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된 인물 모세 by 모세는 파라오였다

Realize 2021. 7. 24. 1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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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못해 예언자가 된 모세 by 책의 민족 : 유대인 디아스포라 4천년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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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교&이집트 최강의 마법사 모세 (신의 42글자 이름, 신의 72가지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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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함께 보세용~

 

 

모세는 파라오였다 p167

 

 

모세 전설의 내용과 가치

 

모든 전설에 따르면, 모세는 히브리 부모에게 버림받았으나 이집트 왕실에서 자라게 된다. 그의 이집트 어머니는 공주이자 왕의 부인이다. 파라오는 모세의 할아버지 혹은 양아버지가 된다. 모세는 분명히 왕자로 자랐다고 말할 수도 있고 문맥으로 보아 그렇다고 추리해낼 수도 있다. 플라비우스 요세푸스의 판본을 따르면, 모세 왕자는 자신의 히브리 핏줄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다. 모세는 젊었을 때 에티오피아 원정에서 9년 혹은 10년 동안 군대를 승리로 이끈다. 이 체류 기간 중에 이집트 왕자 모세는 에티오피아 공주와 결혼한다. 이집트로 돌아오는 과정에 측근에게 들은 음모로 자극받은 파라오의 화가 모세를 위협한다. 결국 모세는 왕위 찬탈을 기도했다는 누명을 쓰게 된다. 이에 비해 다른 판본들은 이집트 밖으로 도망친 후에 결혼했다고 한다. 에제키엘의 저서에는 시뽀라가 에티오피아인이라는 맥락으로 쓰여 있고, 다른데서는 모세가 쿠시의 여왕과 결혼했지만 자신의 왕국을 잃는 것으로 끝난다.

 

헬레니즘 시대부터 있어온 것으로 증명된 성서 밖의 모세 전설들은 이 기간 동안, 또 그 후에도 페르시아에서 유대인들에게 사실인 양 널리 퍼져 있었다. 그러한 견해는 새로운 것이 아니다. 그것은 구약성서에 나오는 전설에 의한 영향이었다. 그리하여 왕자 모세가 에티오피아에서 죽인 뱀의 이야기는 성서에 근거한 이야기인데, 예언자 모세가 뱀들을 사막으로 몰아냈다고 되어 있다. 모세의 쿠시인 아내에 대해 미리암과 아론이 일으킨 싸움에 대한 성서의 일화는, 일부 독자가 이 결혼에 관련된 전설을 이미 알고 있으리라는 것을 전제하고 있다. 결국 전승되는 구약의 이야기와 성서 밖의 전설들은 도망에 관한 주제의 기초가 되는 두 동기로 연결된다. 즉 벨하우젠이 인정했듯이 출애굽기는 드러나는 동기와는 별도로, 필론과 요세푸스가 왕자 모세의 도망을 설명하기 위해 발전시킨 정치적 특성에 관련한 두 번째 동기까지 드러내 보인다.

 

한 판본과 다른 판본 사이의 연관성 덕분에 헬레니즘이나 페르시아 시대에 성서의 모세 전설이 나타났다고 할 수 있다. 또한 모든 모세 전설이 이 시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도 할 수 있다. 성서주해학자들은 오랫동안 성서의 모세 전설은 모세 시대에는 구전되다가, 다윗과 솔로몬 통치 시기인 기원전 10세기에 글로 옮겨졌다고 확신했다. 그러나 이러한 연대 추정은 모세 이야기보다 더 오래된 것이며, 다윗과 솔로몬이라는 왕들의 역사적 검증이 의심되는 오늘날에는 막연한 짐작일 뿐이다. 이러한 문제는 여기에서 그치겠지만, 성서의 모세 이야기가 바빌론의 유대인들에 대한 것이라고 평가하는 성서주해학자들의 의견도 알아둘 필요가 있다. 1976년, 한스 하인리히 슈미트는 그의 저서 <이른바 야훼 전승 문헌>에서 이러한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게다가 1994년에 나온 모세에 관한 저서에서 존 반 시터즈는 모세 이야기를 기원전 5세기 중반인 페르시아 시대 초기의 것으로 본다. 그들은 모세 이야기를 알려진 시대보다 뒤에 놓는다. 성서역사가 닐스 피터 렘케는 모세 5경과 구약성서의 다른 부분들의 모세 이야기가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아케메네스 제국 정복 후의 일로 볼 수 있다고 밝혔다.

