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토르 위고의 [사탄의 종말]의 의미와 구조
아카님이 좌도에 관해 공부할 때에는 '사탄의 종말'과 '자유의 성경'을 두 권을 읽어보라고 쓰신 글을 보고 관련 자료를 찾아보았습니다.
국회도서관 논문 복사 서비스로 사탄의 종말에 관련된 논문을 4부정도 배송 받았는데, 함께 읽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조금씩 타이핑해서 올려보려고 합니다!
빅토르 위고의 [사탄의 종말]의 의미와 구조
김희경
(이화여자대학교)
차례
1. 인류의 서사시 : [사탄의 종말]
2. 미완성의 유작. [사탄의 종말]의 출판된 구조와 원고의 집필 시기
2-1. 품의 출판된 구조
2-2. 원고의 집필 시기
3. ‘한밤중의 사탄’의 한탄 : 빛을 회구하는 어둠
4. 위고에게 있어 악이란 무엇인가
4-1. 창조에서의 필요악인 물질
4-2. 사탄의 추락 : 빛에서 멀어지는 추락
5. 사탄의 구원
5-1. 영혼을 재현하는 자유천사 ange liberte의 지옥으로의 하강
5-2. 사탄의 재탄생
6. 맺는말
1. 인류의 서사시
빅토르 위고의 서사적 작품인 사탄의 종말은 ‘위고가 생각하는 사탄’의 종말을 그린 것으로 이 작품에는 인류의 윤리적 문제의 바탕을 이루는 악의 개념을 새로이 정의하려는 시도와 함께 인간 구원이라는 문제 해결의 시도가 드러나 있다.
“운문으로 된 이야기”라는 그리스어의 어원에서 기원하는 서사시 lepopee가 19세기 초반에 낭만주의와 함께 등장하였을 때, 그 내용에 있어서 예전의 것과는 다른 새로운 의도를 품고 있었다. 이 시기에 나타난 서사시들에는 19세기의 문학사에 탁월한 혜안을 보여줬던 레옹 셀리에가 라마르띤의 말을 인용하여 잘 지적해주었듯이, “이제 더 이상 민족적이거나 영웅적인 데에 그치지 않고 나아가 전 인류의 서사시”가 되고자 하는 열망을 지녔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이러한 성격을 지닌 19세기의 서사시가 이제 더 이상 문학장르의 구분이라는 의미만을 지니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운문이든, 산문이든, 그 형태나 기술적인 문제들은 이제 그 논의의 중심에서 벗어나게 되고 서사시가 그려내려고 하는 세계관이 중요한 관심사로 떠오른 것이다.
시대나 민족이라는 시간적이고 공간적인 제약을 뛰어넘어 ‘인류 공동의 보편적인 서사시’를 그려내려 했던 낭만주의의 ‘인류의 서사시’가 겨냥하고 있는 것은 분명 ‘인류의 진보’라는 주제였지만, 이 때의 진보는 물질적인 진보보다는 종교적인 의미를 포함하는 정신적인 진보를 더 우위에 두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 시기의 낭만주의적 서사시가 종교적인 의미, 특히 존재의 신비적인 의미를 추구하였다고 문학사가 단언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인간 구원이라는 문제가 대두되는 것은 이러한 분위기에서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사탄의 종말’이라는 주제 또한 이러한 분위기에 아주 적합한 것으로서 구원의 주제와 연관되어 문인들의 상상력을 자극하며 자주 등장하게 된다.
빅토르 위고의 사탄의 종말은 비록 완결 짓지 못한 유작으로 발표되었지만 인류의 대서사시를 그려내려는 시대적 열망에 충실히 답하는 작품으로서, 새롭지 않은 주제를 새로운 관점으로 전개시킨 부분이 적지 않은 위고의 서사적 걸작으로 꼽히는 작품이다. 그래서인지 일찍부터 위고의 어떤 다른 걸작들도 불러일으키지 못한 비평가들의 관심을 불러모아 훌륭한 많은 연구서들을 배출시킨 작품이기도 하다.
제목 자체에 그대로 드러나 있는 ‘사탄의 종말’이라는 작품의 주제는 기독교의 교리에 위배된다. 천사의 신분에서 반항으로 영벌을 받아 추락한 사탄의 존재와 그가 지배하는 악의 세계가 하나님의 지배하에 있는 선의 세계와 맞서있다는 것을 실제적으로 믿는 기독교 정통교리에 맞서, 이러한 사탄의 구원의 문제를 결부시키는 것 자체가 이단이 아니라면, 적어도 비주류의 대담한 사고를 드러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대담한 주제들은 대번에 원죄설과 같은 기독교의 다른 교리들을 문제삼게 된다. 기독교 사제들이 쿠데타를 인정하는 것을 보고 망명시기에 더욱 심해진 위고의 반교권주의의 영향도 있겠지만, 위에서 언급했던, 인류의 구원을 표방한 ‘인도주의’라는 낭만주의의 세계관이 기독교 정통교리에서의 원죄설과 악의 절대적 존재를 받아들일 수 없게 만들었을 것이다. 악의 절대적 존재와 구원이라는 문제는 양립하기가 쉽지 않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사탄의 종말’이라는 대담한 주제를 시도하는 위고의 작품에서 악에 대한 새로운 개념을 보게 되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2. 미완성의 유작, 사탄의 종말의 출판된 구조와 원고의 집필시기
2-1. 작품의 출판된 구조.
사탄의 종말 집필시기는 두 단계로 나뉘어져 이루어진다. 그 두 단계의 집필시기는 1854년 1월에서 5월까지, 그리고 1859년에서 1860년까지의 두 기간으로 알려져 있다. 작품의 이야기는 ‘지상 밖에서’와 ‘지상에서’라는 두 차원에서 한번씩 교차하며 이루어진다. 우선 출판된 대로의 작품구성으로 따라가 보면 다음 순서를 따른다.
먼저, ‘지상 밖에서, (어둠이 만들어졌다)’의 제목으로 사탄의 추락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이 제목은 성경의 창세기에 나오는 ‘빛이 만들어졌다’를 그대로 본떠 반대의 내용을 제시한 것으로 사탄이 어둠 속으로 추락하는 것을 따라가고 있다. 추락하면서 사탄의 입에서 내뱉어진 말들은 악의 화신들을 만들어낸다. 이 추락하는 중에 천사의 날개에서 하얀 깃털 하나가 떨어져 나와 심연의 가장자리에 머물러 있다. 신은 떨어지지 않은 그 깃털을 심연에 던지지 말라고 명한다.
‘지상에서’, 악이 성행한다, 홍수가 일고, 사탄이 어둠으로 만든 그의 딸 이지스-리리트가 세상을 지배하고 있다. 신이 세상을 다시 소생하도록 명하여 물이 내려가고 세상이 다시 등장하지만, 카인이 아벨을 죽일 때 썼던 세 가지 도구들(못, 막대기, 돌)이 이지스-리리트의 수중에 들어가게 되어 인간의 죄악의 씨앗을 이루게 된다. 이 죄악의 씨앗들은 검, 십자가(교수대), 감옥이라는 세 가지 상징으로 전개되며 전쟁, 맹신 압제라는 인간 사회의 악의 세 가지 형태를 낳게 된다. ‘지상에서’의 이야기는 이러한 악의 상징들을 제목으로 한 세 가지 에피소드로 전개된다. 그리고 이 에피소드는 각각 인류역사의 세 시기에 할당된다. 검은 선사시대에 교수대는 그리스도 출현의 시기에 감옥은 1789년 혁명의 시기에 대응된다. 이 중 첫 번째 에피소드가 제 1권에서 전개되는데 여기에서는 선사시대의 정복자이며 지금의 바빌로니아 지방의 칼데아의 전설적인 왕인 넴로드가 등장하여 하늘을 정복하려는 무모함을 보이다가 벼락을 맞고 떨어지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지상에서 전쟁은 점점 그 기세를 더하게 된다.
다시, ‘지상 밖에서’는 이 에피소드의 제목이기도 한, ‘사탄의 깃털’이 신의 시선으로 빛나는 천사의 형상으로 바뀌고 자유라는 이름을 얻는다.
‘지상에’로 다시 돌아오면 예수를 처단했던 십자가를 상징으로 그리스도의 수난기를 상기시킨다. 여기에서 예수는 사제들에 의해 희생되는 것으로 드러냄으로서 위고의 반교권주의를 알아볼 수 있다.
