 118쪽에 있는 주 31. 그는 시편 24편의 피트헤이 올람(םלוע יחתפ) 역시 “저 세상의 문들”을 가리킨다고 제안한 바 있다.

죽음을 말하는 문맥에서 이 낱말을 이런 뜻으로 읽어야 한다는 것이다.

성서 이후 시대의 올람은 유대인들의 경전인 미슈나에도 등장하여 “이 세상”을 뜻하는 말로 사용된다. 기원후 2세기 초반에 편집되었다고 흔히 말하는 미슈나에는 아보트라는 책이 들어있다. 이 책은 잠언이나 벤시라(집회서)와 같이 지혜문학에 속하는 문헌이다. 이 문헌에서 “이 세상”이란 뜻으로 나오는 올람의 대표적인 경우는 다음과 같다. 하녹 알벡, 『미슈나 - 쎄데르 네지킨』(예루살렘: 비알릭, 1988년), 353, 369쪽(히브리어).

 

 

이 세상(םלועה)은 세 기둥 위에 서있다.

토라와 예배와 나눔이다. (Mishna Avot 1:2)

 

그대는 이 세상에서(הזה םלועב) 행복할 것이다.

그대는 오는 세상에서(אבה םלועב) 좋을 것이다. (Mishna Avot 4:1)

 

유대인 문헌에서 올람은 특별히 이 세상을 뜻하는 공간개념으로 많이 쓰인다. 두 번 째 예문처럼 “오는, 올”이라는 수식어가 붙어 “저 세상”을 나타내기도 한다. 유대인 기도서에서도 이러한 공간적 올람은 쉽게 발견된다. 속죄일 저녁에 드리는 기도문 중 “아타 요데아”는 이렇게 시작한다. Nosson Scherman et al. The Artscroll Siddur: Nusach Ashkenaz (2d ed.; New York: Mesorah Publications, 1990), 776.

.

 

주님은 세상의 비밀(םלוע יזר)과

살아있는 모든 생명 속에 숨어 있는 신비를 다 알고 계십니다.....

 

이렇게 올람은 히브리성서 이후에 등장하는 유대인들의 문헌에서 공간개념으로 흔하게 쓰인다.

 

(3) 시간과 공간을 함께 나타내는 성서 히브리어 낱말들

 

많은 낱말이 시간과 공간을 다 가리키지만 여기서는 몇몇 낱말을 그 예로 들기로 한다.

 

도르(רוד) - “영원”(시 21:5), “사는 곳”(사 38:) “세대”(시 102:25)

헬레드(דלח) - “계속되는 기간”(시 39:6), “세상”(사 38:11)

파님(םינפ) - “얼굴”(창 43:31), “표면”(창 2:6), “옛날”(신 2:12)

케뎀(םדק) - “앞”(사 9:11) “동쪽”(욥 23:8), “먼 옛날”(신 33:15)

, 케츠(ץק) - “(시간과 공간의) 끝”(단 8:19, 왕하 19:23)

 

이 낱말들은 어떤 곳에서는 시간을, 또 다른 곳에서는 공간을 뜻하지만, 때로는 둘 다를 포함하는 경우도 있다. 대표적인 경우는 욥기 18장에 나오는 수아 사람 빌닷의 말이다(욥 18:20).

 

동쪽 사람들(םינמדק)이

그의 종말을 듣고 놀라듯이

서쪽 사람들(םינרחא)도

그의 말로를 듣고 겁에 질릴 것이다.

 

『표준새번역 개정판』을 인용한 것으로, 카드모님을 “동쪽사람들”로, 악하로님을 “서쪽사람들”로 두 용어를 공간적으로 읽었다. 『개역 개정판』도 비슷하게 “동쪽에서 오는 자들”과 “서쪽에서 오는 자들”로 각각 읽었다. 하지만 이 두 낱말은 『개역』의 “앞선 자”와 “오는 자”처럼 시간적으로도 읽을 수 있다. 곧 “지나간 사람들”과 “앞으로 올 사람들”로 읽을 수 있다.

 

(4) 공간적 올람의 최근 논의

 

최근 공간개념의 올람을 논의한 학자로는 앨런 쿠퍼와 헐버트 니어를 들 수 있다. 쿠퍼는 먼저 근친어인 우가릿어 ‘-l-m에 “저 세상”이라는 뜻이 들어있다고 주장한다. Alan Cooper, “MLK ‘LM: ‘Eternal King’ or ‘King of Eternity’,” in Love & Death in the Ancient Near East: Essays in Honor of Marvin H. Pope (ed. John H. Marks and Robert M. Good; Guilford, Conn.: Four Quaters, 1987), 1-7.

그가 관심갖는 표현은 KTU 1.108에 세 번 나오는 rpu mlk ‘lm이라는 표현이다(1, 21, 22행). 그는 이집트의 파라오 가운데 아메노피스 3세의 호칭(hk3.ḏt)과 아텐의 호칭(nb nḥḥ)이 둘다 “영원의 주님”이라는 뜻으로 흔히 저 세상의 신인 오시리스와 관련하여 쓰이는 호칭인 것에 착안하여, 영원과 저 세상의 연결점을 찾으려 했다. 오시리스는 시간의 주(인)이면서 동시에 저 세상의 왕으로 이집트에서 추앙받았기 때문이다. 쿠퍼는 영원과 저 세상에 대한 이집트의 이러한 개념이 아마르나 시대에 가나안으로 들어갔다고 말한다. 두로의 아비밀키의 서신에 보면 특별히 이러한 이집트적 개념이 많이 발견된다는 것이다. 쿠퍼는 또한 메소포타미아의 “영원”(erṣetu)이라는 구체적인 개념과 이집트의 “영원”(ḏt/nḥḥ)이라는 좀더 추상적인 개념이 라파우(rpu)에 함께 나타난다고 말한다. 사실 아카드어 에르체두(erṣetu)에는 “영원”이라는 뜻이 없기 때문에 쿠퍼의 이 주장은 재고해야 할 주장이다(CAD erṣetu 항목 참조).