 

이들의 이러한 연대 추정은 성서 이외의 모세 이야기가 허구로서 다뤄질 수밖에 없는 페르시아 시대나 헬레니즘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유일한 것이다. 이 같은 논쟁으로 성서의 전설들을 비역사적인 것으로 제외시킬 수도 있으며, 유대-헬레니즘의 전설들과 연관 지을 수 있다.

 

이제 왕자 모세에 관해 만들어진 유대의 전설이 역사적인지 아닌지를 푸는 문제가 남아 있다. 그것은 다음 장들의 목표이다. 결국 문제는 이집트 역사에 유대 전설 속의 모세 왕자에 해당하는 왕자가 있었을까 하는 점이다.

 


p225

 

 

아몬-마세사와 모세의 가계도

 

1905년 발간된 <이집트 역사>에서 W.F.피트리는 타크하트 공주를 람세스 2세의 딸이자 세티 2세의 아내, 아몬-마세사의 어머니로 보았다. 80여 년 후 1987년 에이단 닷슨은 더 나은 자료를 토대로 같은 결론에 이르게 되는데, 찬반 의견을 틀림없이 검토해본 결과였다. 그렇다면 피트리와 닷슨을 따라 아몬-마세사의 가계도를 세워보자. Y와 Z라는 문자는 각각 세티 2세의 어머니와 타크하트의 어머니를 가리킨다.

 

 

피트리는 나름대로 람세스 2세의 가계 도식을 만들었다. 여기에 약간 수정을 해서 적어보자.

 

기원전 1279년 람세스 2세 즉위

기원전 1270년 메렌프타 탄생

기원전 1250년 세티 2세 탄생

기원전 1240년 타크하트 탄생

기원전 1225년 마세사야 탄생

기원전 1213년 람세스 2세 죽음, 메렌프타 통치 시작

기원전 1208년 메렌프타의 리비아 전쟁

기원전 1207년 아마다에 마세사야 비문

기원전 1204년 메렌프타 죽음, 세티 2세의 통치 시작

기원전 1203년 마세사야/아몬-마세사의 반란

 

아몬-마세사는 모계 쪽으로는 람세스 2세의 손자, 부계 쪽으로는 중손자중 하나였다. 따라서 가계학자들이 조상이 부족하다고 제기할 수도 있을 것이다. 만약 단 하나뿐인 조상이 가계도의 다른 곳에서 등장한다면 할아버지들, 증조할아버지들, 아버지들 등의 수가 거기에서 나올테고, 후손들은 그들 간에 협소하게 인척관계를 맺지 않았더라도 그 수는 많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근친 간의 부모에서 나온 성서의 모세 가계도에서도 유사한 결여를 확인할 수 있다. 구약성서에 따르면 모세의 아버지 아므람과 어머니 요게벳은 조카와 고모 사이였다. 다소 기이한 이러한 인척 관게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설명해준다.

 

이집트로 이주한 70명의 히브리인중 하나였던 레위는 137세까지 살았고, 아마도 긴 생애의 말년쯤에 요게벳이라는 딸을 낳았을 것이다. 그리고 훨씬 전에 낳았을 레위의 아들 크핫은 아들 아므람을 낳았는데 그가 고모가 되는 요게벳과 결혼하고, 그 사이에 미리암, 아론, 모세를 두었다.(출애굽기 6:16,18,20절, 민수기 26:58~59절)

 

이러한 자료에 따라 모세의 가계도를 만들어보면 아몬-마세사와 유사한 구조가 됨을 확인할 수 있다.

 

 

모세의 가계도를 세우는데 이용한 요소들은 그의 탄생과 버려짐의 이야기에는 없다. "레위 가문에 한 남자가 있었는데 그는 같은 레위 가문의 여자를 아내로 맞았다."(출애굽기2:1) 민수기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아므람의 아내 이름은 요게벳인데, 레위가 이집트에서 얻은 딸이다."(민수기 26:59)

 

이것은 레위기를 보면 다음과 같이 한 남자와 그의 고모와의 근친상간적 결합을 금지하고 있었기에 더욱 놀라운 일이다. "네 고모의 부끄러운 곳을 벗겨도 안된다. 그는 네 아비와 같은 핏줄이다."(레위기 18:12) 하지만 이러한 법률은 이집트 탈출 후에 공표된 것이고, 소급해 효력이발휘되는 것은 아니었다.