마지막으로. ‘지상 밖에서’는 어둠 속에서 사탄이 하는 한탄으로 이어진다. 제일 먼저 쓰여진 이 부분은 신의 사랑을 호소하는 사탄의 이례적인 모습으로 시사해주는 바가 크다. 두 번째 부분에서는 사탄의 딸인 자유천사가 신의 허락을 받고 심연으로 내려가 사탄의 또 다른 딸인 이지스-리리트와 싸워 무화시키고, 사탄이 구원받도록 돕는다.
마지막으로 할당된 ‘지상에서’의 세 번째 권인 ‘감옥’은 제목만이 남겨졌을 뿐, 쓰여지지 않았다. 프랑스 대혁명을 다루게 될 이 부분이 쓰여지지 않으면서 이 작품은 미완성으로 남게 된다. 따라서 결론부분도 지상에서의 부분은 제외된 채로 하늘에서의 이야기만으로 이루어진다. 사탄이 용서를 받아 다시 루시퍼 천사로 다시 태어나는 것으로 이 이야기는 마무리된다.
비록 작품이 작가에 의해 완성되지는 못했지만, 제목에 그대로 보여지는 주제는 그 여정이 충분히 드러나 있다.
2-2. 원고의 집필 시기
2-2-1. 1854년 1월에서 5월까지, 저지섬에서
1854년 1월 20일 [Satan]이라는 제목으로 288행의 시구가 완성된다. 이 시구들은 뒤에 세 번째 ‘지상 밖에서’의 첫 번째 이야기를 이루는 “한밤중의 사탄” 부분과 네 번째 ‘지상 밖에서’의 “용서받은 사탄”의 일부분에 들어가게 된다.
1854년 2월에는 ‘지상에서’의 첫 번째 이야기인 ‘검’에서의 넴로드의 에피소드를 시작하여 2월에는 지상에서의 제 1권 ‘검’의 많은 부분이 이루어진다.
1854년 3월에는 “어둠이 만들어졌다”의 거의 대부분이 이루어진다.
1854년 4월에는 첫 번째의 ‘지상 밖에서’의 “어둠이 만들어졌다”의 뒤를 잇는 “어둠 속에 들어감”과 ‘어둠에서 나옴’이 쓰여지고, 5월까지 ‘검’의 나머지 부분이 이루어지면서 집필은 중단된다.
2-2-2. 1859년 11월에서 1960년 4월까지, 게른지 섬에서
1859년 11월 16일에 “나는 [사탄의 종말]을 다시 시작했다”라는 메모를 하고, 그해 12월에서 1860년 4월까지 ‘십자가’ 전체와 두 번째 ‘지상 밖에서’의 이야기인 ‘사탄의 깃털’을 끝낸다.
이러한 집필이 이루어지는 도중인 1860년 2월에 세 번째 ‘지상 밖에서’의 첫 번째 이야기인 ‘한밤중의 사탄’의 일부와 마지막을 이루는 ‘용서받은 사탄’의 일부분을 써서 완성하고 3월에는 세 번째 ‘지상 밖에서’의 두 번째 이야기인 ‘자유천사’부분을 거의 완성한다.
1860년 4월중에 세 번째 ‘지상 밖에서’의 ‘한밤중의 사탄’의 두 번째 항목에 끼워있는 ‘새들의 노래’를 쓰고, 해야 할 것에 대한 4월 15일의 메모를 마지막으로 집필은 다시 중단된다.
1860년 4월 25일에 위고의 수첩에서 발견된 다음의 메모는 이 작품의 작업의 중단을 확실하게 알려주는 것이 된다. “나는 오늘 원고함에서 [레 미제라블]을 꺼냈다.”
간략하게 살펴본 원고의 집필시기에는 주목하게 되는 몇 가지 점들이 있다. 일단 이 서사시의 문을 열게되는 원고 시작의 시점(1854년)이 [관조시집]의 한가운데 들어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그래서 작품의 모태가 되는 사탄의 한탄으로 시작되는 처음의 원고, ‘한밤중의 사탄’은 서사시라기보다는 서정적인 분위기에 잠겨있음을 지적하는 평자들이 많다.
1854년까지의 초기 집필시기에서 관심을 끄는 또 다른 대목은 이 시기에 쓰여진 ‘어둠이 만들어졌다’의 아홉 번째 항목에 이미 ‘추락하는 천사의 날개에서 떨어져 나온 깃털 하나가 심연 가장자리에 남아있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사실이 우리의 주목을 끄는 이유는 사탄의 구원을 위해 이미 초창기부터, 이 서사시의 백미 중의 하나인 양쪽 세계에 걸친 중간 존재인 자유천사의 구상이 있었음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원고의 집필과정을 보면, 많은 평자들이 궁금해하는 미완성으로 남을 수밖에 없는 이유가 짐작되는 부분이 있다. 이 작품이 처음 쓰여진 1854년은 저지섬에서 1853년부터 작가가 경도되어 있던 강신술의 영향으로 계시적인 분위기에 젖어있던 때로, 1855년부터 시작된 [신]의 집필과 더불어, [관조시집]의 마무리 작업을 위해 [사탄의 종말]은 일시 중단되었을 거라는 레옹 셀리에의 설명은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1855년 10월에 게른지섬으로 이주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오고, 이때에는 1856년 4월에 출판된 [관조시집]은 이미 집필이 끝난 상태였다. 새로운 섬에서는 [관조시집]의 성공이 가져다 준 경제적인 안정감과 함께 심리적인 안정감을 찾게 된 작가에게 현실적인 작품을 쓸 것을 요구하는 출판사의 강력한 권고로, 작가는 [세기의 전설들]에 몰두하게 되면서, [신]과 [사탄의 종말]은 또다시 원고함으로 밀려나게 된다.
그러나 첫 번째 집필시기와 두 번째 집필시기 사이에도 사탄에 대한 작품의 언급은 간혹 있어왔다. 그 중에서도 눈에 띄는 것은 1859년 6월에 쓰여진 [세기의 전설]의 서문에 나타난 내용이다. “인류, 악, 무한이라는 세 가지 양상으로 나타나는 존재라는 유일한 주제를 다루게 될 시를 계획”하면서, 그 존재의 세 가지 양상을 각각 하나씩 드러내 보여줄 세 작품들을, 즉 [세기의 전설들], [사탄의 종말], [신]을, 한 연작으로 계획했던 당시의 위고에게는 아직도 [사탄의 종말]이라는 작품이 그의 작품세계에서 중요한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왜 이 작품은 미완성으로 남게 되었을까? 이 점에 대한 평자들의 설명은 분분하다. 어떤 평자는 프랑스 혁명이 너무 가까운 과거사이기에 서사시의 소재가 되기에 무리가 있었을 거라고 했지만, 레옹 셀리에는 이 점에 대해서 단호하게 이견을 보인다. 위고는 어느 누구보다도 현재의 역사를 서사적 차원으로 잘 옮길 수 있는 힘을 지닌 작가라는 것이다. 하지만 자유천사가 바스티유 감옥을 무너뜨리는데 개입하는 것만은 무리였을 거라는 것이 그의 지적이다. 더불어 그의 의견에 따르자면, 위고는 [레 미제라블]을 다시 시작하면서 [사탄의 종말]에 대한 미련이 없어졌을 수 있다는 것이다. 폴 쥠토르가 분명하게 제시하였던 “1860년 이후의 사탄은 장발장이다.”라는 명제가 보여주듯이, 위고는 다른 작품에서 훌륭하게 그 의도를 펼쳐 보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작품의 미완성에 대한 또 다른 의견이 있다. 폴 베니쉬의 의견으로는, 위고가 망명지에서 바스티유감옥의 점령만으로 악이 종결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어느 누구보다도 뼈져리게 느꼈을 것이라는 것이다. 이렇다 보니 카인의 범죄도구였던 돌은 무너진 바스티유감옥이 아니라 시지프스의 바위로 느껴졌을 것이고, 1789년의 혁명을 사탄의 구원과 종말이라는 주제와 연결시키기에는 무리가 있었을 거라는 것이다.
셀리에와 베니쉬 둘 다의 지적은 공통점을 지니는데, 모두 사탄의 구원이라는 신화를 역사에 그대로 대입하기가 어려웠을 거라는 점을 들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위고의 평자들은. 남아있는[사탄의 종말]의 원고가 추락과 구원이라는 구도를 보여주는데 손색이 없는 훌륭한 서사시임을 부정하지 않는다.
우리는 미완으로 남겨진 역사의 부분은 놔둔 채로, 주로 ‘지상 밖에서’ 이루어지는 구원의 여정을 따라가려고 한다.
