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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학자 오강남의 인류의 스승 - 모세, 아모스, 아불라피아, 모세 드 리옹

달빛정화 2022. 3. 25. 13:59

예전에 올린 글들이랑 같이 보면 잼나용~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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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된 인물 모세 by 모세는 파라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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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트라그라마톤에 대한 연구 by 이집트인 모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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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세, 위대한 카발리스트이자 연금술사 by 사마엘 아운 웨오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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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못해 예언자가 된 모세 by 책의 민족 : 유대인 디아스포라 4천년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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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끄적)모세는 어떻게 홍해(만잘라 호수)를 가를 수 있었나? (feat. 강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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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교&이집트 최강의 마법사 모세 (신의 42글자 이름, 신의 72가지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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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세

그리스트교 초석 놓은 유대교 창시자

‘출애굽’ 통해 이스라엘 민족 출현

야훼신 첫 등장 … 단일 신관 완성

램브란트가 그린 모세의 초상화.

모세는 역사 아닌 설화 속 인물

일반적으로 유대교의 창시자를 모세(Moses)라 한다. 물론 유대교 학자들이나 그리스도교 신학자들 중에 극 보수주의자가 아닌 이상 모세를 실제 역사적 인물로 보는 이는 거의 없다. 전통적으로 모세를 ‘모세 오경(五經, Pentateuch)’의 저자라 보기도 하지만 이것도 물론 역사적으로 정확한 사실이라 보는 학자들은 거의 없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명심해야 할 것은 모세가 역사적으로 실재 인물이냐 아니냐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하는 사실이다. 그가 역사적 인물인가 아닌가 하는 것과 상관없이, 그가 이끌었다고 하는 ‘출애굽(Exodus)’ 사건에 대한 이야기는 전통적으로 유대인들이 지켜온 신앙의 초석이 되었다고 하는 점을 부인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런 점을 염두에 두고 그의 이름에 얽힌 사건과 그가 전했다고 하는 가르침을 살펴보기로 한다.

모세의 이야기는 유대인 성경 둘째 책인 「출애굽기」에 나온다. 한 가지 지나가면서 언급할 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유대인들의 경전을 ‘구약’이라 칭하지만, 유대인들 앞에서 그들이 가지고 있는 경전을 ‘구약’이라 하는 것은 실례다. 요즘은 대부분 ‘히브리어 성경(Hebrew Bible)’이라 하든가 유대인들처럼 ‘타나크’라 부른다.

애굽서 노역 시달리던 동족 구해

「출애굽기」에 나오는 모세의 이야기를 역사와 연관시킬 경우 모세를 전통적으로 기원전 13세기 사람으로 본다. 모세 당시 히브리인들, 혹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집트(애굽)에서 노예생활을 하고 있었다. 노예들의 인구 증가가 급격해지자 이집트 당국은 노예들이 침략군과 합세할 경우를 염려해서 노예들의 인구를 제한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히브리 노예들이 낳는 아이들 중 남자 아이는 모두 죽이라고 명했다. 모세의 부모도 모세를 낳고 3개월간 숨겼지만 아기 울음소리가 커지면서 더 이상 숨길 수 없게 되자 아기를 물이 새지 않을 바구니에 담아 나일 강 갈대 사이에 띠웠다. 마침 이집트 왕 바로의 딸이 밤에 강가로 목욕하러 나왔다가 아기를 발견했다. 멀리서 이를 지켜보고 있던 아기의 누나가 달려와 공주에게 유모가 필요하냐고 묻고, 아기의 어머니를 소개했다.

아기는 어머니를 유모로 하여 어느 정도 자란 다음 정식으로 공주의 양아들이 되었다. 공주는 아기에게 ‘모세’라는 이름을 주었는데 ‘건져내었다’는 뜻을 지닌 이름이었다. 모세가 어른이 된 후, 하루는 어느 이집트 사람이 히브리인을 치는 것을 보고 그 이집트 사람을 쳐 죽였다. 다음 날 두 히브리 사람들이 싸우는 것을 보고 동포끼리 싸우지 말라고 하자 그 중 하나가 “당신이 이집트 사람을 죽인 것처럼 나도 죽이려 하는가”하고 대들었다. 이에 자기가 이집트 사람을 죽인 것이 탄로 났음을 감지했다. 바로가 이 사실을 알고 “모세를 죽이려고 찾았다.” 모세는 도망하여 동쪽으로 홍해를 건너 미디안 광야로 피신했다.

모세는 미디안 제사장의 집에서 양치는 일을 하게 되었다. 그의 딸 십보라와 결혼, 아들을 낳고 그럭저럭 잘 살고 있었다. 그러나 그 당시 이집트에서 계속되던 피라미드나 궁전을 짓는 거대한 토목공사에 동원되던 히브리인 노예들의 고역이 극심하였다. 「출애굽기」에 의하면 ‘고역으로 인하여 부르짖는 소리가 하나님께 상달’하였다고 한다. 이에 하느님이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 나타나 광야에서 목자로 일하고 있던 모세에게 이집트로 내려가 고통당하는 그의 동족을 구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인도하라고 명했다.

