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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바랜 붉은 화려함 - 궁정귀족의 성문화 by 서양사학입문

달빛정화 2022. 4. 23. 13:48

하드 정리하다 눈에 띄여서 올려요~

이전에 올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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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주아와 궁정귀족의 성문화 충돌 by 서양사학입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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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것의 다른 시각에 대한 글~

즉 한 쌍의 패키지인거죠......

사실 달빛지기에게는 내용보다는

이 글을 쓰기 위해 본 책들에 더 눈이 가네요ㅎㅎ

그리고 세련된 매너에 대한 부분을 읽고

책벌레의 하극상 귀족들의 표현을 보면

좀 더 이해가 되지 않을까 싶네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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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서이자, 『문화충돌, 그리고 너그러움의 진화』, 채륜, 2012 노버트 엘리아스, 『매너의 역사』, 신서원, 1998 필립아르에스, 『사생활의 역사3』, 새물결, 2002 테오도르 젤딘, 『인간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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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사입-_궁정귀족문화[최종].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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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바랜 붉은 화려함 - 궁정귀족의 성문화

< 목 차 >

Ⅰ.시작하며- 아름다움의 이중성

Ⅱ.본문

1.“정중한, 상냥한, 전아한, 고상한”- 갈랑트리

2.화려한 관능적 아름다움 - 궁정 바로크

3.억압과 차별의 상징“매너의 학교”

4.무너진 성(性)의 경계선

Ⅲ.마치며 - 궁정귀족 문화는 과연 타락한 것인가?

Ⅰ.시작하며 - 아름다움의 이중성

역사 속에서 다양한 문화의 충돌이 존재한다. 문화충돌은 서로간의 차이 때문에 마찰이 존재하였고, 문화의 공통성보다 차이점을, 융합이나 공생보다는 마찰과 대립의 측면을 부각시켰다. 이번 발제에서 다루게 될 궁정귀족의 문화 역시 부르주아의 문화와 충돌했던 문화였다. 중세시대의 권력과 부를 바탕으로 지배집단으로서 군림해온 궁정귀족들은 제3신분으로 억압을 받던 주변집단인 부르주아가 등장하자 문화적인 면을 포함해 많은 부분의 충돌을 가져왔고 이는 유럽 역사에 많은 변화를 가져다주었다.

17,18세기 궁정귀족들은 부와 권력을 이용하여 사치스럽고 호화스런 생활을 영위했다. 그들은 화려한 건축양식을 이용한 궁전을 지었다. 또한 그들이 사용한 가구와 그들이 입었던 의상에서도 화려하고 사치스러움이 묻어난다. 이러한 점에 대해 신흥계층으로 등장한 부르주아는 불평등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비도덕적 행위라고 비판했고 이는 프랑스 혁명의 가장 커다란 원인이 되었다. 하지만 문화적인 면에서 볼 때, 궁정귀족의 문화는 당대 최고도로 세련된 문화를 만들었다. 그들은 무도회와 춤을 규율화하여 우아함을 보여주었고, 대화법과 생활예절에 있어 많은 법도를 만들었다. 또한 귀부인들이 주축이 돼 시작된 살롱문화는 계몽주의의 씨앗이 되었다는 평가를 받기도한다. 따라서 이번 발제를 통해 궁정귀족들의 영위했던 세련된 아름다움이 부르주아가 비판한 것처럼 타락한 아름다움에 불과한지, 아니면 역사의 승자의 시점에서 왜곡되어진 아름다움인지에 대해 생각해보고자 한다.

Ⅱ.본문

1.“정중한, 상냥한, 전아한, 고상한”- 갈랑트리(galantry)

궁정귀족은 자신들의 권위를 더욱 드높이기 위해 고도의 세련된 태도를 지켰다. 이는 “정중한, 상냥한, 전아한, 고상한”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 갈랑트리(galanrty)라 불렸다. 귀족들을 베르사유에서 갈랑트리의 정신을 담아 생활했는데 그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이 그들의 춤이다. 그들은 ‘사랑의 몸짓, 우아의 권면’이라 불릴 만큼 춤에 다양한 규율을 적용했다. 그들은 다양한 종류의 춤을 만들었는데 특히 그들은 파트너와 함께 하는 춤이 많았다. 콩트르당스 및 커플 춤의 모든 선과 모든 움직임은 안무가와 이론가들에 의해 장식적으로 아름답게 기획되고 패턴화되었다. 궁정귀족에게 있어 춤의 형식 자체가 하나의 대화로서 육체의 귀족적 훈련과 귀족적 사회성을 위한 권장항목이었을 뿐 아니라, 규정된 몸짓 하나하나가 철학적 성찰의 색체를 띄었다.