3. ‘한밤중의 사탄’의 한탄 : 빛을 회구하는 어둠
[사탄의 종말]은, 위에서도 언급했지만, 1854년 1월 20일에 끝마쳐진 288행으로된 ‘사탄 Satan’이란 시를 모태로 태어나게 된다. ‘용서받은 사탄’의 부분을 제외한, 이 부분은 출판된 책에서 세 번째 ‘세상 밖에서’의 첫 번째 이야기, ‘한밤중의 사탄’으로 나오게 된다.
이 이야기의 처음은 대뜸 이렇게 시작한다. “나는 그를 사랑해!” 그리고 그 절의 마지막은 이렇게 부르짖는다. “나는 신을 사랑해!”사탄이 신을 사랑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표현은 단도직입적이다.
나는 그를 사랑해!, 밤, 감옥무덤, 산송장, (…)
깊은 구렁텅이, 지옥, 심연이여! 나는 신을 사랑해! (…)
온갖 정신의 짝, 빛이여!
온갖 사고의 불꽃, 태양이여! 생기여!
너희들은 도대체 어디에 있는 것이냐?
나는 너희들을 찾는다. 오 고통스러워라!
신을 사랑하는 사탄은 빛을, 생기를 찾고 있다. “예전에 떠오르는 순수한 빛이었고, 빛나는 이마를 갖고있던 대천사였던” 사탄에게 지옥은 “빛을 사랑하지만” 빛이 “부재”하는 어둠이다.
떠오르는 빛, 순수한 서광, 예전의 내가 그랬었다. 내가!
나는 찬연히 빛나는 이마를 지닌 대천사였다. (…)
지옥은 영원한 부재이다.
지옥은 사랑하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오호라! 나의 빛은 어디에 있느냐? 나의 생기와 나의 광명은 도대체 어디에 있느냐?
대천사 루시퍼였던 사탄은 자신의 빛을 잃어버린 자이며, 지옥은 빛이 사라져 그리움을 자아내는 장소가 된다. 위 예문에서 보듯이, 사탄과 지옥과 같은 ‘세상 밖에서’ 일어나는 초월적인 일들에서 심정적인 분위기가 느껴지는 것은 흥미롭다. 여기에서의 사탄과 지옥의 개념은 기독교 정통교리에서보다 상당히 완화되어 달라져있음을 알 수 있다. 기독교 교리에서는 사탄과 지옥은 실재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개념이나, 위고는 이 개념들이 실재하는 것이라고 믿지 않았던 것이다.
악마가 신을 사랑하는 주제는 19세기 다른 작품들에서 찾아볼 수 있지만, 막스밀네르가 잘 지적하였듯이, 위고의 독창성은 사탄 자신이 용서받아야 하는 이유로 드는 존재론의 필연적인 결과라는 논거와 이를 제기하는 태도의 당당함에서 찾아볼 수 있다.
오 신이여, 용서하기를! 내가 용서받아야 하는 것은 너 때문이야.
내 영속성은 네 영속성을 그늘지게 해.
네 눈. 광명 앞에서는 어느 것도 머물러 있어서는 안돼.
모든 것은 변하고, 늙어가 변모되어야 해.
너 혼자만이 존재하지, 네 앞에서 모든 것은 나이를 먹어야 해.
너의 파란 하늘 어느 구석에 앉아있는 환영을 보는 것은,
영원한 신 앞에 있는 영원한 사탄을 보는 것은
너의 광채를 가리는 귀찮은 구름일거야.
“용서를 받아야 하는 것은 신 너를 위한 것”이라는 항변이다. 신만이 영원히 존재하고 그 이외의 모든 존재는 변해야 하며 영원히 존재할 수 없지 않겠냐는 것이다. 그러므로 영원히 용서받을 수 없는 사탄, 즉 영원한 사탄의 존재는 이러한 신의 개념에서 볼 때는 신, 자신에게 오점이 될 뿐이지 않겠냐는 이야기이다. 신에게 용서를 구하는 사탄의 이러한 태도는 기존에 있었던 사탄에 대한 완화된 태고, 즉 회개를 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두어 그의 용서를 생각하는 태도와는 전혀 다른 것이다. 여기에서 사탄은 회개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단지 신에 대한 사랑을 토로하듯이, 예전에 가졌던 빛에 대한 그리움만이 있을 뿐이며, 사탄 자신이 용서받아야 하는 것은 존재가 따르게 되는 당연한 논리적인 귀결이라는 것만을 항변하고 있다. 이러한 논리를 따라간다면, 사탄이 추락한 이유는 벌을 받을 만한 행위를 해서가 아닌 것처럼 느껴진다. 물론 그 자신이 내세우는 자신의 죄는 있다. 부러워 시샘을 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욕심이 많아서 벌을 받아 추락하게 된 사탄은 욕심을 부리지 않을 테니 용서해달라는 것이 아니라 나를 용서해주지 않으면 신, 당신에게 오점이 되니 용서를 해야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도대체 사탄은 신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기에 이리도 당연하고도 당당하게 자신의 구제를 요구할 수 있는가?
위고의 신의 개념은 무한을 품을 수 있는 중심으로 자주 나타난다. 이 서사적 작품에서 나타나는 신의 이미지도 다른 시집, 예를 들어 신을 주제로 한 미완성 시집 인 [신]이나, [관조시집]에 나타난 신의 개념과 다르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신, 모든 것의 심장,
천사, 별, 인간, 그리고 짐승이
그 자신 안에 지니고 있는 이 빛나는 아버지,
무리들이 그 주위로 모여드는 중심,
유일하게 살아있고, 유일하게 진실하며, 유일하게 불가결한 이 존재,
신은 모든 것의 중심이며, 무한한 모든 것의 마음 안에 중심으로 자리잡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세 번째 ‘세상 밖에서’의 ‘한밤중의 사탄’ 사이사이에 들어가기로 되어있던 일종의 ‘세상은 찬가들’은 분명 사탄의 한탄과는 대비가 되고 있다. 아쉽게도 제목만이 남겨놓고 쓰여지지 않은 부분이 많지만, 그 중에서 1860년에 쓰여진 ‘새들의 노래’에서 우리가 위에서 지적한 신의 개념을 확인할 수 있는 부분이 많이 나온다.
모든 것은 밤낮으로 자신의 목적지로
이끌려진다.
강물은 길을 잘못 드는 일없이 떠돈다
모든 것이 목적지로 이끌려지게 되어있고, 그 모든 것이 한 곳에 모일 수 있기 위해서는 그 목적지는 중심일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는 빛이 있다.
우리는 빛 속으로 되돌아간다.
우리는 우리의 어머니인 광명 속으로
흘러간다.
새는 숲에서 나와
빛으로 사라지는 듯하다.
우리가 <되>돌아가는 곳은 빛이다. 되돌아간다는 것은 나온 곳으로 다시 간다는 말이다. 빛을 ‘어머니’라는 말로 다시 받은 것도 이러한 의미에서 이해가 된다. 이제 목적지에 빛이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위고의 많은 작품에서 나타나는 빛이 가시적인 현상으로서의 빛이 아니듯이, 여기에서의 빛도 현상적인 빛만을 일컫는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 이 빛 안에서 모든 것은 하나가 되어 맞닿게 되고, 후각이 시각과 만나는 공감각현상이 일어나며, 자연은 신성한 것이 된다.
그는 모든 것이 하나이기를 원했다.
향기는 순수한 서광과 자매였다.
하나의 노래 안에서
서로 맞닿아 있는 사물들은
신성한 자연이었다.
모든 것이 하나가 되기를 원하는 ‘그’는 여기에서는 ‘미지의 그자’로만 밝혀지지만, 우리는 창조주를 가리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이 창조주가 존재의 크고 작은 것들의 차이를 넘어, 서로 다름의 차이를 넘어, “새벽이 저녁과 결합하는” 조화로움을 만드는 것은 그의 사랑이다.
그는 어느 날 원하기만 하면 되었다.
사랑은 거대한 하모니가 되었다.
모든 존재가 거기에 있었다.
그는 존재의 광란에 그의 지혜를 섞었다.
사탄은 이러한 사랑에서 배제되었다고 생각한다. 모두들 그들의 삶 속에서 느끼는 이 사랑을 자신만은 느끼지 못하는 불행한 자임을 자각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사탄인 자기까지 그 안에 들어가야 이러한 신의 개념이 완전해진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그를 볼 때, 그가 타락한 것은 전적으로 그의 잘못 때문이 아니라 사랑을 받지 못해서이지 않을까 하는 의구심마저 든다. 그는 자신이 “행복했다면 착각했을 것”이라고 말하지 않는가.
이러한 불행 속에서 사탄은 복수를 꿈꾼다. 사랑 받지 못해 꿈꾸는 사탄의 복수에서 우리는 악의 모습을 알아볼 수 있다.