모세는 내키지 않는 마음이었지만 자기의 형 아론과 함께 이집트의 바로 왕에게 가서 히브리 백성들을 놓아줄 것을 요청했다. 물론 토목공사에 필요한 인력을 그냥 놓아줄 수는 없었다. 그러자 나일 강은 물론 이집트의 모든 물이 피로 변하게 하는 일, 이집트의 왕태자 등 처음 난 모든 것을 죽게 하는 일 등 열 가지 재앙을 통해 야훼의 능력을 보인 후 가까스로 허락을 받고 탈출하는데 성공했다. 홍해가 갈라지는 등 기적적으로 홍해를 건넜지만 그들에게 약속한 땅으로 곧장 들어갈 수는 없었다. 거기에는 이미 다른 족속들이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십계명 받아 종교 신앙 윤리 확립

어쩔 수 없이 시내 광야에서 야훼 신이 내려 주는 만나를 받아먹으면서 ‘40년’을 헤매게 되었다. 출애굽 1세대에서 몇 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약속한 땅을 밟아보지 못하고 광야에서 죽었다. 모세마저 산 위에서 약속의 땅을 바라만 보았을 뿐 들어가지 못했다. 그러나 이 ‘출애굽’ 기간 동안 이런 저런 시련을 통해서 히브리인들은 몸에 배인 노예근성을 씻어내고 다음 세대가 자주적이고 독립적인 민족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정신적 훈련을 쌓은 셈이다.

더욱이 이 사건을 통해 이스라엘은 자기들이야 말로 신이 특별히 선택한 백성이라는 ‘선민(選民)’ 의식을 확고히 할 수 있었다. 또 이 기간 모세가 시내 산꼭대기에 올라가 야훼 신으로부터 돌비에 새겨진 ‘십계명’을 직접 받았다. 결국 모세를 매개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새로운 국가, 새로운 종교, 새로운 신앙의식을 확립하게 된 셈이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비록 모세 오경이 모세가 쓴 것이 아니라, 몇 가지 다른 전통에서 내려오던 고대 문헌들이 후대에 짜깁기 식으로 합해져서 이루어진 문헌이라 할지라도, 모세의 이름과 연결되어 기록된 그 내용은 유대교 전통의 근간이 되고 있다. 물론 그리스도교와 이슬람에서도 이를 자기들의 전통 일부로 인정하고 있다. 모세 오경에 있는 기본 가르침 몇 가지를 살펴본다.

야훼는 인간에 개입하는 인격신

첫째, 새로운 신관이다. 「출애굽기」의 기록에 따르면, 모세 이전까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으로만 알려졌던 신이 이제 특별한 이름을 가지고 등장한다. 불타는 떨기나무 속에서 모세에게 나타난 신에게 모세가 그의 이름을 물으니 그는 ‘나는 스스로 있는 자’라고 했다. 그 이름이 ‘야훼’다. ‘스스로 있는 자’ 혹은 ‘있음을 있게 하는 자’라는 뜻으로 풀 수 있다. 이것이 유대인들만 사용하는 신의 고유명사가 된 셈이다. 유대인들은 신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않는 전통 때문에 이 이름이 나올 때마다 ‘야훼’라는 이름 대신 ‘아도나이(주님)’이라 불렀다.

야훼 신은 주변 다른 민족들이 모시던 토지 신, 태양 신 등의 자연신과 달랐다.

야훼 신은 자기 백성들을 위해 역사에 직접 개입하는 인격신이었다. 히브리인들을 추격해 오는 이집트 군대를 물속에 사장시키고 다른 민족들과의 전쟁에서 그들이 이기도록 해주는 등 군사적 전술이나 전쟁에도 능한 힘 있는 신이었다. 유대교가 야훼 신을 역사의 신으로 보고, 자기들의 역사를 야훼신의 ‘구원사’로 보는 초석이 이 때 심어졌던 셈이다.

한 가지 덧붙일 것은 일반적으로 유대교 신관을 ‘윤리적 유일신관(ethical monotheism)’이라 하지만 모세 오경에 나타나는 신관을 엄격하게 유일신관이라 말하기는 곤란하다는 점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야훼 신만을 따르기로 약속했지만, 다른 신의 존재를 완전히 부정하지는 않은 것 같기 때문이다. 십계명에도 ‘다른 신’에 대한 언급이 있고, 백성들도 자기들이 약속을 어기고 다른 신들을 섬기는 일이 비일비재했기 때문이다. 이론(異論)의 여지가 있기는 하지만 모세 당시의 신관은 다른 신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한 신에게 충성을 다하는 단일신론(henotheism)의 성격이 강했다고 보아야 할 것 같다.