 

아몬-마세사처럼 모세 가계도에서도 조상이 부족해 조카와 고모의 위치에 있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혈족 관계가 생기게 되었다. 한편 가계도의 다른 대응 관게는 레위가 람세스 2세의 수명에 있다. 레위는 137세에 죽었다고 했는데, 람세스 2세는 67년을 통치했고 아마 90세의 나이에 죽었을 것이다. 레위만큼 수명이 길었던 것이 딸과 손자가 부부로 맺어진 이유가 되지는 않는다. 성서에는 아담과 그 후손들의 수명이 적혀 있는데, 최초의 인간 아담은 930세로 되어 있고, 다음 세대들은 줄어들어 레위의 아버지 야곱은 147세에 죽었다. 이집트에 도착했을 때가 죽기 17년 전이었던 야곱은 파라오를 만났는데, 파라오가 그에게 물었다.

 

"얼마나 수를 누리셨소?", "이 세상을 떠돌기 벌써 130년이 됩니다. 얼마 되지는 않으나, 살아온 나날이 궂은 일뿐이었습니다. 소인의 조상들이 떠돌아다니시며 누리신 수에 미치려면 아직 멀었습니다."(창세기 47:8~9)

 

그러므로 아몬-마세사와 성서의 모계 가계도는 구조가 유사하다. 다른 한편으로 모세 부모의 부계쪽 관계는 모세 5경의 이야기 결말에 전혀 나오지 않는다. 그런 이유로 필자는 이러한 특성이 이집트인 모세의 히브리화를 위해 역사적인 실제 부모를 레위의 허위적인 부모로 바꾸었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어쨌든 확실히 두 가계도의 대응관계는 놀랄 만한 우연이다.

 

 


p236

 

 

모세와 마세사야의 비교

 

마세사야/아몬-마세사와 모세를 비교한 연구 결과를 표로 요약해볼 수 있다. 그들의 비교 가능한 특성은 +기호로 표시했다. 모세의 하나뿐인 쿠시인 부인이 '마세사야/아몬-마세사'와는 관련이 없다는 것을 확인할 것이고, 이와 관련해 마세사야의 부인과 관계된 출처의 비밀을 밝혀야 한다. 그리고 다른 비교 지점에서 여러 군데가 불확실한 것은 분명하다.

 

만약 구원의 일화를 제외한다면, 이집트 왕자 모세에 대한 유대 전설은 마세사야의 일대기를 모방한 이야기로 읽힐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성서의 모세와 이집트 왕자 마세사야가 동일 인물이라는 결과가 도출되지는 않는다. 어떻게 반란을 일으킨 사람이 조국에서 정치적 실패를 겪은 후 이스라엘 민족의 지도자가 되었으며, 그들을 이집트에서 탈출시키고 시나이 산의 계명을 이스라엘 민족에게 전할 수 있었을까? 이러한 의문이 아직 남아 있다. 또한 우리는 세티 2세에 대항한 마세사야/아몬-마세사의 반란이 어떻게 끝났는지 전혀 모르고 있다. 왕위를 요구했던 이의 통치 기간이 짧았고, 합법적인 지배자가 그를 죽였다는 것만 알고 있을 뿐이며 자세한 상황은 모른다. 어쩌면 아몬-마세사는 군사 분쟁을 전쟁으로 끌고갈 결심을 하기도 전에 죽었을지 모른다. 아니면 그는 세티 2세에게 쫓겨 누비아로 돌아가 마세사야라는 이름으로 통치했던 지방에서 죽었을지도 모른다.

 

현재의 참고 자료로는 라메시드 시대 말에 파네헤지에게 반역한 쿠시의 부왕처럼 마세사야가 북쪽으로 움직여 델타에서 군사적 출구를 찾았다고 볼 수도 있다. 그의 공격 목표는 정확히 세티 2세가 거주하던 도시 람세스와 그 주변의 히브리인들이 살던 곳이었다.