3. ‘한밤중의 사탄’의 한탄 : 빛을 회구하는
[사탄의 종말]은, 위에서도 언급했지만, 1854년 1월 20일에 끝마쳐진 288행으로된 ‘사탄 Satan’이란 시를 모태로 태어나게 된다. ‘용서받은 사탄’의 부분을 제외한, 이 부분은 출판된 책에서 세 번째 ‘세상 밖에서’의 첫 번째 이야기, ‘한밤중의 사탄’으로 나오게 된다.
이 이야기의 처음은 대뜸 이렇게 시작한다. “나는 그를 사랑해!” 그리고 그 절의 마지막은 이렇게 부르짖는다. “나는 신을 사랑해!”사탄이 신을 사랑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표현은 단도직입적이다.
나는 그를 사랑해!, 밤, 감옥무덤, 산송장, (…)
깊은 구렁텅이, 지옥, 심연이여! 나는 신을 사랑해! (…)
온갖 정신의 짝, 빛이여!
온갖 사고의 불꽃, 태양이여! 생기여!
너희들은 도대체 어디에 있는 것이냐?
나는 너희들을 찾는다. 오 고통스러워라!
신을 사랑하는 사탄은 빛을, 생기를 찾고 있다. “예전에 떠오르는 순수한 빛이었고, 빛나는 이마를 갖고있던 대천사였던” 사탄에게 지옥은 “빛을 사랑하지만” 빛이 “부재”하는 어둠이다.
떠오르는 빛, 순수한 서광, 예전의 내가 그랬었다. 내가!
나는 찬연히 빛나는 이마를 지닌 대천사였다. (…)
지옥은 영원한 부재이다.
지옥은 사랑하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오호라! 나의 빛은 어디에 있느냐? 나의 생기와 나의 광명은 도대체 어디에 있느냐?
대천사 루시퍼였던 사탄은 자신의 빛을 잃어버린 자이며, 지옥은 빛이 사라져 그리움을 자아내는 장소가 된다. 위 예문에서 보듯이, 사탄과 지옥과 같은 ‘세상 밖에서’ 일어나는 초월적인 일들에서 심정적인 분위기가 느껴지는 것은 흥미롭다. 여기에서의 사탄과 지옥의 개념은 기독교 정통교리에서보다 상당히 완화되어 달라져있음을 알 수 있다. 기독교 교리에서는 사탄과 지옥은 실재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개념이나, 위고는 이 개념들이 실재하는 것이라고 믿지 않았던 것이다.
악마가 신을 사랑하는 주제는 19세기 다른 작품들에서 찾아볼 수 있지만, 막스밀네르가 잘 지적하였듯이, 위고의 독창성은 사탄 자신이 용서받아야 하는 이유로 드는 존재론의 필연적인 결과라는 논거와 이를 제기하는 태도의 당당함에서 찾아볼 수 있다.
오 신이여, 용서하기를! 내가 용서받아야 하는 것은 너 때문이야.
내 영속성은 네 영속성을 그늘지게 해.
네 눈. 광명 앞에서는 어느 것도 머물러 있어서는 안돼.
모든 것은 변하고, 늙어가 변모되어야 해.
너 혼자만이 존재하지, 네 앞에서 모든 것은 나이를 먹어야 해.
너의 파란 하늘 어느 구석에 앉아있는 환영을 보는 것은,
영원한 신 앞에 있는 영원한 사탄을 보는 것은
너의 광채를 가리는 귀찮은 구름일거야.
“용서를 받아야 하는 것은 신 너를 위한 것”이라는 항변이다. 신만이 영원히 존재하고 그 이외의 모든 존재는 변해야 하며 영원히 존재할 수 없지 않겠냐는 것이다. 그러므로 영원히 용서받을 수 없는 사탄, 즉 영원한 사탄의 존재는 이러한 신의 개념에서 볼 때는 신, 자신에게 오점이 될 뿐이지 않겠냐는 이야기이다. 신에게 용서를 구하는 사탄의 이러한 태도는 기존에 있었던 사탄에 대한 완화된 태고, 즉 회개를 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두어 그의 용서를 생각하는 태도와는 전혀 다른 것이다. 여기에서 사탄은 회개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단지 신에 대한 사랑을 토로하듯이, 예전에 가졌던 빛에 대한 그리움만이 있을 뿐이며, 사탄 자신이 용서받아야 하는 것은 존재가 따르게 되는 당연한 논리적인 귀결이라는 것만을 항변하고 있다. 이러한 논리를 따라간다면, 사탄이 추락한 이유는 벌을 받을 만한 행위를 해서가 아닌 것처럼 느껴진다. 물론 그 자신이 내세우는 자신의 죄는 있다. 부러워 시샘을 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욕심이 많아서 벌을 받아 추락하게 된 사탄은 욕심을 부리지 않을 테니 용서해달라는 것이 아니라 나를 용서해주지 않으면 신, 당신에게 오점이 되니 용서를 해야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도대체 사탄은 신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기에 이리도 당연하고도 당당하게 자신의 구제를 요구할 수 있는가?
위고의 신의 개념은 무한을 품을 수 있는 중심으로 자주 나타난다. 이 서사적 작품에서 나타나는 신의 이미지도 다른 시집, 예를 들어 신을 주제로 한 미완성 시집 인 [신]이나, [관조시집]에 나타난 신의 개념과 다르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신, 모든 것의 심장,
천사, 별, 인간, 그리고 짐승이
그 자신 안에 지니고 있는 이 빛나는 아버지,
무리들이 그 주위로 모여드는 중심,
유일하게 살아있고, 유일하게 진실하며, 유일하게 불가결한 이 존재,
신은 모든 것의 중심이며, 무한한 모든 것의 마음 안에 중심으로 자리잡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세 번째 ‘세상 밖에서’의 ‘한밤중의 사탄’ 사이사이에 들어가기로 되어있던 일종의 ‘세상은 찬가들’은 분명 사탄의 한탄과는 대비가 되고 있다. 아쉽게도 제목만이 남겨놓고 쓰여지지 않은 부분이 많지만, 그 중에서 1860년에 쓰여진 ‘새들의 노래’에서 우리가 위에서 지적한 신의 개념을 확인할 수 있는 부분이 많이 나온다.
모든 것은 밤낮으로 자신의 목적지로
이끌려진다.
강물은 길을 잘못 드는 일없이 떠돈다
모든 것이 목적지로 이끌려지게 되어있고, 그 모든 것이 한 곳에 모일 수 있기 위해서는 그 목적지는 중심일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는 빛이 있다.
우리는 빛 속으로 되돌아간다.
우리는 우리의 어머니인 광명 속으로
흘러간다.
새는 숲에서 나와
빛으로 사라지는 듯하다.
우리가 <되>돌아가는 곳은 빛이다. 되돌아간다는 것은 나온 곳으로 다시 간다는 말이다. 빛을 ‘어머니’라는 말로 다시 받은 것도 이러한 의미에서 이해가 된다. 이제 목적지에 빛이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위고의 많은 작품에서 나타나는 빛이 가시적인 현상으로서의 빛이 아니듯이, 여기에서의 빛도 현상적인 빛만을 일컫는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 이 빛 안에서 모든 것은 하나가 되어 맞닿게 되고, 후각이 시각과 만나는 공감각현상이 일어나며, 자연은 신성한 것이 된다.
그는 모든 것이 하나이기를 원했다.
향기는 순수한 서광과 자매였다.
하나의 노래 안에서
서로 맞닿아 있는 사물들은
신성한 자연이었다.
모든 것이 하나가 되기를 원하는 ‘그’는 여기에서는 ‘미지의 그자’로만 밝혀지지만, 우리는 창조주를 가리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이 창조주가 존재의 크고 작은 것들의 차이를 넘어, 서로 다름의 차이를 넘어, “새벽이 저녁과 결합하는” 조화로움을 만드는 것은 그의 사랑이다.
그는 어느 날 원하기만 하면 되었다.
사랑은 거대한 하모니가 되었다.
모든 존재가 거기에 있었다.
그는 존재의 광란에 그의 지혜를 섞었다.
사탄은 이러한 사랑에서 배제되었다고 생각한다. 모두들 그들의 삶 속에서 느끼는 이 사랑을 자신만은 느끼지 못하는 불행한 자임을 자각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사탄인 자기까지 그 안에 들어가야 이러한 신의 개념이 완전해진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그를 볼 때, 그가 타락한 것은 전적으로 그의 잘못 때문이 아니라 사랑을 받지 못해서이지 않을까 하는 의구심마저 든다. 그는 자신이 “행복했다면 착각했을 것”이라고 말하지 않는가.