또한 패션화에 그려진 모습을 통해 궁정귀족의 의상과 그들의 대화모습 등을 볼 수 있다. 궁정귀족의 귀부인들은 자신만의 살롱을 열어 지식인들은 후원했으며 당시 유명한 살롱은 초대받는 것 자체가 진정한 특권으로 여겨졌다. 특히 랑부이에 백작부인의 살롱은 극작가 피에르 드 마리보와 계몽사상가 퐁트넬같은 특권귀족이 참여해 초기 계몽주의 확립에 중심적 역할을 하기도 했다. 살롱문화는 연극, 문학, 철학 뿐만 아니라 대화법과 예절을 꽃피웠고 이는 궁정귀족들의 갈랑트리적 면을 확립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

2.화려한 관능적 아름다움 - 궁정 바로크

프랑스와 스페인 등 가톨릭 국가를 중심으로 발전한 절대주의 왕정은 궁정 바로크를 후원했다. 또한 각국의 절대주의 왕실 역시 예술가에 대한 후원을 아끼지 않았고 이들을 통해 궁정의 위엄을 드높이고자 했다. 프랑스에서는 왕립 아카데미가 루이 14세의 후원을 받게 되었다. 그 이후부터 예술이 단지 왕의 명예를 드높이는 수단으로 활용되게 되었다. 다시 말해 예술은 절대군주의 위신을 높이는 특수가능을 지닌 국가 통치의 한 방법에 불과했던 것이다.

궁정바로크는 화려하고 장식적이며 관능적이고 감각적이다. 일반적으로 이해하기 쉬운 양식을 사용하며 색채가 풍부하고 웅장하다. 특히 강렬한 붉은색과 푸른색, 그리고 흰색을 많이 사용했다. 동시에 예술작품들을 통해 자신을 신비한 그리스‧로마의 신으로 이상화하기도 했다. 특히 ‘태양왕’ 루이 14세는 자신을 태양의 신 아폴론의 모습으로 묘사했다. 그의 어머니인 안 도트리시는 여신 헤라로, 왕비 마리 테레즈는 지혜로움의 상징인 아테나 혹은 순결의 상징 아르테미스로, 수석 대신 마자랭은 세계를 지탱하는 아틀라스로 등장한다. 이렇게 왕가의 사람들을 그리스의 신으로 나타내는 것은 왕가의 신성성을 강조하기 위해서였다.

또 하나, 거대한 베르사유 궁은 루이 13세의 사냥용 별장이었던 것을 루이 14세가 증축하여 완성한 바로크 양식의 궁전이다. 이러한 장엄하고 위압적인 건축물은 통합적이고 강력한 어떤 힘을 연상시킨다. 이는 귀족과 신민들에게 그들은 절대로 이룰 수 없는 과업을 과시함으로써 왕에 대한 존경심을 가지도록 하려는 루이 14세의 정치적 계략이었다. 이런 계략에 의해 한 때 자신의 성에서 왕처럼 군림하던 귀족들은 화려한 베르사유 궁에 들어가 왜소한 모습으로 왕의 신하가 되어야 했다. 그들은 계속된 전쟁과 내란, 폭동 등으로 사멸 혹은 경제적으로 파산하여 생활능력을 상실했기에 궁정에 기거하는 것만이 그들의 유일한 생계수단이 되었기 때문이다. 바로크 문화는 날이 갈수록 더 권위주의적인 궁정문화로 변하였다.

3.억압과 차별의 상징“매너의 학교”

17~18세기 절대주의가 절정에 달했던 이 시기에 베르사유 궁정은 유럽 귀족들이 본 받아야할 ‘매너의 학교’였다. 궁정문화에서는 세련된 매너가 무엇보다 중요한 덕목으로, 이를 갖춘 귀족에게 부와 명예가 보장되었다. 당시 귀족들은 정부인 외에 다른 여자를 애인으로 두어 자신들의 연애 기술을 발전시키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이는 귀족들 사이의 내부 경쟁과 그에 따른 긴장감으로 인해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기 위함이였다. 그래서 귀족들은 상대에 대한 배려, 세련된 기교를 부단히 갈고 닦아야 했으며, 보복 또한 노골적으로 드러나지 않는 미묘한 수위에서 정교하게 행해져야만 했다.