그래서 그는 KTU 1.108에 등장하는 rpu mlk ‘lm을 “라피우, 저 세상의 왕”이라고 읽는다.

쿠퍼의 두 번 째 논문은 시편 24편에 나오는 “영원한 문들”(םלוע יחתפ)에 관한 글이다. Cooper, “Ps 24:7-10: Myhology and Exegesis.” JBL 102 (1983): 37-60.

그는 이집트의 『사자서』(The Book of the Dead)와 『관 본문』(Coffin Texts)에 근거하여 “저 세상의 문들”로 읽을 것을 제안한다. 성산에 들어갈 자격요건이 깨끗한 손, 해맑은 마음 등으로 시편 24편에 나오는 것처럼 『사자서』의 주문 147번도 저 세상으로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비슷한 요건을 갖추어야 한다고 말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관 본문』의 주문 312번에 나오는 “너의 얼굴을 들어 그를 보라”는 표현이 시편 24편의 “고개를 들라”는 표현과 유사하며 모두 저 세상으로 들어가는 장면에 나온다고 말한다. 그래서 “저 세상 문들아, 고개를 들라”는 표현과 “이는 누구인가”라는 표현은 저 세상 문 앞에서 벌어지는 장면을 보여주는 대화로, 아래세상을 제압하려는 전사이신 야훼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고 쿠퍼는 말한다. 시편 9편에서는 “죽음의 문”(תומ ירעש)과 “딸 시온의 문”(ןויצ־תב ירעש)이 죽음의 문맥에서 함께 등장한다. 따라서 시편 9편과 연결시켜 생각해 볼 때 “영원한 문”(םלוע יחתפ)을 “저 세상의 문” 또는 “아래세상의 문”으로 읽어야 한다고 하는 쿠퍼의 주장은 설득력있는 주장이라고 말할 수 있다.

 

헐버트 니어는 우가릿어, 아람어, 페니키아어, 히브리어를 포함한 북서방 셈어의 ‘-l-m 이 “무덤”이나 “아래세상”을 뜻한다고 말한다. Herbert Niehr, “Über Semantik von nordwestsemitik ‘lm als ‘Unterwelt’ und ‘Grab’,” in Ana šadî Labnãni lū allik: Beiträge zu altorientalischen und mittelmeerischen Kulturen. Festschrift für Wolfgang Röllig (ed. Beate Pongratz-Leisten et al.; AOAT 247; Neukirchen-Vluyn: Neukirchener, 1997), 295-305.

우가릿어 KTU 1.108의 mlk ‘lm(“아래세상의 왕”)와 KTU 1.106:28의 ksu ‘lm(“아래세상 의자”), 페니키아어 아히람 무덤 새김글(KAI 1:1)과 카라테페 새김글(KAI 26 A iii 19)의 알람(“무덤, 아래세상”), 아람어 파나무 새김글(KAI 214:1)의 알람(“무덤”), 데이르 알라 새김글의 알라민(Deir Alla ii), 히브리성경의 올람(겔 26:20, 애 3:6 [= 시 143:3], 시 29:10, 렘 10:10)이 “아래세상”이나 “무덤”을 뜻한다고 말한다.

 

4. 어떻게 시간이 공간을 가리키는가?

 

아시리아학 학자 거딘 종커는 바벨론어 무덤 새김글과 페니키아어 에슈문아자르 무덤 새김글에 고정적으로 나오는 표현을 통하여 공간과 시간이 어떻게 의미론적으로 전환하는가를 잘 말하고 있다. Gerdien Jonker, The Topography of Remembrance: The Dead, Tradition and Collective Memory in Mesopotamia (SHR 68; Leiden: E. J. Brill, 1995), 194-197.

 

 

그의 이름이 위에서(i-na e-la-ti) 울려퍼지기를!

그의 영혼이 아래에서(i-na ša-ap-la-ti) 깨끗한 물을 마시기를! (VAS 1 54:15-18) Jean Bottéro, “Les inscriptions cunéiformes funéraires,” in La mort, les mortes dans les sociétés anciennes (ed. Gherardo Gnoli and Jean-Pierre Vernant;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1982), 388-389.

 

 

아누와 엔릴과 에아가 그의 후손들을 짓누르시길!

아랫세상 신들께서 여기 아래에서(i-na ša-ap-la-ti)

그의 후손을 파멸시키시길! (Langdon Kish 1 pl. 34 no. 2 ii 64) 앞의 글 386-387쪽에서 거듭 인용.