이러한 불행 속에서 사탄은 복수를 꿈꾼다. 사랑 받지 못해 꿈꾸는 사탄의 복수에서 우리는 악의 모습을 알아볼 수 있다.
4. 위고에게 있어 악이란 무엇인가
4-1. 창조에서의 필요악인 물질
사탄은 복수할 대상과 수단으로, 중심에 자리잡은 창조주의 영향권 아래에서 모든 것이 균형 잡히고 조화로운 이 창조된 현실의 세계를 택한다.
나는 우주의 얼굴을 망가뜨릴거야.(…)
나는 이상을 부수기 위해 현실을 집어들거야.(…)
나는 창조물의 모든 범죄를 드러낼거야, 공포.
배신, 살해, 아찹, 티베르, 아트레를,
신성하고 빛나는 너의 창조위에!
현실세계의 모습을 훼손하려는 의도는 우선 물질을 혼란스럽게 어지럽히면서 시작한다.
물질은 이마에 내 표적을 지니고 있지. 나는 물질에 싸움을 거는거야. (…)
신이 그의 법칙아래 통제하고 있는 바다와 육지를
나와 더불어 혼돈을 만들도록 강요하는 거야. (…)
어느 곳에서나 지옥으로 혼돈을 완성하는 거야.
신의 법칙 아래 질서를 유지하고 있는 창조물들, 특히 바다나 육지를 이루는 물과 대지와 같은 물질들을 놓고 신과 다투어 어떻게든 혼돈을 야기하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지옥은 이러한 혼돈을 완성시키러, 혼돈이 이루어진 다음에 온다. 창조주의 창조 이후에 사탄의 새로운 방식의 창조는 이러한 무질서한 물질에 기초해있으면서 재앙을 가져오게 된다. 결국 창조주가 창조한 것으로 창조주를 압박하겠다는 계획이다.
여호와는 지금 떨며 그가 창조한 것 어디에서나
사탄의 창조를 느낀다. (…)
나는 창조주가 이루어 놓은 것 속에서 그를 죽이고 싶다.
나는 그의 작품 속에서 그를 고문하고 싶다.
인간 영혼 전체에서(…) 그가 신음하는 것을 듣고 싶다!
정신인 그가 물질 아래에서 발버둥치기를 원한다. (…)
보라, 바라보라, 하늘이어! 처형대는 세상이다.
나는 음침한 집행인이다. 나는 신을 처형한다.
사탄은 정신으로서의 신이 그의 작품인 혼란스러운 물질 아래에서 괴로워하기를 바란다. 복수를 꿈꾸는 사탄은 신을 죽일 처형장이 세상이 될 거라고 호언장담을 하고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정신과 물질의 이분법적인 대결을 볼 수 있다. 세상은 이러한 대결이 이루어지는 장소가 되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지상에 있는 모든 것은, “짓밟힐 수 있는 신성한 무언가를 가지고 있다”는 말에서, 대결이 존재의 경계가 서로 다른 것들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존재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을, 세상의 일을 빌어 말하자면, 내전이 이루어짐을 알 수 있다.
여기에 이르러, 사탄은 자신을 악으로 명확하게 규정하고 있다.
나는 악이다. 나는 밤이다. 나는 공포이다.
이렇게 본다면, 악이란 개념은 양자 대결의 구도에서 물질의 축과 관련이 있다고 해도 큰 무리는 없을 듯하다.
그렇다면 조금 성급한 감이 있지만, 서사시의 제목이 그 의도를 보여주듯이, 세상에서 악을 완전히 없앨 수 있을까라는 의문을 제기해보자, 하지만 악의 소탕을 말하기 전에 악의 기원에 대해서 좀 더 살펴보는 것이 신중할 것이다.
위고가 생각하는 악의 기원을 알아보기 위해서는 1854년 10월에 쓰여진 [관조시집]의 그 유명한 시, “어둠의 입이 말하는 것”을 들어보아야 한다.
신은 무게가 없는 존재만을 창조했다.
그는 그 존재를 눈부시고, 아름답고, 순수하고, 근사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불완전하게 만들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같은 높이에서,
창조주와 동등하게 된 창조물은,
그 완벽함으로 가없는 무한 속에서,
신과 섞여들어 혼동되었을 것이고,
창조는, 그 빛에 힘입어
창조주로 귀환하였을 것이며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예언자가 그 안에서 꿈꾸는 신성한 창조는,
존재하기 위해서는, 오 심오함이여, 불완전해야했다.
이리하여 신은 우주를 만들었고, 우주는 악을 이루었다.
그런데, 최초의 잘못은
최초의 무게였다.
신은 고통을 느꼈다.
무게는 형태를 취했고, 새잡이가 떨면서 버둥거리는 새를 데리고 달아나듯,
그 무게는 추락하면서 필사적인 천사를 질질 끌며 떨어졌다.
악은 이루어졌다. 그런 다음 모든 것은 심해져갔다. (…)
영혼은 떨어졌고, 악들은 그 양을 더해가는구나, (…)
그래서 이 무더기로 된 모든 세상들이 이루어졌고,
이 덩어리 뒤로 어두운 밤이 태어났다.
악은 물질이다. 검은 나무, 숙명적인 과실.
전개되는 논리는 이렇게 요약된다. 완벽한 창조자는 자신과 거의 차이가 없는 존재를 창조하였지만, 그래도 불완전한 존재를 창조하였다. 존재하기 위해서, 다시 말하면, 이 세상에 실존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불완전해야 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순수 정신인 신으로 귀의해버려 이 세상에 존재 할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 불완전성은 무게를 갖는 형태를 지니는 것으로 간주된다. 그 무게로 존재는 추락하고, 악은 만들어진다. 존재와 함께 추락하는 것은 영혼이다. 악은 더욱 번성하고 어둠이 이루어진다. 이 모든 추락을 만드는 것은 중력을 가져오는 물질이다. 그래서 물질이 악이다.
“세상에 없던 중력을 가져온 것이 처음의 잘못이었음”으로 보는 악의 개념에 대한 위고의 독특한 입장에서는, 평자들이 잘 지적하였듯이, 태초에 악은 행위로 말미암아 생기지 않았다. 절대자의 창조행위와 연관된 악의 개념은 존재 자체의 결과로 나온 것이며, 창조과정에서 저절로 생긴 것으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그 어느 누구의 잘못이 아닌 여기에서의 악의 개념에는 인간의 원죄개념은 없다. 단지 신에 의해 창조된 창조물은 그 물질성으로 말미암아 악으로 나아가게 되는 것이다. 창조를 위해서 악은 필요했다는 말이다.
“어둠의 입이 말하는 것”에 따르면, 이러한 창조 이후의 모든 존재는 많은 단계들을 거쳐 창조자에 귀의하여 통합된다. 피에르 알부이가 잘 지적하였듯이, 이제 선과 악이라는 실천적 행위의 기준은 존재가 신에서 나와 창조되는 과정과 다시 신으로 통합되는 과정을 나타내는 존재의 두 양상으로 나타나게 된다.
이러한 악의 개념에 입각하여, 세상에서 악을 없앨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다시 해본다면,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악이 없어지면, 세상도 없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이 세상 자체가 벌의 결과이다. 하지만 신은 자신이 창조한 이 세상, 그 어느 것 밖에 있지 않기에, 세상은 신의 영역 밖에 있지 않다. 따라서 창조행위 때 발생한 악도 신에서 벗어나 있지 않다.
너희들은 징벌의 세계의 문턱에서 살고 있다.
하지만 너희들은 완전히 신의 영역 밖에 있지 않다.
창공에서는 태양이며, 재 속에서는 불씨인 신은,
우주만물의 목적이기에, 어느 것 밖에 있지 않다.
그의 시선은 빛인 것과 마찬가지로 번갯불이기도 하다.
그러니, 모든 것은 창조이다, 약조차도.
왜냐하면 가면의 내부엔 여전히 얼굴이 있기 때문이다.
물질로 나타나는 악은 창조된 존재의 겉을 싸고 있는 외피이다. 창조된 모든 존재들 안에는, 그것이 아주 하찮은 것이라 할지라도, 신이 보편적인 목적으로서 내재되어 있다.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모든 존재에 편재해 있는 중심의 이미지로서의 위고의 신의 개념은 모든 존재가 그것을 향하여 나아가게 되어 있는 목적이 된다. 신이 모든 것을 끌어들이는 자력이 있는 중심이 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우주의 어두운 탄생을 알려주었던 “어둠의 입”이 중반 이후에 모든 존재의 희망을 이야기하는 것은 모든 존재에게는 여러 단계를 거치는 중심에 있는 신으로의 회귀가 이미 예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제 모든 존재에게 예정되어있는 ‘신으로의 회귀에 왜 자기만 제외되어야 하는가’라는 어둠 속에서 하는 사탄의 한탄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자기가 제외된다면 모든 존재를 포함한다는 신의 개념에 오점이 되지 않겠느냐는 항변도 또한 일리가 있음을 시인해야 한다. 사탄이 한탄하며 드러내는 속내는 잘못의 용서를 비는 것이 아니라 통합되려는 갈망이자, 회귀하려는 갈망을 드러내는 것이다.