또한 17세기부터 귀족적 궁정사회에서 왕과 귀족, 그리고 부르주아 사이의 의존관계에서 형성되는 절대주의적 궁정예절이 이루어진다. 상공업의 발달로 도시가 발달하면서 농노들이 도시로 이동하면서 봉건제도의 기본이 무너지게 된다. 따라서 국왕을 중심으로 하는 권력의 집중화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그 결과 그 동안 장원을 중심으로 지역의 주인 역할을 하던 봉건 귀족들은 경제적으로 곤란을 겪어야했다.

결국 그들은 왕에게 기댈 수 밖에 없었고 왕이 지배 아래 들어가게 되었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 그들의 권력을 일부 내려놓아야 했고 그러기 위해 필요했던 것이 매너였다, 왕은 귀족들이 가지고 있던 권력이나 그들의 폭력성을 제거하는 수단이 되었던 것이다. 이후 부르주아가 귀족들의 새로운 경쟁자로 등장하면서 귀족들의 생존 또한 위협을 받게 되었다. 이러한 경쟁적인 관계에서 전통귀족들은 세련된 행동양식을 발전시켜 자신들을 부르주아와 차별하면서 자기 보호의 경향을 증가시킨 것이다.

다시 말해 더욱 세련된 매너의 발달은 궁정귀족이 자신을 쫓아오는 부르주아들을 구분시키려는 방어수단이었다. 따라서 귀족들은 일상의 모든 행위에 대해 복잡하기 이를 데 없는 예절들을 만들어 자신들의 특수성을 부각시켰다. 밑에 계층과는 다른 귀족만의 특성으로 매너를 만들어버린 것이다. 이러한 세련미의 발달은 억압과 동시에 사회적 차별의 기준이 되었다.

4.무너진 성(性)의 경계선

부르주아들이 귀족들을 비판함에 있어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했던 것은 귀족들의 결혼관을 포함한 그들의 문란한 성(性)문화였다. 당시 궁정귀족들에게 결혼은 가문유지의 수단,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귀족남편은 아내에게 사회적 신분유지와 정치권력의 획득을 요구했다. 이에 아내는 활발한 사교 활동을 바탕으로 남편이 안정적인 지위를 유지할 수 있도록 했으며, 남편의 지위와 부를 이용해 호화로운 생활을 영위할 수 있었다. 이들의 결혼은 상호 계약적이었기 때문에 부부는 서로에게 얻을 수 없는 사랑을 각자의 애인에게서 찾았다. 대부분의 궁정귀족은 남녀를 불문하고 배우자 외에 애인을 두어 폭넓은 관계망과 연애기교를 반전시키는 일에 몰두하였다.

또한 귀족들의 결혼관 자체가 가문유지의 수단이었기 때문에 근친상간 역시도 많이 행해졌다. 귀족들은 자신의 가문과 혈통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일반 사람들과의 결혼을 거부했으며 자신들의 가문과 품격이 동등하게 판단돼야 만이 결혼이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생각을 가진 귀족이었기 때문에 성적인 쾌락은 그들의 애인에게서 찾을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궁정귀족을 비판하며 등장한 부르주아들은 결혼은 남녀 서로의 자유로운 의사에 근거해서 성립되어야하며 부부는 깊은 애정과 굳건한 정절을 기초로 결합되어야 한다는 이상적인 결혼관을 주장하게 되었고 이는 결국 부르주아 사회에서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졌다, 이러한 이론은 또한 결혼에 있어서 배신 없는 사랑, 즉 ‘일부일처제’의 형태로 나타나게 되었다.

Ⅲ.마치며 - 궁정 귀족 문화는 과연 타락한 것인가?