 

 

종커는 위의 무덤 새김글(OB 또는 MB)에 등장하는 아카드어 “위”(elēnu)와 “아래”(šaplanu)의 이분법이 무덤을 중심으로 시간과 공간을 동시에 아우르는 말로 사용된다고 말한다. 곧 “위”는 살아있는 자들의 공간을 가리키면서 동시에 미래를 그리고 “아래”는 죽은 자들의 공간을 가리키면서 동시에 과거를 가리킨다는 것이다. 그의 통찰에 의하면 이러한 표현이 시돈에서 발견된 기원전 5세기 경의 페니키아 에쉬문아자르 무덤 새김글(KAI 14:11-12)에도 등장한다는 것이다.

 

아래로는 뿌리(טמל שרש)가 없기를, 그리고 위로는 열매(לעמל רפ)가 없기를!

하늘 아래에서 살아있는 자들과 함께 이름이 없기를! 페니키아어 전문은 다음과 같다. “שמש תחת םיחב ראתו לעמל רפו טמל שרש םל ןכי לא”

 

 

여기서도 “아래”는 죽은 자들의 공간을 가리키면서 동시에 과거를 가리키고 “위”는 살아있는 자들의 공간과 동시에 현재를 그리고 “뿌리”와 “열매”는 후손들이라는 미래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된다는 것이다. 곧 무덤 새김글이라는 장르에서 이러한 공간과 시간의 아우름이 발견된다는 것이 종커의 주장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점은 욥기 18장에도 에슈문아자르 무덤 새김글에 등장하는 표현이 똑같이 나타난다는 점이다. 문맥 역시 죽음을 말하는 곳이다.

 

14그는 안전한 그의 집에서 찢겨나간다.

공포의 왕이 그를 향해 돌진한다.

15그의 집과 재산은 타버려 재가 된다.

16아래로는(תחתמ) 그의 뿌리가 말라버린다.

위로는(לעממ) 그의 가지가 말라붙는다.

17그에 관한 기억은 땅에서 사라진다.

그 어디에서도 그의 이름은 들리지 않는다.

18그는 빛에서 어둠으로 던져진다.

그는 세상에서 쫒겨난다.

19그에게는 씨도 없다. 후손도 없다.

그가 살던 곳에는 아무도 남은 자가 없다.

20올 세대가 그의 운명 때문에 놀랄 것이다.

지난 세대가 공포에 사로잡혔다.

21아, 못된 자의 집이란 이런 것.

하느님을 알지 못하는 자의 장소이다.

 

이 부분은 “집”(14절)과 “장소”(21절)라는 공간이 전체를 감싸고 있는 모습을 보인다. 그 한가운데에는 갑작스런 죽음(14절), 아래로 내려감(18절), 자손없이 기억 속에서 사라짐(17, 19절)이라는 내용이 들어있다. 앞서 인용한 무덤 새김글들처럼 “위”와 “아래”라는 공간과 시간 그리고 “후손”과 “기억”이라는 미래의 시간을 뜻하는 표현이 등장한다. 시간과 공간의 아우름은 21절에 나오는 “올 세대”와 “지난 세대”라는 표현에서도 감지되는데, 둘은 각각 “동쪽 사람들”과 “서쪽 사람들”로도 옮길 수 있는 말이기 때문이다. 내려감 모티브가 여기서는 특별히 강조되어 한가운데를 차지하고 있는데, 이렇게 내려감 모티브와 함께 공간과 시간의 아우름을 우리는 우가릿의 죽음 정경 제의문(KTU 1.161:21-26)에서 잘 발견할 수 있다

 

너의 주님을 따라 아래세상(arṣ)으로 내려가라!

아래세상(arṣ)으로 내려가라!

땅(‘pr)으로 깊숙이 내려가라!

아래에는(tḥt) Sdn과 Rdn.이 계신다!

아래에는(tḥt) Ṯr ‘llmn이 계신다!

아래에는(tḥt) 가장 오래된 르파임(rp’im qdmym)이 계신다!

아래에는(tḥt) 암미쉬타므루 임금이 계신다!

아래에는(tḥt) 니크마두 임금도 계신다!

 

이 제의문에는 “아래세상”을 뜻하는 용어(arṣ, ‘pr)를 시작으로 일련의 “아래에”(tḥt)란 표현이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히브리성서처럼 야리두(*yrd)는 내려감 모티브를 잘 드러낸다. 계속적으로 반복되는 “아래에는”에 뒤따라 나오는 이름들은 모두 우가릿 왕국의 조상들이다. 그런데 아래세상에 있는 조상들은 이 제의문은 “가장 오래된 르파임”이라고 부른다. 곧 “아래”라는 공간을 “가장 오래된”(qdmym)이라는 시간으로 설명하는 것이다.

이렇게 죽음을 말하는 곳, 또는 내려감 모티브가 등장하는 문맥에서 우리는 공간과 시간이 서로 만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시간과 공간은 한 실체의 다른 측면이라는 점이다. 다시 말해 시간과 공간은 한 동전의 양쪽 면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5. “저 세상, 아래세상”이라는 공간을 가리키는 올람 이환진의 앞의 논문 62-92쪽 참조.

 

 

앞서 말한 것처럼, 공간적 올람이 등장하는 곳은 그 문맥이 죽음을 말하는 곳이나 내려감 모티브가 언급되는 곳이다. 여기서는 여덟 구절에 나오는 여섯 표현을 그 예로 들기로 한다.

 

1) 예레미야 20장의 하라트 올람(םלוע תרה)

 

욥 3장이나 욥 10장과 비슷한 어조로 예레미야는 20장에서 죽음을 갈망한다. 이곳은 아기집과 무덤의 이미지가 서로 겹쳐 등장한다(17-18절).