4-2. 사탄의 추락 : 빛에서 멀어지는 추락
이 서사시의 처음은 ‘사탄의 추락’을 묘사한 ‘어둠이 만들어졌다’로 열린다. 대천사의 추락을 묘사한 것은 회화에서는 오래 전부터 있어왔지만 문학에서는 드물었다. 서사시를 여는 장대한 서문으로의 이 부분은, 레옹 셀리에의 말을 빌리면, 아주 별 것 아닌 것으로, 즉 추락이라는 간단한 움직임으로 풍부한 장면을 연출하고 있다.
허우적거리며 떨어지는 사탄의 손에 잡히는 바위를 보아 공간적으로 수직으로 떨어지는 추락의 이미지를 느끼게 해주지만, 그러한 묘사는 자주 있지 않다. 대부분 여기에서 묘사되는 것은 구체적이라기보다는 추상적이다. 그 추상성은 시간의 개념에서도 발견된다. “사 천년 전부터 그는 심연으로 떨어지고 있었다.”라고 시작되는 첫 구절에서, “사 천년 전부터”라는 시간을 나타내는 상황보어는 실제적인 시간의 의미보다는 ‘끊임없이’라는 의미로 받아들여진다.
심연에는 혼돈만이 있다. 이러한 추상적인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사탄의 추락의 이미지를 보아, 세상이 그 형태를 다 갖추기 이전에 사탄이 추락했을 가능성을 지적하는 폴 쥠토르 견해에 막스 밀네르가 동의를 보낸다. 두 연구자는 더 대담한 추측을 내놓는다. 그것은 사탄의 추락이 세상을 만드는 최초의 물질을 낳게 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그것은 추락을 아래로의 하강으로만 보기보다는 빛으로부터의 멀어지는 것으로 보면 이해할 수도 있는 일이다. 신의 품에서 벗어나게 된 사탄은 자연히 신성한 빛에서 멀어지게 되어 어둡게 되는데, 바로 이 어둠에서 물질, ‘어둠의 입’이 태초에 이루어졌다고 한 최초의 비형상적 물질이 나오게 되었을 거라는 추측을 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어둠의 입’이 알려준 대로, 최초의 잘못이 중력이며, 추락하게 한 물질이 악이라는 창조의 의미 과정이 보이려는 순간이다.
사탄의 추락으로 빛이 사라짐과 동시에, 빛이 사라지는 것 자체가 추락의 효과가 된다. “악은 빛이 사라지면서 생긴다는 놀라운 세계관”을 이 서사시의 첫 부분, ‘그리고 어둠이 만들어졌다’는 보여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빛이 없는 한에서 물질은 악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물질 그 자체는 악하지 않다. 빛을 머금고 있는 만물이 균형과 조화를 이루는 것을 ‘새들의 찬가’에서 우리는 보았기 때문이다.
사탄은 중심의 빛으로부터 멀어지고 있다. 추락은 위에서 아래로의 하강이 아니라 중심에서 끝없는 원주의 변두리로 멀어지는 것이다. 바닥이 없는 나락으로의 추락이다. 자칫 밋밋하게 묘사될 수밖에 없는 사탄의 추락이 이 서사시의 첫 장면은 ‘빛이 무정하게 사라지는’ 묘사로 그 극적 밀도를 높여간다.
사탄이 손에 걸리는 바위를 붙들고 잠시 멈추었을 때, 높은 곳에서의 그 누군가가 처음 외치는 것은 “떨어져라! 태양들이 너의 주위에서 꺼질 것이다”라는 저주였다. 그리고 계속되는 그 저주는 추락과 어둠의 관련성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마침내 태양이 하나밖에 남지 않았을 때, 사라져가는 그 별을 잡기 위해 날개를 퍼덕이며 달려나간다.
그는 날고 있었다. 무한은 끊임없이 다시 시작한다.
이 바다 위에서 그가 하는 비행은 거대한 원주를 이루고 있었다.
사탄이 다가갈수록 끝없이 밀려나가는 무한의 원주에 이르러 사탄은 마지막 남은 별이 죽어가는 것을 목격한다.
저기 태양은 심연 속에서 죽어가고 있었다.
다시 소생시킬 공기도 없는, 안개 속 깊은 곳에서, 별은
음침한 채로, 천천히 부셔져, 식어가고 있었다.
문둥병처럼 퍼지는 어둠 아래에서 짓무르는 궤양 같은 불꽃이
불길한 음밀함 속에 줄어드는 것이 보였다.
숯덩이 같은 불꺼진 세상! 신에 의해 지펴진 불꽃이여!
그 터진 틈으로 아직은 조금의 불기운을 보이고 있었다.
마치 두개골 구멍으로 영혼이 보이는 것처럼.
때때로 외벽을 남실거리는 불꽃은
중심에서 할딱거리며 기어다니고 있었다.
그리고 각각의 분화구에서는 번쩍거리는 검처럼
부르르 떨리는 섬광들이 나왔다가
꿈처럼 소리 없이 사라져갔다.
심연에서 어둠에 잠식당하는 별의 불빛은 흡사 두개골 안에서 가물가물 꺼져가는 영혼은 불빛 같다.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의 시선을 사로잡는 것은 메타포의 수사법을 구사하여 잘 표현해내려는 꺼져가는 별빛보다는 표현의 대체물로 사용된 영혼이라는 말이다. 어둠에 잠식되어 가는 별빛을 위해 영혼이라는 메타포를 사용한 것이라기보다는, 육체 안에서, 더 넓게 말하자면, 물질 안에서 잠식되어 가는 영혼을 그려내기 위해서 사탄이 이제까지 별빛을 쫒아가는 것을 묘사한 것이 아닌가하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중심의 빛으로 나타나는 신에서 멀어져 끝없는 심연의 원주를 맴도는 사탄의 추락의 장면은 우주에서의 별빛이 사라지는 것으로 자신 안에서 영혼의 빛이 꺼져가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 같다. 별빛보다는 영혼의 빛의 소멸이 훨씬 더 신에서 멀어지는 것을 잘 보여주지 않는가. 이렇게 사탄의 추락으로 완벽하게 ‘밤이 만들어졌다’. 그는 밤에 함몰된 것이다.
대천사는 자신이 침몰하는 돛대와 같이,
어둠의 홍수에 익사한 자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는 화강암으로 된 손톱이 있는 날개를 다시 펴고서,
발을 비틀어 꼬았다. 별은 꺼졌다.
“물질이 악”이고, “사탄이 악”이라는 위고의 정의는 이제 신에서 멀어짐, 즉 다시 말하면, 중심의 빛에서 멀어짐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 결과는 내부의 신성이 사라져 영혼의 불빛이 꺼져 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물질이 성하여 영혼이 침식당하는 것과 영혼이 꺼져가면서 물질이 만들어지는 것, 이 두 사실 중에서 어느 것이 먼저인지는 모른다. 거의 동시로 보여진다. 사탄의 추락과 세상의 창조는 거의 동시적인 사건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지상 밖에서’의 초월적인 혼돈의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사탄의 추락을 묘사하고 있는 ‘그리고 밤이 만들어졌다’라는 서사시의 이 첫 부분이 사탄의 내적 드라마를 보여주기 위한 외적 투사처럼 느껴지는 것도 또한 이 때문일 것이다.
추락이 완결된 이 시점에서 바로 뒤이어 반전을 예고할 수 있을 하나의 에피소드가 끼어드는 것은 흥미롭다. ‘그리고 밤이 만들어졌다’의 아홉 번째이자 마지막 부분은 “그런데”라는 반전을 이끄는 접속사로 시작한다.
그런데 천상 가까이, 어느 것도 변하지 않는 심연의 가장자리에,
대천사의 날개에서 떨어져 나온 깃털 하나가
머물러 있었다. 그리고 순수하고 하얀 채로, 떨고 있었다.