궁정귀족문화는 여느 다른 문화보다도 “아름다움”이라는 말에 가깝다. 궁정귀족은 자신이 가진 막대한 부를 이용해 화려하고 사치스런 건축과 가구부터 춤과 예절까지 다양한 영역에 있어 품격있는 문화를 완성시켰다. 그러나 이러한 아름다움 이면에 자신들의 권위를 지키기 위해 장치를 해놓았으며 이에 따라 근친상간 같은 문란한 성생활을 하기도 했다.

궁정귀족문화는 분명 현대에는 이해하기 힘든 성문화와 부르주아가 비판했듯 당시의 사회 문제점을 바라보지 못하고 자신들만의 아름다움을 영위했다고 볼 수도 있다. 결국 그들의 잘못된 아름다움은 프랑스 혁명을 통해 처벌받았고 그들은 역사 속에서 사치를 일삼은 어리석은 사회지도층으로 기록되었다.

물론 그들이 영위한 궁정 귀족 문화는 비도덕적인 면이 존재하지만 그들의 문화 내에는 현대사회의 예절에도 영향을 주는 것 역시 많이 존재한다. 또한 궁정귀족 문화 중 하나로 시작 된 살롱문화는 계몽주의 씨앗이 되었다라고 보는 만큼 궁정귀족 문화는 한쪽에 치우쳐서 해석하기 보다는 보다 균형잡힌 시각으로서 바라보아야 그들이 영위한 “아름다움”을 보다 깊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참고문헌>

서이자, 『문화충돌, 그리고 너그러움의 진화』, 채륜, 2012

노버트 엘리아스, 『매너의 역사』, 신서원, 1998

필립아르에스, 『사생활의 역사3』, 새물결, 2002

테오도르 젤딘, 『인간의 내밀한 역사』, 강, 2001

장 루이 플랑드렝, 『性의 歷史』, 동문선, 1998

서이자,「절대주의 귀족과 근대 부르주아의 섹슈얼리티(Sexuality)」p.142

1) 커플들이 둘씩 짝지어 마주한 가운데 길게 열을 지어 추는 일련의 춤 형식을 말한다. 여러 나라마다 많은 민속적 춤들이 콩트르 당스에 기반을 두고 있고 커플댄스로서 그 변형태를 가진다. 18세기 프랑스에서 가장 유행한 춤으로 기원은 17세기 프랑스 궁정으로 도입된 영국의 민속무용이라고 말해진다. 템포가 빠르고 경쾌하며 2/4박자 6/8박자 등 2박자 계통의 춤이다. 넓게는 왈츠나 폴카도 콩트르 댄스에서 타왔다고 말하기도 한다.

2) 패션회화라 부르기도 한다. 귀족 등 상류계층의 모습을 주제로 삼았다. 딱히 초상화 혹은 장르화로 말할 수 없기 때문에 정확한 장르 구분은 애매하다. 당시 아카데미가 규정한 예술 위계에 맞춰 넣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3) 17세기와 18세기의 살롱은 성격이 다르다. 17세기의 살롱은 엄격하게 궁정귀족만 참여할 수 있었다. 하지만 18세기 로코코 살롱은 17세기에 비해 개방적이여서 다양한 지식인들도 참여할 수 있었다.

4) 아르놀트 하우저,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2』, 창작과 비평사, 1999, p.260-262

5) 붉은색은 추기경의 옷 색깔이자 가톨릭의 권력을 상징하는 색으로 루터는 붉은색을 격렬하게 혐오했는데 붉은 색을 가리켜 ‘바빌론의 창녀’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6) 이지은, 『귀족의 은밀한 사생활』, 지안, 2012, P.106

7) 아르놀트 하우저,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2』, 창작과 비평사, 1999, p.253-254

8) 예절의 예로서 ‘발걸음이 너무 늦어도 또 너무 빨라서도 안된다’라는 규제는 이후 ‘귀족은 하인처럼 빨리 걸어서도 안되고 부인네처럼 느릿느릿 걸어서도 안 된다’는 것으로 변하였다.

9) 부르주아가 궁정귀족의 성적인 문란함을 극적으로 비판한 것의 단적인 예는 프랑스 혁명 당시 마리앙투아네트의 포르노그라피와 그녀와 관련한 스캔들에 단적으로 나타난다. 당시 마리앙투아네트는 자신의 아들과 근친상간관계라는 스캔들이 있었으며 다양한 애인들에 둘러싸여 성관계를 맺는 포르노그라피 그림이 그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