둘째, 십계명의 등장이다. 십계명은 백성들에게 어떻게 살 것인가를 구체적으로 지시하는 야훼 신의 명령이었다. 「출애굽기」 20장에 나오는 십계명을 요약해 보면 1, 나 외에 다른 신들을 있게 하지 말라. 2, 우상을 만들거나 섬기지 말라. 3, 신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4,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5, 부모를 공경하라. 6, 살인하지 말라. 7, 간음하지 말라. 8, 도둑질 하지 말라. 9, 거짓 증거하지 말라. 10, 탐내지 말라 하는 것이다.

처음 네 가지는 인간과 신과의 관계를 다음 여섯 가지는 인간 자신들 사이 관계를 규정하는 것이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그 신이 인간에게 인간관계에서 윤리적 행위를 요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셋째, 언약 개념이다. 야훼 신은 모세에게 준 십계명이나 기타 법령을 통해 자기의 뜻을 밝히고 그의 백성들이 이를 충실히 지키면 그들에게 전쟁에서의 승리를 비롯하여 여러 가지 축복을 내려 주기로 약속하고 이에 백성들은 “ 한 소리로 응답하여 가로되 명하신 모든 말씀을 우리가 준행 하리이다.”(출24:3)하여 그 약속을 받아들였다. 소를 잡아 피로 그 ‘언약(covenant)’을 인준하는 예식도 거행했다. 신을 이렇게 일종의 ‘계약관계’로 파악하고, 그에 대한 순종이냐 불순종이냐 하는 것을 종교 생활의 근간처럼 중요시했다는 것은 후대 유대교가 자칫 모든 것을 인과응보로 보는 율법주의적 종교가 될 소지를 제공하는 대목이 아닌가 여겨지기도 한다.

넷째,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내 산을 떠나 여행을 계속하며 이리 저리 다니게 됨에 따라 신과 만날 수 있는 새로운 장소가 필요했다. 이런 필요에서 생긴 것이 ‘성막(聖幕)’이었다. 야훼 신을 모시기 위해 특별한 지시에 따라 세워진 성스러운 천막이었다. 백성들이 장막을 옮길 때마다 그 가운데 성막을 치고 신을 모셨다. 성막에는 십계명을 담은 법궤가 있었는데, 이스라엘이 적과 싸울 때 이 법궤를 가지고 가면 언제나 승리할 수 있다고 믿고 가지고 다녔다. 성막도 거룩하지만 법궤는 더욱 거룩하여 제사장 이외의 사람이 만지면 죽을 정도였다.

신을 일종의 계약 관계로 파악

이상에서 보는 것처럼, 모세가 이끌었던 출애굽 사건은 실로 유대교의 시발점이자 중심축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유대교 경전은 계속하여 하느님을 지칭할 때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해 낸 너의 하나님 여호와’로 표현하고 유대교의 유월절 등 큰 명절은 거의 다 이 출애굽 사건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다. 사실 「창세기」도 출애굽 사건의 배경을 설명하기 위해 쓰인 책이라 볼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모세나 그가 이끈 출애굽의 역사성 문제를 떠나서 ‘모세’라는 인물을 유대교의 초석을 놓은 유대교의 창시자라 보아 마땅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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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교 창시자, 모세

[종교학자 오강남의 인류의 스승] 모세 그리스트교 초석 놓은 유대교 창시자 ‘출애굽’ 통해 이스라엘 민족 출현 야훼신 첫 등장 … 단일 신관 완성 램브란트가 그린 모세의 초상화. 모세는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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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모스

사회 불의 항거했던 유대교 예언자

유대교의 예언자 전통 확립했던 성직자

지배층 죄악 낱낱이 열거하며 심판 경고

타락한 종교 지도자 ·형식적 제물 거부

하느님의 사랑 예언했던 호세아와 대조

아모스의 초상화.

유대교 전통에 의하면, 모세와 함께 이집트에서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40년간 광야를 헤매다가 드디어 여호수아(‘예수’와 같은 이름이다)의 인도로 지금의 팔레스타인인 가나안으로 들어가, 이미 살고 있던 민족들과의 유혈전쟁 등 우여곡절 끝에 가나안을 정복하게 되었다. 유대교 경전에 의하면 이 모든 것이 물론 그들의 신 야훼의 직접적인 진두지휘 하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가나안을 정복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열두 지파로 나뉘어 살았다. 처음 200년간은 열두 지파를 통괄해서 다스리는 왕이 없이, 주변 민족이 침입해 오면 그때그때 임시로 지도자를 선출하여 적을 물리쳤는데, 이때의 지도자들을 ‘사사(師士, Judges)’라 하였다. 우리에게 ‘삼손과 딜라일라’로 잘 알려진 삼손도 이런 사사들 중 한 명이었다. 북미 호텔에 가면 방마다 ‘기드온 클럽’에서 제공한 성경이 비치되어 있는데, 기드온도 유명한 사사였다.