 

만약 피-람세스 지역에서 마세사야가 실패했다면, 그리고 나일 골짜기 쪽으로 후퇴할 가능성이 모두 차단되었다면, 아마 그는 시나이 반도 쪽으로 도망칠 수 있는 골짜기 동쪽에 머물렀을 것이다. 왕위 찬탈에 실패한 그는 추종자들과 함께 시나이로 도망갔을까? 출애굽기에 묘사된 이집트 탈출은 이러한 후퇴를 바꾼 것일 수도 있지 않을까? 혹슨 왕위를 노렸던 경쟁자가 조국을 떠날 때 그 분쟁을 이용하여 히브리 민족을 이끌고 떠난 것은 아닐까? 만약 마세사야가 쿠시인 부인과 함께 동북쪽 델타에 군대와 생필품을 지닌채 봉쇄되었다면, 그에게 남은 길은 시나이로 가는 길뿐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탈출 조건은 성서에서 아람인으로 번역되는 에티오피아 왕비인 누비아 부인과 함께 모세가 이스라엘 민족을 시나이 반도로 인도해 도망가고 있었다는 것을 설명해준다.

 

 


 

p453

 

17 페르시아 시대 구성된 모세에 대한 성서 이야기

 

민족 시인이자 이론가 야비스트

 

아마도 야비스트는 키루스가 신 바빌론 제국을 정복해 유대인들을 종속시켰던 시기인 기원전 539년 이후 바로 글을 쓰기 시작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 시대는 십중팔구 아케메네스인들 자체도 아직 공식 종교로써 조로아스터교를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이다. 다리우스 1세가 아후라 마즈다의 우월함을 명백히 선언했던 것은 기원전 520년경이었다. 성서의 시대를 재구성해야 하는 우리는 이란의 교리를 수용하는 과정을 함께 살펴보아야 한다. 유일신교라는 새로운 세계관에 이르는 과정을 보기 위해서는 그러한 사상이 형성되는 것을 막는 억제 요소들을 계속 규정하는 것이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존재를 지배하는 원리로서 선과 악의 대립적 구도에 대한 페르시아의 교리에 동의할지라도, 야비스트는 십중팔구 유일신, 선한 신, 신에 대항하는 어떠한 반대 힘도 설 수 없다는 것만 인정했을 것이다. 완전한 창조는 이 관대한 유일신의 작품이며 신에게 맞설 적수는 그것이 악한 존재일지라도 어디에도 없다. 신과 대립하여 악행을 저지를 수 있는 존재는 유일신의 창조물인 인간뿐이다. 이처럼 악은 선택에 의한 것이라는 점에서 조로아스터교와 유사한 구조를 발견할 수 있다.

 

예언자 모세의 모습은 조로아스터를 모델로 한 것일 수도 있을까? 고대 이란의 예언자처럼 모세도 문화적, 윤리적 율법을 신자들에게 전하라는 야훼의 계시를 받았다. 그런데 조로아스터가 신의 메시지를 모든 인간에게 전해주어야 했던데 비해, 야훼가 모세에게 전한 율법은 이스라엘 백성들만을 위한 것이다. 조로아스터의 신은 사람들을 구별하지 않았지만 야비스트는 새로운 사상을 전개시켰다. 이 사상에서 조물주는 아브라함과 그의 아내 사라의 자손으로만 한정해 특별한 관계를 유지한다.

 

야비스트가 높이려고 애썼던 민족적 자긍심은 이론 체계의 완전한 개작을 내포하고 있었다. 여기서 페르시아의 영향은 지워지거나 약화되어 당시 유대인들의 종교 개념처럼 되었을 것이다. 야비스트는 프로이트만큼 독창적이지는 않았다. 프로이트는 모세를 유대인 입장에서 보면 위대한 이방인인 아크나톤을 추종하는 이집트인으로 보았다. 프로이트와는 반대로 야비스트는 전통을 보존하고 모세에게 자신들의 목소리를 전하게 한 유대 민족에게 모세가 이방인이라는 사실이 자랑거리가 된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페르시아의 요소는 새로운 개념 체계를 세우도록 했던 영감의 원천이 되었다. 선민들의 유일신 야훼의 종교 계시에 대해 아주 오래전부터 역사적 토대를 마련하는 것이 중요했다. 이러한 목적은 이스라엘 초기까지 거슬러 올라가게 하면서 누구도 들어본 적 없는 모세를 예언자로 임명하면서 이루어지게 되었다.