 

내가 모태에서 죽어

어머니가 나의 무덤이 되었어야 했는데

내가 영원히 모태 속에 있었어야 했는데

어찌하여 이 몸이 모태에서 나아서

이처럼 고난을 고통을 겪고

나의 생애를 마치는 날까지 이런 수모를 받는가!

 

여기서 “내가 영원히 모태 속에 있었어야 했는데”(םלוע תרה המחרו)라고 옮긴 『표준새번역 개정판』은 불어역인 『교회일치역』(TOB)과 비슷하게 마소라본문을 많이 풀어서 별 무리없이 읽히도록 옮긴 것으로 보인다. 사실 하라트 올람은 성경 속에서도 독특한 구조로 구성되어 있는 표현으로 고대역본과 현대역본을 포함한 모든 역본들이 “영원히 임신하다” 칠십인역, 페쉬타역, 불가타역, 루터역 개정판, BFC, EÜ, GNB, JB, ZB 등.

또는 “영원히 크다” 또는 “늘 크다” NJPS, NEB, NRSV, REB.

등으로 읽어왔다. 그런데 이러한 번역은 시간적 올람에 매어있는 어색한 번역이라 말할 수 있다.

이 표현은 바로 앞에 나오는 “어머니가 나의 무덤이 되었어야 했는데”(ירבק ימא יל־יהתו)와 대구로 읽어야 어려움이 해소될 것이다. 17절b와 17절c를 비교해 보도록 하자.

 

나의 어머니(ימא) // 나의 무덤(ירבק)

그의 아기집(המחר) // 저 세상(םלוע)

 

위의 두 행은 (a) - (b) // (a’) - (b’)의 구조를 잘 보여주고 있다. 물론 형용사 하라(הרה)의 구문형인 하라트(תרה)가 이해하기 힘든 표현이기는 하나, 이는 시적인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아기집과 무덤의 유비는 욥 3:10-12와 10:18-19 그리고 쿰란 공동체의 『감사 두루마리』(1QHa xi)에 잘 표현되어 있다. 공간적 올람으로 하라트 올람을 읽을 때 이렇게 옮길 수 있을 것이다.

 

나의 어머니가 나의 무덤이 되었더라면!

그의 아기집이 저 세상이 되었더라면!

 

2) 시편 143편, 애가 3장의 므테이 올람(םלוע יתמ)과 에스겔 26장의 암 올람(םלוע םע)

 

이 세 구절은 죽은 이들을 언급하면서 그들을 아래세상으로 내려간 이들이라고 말하고 있는 점이 공통점이다. 곧 저 세상 사람들을 말하는 것인데, 이들을 우리는 전통적으로 “죽은 지 오래된사람들” 또는 “옛날에 죽은 사람들”이라고 읽어왔다. 문제는 그렇다면 금방 죽은 사람들은 아래세상으로 내려가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인가? 시편 143편과 애가 3편의 시인은 자신들을 오래 전에 죽은 사람에 비유했다고 보아야 하는가? 에스겔은 두로의 심판을 예언하면서 두로가 옛날에 죽은 사람들에게로 내려갔다고 말한 것인가? 이런 문제점을 염두에 두고 살펴보기로 하자.

시편 143:3과 애가 3:6에는 같은 구절이 나온다. 시인은 자신의 비참한 처지를 죽음에 비유하여 이렇게 말한다.

 

원수들이

내 목숨을 노리고 뒤쫓아와서

내 생명을 땅에 짓이겨서

죽은 지 오래된 사람처럼

흑암 속에서 묻혀 살게 하였습니다.

 

여기서 “죽은 지 오래된 사람”이란 표현이 므테이 올람(םלוע יתמ)을 옮긴 것이다. 『개역』의 “죽은지 오랜 자”도 『표준새번역 개정판』과 비슷한 번역이며, 대부분의 영어역본들도 “THOSE LONG DEAD”라는 고정적인 번역을 채용하고 있다. 칠십인역, 페쉬타역, JB, NRSV, REB, CEV(“someone long dead”), NEB(“a man long dead”). 같은 표현을 NJPS는 “the people of old"(시편 143편)와 “those long dead”(애가 3장)로 옮겼고, NRSV도 “those long dead"(시편 143편)과 “those of long ago"(애가 3장)로 옮겼다. 불가타역도 이와 비슷하게 “quasi mortuos antiquos”(시편 143편)와 “quasi mortuos sempiternos”(애가 3장)로 각각 옮겼다. 같은 시간 개념이나 강조점이 다른 개념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공동번역』도 “먼 옛날에 죽은 사람”(애가 3장)이나 “영영 죽어 버린 사람”(시 143편)처럼 비슷하게, 그러나 같은 표현을 약간 다른 뉘앙스로 옮겼다. 이러한 시간적 올람 이해는 유럽에서 나온 각 역본들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번에는 에스겔이 두로 사람들에게 선언하는 신탁을 읽어보기로 하자. 에스겔은 자신이 엘이라고 주장하며 스스로 뽐내는 두로 사람들에게 물의 이미지를 동원하여 그들의 파멸을 선언한다(겔 26:19-20). 행갈이는 필자의 임의대로 한 것임.

 

 

내가 너를 사람이 살지 않는 성읍처럼

황폐한 성읍으로 만들고

깊은 물결을 네 위로 끌어올려서

많은 물이 너를 덮어 버리게 하고

너를

구덩이로 내려가는 사람과 함께 내려가

옛날에 죽은 사람들에게로

가게 하겠다.