시간이 지나면서 백성들이 “우리도 모든 이방 나라들처럼, 우리의 왕이 우리를 다스리도록” 하자고 했다. 이렇게 하여 ‘기름부음을 받아’ 선출된 최초의 왕이 사울이었다. 그러나 사울은 성공하지 못한 왕이었다. 그를 이어서 왕이 된 사람이 남쪽 베들레헴 출신의 목동으로 적군의 대장 골리앗을 돌팔매로 죽인 다윗이었다. 다윗은 예루살렘을 정복하고 이를 수도로 정하는 등 왕권을 튼튼히 했다. 전통에 따르면 이스라엘 왕국은 다윗의 제위 기간(기원전 1000-961) 그 전성기를 맞이했다.

다윗의 후계자를 놓고 ‘왕자의 난’이 있었지만, 그가 사랑하던 아내 밧세바에게서 난 아들 솔로몬이 왕이 되었다. 그는 예루살렘에 성전을 짓는 등 아버지에게서 물러 받은 부에 힘입어 ‘솔로몬의 영광’을 구가하기도 했지만, 계속되는 실정으로 인해 나라의 기초가 흔들리게 했다. 결국 그가 죽은 후 이스라엘은 북쪽 열 지파로 구성된 ‘북방 이스라엘’과 유다와 벤야민 두 지파로 이루어진 ‘남방 유다’ 둘로 갈라지게 되고 말았다.

북방 이스라엘은 기원전 722년 아시리아 왕국의 침입을 받아 멸망당하고, 아시리아의 인구분산정책에 따라 사방으로 흩어져 이른바 ‘잃어버린 지파(lost tribes)’가 되었다. 남방 유다도 기원전 586년 바빌론의 침입을 받고 많은 사람들이 바빌론으로 끌려갔는데 이를 ‘바빌론 포로(Babylonian exile)’라 이른다.

그러나 이들은 반세기 정도 후 페르시아의 왕 고레스의 정책에 따라 다시 유대 땅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지금 유대인들을 ‘유대인’이라고 하는 것은 이처럼 북방 이스라엘 사람들은 다 사라지고, 남방 유다 사람들만 살아남았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에는 직업적인 예언자 학교가 있었다. 이런 학교를 거쳐서 된 예언자는 한국으로 치면 세습무(世襲巫)와 맞먹는 사람들이라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유대교에서 중요시하는 예언자는 모두 ‘야훼 신이 내게 임하시매’라는 영적 체험을 통해 예언자가 된 사람들이다. 강신무(降神巫)나 접신무(接神巫)에 가까운 사람들인 셈이다. 여기서 한 가지 지적할 것은 ‘예언자(預言者)’는 앞일을 미리 말하는 사람이라는 뜻보다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 전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예언’의 예는 ‘미리 예(豫)’가 아니라 ‘맡길 예(預)’가 더 정확하다. 옛날에는 ‘선지자(先知者)’라는 말로 번역하기도 했는데, 이것도 ‘미리 알고 있는 사람’이라는 뜻이 강하여 현재 별로 쓰지 않는다.

물론 왕권의 출현 전에도 모세나 사무엘 같은 ‘예언자’들이 있었지만, 권력층이 등장하면서는 예언자들이 주로 권력의 남용을 경고하는 목소리가 되었다. 다윗 왕이 밧세바를 취하고 그의 남편 우리야까지 전쟁에서 죽게 하자, 예언자 나단이 그에게 가서 그 죄를 지적한 것과 같다. 특히 북방 이스라엘과 남방 유다의 출현, 그들의 멸망 전후해서 이런 식으로 부패한 정치권력이나 종교 권력의 횡포, 이에 부화뇌동하는 사회를 고발하고 질책하는 예언자들이 많이 출현했다.

이런 예언자들 중 기록을 남긴 이들은 그리 많지 않다. 현재 유대교 경전에는 이른바 4명의 ‘대예언자’와 12명의 ‘소예언자’의 기록이 남아 있다. 예언자들의 지위에 따른 분류가 아니라 단순히 그들의 이름으로 된 기록의 분량이 크냐 작으냐 하는데 따른 분류이다. 이들 중 가장 대표적인 예언자 몇 명을 든다면 포로기 이전의 아모스(기원전 750년경), 호세아(기원전 740년경), 제1이사야(기원전 742-690년경), 예레미야(기원전600년경), 그리고 포로 기간 중의 에스겔, 제2이사야 등이 있다.

아모스는 이런 예언자들 중 시간적으로도 제일 처음일 뿐 아니라 그의 이름으로 된 기록을 남김으로 유대교의 예언자적 전통을 확립한 예언자라는 점에서 예언자들 중 가장 대표적이라 할 수 있다. 그가 남겼다고 전해지는 『아모스서』는 그 시적 문학성에서나 사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문헌에 속한다. 이제 그의 삶과 가르침을 살펴보기로 한다.