대천사의 날개에서 떨어져 나온 깃털 하나는 심연의 가장자리에 머물러 있다. 떨어지지 않은 순수한 하얀 깃털은 이제까지 신에서 멀어지는 여정을 되돌려 신에게로 다시 통합할 수 있는 여정을 인도할 것이다. 1854년에 쓰여진 이 부분은 작품구상 초기부터 이미 사탄의 구원은 예정되어 있음을 알려주고 있다.
5. 사탄의 구원
5-1. 영혼을 재현하는 자유천사의 지옥으로의 하강
추락하는 사탄의 날개에서 떨어져 나온 이 깃털은 죽은 자가 세상에 남겨두고 간다는 “일종의 빛”으로 비유된다. 죽은 자가 남기고 간다고 추정되는 이러한 빛을, 우리는 망자의 영혼이라 부르지 않는가? 우리의 예측이 설득력을 갖게 되는 것은 그 다음의 묘사 때문이다.
이 깃털은 영혼을 가졌을까? 그것을 누가 알겠는가?
이것은 이상한 모양을 하고 있다. 이것은 쓰러져 있었지만,
빛나고 있었다. 이것은 떨어진 빛이다.
위의 예문에서 깃털의 몇 가지 특성을 알아볼 수 있다. 추락에서 남게된 깃털은 영혼과 관련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며, 그것은 빛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의 흥미를 끄는 것은 “떨어진 빛”이다. 빛과 어둠의 대조와 상승과 하강의 대조가 연결된다면, 당연히 빛과 상승, 그리고 어둠과 하강의 연관성이 자연스럽다. 여기에서 빛과 하강이 연관된 것은 모순어법으로 볼 수 있다. 서로 다른 이질적인 것들의 만남을 역설적으로 표현하는 모순어법은 서로 상반되는 두 세계를 연결시키려는 시도이다. 깃털이 보여주는 이러한 모순적인 모습은 그의 이중적 성격, 그리고 이 성격으로 기인하는 그의 중재자적인 모습을 예고하고 있다. “심연과 하늘사이에서 떨고 있는” 이 깃털의 이 이중적인 성격은 신의 개입으로 더욱 더 분명해진다. 이 깃털에 갑자기 내리꽂히는 “놀라운 눈빛”은 “부드러운 초자연적인 빛으로” 깃털을 “영혼이 내려앉은 한 여인의 형태”로 변모시킨다. 이렇게 “지옥과 천국”의 합작으로 태어난 딸, 결국 신과 사탄의 공동의 딸이 ‘자유천사’이다.
위고의 서사사에서 사탄의 구원은 기독교에서 말하듯이 예수의 역할에 의해서도, 신의 직접적인 개입에 의해서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사탄의 구원은 이중적 태생을 지니는 자유천사의 매개로 이루어진다. 자유천사가 영혼을 재현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빛에서 멀어져간 사탄이 딸을 통해 구원받는다는 것은 초월적인 힘에 의한 구원이 아니라 자신의 잃어버린 영혼을 되찾아 재탄생 된다는 의미가 될 것이다.
사탄에게는 자유천사 말고도 다른 딸이 있다. 사탄이 어둠에 완전히 묻히는 것으로 끝나는 ‘그리고 밤은 만들어졌다’를 뒤이어 ‘지상에서’ 일어나는 악의 번창은 사탄이 직접 나서서 하지 않는다. 지상 전체가 ‘어둠 속으로 들어가는 것’은 사탄의 딸인 이지스-리리트가 맡는다. 이 이지스-리리스는 숙명을 나타내고 있다. 천사의 이름이 자유인 것과 대조적이다. 이제 사탄이 구원되기에 앞서, 우리는 사탄의 두 딸인 자유천사와 이지스-리리트의 한판 대결을 보게 될 것이다. 두 세계의 대결이 신과 사탄이라는 초자연적인 극단적인 대결이 아닌, 사탄의 두 딸의 대결, 이렇게 미리 말할 수 있다면, 영혼과 물질의 대결로 완화되었음을 목격하는 것은 흥미롭다. 지옥으로 내려온 천사는 자신의 빛으로 그 힘을 발휘한다.
숙명을 관장한다는 “세상의 검은 영혼”인 이지스-리리트는 자유천사와 맞서며, “자신은 영원한 어둠의 바탕을 지닌 밤이며 천사 너는 일개 별빛일 뿐”이라고 무시하려하지만, 이 작은 별은 어둠 전체를 삼키는 위력을 보인다.
자유천사가 숙명의 환영을 무화시키는 동안 자고 있는 사탄의 모습은 어둠의 장막에 빠져있는 가운데 ‘인간의 얼굴’로 나타난다. 이 모습을 본 천사는 눈물을 흘린다. 그런데 이 눈물은 별빛이 흐르듯 두 눈에서 흐르는 빛이다. 눈에서 빛을 흘리며 우는 천사와 인간의 얼굴을 한 사탄의 만남은 인간이 잃어버린 영혼을 만나는 장면으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지독히도 불행하며 지독히도 악독한 자는
헐떡이고 있었다. 불멸의 처녀는 찬란히 빛나는
그녀의 머리를 기울이며
짐승 속에 묻힌 천사 쪽으로 팔을 뻗었다.
자유천사는 “불멸의 처녀”로 나타나고 사탄은 “짐승 안에 묻혀있는 천사”로 나타나는 위 예문의 표현은 이중성을 지닌 인간과 인간의 불멸의 영혼으로 읽어도 무방할 것이다.
천사에서 추락하여 어둠에 잠길 때 그 깃털에서 자유천사가 나왔듯이, 영혼은 멸하지 않고 살아남았던 것이다.
당신에게서 살아남은 게 저에요. 나는 당신의 딸이지요.
자유천사의 지옥으로의 하강은 빛이 어둠으로 하강하는 역설을 보여주는 일이다. 사실 사탄이 있는 어둠은 신의 눈길이 닿지 않는 곳이었다. 대천사가 사탄일 수 있었던 것은, 우리가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신의 빛에서 멀어졌기 때문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상기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신의 눈길이 미치지 못하는 어둠에 빛이 들어온 것이다. 그 빛은 사탄의 딸인 천사의 매개로 들어온다. 다시 말하면 인간이 자신의 영혼으로 잃어버린 그 빛을 되찾는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자유천사는 추락하기 이전의 사탄의 모습을 사탄에게 상기시킨다. 예전의 사탄은 신과 함께 자연을 이끌었던 빛의 대천사였다.
오! 내가 당신 날개에 섞여 있을 때, 사탄은
무한한 공간의 여명 속에서 어떤 천사였던가!
신은 선이라고 이름지었고, 당신은 스스로 아름다움이라 하였지 (…)
심연은 신의 의해서 그랬던 것처럼 당신에 의해서도 인도되었어.
어느 날 원소들은 신, 그를 위해 당신를 택했고 (…)
세상은 당신의 날갯짓 리듬을 따라 (…) 탄생했지 (…)
순수하고 힘찬 당신은 빛났지. 백합 같은 대천사여!
영웅을 따라 군대가 진격하듯 당신을 따라 성좌들이 행진했었지.
예전의 사탄은 심연과 원소들을 이끌고 우주를 창조하는데 기여했던 천사이다. 그의 날갯짓의 리듬에 따라 세계들이 태어나고 성좌들의 길을 인도하는 길잡이이기도 했던 ‘빛나는 힘’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일들은 모두 “자유천사가 그의 날개에 섞여있을 때”라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그 모든 힘에 영혼이 깃들어 있을 때라는 말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세상이 다시 평온을 되찾는 것도 영혼을 되찾음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을 자유천사의 간청으로 알 수 있다.
나로 인해 세상이 성스러운 창공으로 다시 들어오도록 해줘요
에덴이 다시 나타나도록! (…)
신은 나를 자유가 되도록 했는데, 당신은 나를 해방으로 만들어 줘요!
내가 사람의 이마에서 무한의 빛이 나오도록 하게 해줘요.
내가 모든 것을 구하도록 해줘요 당신의 축복 받은 한 쪽인 내가!
예문에서 세상은 빛 속으로 <다시> 들어오고, 에덴이 <다시> 나타난다. 이 다시라는 말은 회귀를 의미한다. 영혼을 되찾게 되면서 예전의 모습으로 되돌아간다는 말이다. 위고에서 신의 개념이 중심의 이미지로 나타나는 것을 상기하면, 영혼의 상실로 이 빛에서 멀어졌다가 영혼의 복구로 다시 회귀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모든 것이 자유천사 덕분이라고 하지 않는가. 영혼을 재현하는 자유천사가 해방이 될 수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5-2. 사탄의 재탄생
‘자유천사’의 마지막 여덟 번째 이야기는 사탄이 재탄생되는 흥미로운 장면을 보여주고 있다. 자유천사가 타락한 아버지에게 애원하며 하는 말은 잠든 갓난아이에게 방울방울 떨어지는 젖과 같이 나타난다. 눈을 뜨지 않은 채로 이 말을 들으며 경련을 일으키는 사탄을 보면, 사탄의 내부에 심한 갈등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내부의 싸움이 지난 다음 사탄의 이마에는 영혼의 빛이 나오게 된다.
