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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스티아 by 그리스 로마의 신화와 전설

달빛정화 2022. 6. 10. 13:08

그리스 로마의 신화와 전설 p57

 

 

(4) 헤스티아

부뚜막과 아궁이의 신 헤스티아는 크로노스와 레아가 낳은 첫째 딸이다. 태어나자마자 아버지에게 먹혔다가 막내 동생 제우스에 의해 구해졌다. 가장 먼저 태어났으나 다른 동생과 마찬가지로 아버지 배 속에서 성장이 멈춘 채 막내의 도움을 기다렸으므로 남매간의 서열은 의미가 없다.

부엌에서 가장 소중한 불씨의 수호신이기도 한 헤스티아는 일찍이 포세이돈과 아폴론의 구혼을 받았으나 이를 거절하고 제우스로부터 처녀로 살 것을 보장받았다. 이런 연유로 헤스티아는 때로 지혜로운 노처녀 고모처럼 받아들여지곤 한다. 스스로 최고신에게 서약한 순결을 지키며 가정의 가장 내밀한 공간에서 부뚜막과 불씨를 지키는 신성한 신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헤스티아는 자신의 이런 직분을 충실히 수행하기 위해서 제우스로부터 순결을 지킬 권리와 함께 인간의 제물을 맨 먼저 맛볼 권리를 받았다고 한다.

헤스티아라는 말은 화덕을 뜻한다. 집안의 화덕이 불씨를 잘 간직하면서 안전하게 보존되어야 하듯이 헤스티아도 올림포스에서 다른 어느 신보다 조용히 자신의 역할에 충실하면서 스캔들 없이 지냈다. 그래서 올림포스의 12신을 꼽을 때 자신의 자리를 아프로디테나 디오니소스에게 양보하는 경우가 많다.

헤스티아는 로마 신화에서의 베스타와 신격을 같이 한다. 그러나 동일한 신격에 대한 두 민족의 신앙에는 차이가 있었다. 로마의 베스타는 국가적으로 제사를 지내면서 숭배하는 중요한 신이었다. 로마에는 이 베스타 신전의 성화를 지키는 여섯 명의 신녀가 있었다. 이들 신녀들은 5-10세 사이의 소녀 가운데서 선발되어 30년 동안 이 직에 종사했다. 30년 봉사 이후에는 결혼이 허용되었으나 이들은 대부분 결혼하지 않고 그냥 살았다고 한다.

그리스 신화에는 불과 관련된 직분을 신격에 포함하고 있는 신이 헤스티아 외에 하나 더 있다. 헤파이스토스가 바로 그 신이다. 그러나 대장장이 신 헤파이스토스의 불은 헤스티아의 불과 그 성격을 달리한다. 그래서 헤파이스토스의 불은 기술과 생산의 불이다. 헤파이스토스의 불은 때로 전쟁과 살상의 수단을 만드는 불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헤스티아의 불은 인류와 가정의 평화를 지키는 생명과 안식의 불이다.

우리나라에도 조왕신이라는 이름의 부뚜막신이 있다. 조왕신은 부뚜막에 살면서 가족의 건강과 집안의 길흉을 관장하는 신이다. 이 신에 대한 공경의 의미로 여인들은 아궁이에 불을 때면서 나쁜 말을 하지 않아야 했고, 부뚜막에 걸터앉거나 발을 디디는 일도 삼가야 했다. 집안의 불씨를 꺼뜨리지 않고 잘 보존하는 일이 조왕신을 잘 모시기 위한 중요한 일의 하나였음은 물론이다.

불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은 고대 어느 사회에서나 찾아볼 수 있다.

그리스 신화의 인류기원 이야기에서도 불과 관련된 이야기가 중요한 축을 이루고 있었음을 볼 수 있었다. 인간을 만든 프로메테우스가 인간에게 베푸는 큰 은혜의 하나가 올림포스의 불을 훔쳐다 주는 것이었고, 이에 대한 제우스의 징벌이 있었다.

고대 그리스의 제전에서 유래한 현대 올림픽에도 이러한 불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인류의 의식이 잘 남아 있다. 올림피아의 헤라신전에서 채화된 성화가 올림픽 개최지까지 불씨를 이어가면서 달리는 것은 신성한 불의 의미를 되새기는 고대 축제의 성격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다.

불은 곧 생명이었고, 이를 훼손하는 것은 죽음에 비견되는 재앙을 의미했다. 신화 속에서 헤스티아가 안정적이고, 순결한 이미지로 전달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