아모스는, 「아모스서」에 의하면, 남방 유다 왕 웃시야 시대, 북방 이스라엘 왕 여로보암 시대의 사람이라고 한다(1:1). 그는 남방 유다에 속하는 예루살렘 남쪽 드고아라고 하는 곳에서 ‘목자요 뽕나무를 배양하는 자’로 일하고 있었다(7:14). (새번역에서는 ‘돌무화과를 가꾸는 사람’으로 되었다. 팔레스타인에는 우리가 한국에서 보는 뽕나무가 없기에 뽕나무를 돌무화과 나무로 옮긴 모양이이다. 신약성경에 삭개오가 군중에 둘러싸인 예수님을 보러 ‘뽕나무’ 위에 올라갔다는 그 나무도 사실은 뽕나무일 수 없다.)

‘예언자도 아니고, 예언자의 제자도 아니었던’ 그가 하루는 양떼를 몰다가 야훼로부터 “내 백성 이스라엘에게 가서 예언하라.”는 명을 받았다. 남방 유다 출신이 북방 이스라엘로 간다는 것이 좀 이상스럽지만, 야훼에게는 남북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그의 백성이라는 뜻일 것이다.

그 당시 북방 이스라엘은 전쟁 위협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안정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상업과 무역이 활발해지면서 부자 상인 계급이 출현하고 그들이 축적한 부를 권력층과 나누어 가졌다. 신흥 부호들은 자기들의 호화로운 집을 짓고 장원을 꾸미기 위해 많은 땅을 차지하게 되고, 그로 인해 농부들은 농토를 잃게 되었다. 자연히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사이의 빈부 차이가 격심해졌다.

잘 사는 이들은 자기들의 부함이 하느님이 자기들에게 내리신 특별한 축복이라 여기고 더 큰 축복을 빌기 위해 제물(祭物)을 가지고 베델과 길갈에 있던 야훼의 성전을 찾았다. 성전에 있던 제사장들과 직업적인 예언자들은 이런 부자들이 갖다 바치는 제물에 팔려 이들 기득권자들의 불의와 횡포를 보고도 모른 척할 뿐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아모스는 베델로 올라가 야훼신의 대변자로 외치기 시작했다. “나 주가 선고한다. 이스라엘이 지은 서너 가지 죄를 내가 용서하지 않겠다.”(2:6) 그러고는 ‘돈을 받고 의로운 사람을 팔고, 신 한 켤레 값에 빈민을 파는’(2:8) 등 이스라엘 지배층이 저지른 죄악상을 낱낱이 열거하고, 결론적으로, “이스라엘 자손들아, 이 말을 들어라. 이것은 나 주가 너희에게 내리는 심판의 말이다. 이집트 땅에서 데리고 올라온 모든 족속에게 내가 선언한다. 나는 이 땅의 모든 족속들 가운데서 오직 너희만을 선택하였으나 너희가 이 모든 악을 저질렀으니 내가 너희를 처벌하겠다.”(3:1-2)고 경고한다. 선택받은 민족이지만 인권을 무시하는 등 악행을 할 때는 용서할 수 없다는 뜻이다.

이처럼 아모스는 무엇보다 ‘정의(正義)’와 ‘공의(公義)’를 강조했다. 부정직한 재판관, 부패한 상인들, 직무유기한 종교 지도자가 판치는 사회를 향해 ‘화있을진저’를 선언한다. 정의를 짓밟고 그 위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형식적 종교행사나 제물은 모두 야훼신에게 역겨울 뿐이라고 역설한다. “내가 너희 절기들을 미워하여 멸시하며 너희 성회들을 기뻐하지 아니하나니 너희가 내게 번제나 소제를 드릴지라도 내가 받지 아니할 것이요 너희의 살진 희생의 화목제도 내가 돌아보지 아니하리라. 네 노랫소리를 내 앞에서 그칠지어다. 네 비파 소리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라.”고 하고 이어서 아모스의 중심사상이라 할 수 있는 말, “오직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흐르게 할지어다.”(5:21-24)하는 말을 소리 높이 외친다.

물론 아모스는 사회적 불평등이나 불의를 회개하지 않으면 이스라엘이 곧 동쪽으로부터 오는 침입자의 희생물이 될 것이라는 등 하느님의 임박한 심판을 이야기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목적은 이스라엘 사람들을 살리려는 것이었다.