그리고 내가 너를

구덩이로 내려간 사람들과 함께

저 아래 깊은 땅 속

태고적부터 황폐하여진 곳으로

들어가서 살게 하여

네가 다시는 이전 상태로 회복하거나

사람들이 사는 땅에서

한 모퉁이를 차지하지 못하게 하겠다.

 

여기서 우리가 문제삼는 표현은 “옛날에 죽은 사람들”(םלוע מע)이라는 표현이다. 『공동번역』은 “옛날에 가버린 사람들”이라고 재미있는 표현을 사용하였다. 말 자체로는 아무런 이의를 제기할 수 없는 표현이다. 하지만 시편 143편과 애가 3장 그리고 에스겔 26장은 모두 내려감 모티브를 잘 보여주는 곳이다. 곧 죽음을 내려감이라는 은유로 말하고 있는 이 곳에서는 시간적 올람보다는 공간적 올람이 더 문맥에 잘 어울린다는 말이다. 시편 143편의 경우 시인은 자신의 처지를 아래세상으로 내려가는 모습으로 강조하고 있다. “목숨을 노리고 뒤쫓다”와 “땅으로 짓이기다”와 “흑암에서 살게 하다”가 계단식 대구를 이루어 저 세상으로 내려가는 과정을 강조하고 있다. 그래서 자신의 처지가 그 곳에서 죽어있는 사람처럼 되었다고 말한다. 자신을 죽은 사람과 동일시하는데 이러한 생각은 시편 28편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1절).

 

주님께서 나를 모른 체 하시면

주님께서 침묵하시면

나는 구덩이로 내려간 이들과 같을 거예요(רוב ידרוי־םע יתלשמנו). 필자의 번역.

 

 

“(구덩이로 내려간 사람)처럼 된다”는 말은 님샬티 임(*־םע יתלשמנ)을 옮긴 말인데 이는 시편 143편과 애가 3장의 크메테이 올람(םלוע יתמכ)에 들어있는 전치사 카프(כ)의 또 다른 표현이라 말할 수 있다. 곧 “.....같이”(כ)가 “.....처럼 되다”는 말로 확대된 것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전치사 카프(כ)는 직유(直喩, simile)를 나타내는 기능을 한다. 이렇게 볼 때 뒤따라 나오는 요르데이 보르(시편 28편)와 므테이 올람(시편 143편, 애가 3장)은 동의어이다. 에스겔 26장에서도 마찬가지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요르데이 보르(רוב ידרוי)는 암 올람(םלוע םע)과 동의어로 등장한다. 모두 내려감 모티브를 그 문맥으로 하는 곳들이다. 따라서 올람을 우리는 여기서 “저 세상” 또는 “아래세상”으로 읽을 수 있다. 이렇게 올람을 공간적으로 읽을 때, 우리는 므테이 올람(시 143:3, 애 3:6)과 암 올람(겔 26:20)을 각각 “저 세상에 있는 죽은 이들”과 “저 세상 사람들”이라고 옮길 수 있을 것이다.

 

(원수들이 내 목숨을 노리고 뒤쫓아와서

나를 땅에 짓이겨서)

저 세상에 있는 죽은 이들처럼

어두운 곳에서 살게 했어요. (시 143:3, 애 3:6)

 

너를

구덩이로 내려간 사람들과 함께

저 세상 사람들에게 내려가게 하리라.

저 아래 깊은 땅에서 살게 하리라.

아주 오래된 잔해처럼 (만들리라.)

구덩이로 내려간 사람들과 함께 (있게 하리라.) (겔 26:20)

 

3) 전도서 12장의 베이트 올람(*םלוע תיב)

 

인간은 그의 영원한 집으로 간다. (전 12:5)

 

유명한 이 표현은 히브리성경에 단 한번 나오는 표현으로 흔히 “영원한 집”으로 번역을 한다. 칠십인역, 페쉬타역, 불가타역을 고대역본과 CEV, NEB, NRSV, REB, RSV, TOB, ZB가 모두 이렇게 읽었다. TEV(“our final resting place”)와 GNB(“zu deiner letzten Wohnung”)는 그 번역원칙에 따라 풀어서 읽었다. 루터역 개정판도 마찬가지이다(“[denn der Mensch fährt dahin,] wo er ewig bleibt”).

먼저 우리는 이와 비슷한 표현이 나오는 시편 49편과 데이르 알라 새김글을 비교해 볼 필요가 있다.

 

ומלוע תיב (전 12:5)

םלועל ומיתב (시 49:12)

ןמלע תיב (데이르 알라 ii 6)

ךימלע יבכשמ (데이르 알라 ii 11)

 

우선 코헬렛의 베이트 올라모와 시편의 바테이모 리올람을 비교하면 올람은 여전히 시간개념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여기서 알아 챌 수 있다. 이는 데이르 알라의 같은 표현인 베이트 알민을 비교해 보아도 마찬가지이다. 데이르 알라어 알민(ןמלע)이 복수형이기 때문이다. 이 복수형은 성서 히브리어의 올라밈(םימלוע)이나 성서 아람어의 알민(ןימלע)과 마찬가지로 질적인 시간을 나타낸다. Baruch Levine, “The Deir ‘Alla Plaster Inscriptions,” 203쪽 참조.