이 사랑스런 처녀가 마치 입을 벌리고 자고 있는 갓난아이이게
젓을 방울방울 떨어뜨리듯, 말을 하고 있을 때,
사탄은 (…) 때때로 잠결에 격렬하게 떠는 것 같았다. (…)
그의 얼굴은 어두운 싸움터 같았다.
그의 얼굴에서는 선과 악이 자기들끼리 싸우고 있었다. (…)
그는 눈을 뜨지 않았지만 무거운 눈꺼풀 아래에서
알지 못할 영혼의 섬광이 보였다. (…)
마침내 어느 최고의 천사가 던졌었을 어떤 빛이
열로 들뜬 커다란 이마에서 나오는 것이 보였다.
위 예문은 자유천사를 동정녀로 표현하면서 젖을 주는 여인이 처녀임을 강조하는 듯하다. 딸이 타락한 아버지에게 새로운 생명을 주는 것이다. 갓난아이같이 된 사탄이 새로이 탄생하게 되는 것은 어머니의 탯줄에서 나오는 육체적인 탄생이 아니고 영혼의 각성에 의한 정신적 재탄생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어머니에게서 아들에게로 이어지는 혈연관계가 아닌, 딸의 젖을 먹는 아버지라는 이러한 새로운 탄생에 대한 위고의 독특한 이미지에서, 평자들은 죄인에게서 태어난 딸의 구원을 받는 점을 들어, 구원은 죄에서 나온 것이라든지 구원은 죄를 낳게 한 반항에서 나왔다는 해석을 하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어머니와 아들의 관계를 신에서 멀어지는 물질적 창조의 순행으로 본다면, 딸의 영혼이 아버지를 살리는 이러한 관계는 신으로 귀화하는 정신적 창조의 역행으로 보여진다. 내부의 갈등 이후, 사탄의 두 눈썹아래에서 영혼의 빛이 보이고, 결국에 가서 열로 들뜬 사탄의 이마에서 빛이 나오게 되는 것은 사탄이 영혼을 되찾은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영혼을 다시 찾은 사탄은 이미 구원받은 것으로 볼 수 있다. 마지막으로 신의 인정만이 남아있다. 신은 자유천사, 즉 인간영혼에 의해서만 구원에 관여하고 있다.
천사가 우리들 사이에 있다. 그녀가 했던 일은 너에게 중요하다. (…)
사탄은 죽었다. 다시 태어나라, 오 천상의 루시퍼여!
오라, 이마에 빛을 지니고서 어둠 밖으로 올라오라!
천사가 사탄에게 했던 행위가 중요한 이유가 영혼의 문제가 아니면 무엇이었겠는가? 여기에서 다시 한번 루시퍼 대천사가 되어 하늘로 다시 오르려면 이마의 빛, 영혼의 빛이 있어야함을 새삼 확인해주는 것이다.
4. 맺 는 말
위고의 사탄에게서, 신과 대적하는 대항자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기존의 사탄의 이미지들과는 달리, 오히려 신에게로 편입되고자 애원하는 모습을 보는 것은 매우 흥미롭다. 지상의 악에 직접 개입하지도 않으며, 윤리적인 적대행위가 드러나지 않는 이러한 사탄의 이미지는 인간을 유혹하여 윤리적인 죄로 나아가게 하는 초자연적인 악마가 아니라 추락한 인간자신을 재현하는 듯하다. 인간구원을 상정했던 낭만주의자들은 인간존재의 타락을 전제로 삼고 있는데, 여기에 나타나는 빛을 지닌 루시퍼와 빛을 잃은 사탄이라는 이중적 모습은 인간의 타락 전, 후의 상태에 상응하는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눈을 감고 자유천사의 말을 듣고 있는 사탄의 얼굴이 “선과 악의 싸움터”처럼 나타나는 것을 보면, 위고가 그리고 있는 사탄의 이미지에서 인간의 모습을 보는 것은 어렵지 않다.
일반적으로, 신과 사탄의 개념은 인간의 선악개념을 이끄는, 양자대결의 두 극단을 재현한다. 하지만 위고가 생각하는 사탄은 중심에서 가장 멀어진 한 끄트머리에 위치하는 존재로 나타나면서, 산이라는 존재의 총제성에 포함될 수 있는 가능성을 잃어본 적이 없었다. 아무리 먼 거리에 있는 원주의 끄트머리라 하더라도 중심에서 벗어나 있지 않기 때문이다. 신의 완전성의 개념에 이렇듯 전적으로 연관되어 있는 위고의 악의 개념은 선과 악 사이, 신과 사탄 사이의 절대적인 이원적 대결을 거부하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사탄이 왜 추락하였는가라는 원인은 이 서사시에서 명백하게 밝힐 수 없다. 하지만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사탄의 추락은 빛의 멀어짐과 관련이 있고, 이는 중심의 빛에서 멀어지는 것을 의미하며 어둠은 추락의 결과로 괴로움의 원인임을 알 수 있었다. 사탄의 구원은 이와는 반대방향으로의 진행에서 이루어짐을 또한 확인할 수 있었다. 결국 이 서사시의 구조는 추락과 신에게로의 재통합을 시도하는 구원의 구조로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구조에서는, 선과 악, 그리고 빛과 어둠의 이분법적 구도가 두 요소들 간의 접근 불가능한 분리구도로서가 아니라, 중심에서 나오고 되돌아가는 역동적인 순환구도로 이해됨으로써, 대결의 양상이 완화되어 나타나게 된다.
중심은 모든 원주를 관장할 수 있겠지만, 구원을 위해 초월성 자체가 개입되지는 않는다는 점이 이 서사시의 독특한 점이다. 구원의 매개자가 사탄의 일부분이었던 자유천사이고, 이 천사가 영혼을 재현한다면 타락한 존재를 구원할 수 있는 가능성이 이미 그 존재 자체 내에 내제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자신의 “축복받은 한쪽”인, 영혼을 재현하는 자유천사 덕분에 자신의 빛을 되찾은 사탄의 구원(종말)은 위고의 존재의 구원이라는 구도에서 인간 영혼의 중심적 역할을 다시 확인하게 한다.
이러한 구도는 개인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으로, 낭만주의의 ‘개인의 내면성으로의 추구’를 드러내고 있다. 이러한 구원이 ‘악의 영원한 종말’을 의미할 수 없을 것이다. 이는 어느 시점에 이루어져 영구히 정착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초자연적인 사탄의 실체를 믿지 않았던 위고가 영혼의 빛을 잃게 됨으로써 추락하는 사탄을 그렸다면, 인간은 이러한 사탄의 이미지를 언제 어디서나 다시 지닐 수 있게 될 것이다. 이렇게 감히 이야기 할 수 있다면, ‘사탄은 우리 인간들’일 수 있다. 타락과 구원의 구도는 인간의 마음의 변화만큼이나 반복적인 것이 될 것이다. 이 서사시가 인류의 대서사시를 표방하면서 초자연적인 이야기를 인류의 역사와 같이 병행하여 전개시키려 했음에도 불구하고, 역사적인 부분이 완성되지 못한 이유는 시간의 선형적 흐름을 따르는 역사에 내면적이고 반복 회귀적인 의미를 대입하기 어려웠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거대한 포부를 지녔던 낭만주의시대의 ‘인류의 대서사시’의 주제들은 종말론적인 역사의 시각에서가 아닌 다른 면에서, 즉 언제나 우리의 삶에 되풀이되어 나타나는 신화적 의미에서 우리에게 말을 걸고 있다. 사탄의 주제는 우리가 언제 어디서나 맞닥뜨릴 수 있는 인류의 윤리기준이 되는 악의 주제와 연관되어있는 한 항상 재현 가능한 주제가 될 것이다. 사탄이란 주제를 독특한 관점으로 풀어나간 위고의 서사시 [사탄의 종말]은, 사탄의 인간적인 면모가 보여주는 것처럼, 초자연적인 주제들을 인간의 심리와 정신적 영역에, 그리고 완결짓지는 못했지만 인간역사에서, 내재화시키려는 시도를 함으로써 현대인들에게 시사해주는 바가 크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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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토르 위고의 [사탄의 종말]의 의미와 구조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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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토르 위고의 [사탄의 종말]의 의미와 구조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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