“너희는 나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 너희는 살려면 선을 구하고 악을 구하지 말지어다.”(5:4, 14)하는 하느님의 약속을 말하고 있다. 흔히 하느님의 정의를 말하는 아모스를 아모스 다음에 나와서 하느님의 사랑을 강조하는 예언자 호세아와 대조하는 것이 보통이지만, 궁극적으로 보면 아모스도 인간을 위한 하느님의 염려와 사랑을 이야기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아모스가 종교적인 것보다 사회 정의나 인권 같은 윤리적 차원만 강조했다고 비판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의 기별은 일차적으로 잘못된 신관이나 안일한 신앙 형태를 고발하는 것이었다. 우리가 믿는 신이 우리가 정의와 공의를 무시하고라도 그저 헌금이나 많이 하면 기뻐하시고 우리에게 계속 복을 내려주시리라 믿는 믿음은 우상숭배와 다름이 없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

더욱이 사회정의를 실천하는 것이 바로 하느님과 맺은 언약을 성실히 준수하는 것임을 강조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아모스가 이렇게 예언자로 사회의 불의에 항거한 것이 바로 그 자신이 하느님과 하나가 되거나 자기 속에 하느님의 임재하심을 감지하는 깊은 종교적 체험에서 가능하게 된 것이라는 점이다. 아모스가 강조하는 윤리적 기별은 이처럼 깊은 종교적 체험과 혜안에 뿌리박은 나무에서만 가능한 아름다운 결실인 셈이다.

아모스를 비롯한 예언자 전통은 후에 예수님에게도 영향을 주었다. 예수님도 사회의 버림 받은 자, 소외된 자, 약자들의 편에 서서 가진 자들의 형식적이고 제도화된 위선적 종교를 배격했다. 오늘 한국 종교계의 현실을 보면서 이런 아모스의 출현이 기다려진다고 하면 잘못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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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불의 항거했던 유대교 예언자, 아모스

[종교학자 오강남의 인류의 스승] 아모스 사회 불의 항거했던 유대교 예언자 유대교의 예언자 전통 확립했던 성직자 지배층 죄악 낱낱이 열거하며 심판 경고 타락한 종교 지도자 ·형식적 제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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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불라피아와 모세 드 리옹

직관·통찰·꿰뚫음 통해 神의 합일 가르쳐

카발라는 말씀 이전 의미 찾으려는 노력

아불라피아, 깨침위해 특수 명상법 제시

神 염송·관상으로 궁극 실제 체험 가능

모세 드 리옹, ‘조하르’통해 신은 空 주장

아블라피아 초상화.(왼쪽) 카발라의 대표 저작 조하르. (오른쪽)

그리스도인들 중에는 유대교가 예수님의 출현과 더불어 끝난 것으로 오해하는 이들이 더러 있다. 그리스도교의 입장에서 보면 예수님은 유대교의 완성이라 할 수 있기 때문에 이런 오해가 있을 수 있겠지만 역사적으로 유대교는 예수님과 그리스도교의 등장 이후에도 계속 이어지고 내적, 외적 요인에 영향을 받으며 발전해 왔다.

서기 70년 예루살렘이 로마 군대에 의해 패망하고 유대인들은 산지사방으로 흩어졌다. 이와 같은 유대인의 흩어짐을 ‘디아스포라’라고 한다.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각기 자기들 사는 곳에 세운 그들의 시나고그(會堂)를 중심으로 그들의 종교 생활을 계속했다.

유대교 전통에도 예언자들이나 시편 기자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신비주의적 흐름이 있었다. 이런 흐름이 발전하여 수레(병거)를 타고 7층 하늘 너머에 있는 천상의 궁전에 이르는 체험을 강조하는 ‘수레 신비주의(Merkabah mysticism)’, 3세기에서 6세기 사이에 기록되었으리라 여겨지는 「창조의 서(Sefer Yetsirah)」, 12세기 전후 독일에서 ‘경견’을 강조하던 하시딤(Hasidim)」 등이 등장했다.

그러나 유대교 전통에서 면면히 흐르던 신비주의적 경향은 13세기에 이르러 지금의 프랑스 남부와 스페인을 중심으로 만개하였다. 이는 우리가 전에 알아본 플로티노스의 신플라톤주의, 그리스도교 신비주의, 이슬람의 수피 신비주의 등의 영향 때문이었다. 이런 여러 가지 신비주의 전통들이 결합하여 유대교 내에 뿌리 내린 신비주의 전통을 ‘카발라(Kabbala)’라고 한다. 문자적으로 ‘전통’이라는 말이지만 특히 ‘비전(秘傳)’으로 내려오는 전통을 뜻한다.