곧 올람은 시간적 의미를 그 속에 여전히 담고 있는 것을 우리는 여기서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코헬렛의 올라모(ומלע)와 데이르 알라어의 알라메이카(ךימלע)를 비교해 보면 둘다 공통적으로 소유격 어미가 붙어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시간개념에 소유격 어미가 붙을 수 있는지 생각해 볼 일이다. 또한 데이르 알라어의 미슈카베이 알라메이카는 보통 “너의 영원한 이부자리” 또는 “너의 영원한 침대”라고 옮기는데, 이부자리나 침대를 영원하다고 말할 수 있는가?

차라리 아람어 파나무 무덤 새김글에 나오는 “나의 무덤”(ימלע)라는 표현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소유격 어미는 장소를 나타내는 지시적 어미가 아닐까? 그리고 시리아-메소포타미아 신화에 무수히 등장하는 아래세상의 세간 살이 용품을 생각해 보면, 수메르어 『이난나의 내려감』과 아카드어 『이쉬타르의 내려감』 뿐만 아니라 『길가메쉬』(제 12토판)에도 아래세상에는 이 세상과 똑같이 집과 문과 침대 등 여러 세간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미슈카베이 알라메이카는 “저 세상에 있는 너의 이부자리” 또는 “아래세상에 있는 너의 침대”로 읽어야 마땅할 것이다.

“아래세상”을 뜻하는 “집”이란 표현은 메소포타미아 신화인 『이쉬타르의 내려감』(니느웨 본)의 서두에 전형적으로 등장하며, “니느웨 본”(1-11)과 “앗수르 본”(LKA 62 rev. 10-20) 그리고 『길가메쉬』(VII 185-193)과 『네르갈과 에레쉬키갈』(Sultantepe iii 1-5)에서 이 부분은 고정된 표현으로 반복되어 등장한다.

이와 비슷하게 데이르 알라 새김글(ii 6-7)에도 비슷한 형태로 등장한다. 뿐만 아니라 수메르어로 쓰여져 있는 『우르남무의 죽음』과 『길가메쉬의 죽음』이라는 문헌 그리고 우르남무의 죽음 제의문에도 “집”(é)은 저 세상 또는 아래세상을 뜻하는 말로 등장한다. G. Castellino, “Urnammu Three Religious Text.” ZA 18 (1957): 9-12, 17-57; S. Kramer, “The Death of Ur-Nammu and His Descent to the Netherworld.” JCS 21 (1967): 104-122; idem, “The Death of Gilgamesh.” BASOR 94 (1944): 2-12 (Frag. B 7, etc.).

또한 산헤립의 무덤 새김글에도 무덤은 “집”(bítu)로 반복적으로 언급된다. Daniel David Luckenbill, The Annals of Sennacherib (The University of Chichago Oreintal Institute Publications 2; Chicago: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24), 151 (#13).

히브리성서 안에도 공동묘지를 “(내 조상들의) 무덤이 모여있는 집”(תורבק תיב, 느 3:16)이라고 하거나, 죽음을 “모든 생명이 모이는 집”(יח־לכל דעומ תיב, 욥 30:23)이라고 부르는 것이나 스올을 “내 집”(יתיב, 욥 17:13)이라고 부르는 것은 전도서 12장과 함께 같은 전통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점을 고려할 때 전도서 12:5은 이렇게 옮길 수 있을 것이다.

 

아, 사람은 저 세상에 있는 그의 집으로 가는구나.

아, 인간은 아래세상에 있는 그의 집으로 길을 떠나는구나.

 

4) 욥 22장의 오락흐 올람(םלוע חרא)

 

너는 아직도 옛 길을 고집할 셈이냐?

악한 자들이 걷던 그 길을 고집할 셈이냐? (욥 22:15)

 

우리가 생각할 표현은 “옛 길”로 『표준새번역 개정판』이 옮긴 오락흐 올람이다. 스위스에서 나온 『쥬리히 성경』(ZB)은 “DER VORWELT PFARD”라고 하여 올람의 공간개념을 암시하고 있지만, 대부분의 고대역본들과 현대역본들은 “영원한 길” 또는 “옛 길”이라고 올람을 시간개념으로 이해하고 있다. 칠십인역, 페쉬타역, 불가타역, 루터역 개정판.

영어성경인 『당대영어역』(CEV)과 독일어역인 『복음성경』(GNB)은 이 표현을 비유적으로 “THOSE ANCIENT IDEAS”와 “DEN AUSGETRETENEN PFADEN”이라고 각각 비유적으로 읽었다. 불어역인 『쉬운 불어 성경』(BFC)과 독일어역 『복음성경』(GNB) 그리고 영어역인 『현대영어역』(TEV)은 올람을 읽지 않고 그냥 지나쳤다. 문제가 간단치 않기 때문이다. 마빈 포옵은 그의 주석에서, “어둡다”는 뜻의 우가릿어 ģlm(KTU 1.14 i 19)에 근거하여 “어두운 길”(dark path)로 읽을 것을 제안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는 문맥을 무시한 제안이라고 생각된다.

위의 표현이 들어있는 욥 22장은 아래세상의 전형적인 모습을 잘 보여준다.

 

그러기에 이제 네가

온갖 올무(םיחפ)에 걸려 들고

공포(דחפ)에 사로잡힐 것이다.