 

어떻게 야비스트는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유대인들의 기원사를 상상할 수 있었을까? 에두아르트 마이어는 처음에는 유대 왕국에 살던 유대인들이 이스라엘 왕국 주민만큼이나 이스라엘 백성들로 보지 않아야 했다는 것을 지적했다. 어쨌든 유대 민족이 이스라엘 지파였다는 관점이 언제부터 명확해졌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오늘날까지 유대교에 대한 이론적 담론을 지배하고 있는 개념이다. 마이어에 따르면 일상 생활에서 유대인들과 이스라엘인들이 같다고 여기는 것은 의미가 없는 것이며, 동일하게 다룰 때에는 일반적으로 유대 왕국과 이스라엘 왕국을 대조하기 위해서이다. 19세기 이전에는 유대인이 이스라엘 민족 자체라는 생각을 결코 할 수 없었다. 마이어는 고대 유대인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이라고 보지 않았다. 이 호칭은 유대 지파를 구성하게 한 교회 분리로 생긴 왕국 주민에 적용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다윗과 솔로몬은 이스라엘 왕국만큼 유대의 세습 왕국 역시 잘 다스렸다. 가장 좋은 예로 노르웨이인들이 1815~1905년까지 스웨덴 왕들에게 지배당했다는 이유로 스웨덴인이라고 불리지는 않았다. 또한 1697~11763년까지 폴란드인과 색슨족 두 민족이 공동으로 색슨족의 지위를 받았어도, 폴란드인을 색슨족이라고 불러야 한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성서의 자료에 엄밀히 근거한다면 페르시아 시대에는 이미 오래전부터 이스라엘 백성들이 없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사실 기원전 722년 아시리아인들이 이스라엘 왕국을 멸망시켰을 때 그들은 이스라엘 주민들을 추방했고, 1세기 동안 계속해서 계승한 유대의 왕들이 이스라엘 왕의 계승자들로서 간주되었다는 증거는 없다. 느부갓네살 2세가 기원전 587년 유대 왕국을 정복했을 때 추방된 사람들은 유대인이었지 이스라엘인들은 아니었다. 하지만 아시리아인들이 강제 이주시켰던 주민 수가 아무리 대규모라 하더라도 페르시아 지배 초기에는 이스라엘인들과 유대인들이 있었을 것이다. 야비스트는 그들에게 주의를 기울여 이스라엘의 일반사를 구성할 수 있었다.

 

다른 한편, 이스라엘과 유대 왕국의 공통된 역사의 야훼가 두 고대 국가의 가장 중요한 신이라는 점에서 시작된다. 아마 아케메네스 시대의 유대인들 역시 전 지역에 대한 지정학적 요구를 하기 위해 고대에는 이스라엘과 유대가 같은 지파였다는 생각을 지지했던 듯하다. 확실히 야비스트에 이어 성서 편집자들은 가나안 지방을 모두 소유하겠다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정당한 요구에 역점을 두었다.

 

이 점에 있어서 성서주해학자 베른트 요르크 디에브너는 유일신교의 논리적 결과가 특히 신명기 - 이사야서와 시라시드에서 주장하는 보편주의적 개념임을 상기시키고 있다. 그의 말대로라면 유일신교는 편협한 민족주의를 의미하는 것은 아닐지라도 말할 필요 없이 민족주의 경향을 보여주고 있다. 야비스트는 가나안 사람들을 쫓아내야만 할 불경한 자들이자 적으로 보고 있다.

 

앞서 본 바대로 가나안 지방 고대 주민들을 추방한다는 것은 성서에서 전개된 종교적 배타주의의 결과이다. 조상들이 절대적 권리로써 맺은 계약 덕택에 페르시아 시대에 유일신 야훼를 구심점으로 구성된 공동체에서 약속의 땅이 된 가나안은 결코 빼앗길 수 없는 곳이었다.

 

 

 

이집트에서의 노예 상태에 대한 야비스트의 학술적 관점

 

야비스트는 어떻게 이스라엘과 유대 왕국사의 서막을 이집트에서의 노예 상태부터 시작하게 된 것일까? 야훼와 그 백성들 간의 계약 체결과 해방에 이어 이집트에 종속되는 내용이 나오는 것은 어쩌면 집단 이주의 상상과 상응하게 구성되었을지도 모른다. 야비스트는 유대 왕국을 잃게 되고, 유대의 지식인들을 바빌론으로 집단 이주시키게 되는 기원전 587년의 재난을 신의 징벌로 보고 있다. 신의 벌을 받아야 하는 첫 번째 원인은 비록 허구적인 일이지만, 이스라엘 자손들이 가나안을 정복할 때 저지른 과오 때문이다. 이스라엘 자손들은 가나안의 모든 주민을 내쫓아야 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음으로써 자신들만 남아 있지 않고 이교도들과 함께 있었다. 민족의 독립사를 끝내버리는 무서운 복수의 신 야훼는 동시에 백성들을 해방시키고 팔레스타인까지 안내하는 은혜의 신이기도 하다.