신학적 의미보다 직접 체험 중시

카발라 전통은 ‘말씀’에 창조적인 힘이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말씀에는 네 가지 의미 층이 있는데, 표면적 의미(Peshat), 비유나 은유적인 의미(Remez), 미드라쉬적 연상 기법에 의해 재해석된 의미(Derash), 신비적인 비의(秘意·Sod)가 그것들이다. 카발라는 성서의 말씀에서 바로 이 네 번째의 내밀한 신비적 의미를 찾으려는 노력이라 볼 수 있다. 말씀의 참 뜻을 깨닫게 될 때 신의 존재를 비롯한 모든 존재에 감추어진 비밀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카발라 전통은 크게 세 갈래로 나누어진다. 첫째 갈래는 13세기 스페인에 살던 유대인 아브라함 아불라피아(Agraham Abulafia)의 저작에 의한 것이고, 둘째 갈래는 작자가 불분명한 「세퍼 하 조하르(Sefer ha-Zohar 광명의 서)」라는 책을 중심으로 발전된 것이고, 셋째 갈래는 16세기 이삭 루리아(Isaac Luria)의 지도하에 생겨난 것이다. 이 글에서는 아불라피아와 「조하르」의 가르침에 대해서 알아보기로 한다.

아불라피아는 1240년 스페인 사라고싸(Saragossa)에서 출생했다. 젊어서 중동 여러 지방을 두루 다니고 이탈리아와 그리스에서도 오랜 시간을 보냈다. 그의 저술은 대부분 13세기 말엽 그가 이탈리아에 있으면서 쓴 것이다. 그는 히브리어 경전을 비롯하여 11세기 유대인 최대의 철학자 마이모니데스(Maimonides)의 저술에 정통하는 등 여러 방면에 걸쳐 극히 박학다식하였다. 그러나 그의 삶을 근본적으로 바꾼 것은 31세에 경험했던 엄청난 신비 체험이었다. 그 때 이후 그에게 중요한 것은 교리나 신학적 이론에 정통하는 것보다 직접적인 체험을 갖는 것이었다. 그의 저술의 주목적도 사람들에게 궁극실재를 직접 체험할 수 있는 길을 제시하기 위한 것이었다.

아불라피아에 의하면 신을 찾기 위해서는 우선 우리의 ‘영혼을 얽매고 있는 매듭을 푸는 일’이 중요하다고 한다. 우리의 영혼은 우리의 감각을 기반으로 하여 형성된 각종 관념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이다. 이런 관념을 비울 때 실재를 직접적으로 꿰뚫어보는 직관이나 통찰에 이른다고 했다. 마치 우리의 분별지로 인해 실재를 볼 수 없으므로 이를 없애야 한다고 하는 공(空)의 가르침을 연상하게 하는 대목이다.

아불라피아는 마치 중관론에서 말하는 반야(般若智) 같은 직관, 통찰, 꿰뚫음에 이르기 위한 구체적인 방법으로 ‘명상’이 필수적이라고 주장하고, 스스로 계발한 ‘이름의 길(Path of Names)’이라는 일종의 특수 명상법을 제시하기도 했다. 마음을 한데 모으고 히브리어 알파벳을 이리 저리 조합해서 신에게 합당한 여러 가지 이름이나 낱말들을 만든 다음, 이를 주문처럼 외우거나 시각화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기를 계속하면 신의 이름 속에서 우리의 일상적 의식은 사라져버리고, 신비적 깨침에 이르게 된다고 했다. 티베트 불교에서 불보살들의 이름을 외우거나 시각화하는 수행법, 공안(公案)을 가지고 참구하여 깨침의 경지에 이르도록 하라는 선불교의 가르침 등을 연상시킨다.

카발라 명상은 유대화 된 요가

아불라피아는,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젊어서 여행을 많이 했다고 했는데, 여행에서 실제적으로 인도 식 요가의 이론과 수행법을 접하게 되었으리라 본다. 그가 말하는 호흡법, 주문 외우기, 명상할 때의 자세, 스승의 역할 등 많은 면에서 요가의 가르침을 반영하고 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학자들은 그의 명상법을 ‘유대화된 요가(Judaized Yoga)’라 부르기까지 한다.

아불라피아와 비슷한 시기에 「조하르」라는 책이 등장했다. 유대교에 끼친 영향으로 볼 때 이 책은 그리스도교 신비전통에서 위 디오니시우스의 저작이 차지하는 위치와 맞먹을 정도라 볼 수 있다. 이 책은 2세기에 살았다고 하는 시므온 벤 요하이라는 랍비와 그의 제자들을 등장시켜 이야기를 나누는 픽션 형식을 취하고 있다. 스페인에 살던 모세 드 리옹(Moses de Leon)이라는 사람이 1280년에서 1300년 사이에 이 책을 세상에 유포되기 시작했는데, 책의 분량으로나 그 내용의 다양성으로 보아 한 사람의 저작이라 보기는 힘들지만, 유대교 신비주의 연구의 대가 숄렘(Gershom Scholem)에 의하면, 그 책 몇몇 부분을 제외하면 그를 그 저자로 보는 데 무리가 없을 것이라고 한다.