어둠(ךשח)이 덮쳐서 네가 앞을 볼 수 없고

홍수(םימ־תעפש)가 너를 뒤덮는 것이다. (욥 22:10-11)

 

그들은 때가 되기도 전에(תע אלו) 사로잡혀 갔고

그 기초가 무너져서 강물(רהנ)에 떠내려갔다. (욥 22:16)

 

히브리어를 인용한 표현들은 모두 죽음이나 저 세상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표현들이다. 곧, 공포와 어둠과 덫이라는 아래세상의 특징을 나타내는 말들이다. “홍수”나 “강”은 아래세상의 물의 이미지를 가리키는 말이다. 욥기는 저 세상을 갈 때 셀라(חלש)라는 강을 건넌다고 말하기도 한다(33:18). M. Tsevat, “The Canaanite god Šälaḫ.” VT 4 (1954): 41-49; Nicholas J. Tromp, The Primitive Concetions of Death and the Nether World (BiOr 21; Rome: Pontifical Biblical Institute, 1969), 147-151; Marvin Pope, Job (AB 15; 3d ed.; Garden City, N.Y.: Doubleday, 1973), 250.

 

그런데 이러한 죽음의 모습과 함께 의인과 악인의 대비는 잠언 14장에서 잘 볼 수 있다(11-12절).

 

악한 사람의 집은 망하고

정직한 사람의 장막은 흥한다.

사람의 눈에는 바른 길로 보이나

마침내는 죽음에 이르는 길이다(תומ־יכרד התירחאו)

웃어도 마음이 아플 때가 있고

즐거워도 끝에 가서(התירחא) 슬플 때가 있다.

 

여기서는 악인의 집과 정직한 이의 장막이 대조를 이루면서 동시에 죽음을 말한다. 마지막이란 뜻의 악하리트(*תירחא)가 반복하여 등장하는데 이는 악인의 마지막을 가리킨다. 곧 악인의 마지막은 죽음을 향한 길이라고 말한다. “길”(오락흐)이라는 말은 이렇게 죽음이라는 문맥에서는 저 세상 또는 아래세상으로 향하는 내려감을 가리키는 말이다.

아카드어 무덤 새김글(MDP 18 251:1-2)에도 “그들은 길(urḫu)을 떠났다. 그들은 길(ḫarrānu)을 갔다. 이쉬니-카라브와 라-가말은 먼저 갔다”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앞에 나오는 아카드어 우르후는 히브리어 오락흐의 근친어이며 동시에 저 세상을 향한 길을 가리키는 말이다. Moshe Held, “Pits and Pitsfalls in Akkadian and Biblical Hebrew.” JANES 5 (1973): 180, n. 56.

또한 『바빌론 신정론』(Babylonian Theodicy)에도 근친어 우르후는 같은 뜻으로 사용된다(16-17행). W. G. Lambert, Babylonian Wisdom Literature (Winona Lake, Ind.: Eisenbrauns, 1996), 70-71.

 

 

우리 조상들은 사실 포기하였다.

그리고 죽음의 길로 떠났다(ab-bu-nu il-la-ku ú-ru-uḫ mu-ú-t[u]).

그들은 후부르 강을 건넜다는

옛말이 있다.

 

『바빌론 신정론』의 이 표현과 앞서 인용한 욥기의 표현은 물의 이미지와 죽음의 이미지가 함께 나온다는 점에서 공통점이다. 또한 “길”이라는 말도 서로 근친어라는 점이 또한 공통점이다. 히브리성서 자체에도 아래세상을 향한 길이라는 표현이 잠언에 등장한다(2:18-19, 5:5-6). 잠언에서는 오락흐와 마아갈로트가 동의어로 등장한다. 저 세상으로 내려가는 이쉬타르에 빗대어서 말한 것으로 보여지는 잠언의 이 부분에서 “길”이라는 이미지가 내려감 모티브를 잘 보여준다고 말할 수 있다. 우리는 욥 22장의 오락흐 올람을 “아래세상을 향한 길” 또는 “아래세상을 통하는 길” 또는 “아래세상으로 향하는 길”등으로 읽을 수 있을 것이다.

 

너는 못된 자들이 걷고 있는

아래세상을 향한 길을

여전히 따라 갈 생각인가?

 

5) 예레미야 51장의 슈나트 올람(םלוע תנש)

 

영영 깨어날 수 없는 잠에

빠지게 하겠다. (렘 51:39, 57)

 

『표준새번역 개정판』은 올람을 “영영”이라고 전통적인 번역을 따라 읽고 있다. 칠십인역, 불가타역은 “영원한 잠”으로, 페쉬타역은 개역이나 표준새번역 개정판처럼 “영원히 잠에 빠지게 하다”로 옮겼다. 영어성경인 ASV, KJV, RSV, NRSV는 “영원히 계속되는 잠”(a perpetual sleep)으로 읽었으며, NEB와 REB도 비슷하게 “끊없는 잠”(unending sleep)으로 읽었다. BFC, GNB, TOB는 페쉬타역을 따라 “영원히 잠들게 하다”로 읽었다. 영어성경인 CEV와 TEV는 그 번역원칙에 따라 올람을 생략하고 각각 “[그들은] 다시는 깨어나지 않는 잠에 빠질 것이다”([they will] then fall asleep, never to awake up)와 “그들은 잠들어 다시는 깨어나지 못할 것이다”(They will go to sleep and never wake up)로 읽었다.