 

유대 왕국이 독립해 있을 때 야비스트는 아마 조상들이 노예 상태로 있던 이야기를 쓸 생각이 없었던 듯하다. 반면 집단 이주 때 일치단결하고 이방인 나라와 대면해 종속되는 것을 알게 된 문화 공동체 시대에는 이집트에서 보냈던 노예 기간에 대한 생각이 쉽게 이해되었을 것이다.

 

야비스트 저서들에서 민족 자긍심이라는 감정은 본질적으로 종교적 교화에 목적을 두고 있다. 이집트에서의 노예 상태는 치욕적으로 보다는 압박과 고통의 시간으로 나타나 있다. 민족 신이 구해주는 여부는 참고 견디는 것에 따라 일어났으며, 이스라엘 민족은 자신들을 해방시켜준 신에 대해 감사를 표해야 했다. 신이 개입하지 않았더라면 이스라엘 자손들은 이집트의 노예로 계속 머물렀을 것이다. 종교적, 민족적 공동체 감정을 형성하는 것에 대해 야비스트는 오랫동안 잃었던 정치적 독립을 지면에 재탄생시키고, 이스라엘 자손을 선택했다는 새로운 사상으로 민족 의식을 고취시켰다.

 

 

야비스트는 아몬-마세사 전설을 원전으로 삼았는가

 

그런데 야비스트가 야훼의 율법을 전하는 이스라엘 민족의 기원을 기원전 13세기에 둔 것은 어찌된 일인가? 사라진 이스라엘과 유대 왕국에 대해 야비스트와 동시대인들은 역사적 전통을 고수하고 있었다. 그런데 아마 그들중 몇몇은 두 왕국의 기원을 고고학적으로 증명하면서 더 거슬러 올라갔던 듯하다. 유대인들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마리아 언덕에서 유대 산맥까지 정복 흔적을 남겼던 시기로 말이다. 하지만 야비스트는 오히려 우연히 이스라엘과 유대 기원의 역사적 시기를 접하게 되었다. 원시 시대의 이야기에서 증명된 것은 정말 아무것도 없다. 이스라엘 민족이 이집트에 체류했다는 일이나 이집트 탈출, 가나안 정복의 비역사성은 오늘날 많이 증명되었다.

 

야비스트는 이집트에서의 예속 상태를 자세히 살폈다. 그래서 이스라엘 자손들은 해방시킨 모세라는 인물은 이집트 왕자 마세사야라는 실제 인물과 결부시켰다. 마세사야는 당시 협력적인 왕으로서 아몬-마세사라고도 불렀다. 야비스트는 페르시아 시대에 어떤 경로로 이집트인 아몬-마세사에 대한 전기적 지식을 얻을 수 있었을까? 거의 1천년 정도 전에 살았던 사람인데 말이다.

 

필자는 이 문제에 대해 매우 다양한 가설을 설정하면서 오랫동안 골몰했다. 그래서 아몬-마세사가 합법적인 왕 세티 2세를 이기고자 한 시도로서 자신의 남쪽 왕국으로부터 하이집트를 향해 공격을 감행했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 후 아몬-마세사는 자신의 실패를 받아들이고 남쪽으로 후퇴하다가 퇴로가 차단되자 시나이로 통하는 지협 광야인 동쪽으로 향하는 출구를 발견할 수 있었을 것이다. 자신의 군대와 함께 도망치는데 성공했다면 아마 팔레스타인에 숨어 있었을 것이다. 그곳 원주민들 사이에서 이집트 나일 골짜기 출신의 폐왕 이야기가 퍼져나갈 동안 아몬-마세사는 자신의 동향민인 이집트인들을 잊어갔다. 소문을 지어낸 이야기가 되고 기억은 전설로 바뀌었으며 이 전설은 영감의 원천이 되었다. 훗날 야비스트는 이스라엘 기원사에 대한 저서를 위해 전설을 모아 개요를 정할 수 있었다.

 

이러한 추측은 어떤 히브리인도 참여하지 않았던 이집트 탈출에 대한 성서 이야기가 역사적이라는 것을 인정하게 한다. 아니면 이집트에 머물던 아시아 전쟁의 포로나 목자 무리가 한 이집트 탈출자들에게 이끌렸을 가능성도 있다. 이 사람들이 집단 탈출에 대한 전설을 낳게 했을 수도 있다. 이 집단 탈출 전설은 아마 우대와 사마리아 상류의 주민들에게까지 전해졌을 것이며, 계속해서 다음 세대로 전해져 야비스트에게까지 왔을 것이다.