「조하르」에서 가장 중심되는 가르침은 ‘세피로트(Sefiroth)’라는 개념이다. 문자적으로 ‘셈하기(enumeration)’라는 뜻을 가진 말이다. 이를 중심으로 하는 가르침이 전에도 있었지만, 「조하르」에서는 이를 심화시켜, 보이지 않는 세계에 속한 초월적 신의 창조적 능력이 어떻게 보이는 현상 세계에 표출(表出) 혹은 유출(流出)되었는가 하는 일종의 우주 창생 과정을 하나씩 밝혀 주는 이론으로 사용되었다.

궁극 근원으로서의 절대적 신은 엔소프(En-Sof, 無限)이다. 그에게는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어떤 것도 들어 있지 않다. 그런 의미에서 이 절대적인 신은 아인(Ayin, 텅빔)이다. 동양적 표현을 쓰면 무극(無極)이라고 할까. 그러나 이처럼 무(無) 혹은 공(空)으로서의 절대자가 동시에 오르 엔소프(Or En-Sof)이기도 하다. ‘무한한 빛’ 혹은 ‘무량광(無量光)’이란 뜻이다. 이 무한한 빛으로부터 열 가지 ‘세피로트’가 유출되어 나와 오늘 우리가 보는 현상 세계가 형성되었다고 주장한다.

열 가지의 세피로트는 세 개씩 셋으로 나누어지고 열째 것은 위의 아홉 개를 아우르는 것으로 본다. 무량광의 신으로부터 제일 먼저 나온 최고의 것은 신의 ‘왕관(keter)’이다. 이것은 신의 의지를 뜻하기도 하는데, 엔소프 자체와 구별되지 않는 미발의 경지이다. 여기서 둘째, 셋째 세피로트인 ‘지혜(hokhmah)’와 ‘이해(binah)’가 나온다. 이를 각각 ‘아버지’와 ‘어머니’로 표현하기도 한다. 구태여 동양의 태극도와 비교한다면, 무극에서 태극, 태극에서 음양이 구분되어 나온 형식이라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도덕경」 표현을 빌리면 ‘도가 하나를 낳고, 하나가 둘을 낳고, 둘이 셋을 낳고’(42장)에 해당한다고 할까?

불교의 수행·이론체계와 흡사

다음에 나오는 세 개는 ‘자비(hesed)’와 ‘능력(din)’과 ‘아름다움(tifereth)’이다. 그 다음 세 개는 ‘승리(netsah)’, ‘영광(hod)’, ‘기초(yesod)’이다. 마지막 열 번 째의 것은 이상의 것들을 통합하는 하느님의 ‘왕국(markuth)’이다. 이 왕국을 ‘셰키나(Shekhinah)’라고도 하는데, 하느님의 임재를 뜻한다. 절대적 실재로서의 신의 생명과 능력이 인간을 포함하여 현상 세계의 모든 존재 안에 스며들어 있음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셈이다. 특히 셰키나는 여성성을 상징하는 것으로 절대신과 대비를 이룬다.

본래 절대적인 신과 셰키나가 완전히 결합되어 하나이어야 하는데, 인간의 타락 이후 이 둘이 분리되고, 이로 인해 셰키나가 ‘유배(exile)’ 상태에 처하는 불행한 역사가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본질적으로 영적인 존재로서, 인간 존재의 최심층에 들어갈 때 신의 임재를 의식하게 된다고 한다. 인간의 영혼은 이 지상으로 내려 왔다가 할 일을 완성하면 다시 그 근원인 신에게로 올라가 그와 다시 합일하게 된다. 신과의 합일은 보통 죽어서 이루어지는 것이지만, 지상에 살아 있을 동안에도 신비적인 황홀경을 통해 가능할 수도 있다.

「조하르」에 의하면 깊은 종교적 삶을 위해서는 두 가지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한다. 신을 경외하는 것과 기도하는 것이다. 신에 대한 경외심은 신을 두려하면서 동시에 깊이 사랑하는 것이다. 기도란 말로 무엇을 비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집중하는 것으로서, 이런 기도를 통해 신과 합일이 가능하게 될 뿐 아니라 평화와 즐거움이 모든 사람에게 두루 퍼지도록 할 수 있다고 했다. 나아가 이 세상이 신과의 관계를 회복하므로 유배 갔던 셰키나가 돌아오도록 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협력이 필요함을 강조한다.

카발라 전통을 볼 때마다 유대교에 이런 가르침이 있다고 하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 현재 미국 연예인들 중 마돈나, 데비 무어, 브리트니 스피어즈 등 카발라에 매료된 사람들이 있어 화제가 되고 있다. 다음 회에도 카발라 이야기를 계속하기로 하고 오늘은 여기서 일단 그친다. (참고: 필자가 번역한 「내 인생의 탐나는 영혼의 책 50」(흐름출판, 2009) 407-415쪽에도 카발라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오강남 캐나다 리자이나대 명예교수

http://blog.daum.net/whatayun/69914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