그런데 우리는 시편 13편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예레미야 51장과 비교해보면 금방 올람이 무엇과 같은 뜻으로 쓰이는지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시편 13편은 이렇다. “나를 굽어살펴 주십시오. 나에게 응답하여 주십시오. 주, 나의 하나님, 내가 죽음의 잠에 빠지지 않게 나의 눈을 뜨게 하여 주십시오”(『표준새번역 개정판』). 그런데 여기서 “죽음의 잠에 빠지지 않게”라는 말은 마소라본문대로 읽는다면, “내가 죽음을 잠자지 않게”라고 옮길 수 있다. 이 두 표현을 비교해 보자.

 

םלוע תנש ונשיו (렘 51:39, 57)

תומה ןשיא־ןפ (시 13:4)

 

여기서 슈나트 올람은 모트(“죽음”)와 대비되는 표현으로 등장한다. 곧 슈나트 올람을 죽음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슈나트 올람을 다시 다니엘 12장과 비교해보자. 다니엘 12장 2절은 이렇다. “그리고 땅속 티끌 가운데서 잠자는 사람 가운에서도, 많은 사람이 깨어날 것이다”(『표준새번역 개정판』). 여기서는 슈나트 올람과 “땅속 티끌 속에서 잠자는 사람들”이 대비를 이룬다.

 

וצקי רפע־תמדא ינשימ םיבר (단 12:2)

וציקי אלו םלוע תנש ונשיו (렘 51:39, 57)

 

곧 비슷한 구조로 쓰여있는 두 곳에서 올람은 아드마트 아파르(“땅의 먼지”)와 동의어로 쓰인 것을 알 수 있다. 곧 시간적 올람이 공간적 올람을 가리킨다는 말이다. 이번에는 이 세 곳을 모두 나열하면 모두 죽음의 다른 측면을 각각 보여주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וצקי רפע־תמדא ינשימ םיבר (단 12:2)

וציקי אלו םלוע תנש ונשיו (렘 51:39, 57)

תומה ןשיא־ןפ (시 13:4)

 

곧 다니엘 12장은 땅이라는 장소로서의 아래세상을, 예레미야 51장은 시간적인 속뜻을 지닌 공간적 올람으로서의 아래세상을 그리고 시편 13편은 죽음이라는 아래세상의 질적인 측면을 강조한다고 말할 수 있다. 이렇게 놓고 볼 때, 예레미야 51장에 나오는 슈나트 올람의 올람은 장소를 가리키는 말로 옮길 수 있는 근거를 찾을 수 있다.

아래세상 또는 저 세상에서의 잠을 죽음으로 표현한 문헌으로는 수메르어 『룰릴을 위한 애곡』(The Lament for Lulil)을 그 예로 들 수 있다. 이 이야기에는 죽은 오라비가 자신을 위해 슬피 울면서 어서 일어나라고 애원하는 누이에게 하는 말이 나온다. Thorkild Jacobsen, “Death in Ancient Mesopotamia.” in Death in Mesopotamia (ed. Bendt Alster; Mesopotamia Copenhagen Studies in Assyriology 8; Copenhagen: Akademisk Forlag, 1980), 22.

 

 

나는 내 침대에, 아래세상의 먼지에 누워 있어.

사람들 가운데에서도 가장 아래에.

나는 잠에 빠져, 악몽에 빠져 누워 있어.

가장 못된 인간들과 함께.

누이야, 나는 침대에서 일어날 수가 없구나.

 

이 수메르어 본문은 예레미야 51장과 다니엘 12장의 표현과 매우 흡사한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아래세상에서 자는 잠에 대한 이야기는 메소포타미아의 문헌 뿐만 아니라 이집트어 문헌에서도 많이 발견된다. Thomas H. McAlpine, Sleep, Divine & Human, in The Old Testament (JSOTSup 38; Sheffield: JSOT Press, 1987), 136-139.

이러한 근거로 우리는 예레미야의 슈나트 올람을 “저 세상에서 자는 잠” 또는 “아래세상에서 자는 잠”으로 읽을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저 세상의 잠을 잠잘 것이다.

다시는 깨어나지 못할 것이다.

 

그들은 아래세상에서 잠을 잘 것이다.

다시는 깨어나지도 못한 채.

 

나가는 말

 

우리가 문제 삼은 구절은 모두 구문형에 등장하는 올람이다. 이들은 “저 세상 사람들”(므테이 올람, 암 올람), “저 세상으로 가는 길”(오락흐 올람), “저 세상에 있는 집”(*베이트 올람)을 말하며 예레미야 20장의 경우는 특이하게도 “저 세상을 임신하다”(하라트 올람)는 경우이다. 이를 다시 정리하면 이렇다.

 

םלוע יתמ “저 세상에 있는 죽은 이들”(시 143:3, 애 3:6)

םלוע םע “저 세상 사람들”(겔 26:20)

םלוע חרא “저 세상으로 가는 길”(욥 22:15)

*םלוע תיב “저 세상에 있는 집”(전 12:5)

םלוע תנש “저 세상에서 자는 잠”(렘 51:39, 57)

םלוע תרה “저 세상을 임신하다”(렘 20:17)

 

여기 “저 세상”은 모두 “아래세상”으로 옮길 수도 있을 것이다. 다만 이 올람에는 시간적인 속뜻이 담겨있다고 말할 수 있다. 시편 49편과 KAI 34와 35를 참조하라. 아카드어 문헌으로는 무덤 새김글인 OIP 2 151 Nos. 13과 14가 같은 경우라고 말할 수 있다. 이환진의 앞의 논문 47-62쪽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