 

하지만 필자가 가정했던 것은 사실 성서 연구 분야에서 잘 알려져 유명한 역사적인 일에 근거를 두고 전제한 것이다. 성서가 묘사한 것처럼 이스라엘 민족의 이집트 탈출은 사실 역사적으로 모순된다. 만일 소그룹이 이집트를 떠났다면 그것은 전 민족이 떠난 것처럼 전설이 되어 전해졌을 수도 있다.

 

베른트 요르크, 디에브너, 닐스 피터 렘케, 한스 하인리히 슈미트나 존 반 시터즈 같은 구약 비평가들의 작품을 잃은 후, 필자는 본인의 첫 번째 제안이 더 이상 실현성이 없다고 판단했다. 이 저자들의 논의는 성서가 묘사하는 이스라엘의 정치적, 종교적 기원사가 역사적으로 없지만 유대 왕국 몰락 후 수세기에 걸쳐 개작된 허구적인 저서라는 것을 확인시켜주었다. 그 결과 필자는 아몬-마세사 왕의 탈주가 이집트 탈출에 대한 성서 이야기를 역사적으로 구성했을 거라는 견해를 포기했다.

 

 

야비스트는 이집트의 역사적 전통을 원전으로 삼았는가

 

아몬-마세사의 이야기가 전설을 통해 전해진 것이 아니더라도 야비스트나 야비스트와 연관된 정보원이 이집트의 역사적 전통으로 이집트 왕의 전기에 대해 알고 있었음에는 틀림없다. 헤로도토스의 예가 보여주는 대로 페르시아 시대의 이방인들은 이집트 역사에 대해 알 수 있었다. 헤로도토스는 자신의 증언대로 멤피스에 있는 프타 사제들에게 330명의 파라오 이름을 알려주었다.(역사 2권) 게다가 야비스트는 파라오 이야기에 대한 진짜 정보를 수집했을지도 모른다.

 

헤로도토스 이야기는 지리적으로 이집트 북동쪽에 한정되어 있다. 그는 히브리 목자들이 팔레스타인을 휩쓸었던 기아에서 벗어나면서 가축들을 먹일 목초지가 있는 국경 지역에 거주했다고 상상했다. 또한 헤로도토스는 이야기가 악화되는 것을 상상하기도 했다. 이스라엘 자손들은 피톰과 람세스 건설에 할 수 없이 참여하여 강제 노동에 시달리고 있었다. 동쪽의 두 델타 도시는 야비스트 시기에 활기를 띠고 있었다. 야비스트가 피톰과 람세스라는 도시에 대해 알고 있었다면, 야비스트가 람세스와 그의 통치 시기에 대해 조사했다면 람세스 2세의 후손인 아몬-마세사에 대한 자료도 모을 수 있었을 것이다.

 

아몬-마세사라는 이름은 아크나톤과 그 아들들의 경우처럼 정치적 악평을 받았을 뿐더러 숭배되지도 못했지만, 다른 왕들의 이름과 마찬가지로 이집트 역사의 전통에 보존되어 있다. 아몬-마세사의 이름을 언급한 왕실 기록중 유일하게 전해지는 기록을 보려면, 이집트 사제 마네톤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마네톤은 기원전 280년경 고대 이집트사를 그리스어로 썼다. 그중에서 세 번째 혹은 네 번째 필사본이 알려졌는데, 상태가 그다지 좋지는 않다. 문법적 오류들도 많아서 'Amon-mesesa'가 'Ammenemnes'나 'Ammene-mes'로 나와 있기도 하다. 왕들의 이름과 통치 기간 기록은 파라오 시대에 관한 마네톤읜 세 번째 문헌에 잘 보존되어 있으나 소위 말하는 역사적 사건들에 대한 자세한 관계는 거의 소실되었다. 당시 마음대로 쓸 수 있었던 원전의 편집 결과이다. 또한 이집트 사제들이 읽을 수 있었던 왕의 기록들은 헤로도토스 대신에 야비스트가 이집트 역사에 대해 더 잘 알고자 썼던 것들이다.

 

존 반 시터즈는 자신의 저서에 야비스트가 그리스와 바빌론 역사가들의 영향을 받았음을, 또한 저서 속에서 이집트 학자들과의 관계가 큰 역할을 담당했음을 증명하는 논의들을 모았다. 하지만 역사에 관심이 있었더라도 야비스트는 무엇보다 이론적 주제에 끌리는 이야기꾼이었다.

 

 

이스라엘의 구세주가 된 이집트인

 

야비스트는 이스라엘 자손의 구세주를 아몬-마세사로 여기게 된 원인은 무엇일까? 1970년 시인이자 역사가인 프리드리히 쉴러도 <모세의 임무>라는 에세이에서 같은 문제를 제기했다. 쉴러는 모세가 '히브리 출신의 구세주일까?'라는 질문을 던졌다가 곧 이집트인도 이스라엘인도 아닐거라고 가정했다.

 

쉴러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에서 압제받았던 일은 역사적 사실이며, 모세의 출현도 이야기꾼들이 지어낸 허구가 아니라고 여겼다. 다만 신에게 맡기기를 더 원했다.

 

가장 간단한 방법으로 복잡한 문제를 푸는 신의 크신 섭리에 우리는 감탄할 수밖에 없다.

 

신의 섭리는 아닐지라도 야비스트의 이야기 재능에 탄복하게 된다. 나중에 쉴러가 가정하게 된 것처럼 말이다.

 

이집트 태생의 사람이 민족을 위해 히브리 사람들의 구세주가 된다는 것은 당위성이 없다. 보통의 히브리인은 이러한 시도를 할 힘과 정신이 부족했을 것이다. 그러면 어떤 방법으로 그는 그러한 운명을 찾았을까? 처음에는 어떤 히브리인을 잡았다가 곧 미개한 그의 백성들에게 놓아주었다. 동시에 이집트의 지혜를 얻게 해주었다. 그렇게 이집트 교육을 받은 히브리인은 자기 민족을 이집트 노예 상태에서 벗어나게 하는 도구가 되었다.

 

이처럼 쉴러가 묘사한 것은 모세에 대한 야비스트의 마지막 관점이다. 이 이야기를 전개할 때 쉴러는 야비스트가 람세스 2세 통치 시기의 이집트사를 조사하면서 모세 이야기를 전개하기 시작할 당시의 첫 단계를 과감히 뛰어넘었다. 그리고 이집트 왕실에서 태어나 최고 통치권자에게 반기를 들었던 아몬-마세사라는 인물에 푹 빠졌다. 파라오에 대적했던 이 실제 인물은 야비스트의 문학 소재가 되었다. 거기서부터 야비스트는 모세를 노예 상태에서 이스라엘 민족을 해방시킬 인물로 설정할 수 있었다. 그러나 프로이트는 이러한 과정에 공식적인 이의를 제기하게 된다.

 

유대인 백성들에게 위대한 인물이 외국인이라는 사실이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전집 16권)

 

모세라는 인물에게는 메디아와 페르시아의 왕인 위대한 정복자 키루스의 전기가 적용되었다. 예언자들이 알려준 적은 없애려 했던 미디안 왕 아스티아게스처럼 파라오도 미래에 이집트의 적이 될 신생아를 죽이려 했지만, 전형적인 전설답게 위험에 처했던 아이는 구출되었다. 그런데 야비스트는 파라오의 딸에 의해 목숨을 건진 이 아이가 왕가에서 자라게 되었다고 상상하면서 도식에서 벗어난다. 프로이트가 제기했던 문제에 대해 야비스트는 이집트인을 이스라엘 자손으로 만들어 버림으로써 해결했다. 민족 정서를 위해 꾸며진 교훈적 이야기가 들어갔을 가능성도 있는 것이다. 모세라는 사람은 히브리인들을 이집트에서 데리고 나와 시나이에서 이스라엘과 야훼 간의 계약을 체결하게 했다. 또한 약속의 땅 가까이 백성들을 인도했다.

 

이스라엘의 선지자이자 구원지이며 입법자이기도 한 위대한 인물 모세에게는 역사성이 없다. 오늘날 고고학과 전승되는 구약을 비평적 관점으로 보면 모세에 대해 전개하고 있는 성서 이야기는 사실 종교적으로 지어낸 이야기일 뿐 역사적 사실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단지 파라오가 제재를 가했던 에티오피아 평야의 젊은 지휘관 모세 왕자의 몇몇 행적만이 역사적 내용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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